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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과 배신

LNCK 2023. 4. 5. 20:54

고난주간 특새 230403 "헌신과 배신 - YouTube

*위 동영상 28:20초부터 녹취

◈마리아의 헌신 vs 유다의 배신           마26:6~16      23.04.03.

본문 '향유 옥합 사건'은, 월요일과 화요일에 굉장히 타이트한 일정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위로와 쉼의 시간을 가지시는 장면입니다. 

▲마26: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베다니는 '불행의 집'이란 뜻입니다. *house of misery
'가난한 자들의 집'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동편 언덕에, 판자촌 같은 빈자들의 동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5리 떨어져 있죠.      *요11:18, 15스타디온. 약2.5km

근데 거기 '나병환자 시몬의 집' 이라고 했는데, :6
이 집은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의 집이거든요. 

사복음서 기록들에는, 대조본문들이 나오기 때문에 
거기 보면 '나사로의 집' 인데 그러면 누가 나병환자였는가요? 
왜냐면 현재 나병환자 라면, 아무도 그 집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누가 과거에 나병환자였다가 완치가 된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병환자 시몬'은 나사로의 부친 혹은 마르다의 남편으로 추정하죠. 

어쨌든 예수님께서 성전이 있는 화려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월, 화 이틀 동안 사람들과 엄청 씨름을 하시고  *위 도표 참조

그리곤 성을 나오셔서, 항상 저녁에는 베다니로 가셨거든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안에서 밤을 보내지 않으셨어요. 
예루살렘 안에서는 쉼을 얻지 못하셨어요. 
마음도 상당히 불편하지 않으셨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저희가 개척을 시작한 이곳은 좋은 장소지만, 아직 협소하잖아요. 

그런데 예루살렘, 그 화려하고 세상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은 
전혀 예수님을 환영하지 못했다는 거죠. 
예수님이 거기서 전혀 마음의 위로를 얻지 못하셨다는 거죠. 

심지어 거기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성전이 있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성전에 머물지 못 하시고 
예루살렘에 밤을 머물지 못 하셨어요. 

가난한 자들의 동네인 베다니에서, 예수님은 유일하게 위로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3년반 공생애를 놓고 보면, 유일하게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곳이
베나니 에요.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늘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시고 
그러면서도 유대인들에게 늘 박대를 당하셨는데 

유일하게 위로를 얻으신 곳, 
예수님의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있는 곳이.. 베다니 였습니다.  *요11:3, 11

그래서 우리 인생이 '내가 세상에서 성공해서, 내가 높은 사람이 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과연 '꼭 예루살렘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베다니'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면 
우리 삶의 어떤 외적 조건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켜드리는 것은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외적인 조건들과 상황이 어떠할 지라도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 기쁨을 드릴 수 있고 
그 마음 가운데 만족을 드릴 수 있는 
그런 (베다니 같은) 예배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7절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한 여자'라고 표현을 해서, '향유 옥합'이 더 두드러지는 표현이 됐어요. 
그런데 이 한 여자는,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입니다. 

근데 마르다 와 마리아의 차이점은, 
마르다는.. 'landlady 여주인' 이란 뜻입니다. 
마리아는.. 'bitter 슬프다, 슬픔'이란 뜻입니다. 

마르다는 이름 그대로 굉장히 주도적인 여성이었죠.
그래서 마가복음에도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 동네 처음 오셨을 때 
동네 사람들이 많았을 거 아니에요. 그리고 뭐 가난한 동네니까 더더군다나 
예수님 같은 분이 오셨을 때, 얼른 자기 집으로 모시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겠죠.

근데 마르다는 온 동네 사람들보다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여인이었어요. 

그렇게 첫 번째로 자기 집에 초대를 해 놓고, 
마리아는 가만히 있다가, 예수님의 오시니까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지요. 

당시에 랍비들이 가르칠 때, 여자들은 그 앞에서 앉지 않았어요. 
남자들만 앉아 있었거든요. 저는 그 장면을 상상할수록 
베드로가 굉장히 당황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리아가 베드로 자기 자리에 딱 앉아 있는 거죠. 
제일 좋은 자리를 딱 잡고 말씀을 듣고 있으니까 
마리아가 그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아무도 뭐라 그러지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12제자들은 다들 그냥 아무 얘기도 못 하고 있는데,
마르다는 성격상 자기가 얘기를 해야 되는 거예요.

'아니 어떻게 나 혼자 부엌에서, 바쁘게 이 분들 음식을 준비하는데 
내 여동생이 나를 돕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주님은 그래도 사려 깊은 분이신 줄 알았는데,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재밌는 게 
자기 여동생한테 직접 얘기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꼭 예수님께 얘기한 것은
아마 혼쭐을 내달라고 일부러 예수님께 부탁한 것 같아요.

마리아 자매님은 주방의 은사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모하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유형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마르고 닳도록 정말 일만 하고, 요리하고 
집안 살림 다 하고... 

요11:11에 보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 들었도다' 
그러고서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에 가시잖아요. 

그때도 집에 마르다 와 마리아가 있었는데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 나가서 
그 동네 어귀에서 주님을 만나요. 

지금 자기 집에 초상이 났잖아요. 
그런 상 중에 있는데도, 조문객으로 예수님이 오시니까 
동네 입구까지 달려나가는 마르다 입니다. 외향적 성격이죠.

그런데 마리아는 집안에 가만히 주저 앉아 있어요. 내향적 성격이죠. 요11:20

그리고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가 끝나고 나서 
요11장에 보면, 마르다가 (사람을 마리아한테 보내서) 
'주님이 너를 찾으셔!'   
그제야 마리아는 흑흑흑 하면서 이제 집밖으로 나오는 그런 장면이 나오죠.

근데 거기서도 '예수님이 마리아를 불렀다'는 직접적인 얘기가 없거든요. 요11:28
그러니까 마르다 자기가 알아서 동생 마리아를 불러 낸 것 같아요.
예수님이 어련히 마리아를 찾으실 것을 예측한 것 같아요.

지금 마르다는 외향적이고, 마리아는 반대로 내향적이다.. 라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마르다 와 마리아가 캐릭터가 완전히 달라요.

그러니까 마르다의 입장에서는, 마리아 같은 사람을 보면 
'야~ 쟤는 맨날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서 은혜만 많이 받고 그러는데 
도대체 뭘 하나? 아무 것도 삶의 결과물이 없는 거 같고...' 자기는 그런 유형이거든요. 

△근데 그 내성적 마리아가, 본문에서 대형 사고를 치게 됩니다.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은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7절에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날도 예수님이 사람들하고 식사를 하고 계시는데 
왁자지껄한 잔치가 열렸는데 
마리아는 계속 예수님만 바라보는 거죠. 

내향적인 introverted 사람들은 관찰자 유형이 많거든요. 
저도 관찰자 유형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돼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는데 
그녀의 마음 가운데 '내가 뭔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러니까 뭐 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 
그리고 나서 집이 조용할 때,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부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근데 만찬이 한참 진행되는 그 한가운데 
갑자기 이런 돌발행동 했다는 거죠. '식사하시는 자리'였어요.  :7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소리 질렀죠.

우리는 뭐 '호산나 호산나' 굉장히 경쾌하게 찬양하지만 
원래 성경의 '호산나'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였어요.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라는 뜻이죠. 그런 절규의 외침이었죠. 

메시아를 갈망하던 그 시대 사람들이 '드디어 메시아가 오셨구나 
주님,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럼 부르짖음 이거든요.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왕이 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자들도 그렇고, 특별히 베다니에 있는 사람들은 
더더군다나 예수님이 저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 판자촌 베다니를 선호 하신다는 게 
굉장히 희망 찬 메시지였을 거예요.

왜요?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베다니가 완전히 다른 위상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다 들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아마 베다니의 웬만한 사람들이 
그날 저녁에, 이 집에 다 모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큰 잔치가 벌어진 가운데 
마리아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보이고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있어도, 내 눈에는 만나기로 약속한 한 사람만 보이는 것처럼 
마리아는 그렇게 예수님 한 분을 바라보고 있는데 

예수님이 뭔가 평소와 다른 걸 느낀 거죠. 
그리고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기회가 없겠다'
마리아는 그런 마음 때문에, 가서 향유옥합을 부은 거예요. 

그런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요?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저는 이 표현을 보면서 '와~ 이거는 완전히 정치적인 표현이다' 

가난한 자들의 동네 베다니 한 가운데서, 
지금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데 
이런 표현을 썼다는 것은, 상당히 정치적으로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친화적인 표현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순수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했던 사람이 가룟유다였습니다. 요12:4~5 

  
1데나리온을 10만 원으로 치면, 3천만 원이죠. 
이거는 가난한 동네에서 엄청난 가치였어요. 

이 여인이 어떻게 보면 자기 전 인생을 예수님께 그냥 부은 거죠. 
그래서 뭐라고 표현을 했냐면 8절에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왜 낭비를 하느냐?' 

그냥 튀어나온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말의 의미가 뭔가요? 
'예수님이 그런 헌신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 아니라'는 소리를 한 거죠.

그렇게 예수님을 소중하게 이야기하며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죠. 

사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은, 자신들은 그것을 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다른 사람이 한 것을 두고서, 자신들이 왈가왈부 하는 거죠.

그럼 예수님 뭐라고 반응을 하셨는가요? 

▲10~13절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놀라운 이야기를 하셨는데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는데  * '베다니'는 가난한 자들의 마을이죠.
너희가 사실 그들을 돌봐야 되는 거 아니냐?' 이 말씀을 하셨고 

예수님은 항상 계신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계시잖아요. 
오늘(수) 지나고 내일, 목요일 밤이면 예수님은 떠나신다고요.
마리아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고, 감지하고 있었고 
다른 제자들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이 여자가 내 장례를 위해서 이것을 행했다' :11
예수님이 너무 감격해서 과대해석을 하신 건가요? No!

 

마리아가 진짜 그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제 떠나실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는 거예요.

지금 행복한 만찬자리이지만 
예수님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것을 
마리아는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면서 그걸 느낀 거죠. 

그리고는 예수님이 떠나시기 전에, 
어떻게 떠나실지 사실 마리아는 잘 몰랐겠죠.

근데 그녀는, 예수님이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 관심과 사랑의 표현을 한 거예요. 마지막 기회를 잡은 겁니다. 
(어떤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겠죠.)

근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까지 말씀하사냐면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3

그러면 이 여인이 행한 것이, 복음의 완성이란 얘기를 하고 계시는 거에요.

여러분, 복음이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헌신하신 것이 복음인데,

그 복음을 진짜 복음 되게 하는 것은 
주님의 그 십자가 헌신에 대한 감사로 
나도 내 삶을 주께 헌신하는 것이거든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오 예수님, 제가 제 십자가를 질 능력이 안 돼서 
주님이 대신 져주신다고 해서 제가 따라왔는데 
저도 십자가를 져야 되나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나의 모든 죄를 주님이 사해 주신다' 그러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그래서 따라 나섰는데, 
그러면 내가 이 죄의 짐으로 부터 자유함을 얻고, 굉장히 좋을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신앙생활이 만만치 않거든요. 
그리고는 나도 십자가를 지래요. '어 이거는 원래 계약서에 없었던 얘긴데?' (있는데 못 본 거죠)

정말 나도 십자가를 져야 되나요? 
여러분이 신앙 생활의 여정을 가는 것이 
정말 은혜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내 안에 넘쳐서, 내가 그 분께 내 삶을 구별하고 헌신하는 거잖아요. 
'너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그 예수님의 십자가 헌신과, 이 여인의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 
예수님이 생명을 내어주시는 헌신과, 우리의 삶을 내어드리는 헌신이 만나서 
복음이 진짜 완성을 이루는 거예요. 할렐루야!    *설교의 1주제

그래서 예수님이 감격해서 이 얘기(13절)를 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날 베다니 촌에서의 만찬은 
예수님의 헌신과, 여인의 헌신이 합쳐져서 구성이 된 거예요. 
이게 복음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바로 가룟유다의 배신 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헌신과 배신" 입니다.

▲14~16절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가룟유다가 
예수님이 죽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어요.    

복음서를 쭉 보면, 예수님은 본인이 십자가 수난 당하실 것은 미리 예고하셨죠.
그것도 앞서 세 번이나 거듭 하셨습니다. 아래에 찾아놓았죠.

마16:21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17:21~23 (변화산에서 내려와서)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마20:18~19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이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명시적으로 십자가 수난을 얘기하셨는데 
제자들이 왜 못 알아들었을까요? 

지금 뭐 전국적으로 예수님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고 
그 예수님에 대한 그 환호성, 그 사회적 분위기를 봐서 
제자들은 반대로, 예수님이 왕이 되실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3번이나 수난을 얘기하시는데도, 못 알아들은 거에요. 
그 수난 사건이 그렇게 가까이 일어날 사건이나 줄은 몰랐던 거죠. 

근데 유일하게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통찰력이 뛰어난 자가 있었어요.
'지금 아무리 백성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지지해도 
종교지도자들을 위시해서 반대하는 세력들도 득세 하니까 
내가 오랫동안 예수 옆에 있으면 안 되겠다. 빨리 배를 갈아타야 되겠다..' 
이렇게 결심한 자가 가룟유다 잖아요. 

가장 명석한 사람이 가룟유다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예측했던 사람이 가룟유다였어요.

▲정리하면, 
마리아 와 가롯유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의 죽음을 명확하게 알았던 
여제자 와 남제자, 대표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 제 미래를 알려 주십시오!' 이 기도가 굉장히 위험한 것은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떻게 되실 줄 알고.. 옥합을 깨는 헌신을 했는데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그 다음 단계를 알고.. 반대로 배신을 했다는 거죠. 

미래의 정보가 우리의 삶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게 아닙니다. 
미래를 안다고 해도, 바른 선택이 보장되는 게 아니에요*설교의 2대지

바른 선택은, 내가 온전한 인격, 온전한 신앙을 갖고 있어야
바른 선택을 하는 거예요. 

자꾸 우리는 이제 정보를 알고 싶어하죠. 
하나님 앞에 기도 할 때 
'하나님의 우리 자녀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학을 어디로 지원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직장을 어디로 다녀야 되겠습니까?
제가 그 다음 진로는 어디로 가야 되겠습니까?' 

사람은 한치 앞을 알 수 없어요. 
근데 그 한 치 앞을 어떻게해서 알게 된다 할지라도 
그 다음 미래는 또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모든 내 인생의 타임라인을 
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것을 다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기도할 때 
미래를 알려고 하기 보다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미래가 와도,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어요. 

마리아와 가룟유다를 놓고 생각해 본다면
마리아는, 자신의 헌신이 복음의 완성이 될 줄은 몰랐잖아요!

그날의 이 헌신이, 이 대형 사고가
오고 오는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온전하고 순전한 헌신이란 것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이게 놀라운 메시지가 되고, 사람들에게 도전이 된 거잖아요. 

그런데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예상했지만 
그다음에 자신이 배신해서 죽으셨던 그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은 몰랐던 거죠. 

그분이 영원히 이 땅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실 심판주가 되실 것은 몰랐던 거죠. 

 

여러분, 미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깊어져 가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