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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과 제자들 P1

LNCK 2023. 4. 6. 11:29

그리스도의 부활과 제자들(막16장 9~11절) - YouTube

*위 설교 00:00~24:45초까지 녹취

◈그리스도의 부활과 제자들 P1      막16:9~11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예수님

막16장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독특하게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야단을 치십니다. 
14절에 '꾸짖으셨다'고 했어요.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책망하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제자 공동체가 부활하신 주님을 단체로 이렇게 만났어요. 
의미 있는 첫 만남으로 보는데   *단체로는 첫 만남
'그들의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어요. 

그렇다면 제자들이 왜 꾸지람, 또는 책망을 받았는가요? 
아래에 나오지만
-그들이 울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완악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1) 그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이었어요.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mourning and weeping

'슬퍼하고' mourning : 마치 죽은 사람 앞에서 애도하듯이 울고 있었던 것이죠. 

'울고 있는' weeping : 헬라어로 '클라이오'인데
같은 단어가 쓰인 곳을 보면 
막5:38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도착하니까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하더라'  *클라이오 

그러니까 사람이 죽었을 때 그냥 보통 눈물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소리내며 우는 거죠. 

이 단어가 또 어디 등장하냐면 마26:75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닭이 우니까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러니까 지금 제자 공동체가 하고 있었던 일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심히 통곡하고 있었던 거에요. 완전 장례식 분위기였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야단 치신 거죠. 

어떻게 보면 세상의 소망없는 자의 슬픔과 같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애곡하는 모습을 보시고
'이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시고 야단치신 것입니다. 

2) 두번째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어요.

14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이미 여자들을 통해 부활의 증언을 들었는데,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안 믿었어요. 
그래서 그들을 야단치셨습니다. 

3) 또 '믿지 않음'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이 완악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14  

'마음이 완악했다'는 말을 자세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 제자들의 상황이 지금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시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제자들에 가서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전해라. 

그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빈무덤도 확인하고... 
그래서 여러가지 정황적인 증거와 또 목격자의 증언을 들은 상태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여자들의 증언을 듣고 
'듣고도 믿지 아니아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11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래서 본문 막16:11절과 14절에 '믿지 않았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죠.

◑부활을 안 믿기로 작정한 일부 제자들

▲1. 자기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 소문이라서 안 믿음
눅24:11에는, 제자들이 이렇게 여자들의 말을 듣고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했다' 그랬어요.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법정에서 여자들의 증언은 법적인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안 믿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제자들은 듣고도 왜 안 믿었을까요?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못 믿겠다' 한 거죠. 

▲2. 직접 눈으로 보고나서는 '영 spirit 일 수도 있겠다' 하며 안 믿음
그러자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눈으로 보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이제는 믿기를 바라셨겠죠.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되어있냐면
눅24:37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제자들은 보고도 의심합니다. 
귀로 듣고도 의심했는데, 이제는 눈으로 보고도 의심해요.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변화되신 부활체'를 입으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단 번에는 못 알아 봤을 수도 있습니다. 새벽에 마리아도
예수님을 보고 '동산지기'로 착각했을 정도였죠.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도, 

2~3시간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처음에 못 알아뵈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여러 설명들을 듣고서, 예수님으로 믿은 거죠.)

▲3.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도 안 믿음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만져보라' 그러셨어요. 영이 아니시라는 거죠.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39

도마에게는 '내 옆구리에 네 손을 넣어보라' 그랬어요. 
아 그러면 이제는 확실히 믿어야 되잖아요. 

듣기도 했고.. 보기도 했고.. 드디어 손으로 만지기도 했습니다. 

근데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냐면 
'제자들이 아직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랬어요. ↙

'그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예수께서는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좀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눅24:41(공동)

그래서 생선 한 조각을 드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앞에서 드셨어요. 

영은 귀신은 음식을 못 먹잖아요.
예수님은 육체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음식을 드신 거죠.
'나는 귀신이 아니야. 확실히 육체로 부활한 게 맞아!' 이렇게 확증시켜 주신 거죠. 

그럼 이제는 다 믿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4. 승천하기 직전까지, 일부 제자들은 부활을 의심합니다.
이제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자 이제는 예수님이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예수님 앞에 경배하는데, 사실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 이거든요. 

그리고 나서 이제 다시 예루살렘의 감람산에 올라오셔서 이제 승천하시는데 
그러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님이 맞다'라는 것이 
이 제자들 공동체 안에서 거의 대다수가 고백이 되는 순간이에요. 

근데 그 마지막 순간마저도 성경의 기록을 보면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더라'  마28:17

그래서 이제 주석가들도 '설마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이 아직까지 못 믿었겠냐? 
이거는 11제자 외 다른 제자들을 얘기하는 걸 거야..' 이렇게 해석하기도 있죠.

그러나 성경 문맥만 놓고 보면, 열한 제자 가운데 
아직도 의심을 가진 자가 있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는 거죠.
왜냐하면 본문의 맥락안에서는 꼭 그런 것 같아요. 

그럼 만약에 열한 제자 가운데 아직도 의심을 풀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거는 지금 자기가 보고 있는 예수님은 의심한다기보다는 

그 당시에 헬라 문화권에 '도세티즘'이란 사상이 있었는데,
'거룩한 하나님이 인간의 더러운 몸을 입을 수 없다'는 세계관이 있었죠. 
아마 그런 세계관에 절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주님의 부활을 믿기 어려었을 수 있었죠.

▲이 설교의 포인트는 뭐냐면 
증거를 계속 요구하는 사람들은 
계속 증거를 하나님께서 제시하셔도 여전히 의심한다.. 입니다. 

의심도 자기의 선택인 거에요. 
예수님께서 나중에는 딱 이렇게 얘기하시죠. 
'그만 의심하고, 이제는 믿어라!'

역사적 부활에 대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고 넘치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계속 의심을 풀지 않고 끝까지 의심하는 마음 상태,
그게 '마음의 완악함' 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를 책망하신 겁니다. 
슬퍼서 움(:10), 믿음 없음(:14), 완악함(:14).

막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적용 
슬픔의 문제 와 의심의 문제를 한번 다뤄보겠습니다. 

▲적용1. 슬픔의 문제, 자기 연민을 극복하라!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바라보라.. 입니다. 

여러분, 자기 연민에 혹시 빠져 보신 적 있으세요. 
'자기 연민'의 정의는
「아 불쌍한 내 인생 하는 감정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죠. 
내가 비련의 주인공인 것 같고, 인생 내내 나쁜 일만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거나 
어떤 믿음의 여정 가운데서, 애써보다가 잘 안 돼서 슬퍼했으면 
예수님이 그렇게 책망하시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의 애곡에는 상당 부분 
예수님을 위한 것도 아니고,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보기에 불쌍해서..
즉 '우리가 정말 이렇게 3년간 예수님 제자로 좇아다녔는데 
이게 다 무효화되는구나... 
그리고 나도 정말 예수님처럼 그렇게 체포될 수도 있겠구나...' 

이런 여러가지 감정들 가운데 '내가 정말 비극적인 인생의 주인공이구나' 
이러한 어떤 자기 연민의 감정이 있었기에.. 울었다는 생각을 해요. 

△저는 원래 좀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입니다. 
근데 저같은 사람도 자기 연민의 이런 감정을 하나님이 한 번 느껴보라고 
특별한 경험을 허락하신 적이 있어요. 

제가 21살 때, 제가 한번 크게 아팠던 적이 있어요. 
군대에 가려고 시험까지 다 치르고, 합격하고 
한미연합사령부의 이제 행정관 시험에 합격해서, 행정교육을 다 받고 
입대하기 2주 전에 태권도하다가 다쳐가지고 
병원에 가서 CT를 찍게 됐어요. 

종양이 발견된 거에요. 종양도 굉장히 컸고 
나중에 꺼내서 보니까 한 20년 자랐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21살인데, 20년 자랐다고 하니까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제 몸속에서 자란 거예요. 

그 종양을 처음에 의사들은, 조직배양검사하기 전에는 악성으로 본 거예요. 
나중에 MRI를 했더니... 
군대기록에는 제가 '척수악성 종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암이죠. 

마치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장면이, 제 인생에 연출됐어요. 
저는 뭐 다 자란 성인이고, 군대에 가려고 그 정형외과에 가서 촬영한 건데 
그래서 검사결과도 제 혼자 보러 병원에 갔죠.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이, 제가 어린 애도 아닌데 
'반드시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와라' 

아버지는 그때 목회 하시느라 바쁘고, 어머니를 모시고 갔는데 
'지금 군입대고 뭐고 그만두고 이제 수술을 받아야 된다' 하더라고요.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니도 너무 그날 슬프니까 밥도 안 주고 
그냥 방에 들어가서 울고 계시고 
저도 제 방에 책상에 앉았을 때가 오후 2시 경입니다. 
그리고 새벽 1시 반까지 그대로 계속 앉아있었어요. 

근데 정말 제 느낌에 뭐 한 시간 정도 지난 것처럼 느껴졌어요. 
순식간에 10시간 이상을 가만히 제 책상 앞에 앉아서 멍하니 앉아 있었던 거죠. 

'왜 이런 소설 같은 일이 나에게 닥쳤을까? 
내가 혹시 죽으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있을까? 
나의 죽음으로 내 아버지를 훌륭한 목사로 만드시려나? 
목사 지망생인 나 대신 우리 형을 신학공부를 시키시려나?' 

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때로는 울기도 하고.. 그냥 가만히 그렇게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밤1시 반에,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시간에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래서 마치 지금 부활의 제자공동체를 향해서 예수님이 꾸짖으시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제 속에서부터 저를 야단치시는 것 같은 음성을 들었어요. 

제가 1시 반은 어떻게 기억하냐면 
늘 제가 대입 수험생 때부터 은혜 체험을 많이 하고 
새벽 1시 반이 늘 제 큐티시간 이었어요. 

그때 큐티할 때마다 말씀보면, 하나님이 은혜도 많이 주시고 
잠을 많이 못 잘 정도로 혼자서 막 예배드리기도 하고 
그 은혜 받던 시간이 밤 1시 반인데 
늘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던 시간에, 하나님이 또 저를 만나주셨어요. 

제가 그런 체험을 하면서, 무엇을 확실히 알게 됐냐면 
'자기 연민이 죄구나,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그 슬픈 감정에 휩싸이면...'
일단 하나님과의 관계에 먹구름이 낍니다. 
그래서 기도할 생각이 안 들어요. 
그러면 말씀보고 큐티할 생각이 안 들어요.  이게 죄인 거죠!

예상치 못한 일들, 뭐 암에 걸린다거나 
사고로 부모님을 잃는다거나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나의 인생에 딱 닥칠 때.. 낙심하게되죠. 

근데 절대로 자기 연민에 빠지지는 마세요. 
저도 경험을 해보니까 그건 죄더라고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먹구름이 끼어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제가 큐티 하던 시간에 
또 그 기간의 연단에 기간에 제가 붙들었던 말씀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영적인 슬럼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간단합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면 돼요. 주시는 말씀을 붙잡으시면 됩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주님 바라보고, 기도하고, 말씀 붙들고 나가는 거죠. 
예수님께서 이 제자 공동체에게 '정신 차려라!' 

그리고 이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엠마오 도상에서도 제자들에게 성경공부를 시키시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도록 해서
그들이 믿음을 세워주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적용2.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
요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두 번째 적용은 '의심'의 부분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의심은, 계속 증거를 보여줘도 결코 깨끗이 해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심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자기 선택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무언가 의심을 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주세요.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세요. 
제가 구원받은 증거를 보여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고 추구하잖아요. 

그거 괜찮아요. 
그래도 예수님께서 계속 증거들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도 계속해서 
'네가 보지 않았으니 보여주고 
만지지 않았으니 만지게 해주시고..' 이렇게 계속 증거를 보여주셨죠.
 
그런데도 의심을 계속 선택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심해요. 
예수님 승천하기 직전, 세상을 떠나시는 자리에서도 의심했다고 나오잖아요.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28:16~17

그러니 어느 선에선 의심을 멈춰야 되는 거예요. 
왜냐면 '의심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 이게 의심의 특징이거든요.
(*그래서 세상에 음모론이 넘쳐나는 거죠)

△제가 청년부 때 문화부장을 맡은 적이 있었어요.
1993~94 년도에 제가 했던 일이 뭐냐면 
그때 창조과학 관련 부분에 굉장히 제가 많은 관심을 가졌어요. 

1993년 2월에 미국 CBS 방송사에서 <노아의 방주 다큐멘터리> 제작한 게 
있었어요. 이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때는 유튜브도, 자막 제작 앱 같은 것도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일일이 그 비디오를 시청하면서 노트에 받아 적고 
그거를 번역해서 (방송국 직원의 도움을 받아서) 자막 작업을 해가지고 
비디오 테이프를 한 개 번역을 했고 

그 다음에 Evidence For Creation by Roger Oakland
원래 진화론자였고 진화론을 가르치는 교사였다가 
회심한 다음에는 창조과학자가 돼서 열심히 전 세계를 다니면서 강연하는데 
굉장히 강연내용이 설득력 있고 좋거든요. 

당시엔 유튜브가 없으니까, 비디오 테이프로 이런 게 유통됐죠. 
저 테이프를 사가지고 그거를 또 번역을 해서 
방송국에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자막을 만들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우리 청년부 수련회 때도 상영하고 
또 중고등부 수련회에도 상영하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참 내용이 유익하고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도 많아서 
'이 귀한 사역에 헌신하는 것이 정말 귀하다'는 느낌을 분명히 확신했았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이거를 열심히 번역, 배포했죠. 

그런데 한계도 생각을 해보게 됐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보통 영어로 evidentialism 하면, '실증주의, 증거주의' 라고 번역하죠. 

실증된 사실만을 팩트로서 받아들이고 내가 그걸 믿는거에요. 
근데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예수님이 이렇게 물으실 것 같아요. 

'네가 믿는 게 증거를 믿는 거니, 아니면 나를 (인격으로) 믿는 거니?'

여러분도 잘 생각을 해보세요. 
계속 의심을 해서 증거를 찾고 또 찾다 보면 

예수님께서 정말 부활의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해주시는데 
어느 순간에 선가는 예수님의 '의심 이제 그만!' 하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원래 믿음의 속성은 점프하는 거예요. 
그 인격체를 향해서, 나의 신뢰를 믿음으로 드리는 겁니다. 

끝까지 나는 증거를 고집하려 하는 것은 
'내가 결국은 증거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겠다, 예수님을 믿겠다' ..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기 보다는 
그냥 hard fact (찐 증거)로 드러난 그 증거를 신뢰하고 그걸 믿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영상을 만들어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는 이 귀한 사역도 
너무 너무 귀하지만 
'믿음에는' 어느 정도 중간에 멈추고, 믿음으로 점프하는 단계가 필요한 거예요. 

 

△마치는 말

복음서의 제자들의 의심을, 우리 교회사에서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지 않죠. 
-이들이 의심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또 '의심을 통해 확실한 믿음으로 나아간다' ... 
이렇게 의심에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러한 변증 사역도 너무 중요한 것일 인정해요. 
그러나 그 동기가.. 

'내가 끊임없이 파 보겠다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이성으로 끝까지 가보겠다..' 하는 것은 믿음은 아닙니다. 의심은 끝이 없다니까요!

그래서 결국은 믿음과 합리주의, 믿음과 이성주의는 
어느 정도는 같이 동반자이지만 
끝까지 같이 갈 수는 없어요. 

그래서 evidentialism 실증주의적 신앙의 한계도 
우리가 반드시 스스로 점검을 해야 되겠습니다.

믿음으로 부활을 믿는 것이지, 증거로 의심하면.. 끝이 없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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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이 "안 계시듯이 계시는 이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를 밀착해서 동행하신다면..
1년 365일 24시간
나와 함께 식사하시고, 나와 함께 사역하시고,
나와 함께 TV 보시고, 기숙사 방에서 나와 함께 주무신다면,
그게 꼭 좋기만 할까요?

아마 우리 모두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사역과 섬김의 길을 중도포기 할 사람이 속출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안 계시는 듯..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늘 우리 곁에 계시지만.. ‘안 계시듯 계십니다.’

우리 가정과 공동체가 행복하려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시아버지’께서, 외출도 안 가시고, 하루 종일 집에만 계신다면,
그거 며느리 죽어나는 일이지 않습니까!

(적용이 좀 그렇습니다만) 
시부모님 방이 좀 텅 비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 몇 년 사이 참으로 큰 스승들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는가 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우리들에게
정확하게 이정표를 제시해주시던 분들,

지난 시대 우리들의 빈약한 정신세계를 그나마 정화시켜주시던 분들,
장기려 장로님, 또한 존경하는 목사님들,

그런데 이런 분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마다
참으로 특별한 느낌 한 가지가 마음에 남습니다.

분명 그분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들 눈앞에서 장례를 치렀고, 땅에 묻혔습니다.
분명히 그분들은 더 이상 여기, 이 세상에, 우리들 눈앞에 안계십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분들은 분명히 우리들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우리 정신 안에, 우리 영성 안에, 우리의 사고 안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그 분들이 여전히 ‘안 계시듯,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살아 생 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 절절한 사랑, 그 따뜻한 인간미,
그 소박함, 그 인자로움,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은 아직도 생생하게 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 앞에 어렴풋하게나마 부활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한다는 것,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분의 자취가 우리 안에 남아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분께서 남겨주셨던 사랑의 삶을.. 우리 생활 안에 재현시키는 일이 아닐까요?
그분께서 온 몸으로 보여주셨던 섬김과 봉사의 삶이..
내 삶 안에서 되풀이되는 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