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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당하신 예수님

LNCK 2023. 4. 7. 11:29

고통을 당하신 예수(요 19:28)  고난주간특새 월 21.03.29 - YouTube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          요19:28, 벧전5:10            2021.03.29.녹취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고난주간)에 대한 기록들이 다 있습니다. 
사복음서의 3분의 1정도가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로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부분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를 
고난주간에 여러분들이 반복해서 계속 읽으면서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또 고난주간에는 하루 한 끼 정도 금식하시면 
묵상과 기도를 더 깊이하는데 금식이 도움이 됩니다. 

수요일 날은 하루 종일 금식 하는 걸로 교회가 정했습니다. 
또한 이번 주간에는, 낮에도 교회 나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이렇게 공간이 기도하는 분위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자 십자가는 한 마디로 신비입니다. 미스테리, 다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다 이해했다. 예수를 오래 믿어왔기 때문에 
십자가를 다 이해했다' 이렇게 말하면 십자가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의 아주 일부만 알고 있다' 이게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더 알고 싶다. 십자가의 비밀을 더 알고 싶다'

이런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신앙생활 해야 되겠습니다. 
일평생 죽을 때까지 우리는 다 모릅니다. 십자가의 신비와 그 비밀을! 

십자가 복음의 신비는, 우리가 그렇게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우리가 더 많이 알기 원하고,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가갈수록.. 그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비밀이 조금씩 조금씩 더 열리겠지요. 

그리고 십자가의 비밀이 열리는 만큼 
우리의 신앙과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변화는,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서,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보다는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은 만큼 
그 십자가가 우리를 이끌어 주실 때 
우리 신앙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20년, 30년 교회에 아무리 오래 다녀도 
굉장히 신앙이 얕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코스를 다 밟아도, 신앙이 얕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앙이,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십자가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진원지입니다. 

십자가는 무슨 지식적인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대한 책도 많거든요. 
그걸 읽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그 십자가의 비밀을
내가 몸소 체득해 가는 것,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로 충만하신 분이 
가장 혹독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해할 수 없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 세례를 받고 올라 오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분명히 아버지로부터 사랑받는 아들이었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고 고통을 당하게 하셨을 때의 그 고통!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도 주목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 
그 창조주 하나님, 온 우주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죠. 
이게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것도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신비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고통 속에서 절규 하시는데요. 
가상칠언!  7가지 외마디,
그 중에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은 '목 마르다' 하신 것입니다. 요19:28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죠. 
가시관을 쓰신 예수, 날카롭고 투박한 가시로 만든 그 가시관으로 
머리를 파고드는 고통!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는 그런 고통!

십자가의 과정 속에서 받으시는
육체적인 고통에 대한 얘기는 우리가 많이 들었어요.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셨는데 
이 목마름이란 고통의 절정을 의미합니다. 
대충 목이 마르신 정도가 아니에요. 극도의 목마름! 

「피를 많이 흘리면 여러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심장이 더 이상 피를 퍼올리지 않는다.

혈압이 떨어지게 되고 정신이 몽롱해 주면서 기절한다. 
심장은 남아있는 피의 양을 유지하기 위해 소변 만드는 일을 중단한다. 
몸은 흘린 피를 보충하기 위해 액체를 요구하기 때문에 매우 목이 타게 된다.」 
-리 스트로벨 <예수는 역사다>에서

예수님은 이미 피를 많이 흘리신 상태입니다. 
온 몸의 수분까지 다 빠져나간 상태죠.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때는 정신이 혼미하고 기절하고 죽음에 이르는 아주 마지막 단계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나왔던 것처럼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리빙 워터, 살아있는 물이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지금 '목 마르다' 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지금 '내가 목마르다' 
목이 마르다는 것은 고통의 끝 지점입니다. 고통의 마지막 단계, 
고통에 대한 최후의 절규.. 그게 '목마르다'죠. 

예수님은 당신에게 다가온 고통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가 맞닥뜨린 것은 고통입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십자가 앞에서 아주 극도의 고통 속에 있을 때 
그 고통을 경감하시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고통을 낮추고자 신포도주를 마시게 해서 돕고자 했지만,

주님은 거부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고통을 완전히 받아들이기로 하신 것이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 고통을 거부하면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 구원은 그리스도의 고통의 대가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죠.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육체를 입고 계신 주님은, 이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큰 가를 알고 계셨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계신 주님은 이 고통을 피하고 싶었던 거죠. 

마귀의 유혹은 뭘까요?
마귀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라고 부추깁니다. 솔깃한 유혹이죠!

광야에서 마귀의 3가지 시험, 
그 시험은 모두 뭔가하면 '(십자가) 고통 없는 영광'을 부추긴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고난 없는 아주 강력한 신'으로서 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면, 인간의 대표로, 제2의 아담으로 속죄제물이 못 되시는 거죠.

세상은 어디 가나 '고난 없는 영광'을 가르칩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길을 권합니다.
고난이 없는 삶을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통이 제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형통의 복음'이 왜 위험한 것입니까? 
그 형통의 복음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미련해 보이죠.

여러분 세상을 보십시오. 십자가와 정반대입니다. 
간단하고, 쉽고, 편리한 길을 제시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무시당합니다. 

세상에서 십자가는 결코 매력적이지 않죠.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고통을 당하시는 하나님!' 신비로운 일입니다. 

고통을 환영할 사람은 없습니다.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죠. 
우리 일상에서 약간의 고통이 와도 우리는 힘들어 합니다. 

그게 정신적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우리는 고통을 다 싫어합니다. 
고통은 힘들기 때문에 그렇죠.

저는 대상포진을 두 번 앓았는데요. 
가슴과 등에 막 진통이 오는데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며칠을 그렇게 앓았는데 힘들더라고요. 
그냥 막 세상이 다 싫어질 정도로... 

여러분, 이 육체적인 고통을 우리가 많이 겪지만 
사실은 육체적인 고통도 힘들지만, 정신적 고통은 훨씬 더 견디기 힘들어요. 

삶을 끝내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실패를 통한 아픔들, 그리고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아픔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아픔들... 
그 가족들의 질병과 그 죽음을 통해 찾아온 아픔은 참 끔찍하죠. 

우리는 고통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삶에 고통이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작은 고통도 참아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 겪으신 십자가의 고통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내 고통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이해합니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는 자신의 고통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이 고난주간에, 우리가 하나님의 고통, 예수님의 고통에 
한번 집중해 보십시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그 주님의 고통을 묵상할수록, 그 고통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죠.
그 고통이 우리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에 뭔가 답을 하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그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게 하시고 
그 고통을 통해 우리를 어디론가 인도하신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고통에
놀라운 답을 주시고, 또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어 주시는데 
그것에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의 특징이 있는데 '가벼움'입니다. 
어디를 가나 참 가벼워요. 경박성의 시대죠. 

여러분, 이 가벼움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십니까? 
현대인들은 사랑도 가볍습니다. 가벼운 사랑! 
그러니까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져요.

왜 가볍죠? 고통을 통과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고통이 찾아오면, 그 사랑은 깨져 버리죠.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 순간 끓어오르다가, 한순간에 식어버립니다.
좋으면 씹고 싫으면 뱉고.. 인생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이죠.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온 세상에 불행은 혼자 다 지고 가는 듯한 얼굴을 하고 살아갑니다. 

행복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면..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경박한 것이죠. 

이런 시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가급적 고통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무조건 불행이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고통 = 불행 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편안함이 우리 시대의 우상이 되어 버렸어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편안한 삶을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을 키울 때, 가능한 편안한 삶을 살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죠. 
편안하게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무통의 인생은 없습니다. 세상은 고통의 바다죠. 
어떤 형태로든 고통에 직면하게 됩니다.

여러분, 고통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인생은 한 순간에 어느 지점에서 무너질지 모릅니다. 

잘 나가고 편안하고 괜찮았는데.. 어느 한 순간 무너져요. 
언제? 
고통의 파도가 밀려닥치면, 그때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마는 인생이 있습니다.

고통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런 거죠.
너무 가볍게 살아온 것입니다.
너무 장미빛 꿈만 꾸고 살았던 것입니다. 현실은 그게 아닌데... 

갑자기 다가온 고통의 순간을 통과하지 못 하고 
인생이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고통에 대한 바른 길을 찾지 못하면, 인생은 비극으로 끝납니다. 

고통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세상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이 그렇게 비극적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삶에서 고통은 분리시킬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죄를 지은 이후 인간에게 찾아온 고통은 
매일 경험하는 실제입니다. 얼마나 많은 고통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정에 가장이 어린 자녀를 남겨두고 죽는 일,
가족 중 한 사람이 불치병에 걸려 고통 받을 때,
갑자기 일어난 자연재해로 재산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릴 때,

코로나19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난파를 당하고... 
우리 인생의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사고와, 각종 질병들과, 
상실과 이별과.. 그 일로 인하여 찾아오는 슬픔과 이별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십자가의 고통이냐, 
아니면 나의 과오로 인한 고통이냐.. 그 경계가 불분명 합니다만
나의 과오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이라도, 결국은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내게 알게 하시려고 당하게 하시는 고통..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주일 저녁은 우리 부목사님들이 한 주간 동안 심방하면서 겪었던 
성도들의 삶의 이야기를 제가 꼼꼼하게 읽습니다. *심방리포트
그리고 제가 그 사연을 놓고 기도합니다.
어떤 때는 속으로 울컥 할 때가 많아요. 

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십자가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기독교는 고통에 직면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고통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추상적인 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고통을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에 비껴나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누구보다 고통을 충분히 알고 계시며 
우리 누구도 예수님보다 더 능가하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끝 지점까지 가보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비교할 수 있는 고통은 없어요. 

십자가의 고통은..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의 극치인 것입니다.
우리가 크고 작은 고통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대개는 고통의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통에 직면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죠? 

고통 속에서 십자가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깊은 골짜기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그 고통의 순간에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곳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죠. 

고통의 심연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고통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은 유일하세요. 그리스도 밖에 없어요.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더 힘들게 하는 게 뭡니까? 
'누가 내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고통의 순간이 처절하고 외로운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도 내 고통을 이해할 수 없고 
내 고통 안으로 들어 올 수 없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죽마고우도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내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모두가 나의 고통의 바깥에 있는 거죠. 
그래서 누구의 말도 고통의 순간에는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를 하다가 
위로는커녕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고통의 진정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죠. 

그때 인간은, 고통 속에 또 다른 고통이 와요. 
그게 뭔가 하면 절대 고독 입니다.
이 고독은 또다른 고통입니다. 절대 고독입니다. 

△작년에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참 건강하신 분이셨는데 
마지막 병원에서 한 두 달 고생을 하시는데 
뭐 코로나 기간이라서 면회도 잘 안 되고 

병실에 홀로 계시는데 
잠시 또 만나 기도하고, 또 위로하고 돌아오는데 
제가 거기서 그걸 느꼈어요. 아버지의 절대 고독!

아무리 자식이지만, 아무리 아내가 있어도
어떤 가족도 함께 할 수 없는... 
그 병상에서 밤을 새우실 아버님을 생각하니까 
그 절대 고독.. 그게 느껴졌어요.

욥기가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욥이 당하는 고통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죠. 

욥의 아내도 저주와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친구들은 욥의 고통에 더 불을 질렀어요. 왜 그랬습니까? 

모두가 욥의 고통의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죠.
그의 고통 속으로 들어 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의 고통에 함께 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더 깊은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고통 속에 절규하고 있을 때 
우리의 고통 안으로 들어 오시는 분이 계세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의 바깥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아니 우리 고통에 대해서 어드바이스, 조언해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상담해 주시는 불이 아니에요. 
그분은 우리의 고통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깊이 만날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순간이 언제였는가를 보십시오. 

거의 대부분은 고난의 순간입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절규할 때, 
내 인생이 난파를 당하고, 길을 찾지 못하고 절망 속에 있을 때 
그 고통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줬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깊은 고통의 골짜기에서 절규 할 때 
그 고통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줍니다. 

'내가 겪은 깊은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신 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의 고통과 그분의 고통이 오버랩 되면서 
결국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고통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의 고통을 알고 계신다는 것에 놀라게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 고통을 아신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고통은, 우리가 당할 고통을 대신 감당하신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십자가 신학' 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십자가 없는영광은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영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고통을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는 고통과 상관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고통에 적극적으로 다가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의 고통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앞에 마음을 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이 더욱 와 닿습니다. 
고통이 끊임없이 펼쳐질 때, 사람들은 낙심하고 절망하죠. 
그리고 고난이 길어지면 사람들은 고난의 무게 질식을 당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답이 보이지 않는 고난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리 물어도 답이 없습니다. 

성도들의 가정 안에 일어나는 고난들 중에 
할 말이 없는 경우들이 많아요. 
'도대체 이 때는 심방해서 무슨 말을 해줘야 되나?' 
답이 없을 때가 있어요.

그때 답이 딱 하나 있어요. 예수의 십자가! 
하나님은 아들을 영원한 고통에 내버려두지 않으셨어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입니다. 

십자가를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부활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이유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중심이 십자가와 부활! 

이 십자가가 십자가로만 끝나면 안 되죠. 
십자가에는 부활이 뒤따르고,
고난에는 영광이 따라옵니다. 

이 두 가지 축이 기독교를 받치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고난은 반드시 영광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여러분,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고통이 멈추지 않는 곳입니다.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할 인간의 그 고통을 끊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통은 잠시 잠깐이라는 거죠.
지나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게 복음입니다.

벧전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여기서 '잠깐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고후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린 얼마나 눈에 보이는 것, 일시적 현재적인 것만 몰두합니까.
지금 당장 행복하고 잘 되는 것에 눈을 고정시키려고 합니다. 

당장 잘 먹고 잘 사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 삶을 기대한다면, 
얼마 못 가서 불행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삶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나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고통을 느끼지 않는 모르핀을 맞는 것 뿐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무시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고 살면 
고통에서 헤어날 수가 없어요. 

고난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이땅에만 집중한 시선에서 
나를 빠져나오게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최대 선물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고통을 피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집중하게 합니다.

고통이 깊을수록, 십자가는 더 선명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연약해질 때, 우리는 영원한 것에 대한 기대와 사모함이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8:18절에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의 고난은 우리 미래를 준비하게 만듭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고 기다리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고통을 당해도 참을 만해요. 
고통이 고통으로만 끝이 난다면 비극이고 불행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약속된 것은 달라요. 
십자가가 우리에게 허락된 축복은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축복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우리가 붙들고 바라보아야 할 것을 더 선명하게 하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영원한 것에 대한 기대가 깊어지게 하기 때문에 
여러분,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지는 것처럼 
고난은 영광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곧 고난을 통해 우리를 더 깊어지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고통을 제거해 주신다고 약속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나 고통을 아시는 분, 
인간의 애환을 다 알고 계시는분 으로 
우리의 고통 안으로 오셔서 위로하십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우리로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우리로 그 고난을 견뎌내게 하십니다.

고통이 당장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대개 고통은 지속될 때가 많아요. 

그때 우리는 그 고통을 통과해야 하는데, 어떻게 통과하죠?
다니엘의 세 친구나, 다니엘이나
그 고난의 풀무불이나 사자굴에 던져지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근데 현실은.. 세 친구는 고난의 풀무불 속으로 던져졌고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던져졌어요.

고난의 한가운데 던져졌다는 거지요. 고난은 피할 수 없어요.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고난의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주님은 계셨고,
사자굴 속에서도 주님은 임재 하셨습니다. 
홀로 통과하게 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함께 통과해 주셨어요.

이것이 십자가 예수 안에 있는 비밀입니다. 
고난의 용광로를,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통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깊은 골짜기에서,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게 하십니다.
함께 그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 

고통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는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욥은 당하는 고통으로 힘들어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깊은 골짝에서 그런 하나님을 깊이 만납니다. 

욥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이 아니에요. 
훨씬 더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면 
우리의 고통이 새롭게 해석되고 
그 고통을 통하여 또다시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깊이 이해하는 
이 놀라운 선순환이 일어나게 될 때 

매일 겪고 있는 우리의 고통의 현실, 그것에 치어서 실패하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우리 신앙이 연단되는 가운데, 영원한 세계를 사모하고 기도함으로써 
이 땅의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고통을 승화시키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