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나오는 ‘시’가 바로 시편입니다. *팔모스 psalm 두 번째 나오는 ‘찬송’은 오늘날의 찬송가죠. *휨노스 hymn 바울과 실라도 이 hymn을 불렀던 것입니다. 행16:25, 엡5:19 같은 헬라어죠.
제 말은, 바울과 실라가 성경(시편)만 알고 있었다는 게 아니라 당시 부르던 찬송도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바울이 찬송시를 썼을 수도 있고, 실라가 음악가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들은 찬송을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평소에도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까, 결정적인 순간에도 찬송이 나오는 거죠,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위인들은 대부분 다 찬송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찬송이 곡조있는 기도이니까요)
두 사람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다니면서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서 복음을 전하면서 찬송을 불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고도, 엡5:19, 골3:16 등을 보면 알 수 있죠.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바울과 실라가 많은 찬송을 알고(외우고) 부르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을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데일리 루틴이 나온 거죠.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이 처한 감옥은 칠흑같이 어두운 곳입니다. 낮에도 어두운데, 지금 밤중이니 얼마나 더 어두웠겠습니까. 그 어둠 속에서.. 찬송이 지하감옥에서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더욱 간절히 받기 원하는 이 능력 power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환난 가운데서 찬송하는 능력! 이것이 제 질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힌 이유를, 사도행전에 4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행23:6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벨릭스 앞에서 한 말입니다.
아래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한 말입니다. 행24:21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행26: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바울은 로마에서 거기 유대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28:20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의 부활을 증거했기 때문에 바울은 감옥에 갇히고, 또 계속 재판을 받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의 복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었고, 또한 ‘성도의 부활’을 증거했기 때문에,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과 계속 마찰이 있었던 거죠.
나아가 바울 자신이 부활할 것을 믿었고, 부활을 내다보고 있었기에 그는 감옥에서도 계속 찬송하고, 간수장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내다보시고 십자가를 참으신 것처럼, 바울도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에,
그것으로 인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혀도 그는 계속 부활의 복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는 투옥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한밤 중에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서 자기의 절박하고 고민되는 문제를 상담해 온다면 그 친구와 같이 전화통화 중에 찬양하십시오. 아마 바울과 실라처럼, 여러분의 환경에도 지진 같은 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옥문이 열리듯이, 그 친구의 문제에 해결점이 드러나고 친구를 묶고 있는 사슬이 풀어질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간수와 그 가정이 믿음을 갖게 되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어쩌면 간수는, 그 빌립보 도시에서 가장 구원받기 어려운 사람일 수 있죠. 그의 직업상 그는 난폭하게 살던 사람이었죠.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 처한 성도가 찬양할 때, 오늘날에도 그 주위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가장 구원받기 힘든 사람까지도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질문해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바울과 실라처럼 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여정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봉착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그때 인간의 본성을 따라 불평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어떻게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바울은 뭔가 소망하고 있었고,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요. 히12:2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후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예수님은 ‘부활의 소망’과 ‘고난 중에 찬송’하는 것을 연결 지으셨어요. 바울은 예수님께 그걸 배웠다고 봅니다. 성경을 찾아봅시다.
마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바울과 실라가 그 날 밤에, 빌립보 감옥에서 차꼬에 차였을 때, 그들은 위 예수님을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주1)
물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이 구절은, 현재 고난과 핍박을 당할 때 받는 상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부활 때에, 하늘나라에 가서 받는 상을 의미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런 점에서, 부활의 그 날을 내다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천국에서 상급 받는 그 날을 내다보니까.. 찬송이 나왔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바울과 실라처럼 환난 가운데 찬송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 기억하지 못해서 때문이 아닐까요? 부활의 그 날을 너무 내다보지 못하고, 현실만 쳐다보기 때문 아닐까요?
바울과 실라는, 아마 예수님의 이 말씀도 기억했을지 모릅니다. 눅14: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의 범주에 빌립보 간수도 포함될 것입니다. 가장 잔치에 초대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전혀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초대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바울과 실라는 그 엄악한 간수를 복음의 잔치에 초대한 것입니다.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14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히12:2참조 ‘갚을 것이 없는 자들을 복음의 잔치에 초대하십시오!’ 눅14:13참조
▲정리하면 지금과 같은 수련회의 환경에서는 여러분은 쉽게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면 그야말로 삶은 치열한 전쟁터인 거죠.
그 치열한 삶의 각축장, 전쟁터에서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며, 간수장 같은 철천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1) 예수님이 그랬고,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참으십시오!’ 히12:2
찬송이 아니라 불평이 튀어나오는 그 순간에 의도적으로 히12:2절을 기억하고, 한 번 그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2) 지금 우리는 혹시 바울과 실라와 같은 극심한 환경에 처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간수장’ 같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죠. 여러 가지 이유로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초대해서 같이 찬양하십시오.
이것은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하는 게 아닙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찬양하는 게.. 저 사람의 신앙 성향이야, 신앙적 칼라야!’ 그런 식으로 피해 가지 마십시오. 이것이 기독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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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사도행전 저작시기는 바울이 순교하기 이전인 AD 60~63년 사이로 보며 마태복음 저작시기는 AD 80년 경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바울과 실라가, 예수님의 말씀, 산상수훈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마태복음이 완성되기 전에, 벌써 예수님의 말씀 미완성 사본들이 많이 돌았을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