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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폭발적인 능력

LNCK 2023. 4. 7. 18:33

부활의 폭발적인 능력 | 존 파이퍼의 더 바이블 | - YouTube

*위 설교 듣고 요약, 정리

◈부활의 폭발적인 능력             히12:2, 행16:25 

당신이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골고다 언역에 있었다면
당신은 아마 너무 놀라고 비참해서 토했을 것입니다.
또는 비명을 지르거나 자기 머리카락을 뽑았을 거예요.
또는 땅바닥에 쓰러져서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면서 흐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만큼 비참한 모습이었죠.
그것도 여섯 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다가 운명하셨습니다.

손과 발에 대못을 박히시고
옆구리에는 큰 창에 찔리셔서
모진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서였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진 십자가를 자원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선택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분께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요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마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헤롯이나 빌라도가, 
또는 예루살렘의 폭도들이나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책임이 표면적으로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근원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이 드라마를 쓰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자원하신 선택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그 사랑을 깨닫고 로마서에 이렇게 기록했죠.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가장 큰 고통을 당하심을 통해서
가장 큰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직접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후에 내다보신 것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억지로, 마지 못해 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랑을 베풀어 주시되, 
‘사랑’의 동기 말고, 또 무엇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앞의 즐거움’입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개역은 즐거움, 개정은 기쁨, 헬 '카라')
금요일 아침에, 즉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십자를 지시는 날 아침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그 모든 고통을 다 참으신 것은..

-옷이 벗겨지는 수치와 치욕
-살갗이 다 터지는 채찍질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는, 뼈가 부서지는 그 엄청난 고통
-옆구리에 창이 찔리는 숨막히는 괴로움

정말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온 몸을 전율시키는 그 고통이 쉴새 없이 엄습하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면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히12:2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영생 구원을 얻어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그 기쁨!
-우리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보시는 그 즐거움!

그것 때문에, 그것을 내다보시면서
‘아무도 나에게서 내 생명을 빼앗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십자가를 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10:18

‘인자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3일 후 그는 죽음에서 일어날 것이다’

‘나는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리라!
그리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내 것이 될 것이다
나는 만유의 왕, 만왕의 왕이 될 것이다!’

계1:18 ‘(나는) 곧 살아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래서 사망과 음부(지옥)을 멸하시는 권세를
(우리 구원을 위해) 가지시는 그 미래를, 그 기쁨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 후에 내다보신 것

행16장에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죠.
거기에 귀신 들린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주인들은, 그녀의 점치는 일을 통해 돈을 벌어들였죠.

 

그런데 그녀가 바울이 설교하는 중간에
계속 소리지르며 방해하는 것입니다. ‘저 분은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다’
그 말은 맞아도 설교 훼방이었죠.

바울은 처음에는 참고 며칠 시달리다가, 결국 할 수 없이
그녀 속에 있던 귀신을 내쫓았죠.
그러자 귀신이 나왔고, 그녀는 점치는 능력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과 실라는, 고소를 당했고
두 사람은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심한 채찍질을 당한 후에
그리고 발에는 차꼬가 채였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바울과 실라는 그 밤에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희한하다고 한 이유는, 
우리는 주의 일을 하다가 약간만 저항을 받아도, 약간만 어려움에 처해도
불평불만과 괴로움을 토로하지 않습니까.
심한 경우는 주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그 상황에서 찬양을 부른 것입니다.
지금이 찬양이 입에서 나올 상황이냐는 거죠.

행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저 John Piper 와 제 아내는
매일 밤 함께 성경을 읽고, 같이 기도하고나서 잠에 듭니다.

지간 주간에 행16장 이 본문을 같이 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본문으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읽고, 우리 부부는 서로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죠.
‘우리는 (바울과 실라처럼) 이렇게 하지 않는 군요!’  

성경에서 제 양심을 찌르는 여러 구절 중에 하나죠!
이런 구절이 참 제 마음을 괴롭게 합니다.

왜냐면 반대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늘 불평하거든요.
찬양이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은, 본문보다 훨씬 비교할 수 없이 더 사소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불평할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능력이 아닙니다. 
즉 부활을 내다보는 능력이 아닙니다!
불평은 부활의 능력이 아닙니다. 

내다보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불평이 나오는 거죠.
내다보이는 게 있으면.. 그 어려운 상황을 참고 견딜 것이며
나아가 바울과 실라처럼 찬양할 것입니다.

우리가 불평할 때 보면.. 세상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제 자신도 간혹 그럴 때가 있죠.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행16:25
여기서 ‘찬송’은 시편을 뜻하지 않습니다. 
시편을 뜻하는 말은 따로 있습니다.     

찬송하매 (휘메오)는 미완료 시제입니다.‘반복, 진행’의 의미죠.
그러니 찬송 한 곡 부르고 끝냈다는 게 아니라, 계속 불렀다는 거죠.
(그래서 NIV, NASB는 were praying and singing 과거진행으로 번역)

엡5:19 ‘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첫 번째 나오는 ‘시’가 바로 시편입니다.  *팔모스 psalm
두 번째 나오는 ‘찬송’은 오늘날의 찬송가죠. *휨노스 hymn
바울과 실라도 이 hymn을 불렀던 것입니다. 행16:25, 엡5:19 같은 헬라어죠.

제 말은, 바울과 실라가 성경(시편)만 알고 있었다는 게 아니라
당시 부르던 찬송도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바울이 찬송시를 썼을 수도 있고, 실라가 음악가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들은 찬송을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평소에도 찬송을 많이 불렀으니까, 결정적인 순간에도 찬송이 나오는 거죠,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위인들은 대부분 다 찬송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찬송이 곡조있는 기도이니까요)

두 사람은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다니면서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서 복음을 전하면서
찬송을 불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고도, 엡5:19, 골3:16 등을 보면 알 수 있죠.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바울과 실라가 많은 찬송을 알고(외우고) 부르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을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데일리 루틴이 나온 거죠.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이 처한 감옥은 칠흑같이 어두운 곳입니다.
낮에도 어두운데, 지금 밤중이니 얼마나 더 어두웠겠습니까.
그 어둠 속에서.. 찬송이 지하감옥에서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더욱 간절히 받기 원하는 이 능력 power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환난 가운데서 찬송하는 능력!  이것이 제 질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힌 이유를, 사도행전에 4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행23:6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벨릭스 앞에서 한 말입니다.

아래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한 말입니다.
행24:21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행26: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바울은 로마에서 거기 유대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28:20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의 부활을 증거했기 때문에
바울은 감옥에 갇히고, 또 계속 재판을 받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의 복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었고,
또한 ‘성도의 부활’을 증거했기 때문에,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과 계속 마찰이 있었던 거죠.

나아가 바울 자신이 부활할 것을 믿었고, 부활을 내다보고 있었기에
그는 감옥에서도 계속 찬송하고, 간수장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내다보시고 십자가를 참으신 것처럼,
바울도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에, 

그것으로 인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혀도
그는 계속 부활의 복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는 투옥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한밤 중에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서
자기의 절박하고 고민되는 문제를 상담해 온다면
그 친구와 같이 전화통화 중에 찬양하십시오.
아마 바울과 실라처럼, 여러분의 환경에도 지진 같은 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옥문이 열리듯이, 그 친구의 문제에 해결점이 드러나고
친구를 묶고 있는 사슬이 풀어질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간수와 그 가정이 믿음을 갖게 되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어쩌면 간수는, 그 빌립보 도시에서 가장 구원받기 어려운 사람일 수 있죠.
그의 직업상 그는 난폭하게 살던 사람이었죠.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 처한 성도가 찬양할 때,
오늘날에도 그 주위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가장 구원받기 힘든 사람까지도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질문해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바울과 실라처럼 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여정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봉착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그때 인간의 본성을 따라 불평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어떻게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바울은 뭔가 소망하고 있었고,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요. 히12:2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후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예수님은 ‘부활의 소망’과 ‘고난 중에 찬송’하는 것을 연결 지으셨어요.
바울은 예수님께 그걸 배웠다고 봅니다. 성경을 찾아봅시다.

마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바울과 실라가 그 날 밤에, 빌립보 감옥에서 차꼬에 차였을 때,
그들은 위 예수님을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주1)

물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이 구절은, 현재 고난과 핍박을 당할 때 받는 상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부활 때에, 하늘나라에 가서 받는 상을 의미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런 점에서, 부활의 그 날을 내다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천국에서 상급 받는 그 날을 내다보니까.. 찬송이 나왔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바울과 실라처럼 환난 가운데 찬송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 기억하지 못해서 때문이 아닐까요?
부활의 그 날을 너무 내다보지 못하고, 현실만 쳐다보기 때문 아닐까요?

바울과 실라는, 아마 예수님의 이 말씀도 기억했을지 모릅니다.
눅14: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의 범주에
빌립보 간수도 포함될 것입니다. 가장 잔치에 초대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전혀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초대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바울과 실라는 그 엄악한 간수를 복음의 잔치에 초대한 것입니다.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14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히12:2참조
‘갚을 것이 없는 자들을 복음의 잔치에 초대하십시오!’   눅14:13참조

▲정리하면
지금과 같은 수련회의 환경에서는 여러분은 쉽게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면 그야말로 삶은 치열한 전쟁터인 거죠.

그 치열한 삶의 각축장, 전쟁터에서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며, 
간수장 같은 철천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1) 예수님이 그랬고, 사도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참으십시오!’ 히12:2

찬송이 아니라 불평이 튀어나오는 그 순간에
의도적으로 히12:2절을 기억하고, 한 번 그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2) 지금 우리는 혹시 바울과 실라와 같은 극심한 환경에 처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간수장’ 같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죠.
여러 가지 이유로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초대해서 같이 찬양하십시오.

이것은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하는 게 아닙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찬양하는 게.. 저 사람의 신앙 성향이야, 신앙적 칼라야!’
그런 식으로 피해 가지 마십시오.
이것이 기독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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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사도행전 저작시기는 바울이 순교하기 이전인 AD 60~63년 사이로 보며
마태복음 저작시기는 AD 80년 경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바울과 실라가, 예수님의 말씀, 산상수훈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마태복음이 완성되기 전에, 벌써 예수님의 말씀 미완성 사본들이 많이 돌았을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