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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다

LNCK 2023. 4. 9. 08:43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다(권영보선교사) - YouTube

◈부활하신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다   마7:21~23, 요16:7~9, 롬14:2

권영보 선교사 (정리)             *16분 경부터 정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분명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심을 보고 그렇게 했거든요. 

왜냐면 수제자로서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능력도 보았고, 물 위를 걸으시고, 5천 명을 먹이시고
병자를 낫게 하시고,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보았거든요.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예수님이 진짜 왕이 되실 것이라는
기대도 내심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 앞에서, 자기도 죽어야 되는 상황이다 보니까 
자기 목숨이 걸린 문제이다 보니까
그 죽음 앞에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게 죽음입니다. 
죽음의 칼이 딱 내 목을 겨누고 들어오면,
담대하게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나아가기가.. 사실 주저되는 면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체험이 있거든요. 
터키에서 선교사역을 하다가             주1)
2년 전에 제가 한국에 들어와서 강남 세브란스 병원에서 검사를 했을 때 
'복막전' 진단을 받고, (*복막전이암, 대장암의 일종)
그래가지고 3개월 정도 남았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당사자인 본인에게는 잔인한 사형선고였습니다.
제가 분명히 유서쓰고 나갈 때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나갔는데 
사형선고를 받으니 이게 달라지더라고요. 

그 두려움에 제가 완전히 무너졌어요. 
그런 제 모습을 보니, 한 편으로 속된 말로 쪽 팔렸습니다. 
'하나님, 나 죽기 싫습니다!'

제가 병원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10일을 머물렀는데 
거기서 제가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했어요. 
한 10일 동안 무릎으로 살았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나 죽기 싫습니다!' 뭐 이렇게 완전 왼쪽 팔이 이게 다 저리더라고요. 
죽음 앞에 딱 서니까, 이게 다르더라고요. 

제가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 믿음 없는 도마,
이런 분들에 대한 설교를 과거에 몇 번 했었죠. '그러면 안 된다고!'

자기 죽음 앞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주2)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그랬거든요. 그게 '십자가까지' 입니다. 

베드로가 만약 부활까지 체험했다면.. 그러지 않았을거예요.
아직 부활을 못 보았으니까, 베드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기가 죽을 판인데 살려고 하다 보니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고 

그는 표적과 기사를 다 경험하고,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도 고치고
이런 모든 걸 해 본 경험도 있었고
물 위를 걷는 이런 체험도 있었고 
예수가 누군지도 신앙고백도 하게 되고 다 했지 않습니까! 
근데 안 된다는 거예요. 

성경이 우리한테 말해 주는 거는 
'그걸 다 했었어도 예수를 위해서 
자기 생업을 던지고 따랐던 이 베드로도
결국은 자기 목숨 앞에서는.. 부인하게 되더라'는 얘기입니다.

(이 설교의 주제는 "아직 부활을 못 봐서 그렇다!" 입니다.)

12제자 중에 한 명도 안 됐습니다. 그 누구도 
십자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예수는 그리스도' 라고 말한 자가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36개월 있었던 자들 
그들이 '안 됐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게, 부인하지 않는 게 쉬울까요? No!

지금 12제자들이 부인하고 도망가는 것은 뭘 증거합니까?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증거하는 거죠.
-예수가 그저 '사람'에 불과하다는 거죠.
-예수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이나 그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거한 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도망'은 그걸 증거하는 겁니다.

그게 제자들의 신앙의 진면목이었습니다. 
3년이나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지극히 가까운 거리) 좇아다닌 제자들도
신앙이 성숙되지 않았는데, 그럼 지금 우리는 성숙된 것일까요?
내 목에 당장 칼이 들어오면.. 우리는 담대히 '예수는 그리스도다!' 증거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게 된 분들도 소수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이죠!

도망 간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봐야 되고, 고민해 봐야 됩니다. 

◑그럼 제자들의 극적인 변화는 어느 시점부터 였나요?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겁장이들이... 
저도 겁장이 였더라고요. '3개월!' 이렇게 죽음 앞에 서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죽음 앞에서 벌벌 떨던 겁장이 제자들이 
어느 시점에서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됐냐는 거죠.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기대하고 기다렸다면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그 새벽에,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고 무덤에 갔다가 
거기 가서 예수를 만난 거 아닙니까. 

근데 처음에는 동산지기로 알았다가, 결국은 예수님인줄 알아보았죠.
마리아는 빨리 뛰어 가서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부활하셨다!' 

그러면 그 부활 소식을 기다렸던 사람들 같으면
얼마나 기쁘게 당장 그 소식을 받아 들였겠습니까?
근데 마리아의 증언을 무시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막16:11

두 제자가 엠마오의 길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사실을 증거할때.. 역시 믿지 않았어요. 

막16:12~13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제자들이 부활을 믿고 있지 않았다는 거죠.
어떤 제자들은 '귀신이다! (예수의 영이 나타났다)' 하고 믿지 않았어요. 눅24:27

그 후에도, 11명의 제자가 모여 있는데 
예수님이 실제로 못 박힌 상처의 흔적을 보여주십니다. 
손과 발에 못자국, 옆구리 창자국을 다 보여주신 거죠.

그래도 여전히 의심하면서 믿었습니다.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눅24:41

이해를 돕기 위해 저희 아버지 장례식 예를 들어서 좀 설명해 보겠습니다.
장례식 때 땅에 묻었지 않습니까. 내가 봤지 않습니까. 
근데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계시는 겁니다. 당연히 귀신이겠죠!
그만큼 죽은 자의 부활을 믿기 어렵다는 예를 들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영'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해서, 먹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눅24:41~43

예수님이 진짜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된 도마는
그냥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요20:28

이 설교의 주제는 "부활을 믿게 된 후에야, 비로소 제자들이 변했고,
죽음 앞에서 담대한 사도들이 되었고, 순교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죠!

물론 그 후에 '확인 도장' 받은 게, 오순절에 성령 받는 사건이 일어나지만,
앞서 그들이 10일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게 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려는 열망' 때문이었죠.
예수님이 '나 대신 성령을 보낸다'고 하셨으니까요!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예언되었으므로)
행2장에 성령충만 받은 것만으로는, 불충분했을 것입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이 부활하신 주님을 그렇게 만난 사람들은 
그 가운데 크나큰 회개의 역사가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를 주로 안 믿었던 죄!' 

그게 성령님이 역사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증거되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때 
성령님이 그것을 주관하시는 데 
그분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안 믿은 죄를 책망하십니다. 

그 역사가 제자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나중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가지고... 
그 죽음에 겁나 가지고 다 도망갔던 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신하고 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들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이 부활은 이 세상에 없는 것 때문에 
그냥 우리가 교회에서 새신자 반에서 주입식으로 들어가지고 아멘하고 
배운 경험은 있지만, 

제자들한테는 2천년 전으로 돌아가면, 당시에 신약성경이 아직 없었습니다. 
성경이 없고, 신학이 없고, 교리가 없는 상황에서 
이 제자들이 목격한 것은 딴 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근데 이 부활은 이 땅이 없는 거거든요. 믿을 수 없는 거거든요. 
이 제자들은 부활을 더 이상 안 믿을 수 없어서 믿게 된 거예요. 

▲그 분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것입니다.
모세 이후로 1500년 동안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켜 온 유대인들이 
주일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니까, 이제 이단인 거예요. 
기득권이 봤을 때는 완전히 이단이었죠.

유대교인들은 부활을 안 믿기에, 부활을 믿는 그들을 이단 취급도 했지만
무엇보다 안식일보다 주일을 더 지키니까.. 이단 취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사울 같은 극렬 유대인들은
그 이단들을 다 감옥에 넣고 죽이려고.. 시리아 다메섹까지 간 것입니다.
앞서 스데반 집사님까지 돌로 쳐서 죽였고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1세기, 2세기, 3세기, 4세기에
얼마나 많이 죽어 나가는지 몰라요. 

'예수가 다시 사셨다!' 

예수가 사셨기 때문에 
그때부터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는 서신서가 나타난 겁니다. 

부활해야 그리스도 거든요. 
부활해야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라는 말을 쓰는 것은
'부활'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근데 이거는 (부활은)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제자들에게 나타난 변화가, 우리한테도 있어야 되는 겁니다. 

제자들이 회개했던..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그 회개의 역사 
그게 지금 우리한테 있느냐/없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게 된 간증

제가 강남세브란스 병원에서 '복수전이암, 3개월' 사형선고를 받고 
한남동 더힐 아파트 게스트하우스에서
저를 살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제가 호소하고 기도했는지요!

제가 자녀가 셋이거든요. 
터키에서 지금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런 상황인데 
제가 이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3개월 밖에 살수없다'는잔인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을 기도로 간절히 찾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위로의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을 만났어요.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21

이 말씀을 요약해서 성령님이 어떻게 제 한테 말씀하셨냐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바로 너다!'

제가 즉시 이 말씀인 줄 알고, 성경을 펴서 마7:21절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그 말씀이 맞았어요.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다 '주님'이라고 지금 부르고 있습니다. 
터키에서도,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한국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어디든지 예수를 주로 부르고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이거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2천년 전에, 자신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천국에 못 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겠습니까? 
근데 예수님은 그들이 싹 다 지옥 간다고 하신 거죠!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율법적으로 깨끗했습니까? 
안식일 지키죠. 십일조 했죠.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신랄하게 책망하셨죠.
마7:21절에 근거해서 책망하신 겁니다. 

그들이 그렇게 율법을 외적으로 지킨 것은 다 '자기 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천국 가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신 거죠!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로 섬기는 사람의 예

저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
예전에 중남미 선교할 때,  *미국 교포
주의 이름으로 거기 가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저도 마이애미에서 목회 할 때, 백혈병을 환자를 기적적으로 낫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제 주인은 아직 아니더라고요. 내가 여전히 주인이더라고요.
기도해 준 저도 변화되지 않았고,
기적적으로 고침 받은 그분도 변화되지 않더라고요. 
철저히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 집에 대통령이 와 있다고 하면,
부부가 서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대통령보다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신 그리스도 주님 앞에서 사는데,
부부가 함부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 부활하신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
늘 술을 마시면서, 음주가무를 즐기면서 살 수 있겠나요?
오히려 그런 삶을 회개하는 삶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그럴려면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모세가 이집트의 왕자 입니다. 
근데 자기가 히브리 사람이라는 거 하나만 가지고 
자기가 이집트의 왕자 자리를 내려 놓잖아요.
이때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자리 한 번 안 내려놓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자리 한 번 내려놓는 때가 닥치면
그거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런 자리까지 다 내려놓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모세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그가 가시떨기 나무 불꽃가운데에서 였습니다.

'믿는 것' 과 '만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주님께 헌신한다고 
모세처럼, 자기 자리까지 내려놓은 분들도 있으실 거예요.

그런데 모세가 실제로 변화된 것은
'믿은'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살아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가시떨기 나무 불꽃 가운데서 실제로 만난 것이죠!

바리새인 사울이 하나님을 안 믿어서 
그렇게 충성된 삶을 살고, 깨끗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누가 그를 보고 신앙인이 아니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근데 그 사울이, 도리어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아직 만난게 아니었죠.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변화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한남동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간절히 기도할 때,
제가 정말 죽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을 찾았을 때,
하나님을 무섭게 만났습니다. 두려우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동안 제가 예수님을 안 믿은 게 아니었죠.
그런데 그 동안 제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제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하고 살았던 거죠.

내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목회도 하고, 선교지로 나가기도 했던 거죠.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안 믿었던 죄를,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며칠 동안 회개하면서 보니까 
'이게 지옥문이 확 열려 있더라고요. 제 앞에'

저는 그때까지 이렇게 '코람데오' 신앙으로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지옥문이 제 앞에 활짝 열려 있는데 (마7:21절에 의하면 저는 지옥이죠)

'둘째사망' 에 대해서 계시록도 다 읽어 보고 했기 때문에 
이게 교리적으로 모르는 게 아닌데, 제가 (지옥 환상을 보고) 너무 두려웠어요. 
제가 진짜 덜덜덜 떨었어요. 

그리고 지금 3개월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는데,
'영원한 지옥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구나!' 

이게 보이니까 제가 너무 두려워서 '하나님, 제가 어찌해야 됩니까?' 
하고 회개하게 되었던 거죠.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때부터 제 육신이 죽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영원한 죽음이 제 눈 앞에 보이니까!

그때부터 며칠 동안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 흘리시면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환상으로 제게 약 사흘 동안 보여주셨어요. 나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인지 환상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내 원대로 마옵시고...'
나는 이 기도가 안 나오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 기도를 하셨는지.. 그걸 생각하며 제가 통곡이 나왔어요.

인간이 목숨 앞에서 살고 싶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목숨 마저도 내려놓으신 거죠.
내가 죽음 앞에 딱 서 보니까.. 이게 쉽게 나올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죠...
......................................

주1)
엘사랑 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에 이민가서 쭈욱 살다가 
모태신앙으로 장로교 신자로 이렇게 커서 어른이 되어 미국에서 목회하다가, 
5년 전인 2013년에 하나님께서 강권적인 역사가운데 
저를 선교사로 부르셔서 터키로 나갔습니다. 

터키로 나가는 과정 가운데 이제 마지막 훈련까지 다 받고 나가는데 
건강 검진을 받으라고 해서 건강 검진을 받았는데 
'위암 3기 C' 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죠.

그래서 2013년에 갑작스럽게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위 절제 수술 하고, 항암치료 8 번 하고, 이제 터키로 나갔습니다. 

터키에 가서 이제 교회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그 목적으로 나가서 열심히 뛰었죠. 

전도를 하면서 무슬림들하고 가정에서 모이고, 전도하고 했었죠.
이렇게 열심히 했죠. 신앙 생활을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 해왔고 
대학교 때도 잠시 세상에 나가 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서 쭈욱 크면서, 신앙생활 하는 가정에서 정도를 걸어 온 겁니다. 

그러다가 여러분 코람데오 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거죠. 

우리의 삶 가운데 이제 내가 원하는 게 있고,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있는데 
두 갈래의 길이 앞에 보일 때가 있죠.

거기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될 때 
하나는 나를 위한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인데 
이제 여기서 이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일이 커질수록 '내가 진짜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내가 나를 더 사랑하는가?' 이런 기로에 서는 거죠.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이런 위치에 다 서 보았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면은 그런 결정하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그 의미가 우리한테 크게 다가오지 않거든요.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 내가 결정하는 걸로 해 버리고.. 이렇게 했을 때 
진짜 입술로 주여 주여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마음으로는 내가 주인이고... 

제 나름대로는 그런 고민하면서 진짜 선택을 
'이제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붙드는' 이런 선택을 3~4번 큰 걸 해 봤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 주셔가지고 모든 게 잘될 것'이라고 
믿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런 결정을 했는데, 이게 인생이 피폐해 지더라고요. 
왜냐면 '안전장치'를 안 하고 그냥 하나님을 선택할 때 
우리가 많은 걸 버리게 되거든요. 

예를 들면,  선교 나가는 것도 
그 전엔 미국에서 제가 여유롭게 살았거든요.
집도 있었고, 뭐 애들도 사립학교에 보내 가지고 잘 크고 있었고...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강권적인 역사로 저를 터키로 부르시는데 
터키는 생활이 어렵거든요. 

또 현지인들과 같이 살아야 되는 그런 분위기이다 보니까 너무 힘들었죠. 
그러다 보면 상황이 확 바뀐 거예요. 

애들도 학교 가서 몇 번이나 막 맞고 오고 
우리도 경제적으로도 갑자기 확 기울어졌죠.

미국에서는 교회에서 안정적으로 사례비를 받다가
갑자기 이제 후원금으로 돌려지면서, 이게 약속된게 다 안 오기도 하고 
이렇게 하다 보면.. 이게 내가 열심히 일하고 사례 받는 거 하고, 
내가 일 안 했는데 누가 보내는 후원금으로 생활 할 때 
또 이것도 마음이 달라지더라고요. 
'이제는 내가 누구에게 숙이면서 이렇게 살아야 되는 구나!' 


그러면서 이제 선교지에서 어떤 걸 보게 되었냐면
선교지까지 나갈 때는 
또 목회자가 얼마나 
우리가 교회를 개척한다는 게 
교회가 따로 없으니까 우리 가정이 교회인 거예요. 
저하고 아내와 우리 애들하고 

우리 가정에 무슬림들이 초청되어서 
거기서 같이 밥을 먹고, 또 성경 공부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하는 건데 

근데 이런 일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까 
부부싸움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삶의 환경이 각박해지고 힘들어지면, 안 하던 부부싸움도 하게 됩니다. 
힘 안 들면 안 싸울 사람도 
너무 힘들어 버리면, 참다 참다 못해 빵 터지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힘들고 열악한 상황에 가면 갈수록 
'우리가 주의 길을 간다' 하면서 
우리의 실제 모습이 이제 어려움 상황 가운데 민낯이 드러나게 되는데,

아내도 '내가 저런 여자와 결혼 했었나?' 싶을 정도로 
분명히 결혼할 때는 고양이 였는데, 애 셋 놓고 선교지에선 호랑이가 되어 버렸어요.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 상상도 안 되는 일을 
우리가 막 선교지까지 나와서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딜레마가 생겼어요. 
'야 우리가 교회 개척을 하러 터키까지 나왔는데, 
교회가 없는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선포되지 않는 지역에 
이 무슬림 땅에 교회 개척을 하러 왔는데 
우리 부터가 교회가 안 된 거구나!'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이게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애들을 대하는 관계도 더 힘들고 각박해지고..

애들도 힘들어했죠. '미국에서 터키에 왜 왔냐?' 그러고..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가 터키에 왔으니.. 말도 안 통하고 어려움이 컸겠죠.

'하나님은 엄마 아빠의 하나님이지 뭐!' 이런 식으로 나가고 
선교지에 나가 보니까, 선교사 가정에 예수 안 믿는 자녀들이 간혹 있더라고요. 
삶이 힘들다 보니까 애들이 그렇게 되는 거죠. 빗나가게 되죠.

그렇게 하면서 부모에 대한 어떤 그런 불만, 불신
부모들도 싸우고, 애들을 혼 내고, 또 억압적으로 하게 되고 

부모님들이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또 어떨 때는 자식들을 억압적으로 해야 될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자식들과 관계도 어긋나고 하면서
'엄마 아빠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싫다' 이런 애들도 생기고 

그게 이제 딜레마죠. 
우리 자체가 교회가 안 되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무슬림들 한테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교회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느냐는 거죠. 
그게 쉽게 안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미국의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기독교 환경에서 막 함께 신앙생활 할 때는 몰랐습니다. 

근데 실제로 무슬림 환경 속에 들어가서 힘든 가운데서 살다 보니까 
이게 내 신앙의 진면목이 직면 되는 거죠. 

선교지 가서 보니까, 내 신앙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더라고요.
주위에 도와주는 장치도 없다 보니까.. 도와줄 사람도 없고.. 
그냥 우리 가족만 딸랑 나가서 하는 거니까... 


그리고 또 하나 딜레마가 뭐냐면, 무슬림 신자들과 함께 전도하는데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전제하고 전도합니다. 

근데 무슬림들은 '아니다. 예수는 사람이다. 선지자다.' 
이렇게 딱 전제하고 받아치고 나오거든요.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가 130년 아닙니까. 
근데 무슬림 선교사가 지금 한국에 와서 
지금 한국 교인들을 전도하면, 여러분들이 무슬림으로 넘어가겠어요?
안 넘어가죠.

그런데 무슬림 신앙 역사는, 거기 터키는 500년이거든요. *오스만 투르크 제국~

근데 기독교인 우리 선교사들이 거기 가서 
이 사람들을 포섭해서, 커피 마시면서, 서서히 말씀을 전하고 예수를 전하면
5백년 역사를 가진 무슬림들이, 선교사의 전도의 말을 듣고 넘어 옵니까? 
안 넘어옵니다. 

오히려 이들이 유럽 기독교 하고 이제껏 싸워 온 역사가 있다 보니까 
종목 종목 우리 기독교 신앙을 반박하고 공격해 옵니다.

특히 이들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변증학을 배웁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냥 섣불리 갔다가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근데 거기 핵심이 뭐냐면 '예수는 사람이다. 선지자다!' 
'왜 사람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사람이면 사람이지, 어떻게 하나님이냐?' 이런 주장이죠.
자기들 문화권에는, 이게 말이 되는 논리죠.

우리가 기독교 문화권을 벗어나서 이제 밖에 나가 보니까 
이런 거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는 잘 몰라요. 

우리가 기독교 문화권에서 너무나 당연히 믿는 것들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무슬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슬림 문화권에서, 자기들이 역사적, 전통적으로 믿고 내려온
어떤 세계관이 있어요.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예수는 선지자(사람)이다' 라는 거죠.

물론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 따라서 무슬림 율법주의 신앙을 힘들게 따라가다가도
대학에 가서는 전통 무슬림 신앙과 멀어지는 현대 터키인들도 있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각 종교마다 있는 거죠.
그들 중에서 우리가 이제 전도하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죠. 
젊은 세대들이 전통적 모태신앙에서 갈등을 느끼고, 다른 곳에 기웃거리게 돼죠.


주2)
마26: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그가 저주했다' 그랬어요.
전통적인 해석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했다'고 보죠. 
아무리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다'는 것은 석연치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많이 대두되는 새 해석이 뭐냐면 
'이런 사람을 내가 지금까지 인생을 투자해서 따라다닌 내가 멍청한 놈이지.. 
내가 멍청한 놈이지..' 이렇게 자기 자신을 향해 '저주'한 거다... 
이렇게 설명하는 해석이 있어요.

*'저주'의 어근인 '아나세마'는 행23:12, 14, 21절에 '맹세했다'로 나와 있습니다.
본절에서도 베드로가 '맹세했다'고 볼 수도 있죠. 진짜 저주가 아니라요!

근데 최근에 어느 신약신학자의 논문을 보니까 
이 부분을 아주 자세히 설명해 놨는데 
제가 그 논문을 읽다가 깊이 동의가 되더라고요. 

뭐냐면 '당시 유대인들의 수사법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된다'는 거죠. 
그 차원에서 이 본문을 해석하면, 베드로의 '저주'의 진의가 뭐냐면,

예를 들면, 우리가 서로 이제 어떤 이슈를 가지고 논쟁을 해요. 
양자가 말을 주고 받다가 
자기 말에 진심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쓰잖아요. 

'야, 내가 정말 그랬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런 수사법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베드로 저주'의 해석에 가장 순조로운 이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지금 뭐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수사법을 인용 했을까요?

'나는 절대 이 도당이 아니다'
'내가 이 도당이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질게!' 
이렇게 표현을 했다고 보는 것이 
전체 문맥에 순조로운 해석이라고.. 저도 동조가 되더라고요. 

베드로가 진짜 악의적으로 예수님을 저주한 게 아니라는 거죠.
'저주했다'는 말은, 유대인의 수사법인데
'내가 그 도당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식의 의미가, 그 진의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