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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살아나셨도다

LNCK 2023. 4. 10. 11:04

주일예배 “과연 살아나셨다" 눅 24:13-35 23.04.09 - YouTube

◈과연 살아나셨도다      눅24:13~35        23.04.09.

톨스토이의 <이반의 하루> 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반'은 러시아의 가장 흔한 남자 이름 중 하나입니다.

이 소설을 보면, 어느날 밤에 이반에게 주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반아, 내일 내가 너를 찾아봐야 되겠다'

다음 날에 이반이 신이 나서 일어나서 차를 끓이고 과자를 굽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창밖에 어느 할머니가 추운 겨울날씨에 길을 쓸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할머니가 추우시겠다' 그래서 할머니를 불러다가 
차 좀 드시라고 따뜻한 차를 대접을 해드립니다. 

또 기다리는데 예수님은 오시지 않는데 
창 밖을 내다보니까, 어떤 소년이 과일 장사에게 사과를 훔쳐 달아나다가 
붙잡혀서 야단을 맞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반이 밖으로 뛰어나가서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면서 
사과 값을 물어주고 '얘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이렇게 하고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요.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창 밖을 내다보는데 
어떤 상이군인이 목발을 짚고 가는 것을 보고 '피곤하시겠다...' 

그래서 잠깐만 들어오시라고 하고는 차와 과자를 대접하고 보내드립니다. 

저녁이 됐어요. 이반이 이제 잠자리에 들어가면서 
'왜 주님이 오신다고 하시고는 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환상이 보이면서 
그 할머니의 모습, 소년의 모습, 상이 군인의 모습이 보이면서 
주의 음성이 들리기를 
'이반아, 내가 오늘 너를 세 번 찾아갔다!' 라고 말씀하시자

그제서야 이반은 주님이 그 세 사람을 통해 자신을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는 줄거리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스토리가 아닐 수 없지요. 

톨스토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스토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별도로 예수님을 찾을 필요 없다. 
우리 중에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주님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도로 주님을 찾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잘못이죠.

이웃은 이웃대로 대접해야 되지만, 주님은 주님 대로 찾아야 됩니다. 
이웃을 대접한다고, 예수님을 별도로 영접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엠마오 길의 두 제자와 함께 하셨는데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톨스토이가 말한 것입니다. 

본문에 엠마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입니다. 
고향 엠마오로 걸어가면서 두 사람이 열심히 서로 대화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같이 걸어가셨다' 라고 했어요.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속에 던져졌을 때 
바벨론 왕이 들여다보니까 
분명히 3 명을 던졌는데 네 명이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신의 아들과 같이 보이더라' 라고 한 것처럼 

이 제자 두 사람이 걸어가는데 
별안간 예수님이 나타나서 함께 걸어가셨어요. 
그런데 '그들의 눈이 가리워서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동행하시는데 눈이 가리워져서 알아보지 못했다
눅24:16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는 게 아닌데 
우리가 마음이 어두워져서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게 아닌데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서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잠이 깨서 말하기를 '과연 하나님이 여기 계시건만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여기 모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예배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라고 결론만을 내리게 되면 
그 이후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확실함을 다시 정리하는 것이 
우리 믿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최초의 사도들은 (부활을) 어떻게 믿었을까요? 
최초의 증인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됐을까요? 
우리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걸어가던 제자들은 이미 부활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에요. 
22~24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미 이런 모든 소식을 들었어요. 
그럼에도 '슬퍼하고 있었다'는 말은.. 믿지 못했다 라는 뜻입니다. 

남의 말을 듣고, 남이 경험한 그걸 가지고 
믿음에 이르기가 어렵다.. 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이 하는 말, 여자들이 경험한 것, 베드로가 경험한 것, 
그것 만을 듣고 '과연 내가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지?' 

오늘날 우리도 그게 쉽지 않은 것처럼 
2천 년 전 이 제자들에게도 쉽지 않았어요. 

이들이 옛날 사람이라고 만만하게 봐서는 안됩니다. 
옛날 사람이라고 미신적이라든가, 무식하다든가 
쉽게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이들도 생각이 있었고, 이들도 의구심이 있었고, 이들도 증거가 필요했어요.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정황에 의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황이라 함은.. 무덤이 비었고, 누가 훔쳐갔을 리가 없고 
무덤 지키던 군병들이 태만했을리가 없고, 여자들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고 
이런 정황만을 고려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정황에 의해 믿는 것입니다. (엠마오 길 제자들은 정황을 보고서 부활을 믿지 않았죠)

지금도 그런 식으로 확신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죠. 
'제자들의 변화 전과 후가 다르다. 
전에는 그렇게 두려워했는데 
이후에 그렇게 담대한 것을 보니 
뭔가 어떤 일이 일어났어! 
그건 예수님의 부활일 수밖에 없어!' 
이렇게 정황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오늘날도 있습니다. 

정황을 토대로 믿는다는 말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 또 확률이 높다. 개연성이 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확률'은 도박할 때나 쓰는 말입니다. 
'개연성'은 연구할 때나 쓰는 말이고 
'가능성'은 범죄 수사할 때 쓰는 말이에요. 
신앙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보다는, 계실 확률이 높기 때문에 나는 믿어야지..'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기 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그는 이미 신학자였고, 이미 설교자였고, 이미 선교사였는데 
그럼에도 마음에 확신이 없다가 
어느 날 올더스게이트의 교회에 들어가서 설교를 듣는 중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라고 했습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던 이 제자들이 
'예수께서 성경을 풀어주시는 것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한 것처럼 

그 뜨거운 경험을 한 후에 존 웨슬리는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능력이 그에게 나타났어요. 
이전에 갖지 못했던 확신을 가졌습니다. 

존 웨슬리의 올더스 게이트의 경험은 
엠마오 마을로 가던 제자들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려면 
적어도 본문상으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누군가가 성경말씀을 풀어줘야 됩니다. 
내가 스스로 읽을 수도 있죠.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말씀을 풀어줘야 됩니다. 

32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속에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말씀을 누가 풀어줄 때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둘째는, 주님과 떡을 때는 성례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과소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0~31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세 번째는,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됩니다. 
이것은 신비한 것을 말합니다. 

동행하시는 예수! 
이미 동행하고 계셨어요. 

♪이 땅 위에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할렐루야! 

하나님이 괜히 '나를 찾으라' 명하시는 게 아닙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를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에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나를 찾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7:7

엠마오 길의 제자들처럼
주님이 이미 함께 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못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홍수가 나서 집이 물에 잠겨, 지붕 위에 올라가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이 
헬리콥터가 와서 줄을 내려서 '빨리 줄을 붙잡고 올라오라' 했더니 

'아닙니다. 나는 주님이 나를 구해주실 것을 기다립니다'

그 다음에 누가 배를 저어서 와서 '빨리 배에 타세요'
'아니에요. 나는 주님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물에 빠져 죽었어요. 
그가 천국에 가서 주님에게 여쭤봤습니다. 

'제가 주님이 와서 구조해 주실 줄을 기다렸는데 왜 안 오셨습니까?' 그랬더니 
'내가 두 번이나 갔다. 헬리콥터를 갔고, 배로 갔다!'

주님이 이미 돕고 계시는데, 말씀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못알아들을 수 있어요.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톨스토이의 소설이 참으로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일상에 볼 수 있는 사람과 환경을 통해 만나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길을 쓸고 있던 할머니, 굉장히 작은 분입니다. 
-또 사과를 훔쳐 도망가던 아이, 지극히 소자입니다. 
-또 지팡이를 찍고 가던 상이군 용사, 지극히 별 볼 일 없는 사람인데 

그런 작은 기회와, 작은 일을 통해 
주님이 우리와 이미 함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곳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이고 
지극히 작은 곳에서 사랑을 나눌 때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