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삼하 1장 절별 해석 및 주석

LNCK 2023. 4. 10. 15:41

◈삼하 1장 절별 해석 및 주석

1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사울의 죽은 후라' 
사무엘상.하를 연결해 주는 의미 있는 구절이다. 
랑게(Lange)는 이 문구가 2장에 나온 용례처럼(2:1, 그 후에) 
단순히 내용의 흐름을 바꾸어 주는 보편적 형식으로서 사무엘상. 하와 구분점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구약 역사서 중 상당수가 '누구가 죽은 후'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음을 보아(수 1:1, 삿 1:1, 왕하 1:1) 이 문구를 사무엘상.하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삼음은 적절하다. 
더욱이 이 문구에 의해 내용면에서 폭군 사울 왕의 시대와 성군 다윗 왕의 시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을 보아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사무엘상.하가 히브리 성경에서는 한권으로 되었을지라도 이 문구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은 매우 적절하며 또한 그 의미가 깊다.

'시글락' 
브엘세바 북서쪽 19. 2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원래 시므온 지파에게 배당 되었으나(수 19:5, 대상 4:30) 사울 시대에는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편 가드의 아기스 왕은 다윗이 사울에게 뒤쫓기고 있을 때 시글락을 다윗에게 주어 외부의 적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꾀하기도 했었다(삼상 27:6, 대상 12:1, 20). 
즉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이 가드로 도망와 아기스 왕과 군사적 관계를 맺고 이 곳을 얻었던 것이다. 덕분에 다윗은 지금까지 이곳을 그의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며 은거할 수 있었다(삼상 27:8, 9, 30:26-30).

2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제 삼 일에' 다윗이 아말렉 족을 추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시글락으로 돌아온 지(삼상 30:16-20) 제 사흘째 되던 날을 가리킨다.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본절에 나오는 이 사람의 행위는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위증(僞證)에 비추어볼 때(5-10절) 전적으로 거짓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이와 같은 보고를 올리고 있는 이 아말렉 사람은 아마도 이스라엘 군대에 고용된 용병(傭兵)이었을 것이다(8, 13절). 그러기에 그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하고 사울마저 위기에 처하자(4-10절, 삼상 31:1-6) 진영을 이탈, 잽싸게 도망쳐 나왔을 것이다.

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과거 아벡 전투결과, 엘리에서 사무엘로 통치권의 전황이 이루어졌듯(삼상 4, 7장) 이제 길보아 전투(삼상 31장) 결과, 사울에서 다윗에게로 통치권이 전환되게 된 사실(2:1-4)은 배후에서 역동적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즉 비록 인간의 역사는 실패로 끝나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가운데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성취시켜 나가고 계시는 것이다.

'군사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이미 삼상 31:1-7에서 자세히 언급된 상황이다. 이같은 이스라엘의 대패(大敗)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울에게 주셨던 예언(삼상 13:14, 15:23, 26, 28, 28:19)의 성취라는 의의를 지닌다. 

5 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사울과...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였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다윗의 심정이 역설적으로 드러나있는 반문이다. 즉 다윗은 아말렉 사람에게 "네가 직접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목격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어찌 감히 네가 함부로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고 하느냐?"는 의미로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다윗의 위대한 신앙 인격을 엿볼 수 있다. 즉 그는 지금껏 자신을 박해하던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쉬기는 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그 아들 요나단이 전사한데 대하여 충격과 당혹감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6 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소년' 이에 해당하는 '나아르' 는 유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기까지의 소년, 소녀, 청년, 처녀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용병(mercenary)으로 전투에 참여한 점으로 보아 여기서는 20세 전후의 청년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하다. 

'사울이 자기 창을 의지하였고' 
혹자(Clericus)는 이를 사울이 창을 사용, 자살을 시도하려 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의지하다'에 해당하는 '솨안' 은 '기대다', '쉬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극도로 지친 사울이 땅에 꽂힌 자신의 창을 의지한 채 힘들게 겨우 서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봄이 낫다(Lange). 이는 당시 역경 중에 처해 있던 사울의 비참한 지경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7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8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사울의 죽음과 관련된 아말렉 소년의 보고(6-10절)가 완전히 날조된 거짓 보고임을 드러내 주는 결정적 단서이다. 왜냐하면 할례받지 못한 자들에 의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사울(삼상 31:4)이 스스로의 신분을 '아말렉 사람'이라고 밝힌 소년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9절)은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9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10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엎드러진 후에는' 여기서 '엎드러지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에 해당하는 원어 '나팔' 은 '쓰러지다'는 뜻이다. 따라서 혹자는 이를 사울이 창에 엎드리어 자살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학자들은 이를 사울이 블레셋에게 '패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 곁에 서서 죽이고' 이처럼 아말렉 소년은 자신이 사울의 부탁을 받고서 사울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상 31: 3, 4에는 사울이 블레셋군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이같은 차이점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아말렉 소년이 다윗으로부터 상급을 받기 위해 사울이 자결한 사실을 숨긴 채 거짓 증거했기 때문에 생긴 차이점이다. 

'면류관' 원어 '네제르' 는 일반적으로 '왕관'(crown)을 가리키는 말이다.그러나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선 사울이 이러한 왕관을 착용했을리는 만무하다. 아마이는 사울의 투구에 둘러 쳐져 있던 좁다란 금띠로서 왕권을 상징하던 것인 듯하다.

'팔에 있는 고리' 사울이 팔에 차고 있던 고리는 고대 근동의 군지휘관들이 흔히 지니고 있던 장신구 중의 하나이다(민 31:50). 오늘날 발굴된 앗수르의 조각물들에도 보면 손목과 팔에 고리를 찬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11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12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울며 금식하니라' 금식 역시 극한 슬픔을 나타내던 한 방법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슬픔은 지극히 신앙적인 것이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왜냐하면 다윗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슬퍼했기 때문이다. 

1)그의 동포들이 살육당했기 때문이다. 
2)그 중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 요나단도 있었기 때문이다. 
3)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서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짐승같은 이방인에게 짓밟혔기 때문이다. 
4)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기름부음 받은 왕 사울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과거 사울은 하나님의 성호(聖號)로 기름 부음 받은, 즉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신정 국가의 왕이었다(삼상 10:17-24). 따라서 그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죽은 것은 
사울과 그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권위가 떠남을 의미한다. 
이러한 까닭에 다윗은 사울에 대한 그의 사사로운 감정을 초월하여 진정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즉 다윗은 사울 왕국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아 이방인들에게서 조차 능욕(凌辱)당한 사실을 못내 안타까와하며 슬퍼하였던 것이다.

13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나는...아들이니이다' 이와 관련 매튜 헨리(Natthew Henry)는 한 유대인 전설을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곧 이 아말렉 소년이 사울의 마부였던 도엑(Doeg)의 아들이었다는 전설이다. 그에 따르면 사울은 자결하기 전에 자신의 면류관과 팔고리를 이 청년에게 건네 주면서 다윗에게 바치라고 명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일뿐 그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외국인' 
이에 해당하는 원어 '게르' 는 이스라엘에 임시로 체류하는 타국인(노크리)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그 사회에 동화(同和)된 이방인을 의미한다(출 22:21, 23:9). 
이들은 유대 후기에 완전한 시민들처럼 대우를 받았으며(겔47:22), 
제 3의 십일조를 분배받는 특권을 누렸다(신 14:29). 
또한 이들은 여호와 종교로 개종할 경우 이스라엘인과 다름없이 율법에 대한 책임이 있었으며, 동시에 율법의 보호를 받았다(출 12:48, 49, 레 16:29, 17:8, 15, 18:26, 19:34, 24:22, 25:6, 신 1:16, 10:18, 16:11). 
뿐만 아니라, 이들은 법소송에서 하나님께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레 24:22).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인과 같이 땅을 소유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분명 외국인이 갖는 불이익이었다. 때문에 아말렉 소년은 이러한 불리한 입지 조건으로 인해 다윗에게 아첨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1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5 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저를 죽이라' 이처럼 다윗이 아말렉 소년을 죽인 이유는 단순히 그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사울을 죽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대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1)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를 죽인 것은 여호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으며(삼상 24:11, 31:4), 또한 신정 국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 받는 자의 왕권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2) 아말렉 소년은 이스라엘에 귀화(歸化)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법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적어도 이스라엘 사회가 귀화한 외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전심 전력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도 이스라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며 또한 그 왕에게 충성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사울을 살해하였으니 은혜를 악으로 갚은 셈이다. 따라서 다윗이 그를 처단한 것은 하나님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는 행위인 동시에, 여호와의 권위에 대적한 악을 제거한 공의로운 행위였다고 할 수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이 공의로운 처단을 함으로써 은연중 신정 국가의 왕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16 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 

17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슬픈 노래' 원어 '키나' 는 '(장례 때에) 소리내어 울다'란 뜻의 '쿤'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곧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를 가리키는 바 '애가', '비가' 또는 '조가'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 앞에서(3:33, 34),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죽음 앞에서(대하 35:25) 지은 시들은 모두 이러한 '키나'이다.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영혼이 깃든 처소로까지 묘사되어 있다(창 9:4, 레 3:17, 17:11, 14). 그러나 여기에서 피는 최고의 형벌, 또는 죄에 대한 책임 등 처벌을 의미한다. 그리고 머리는 개인의 인격과 육체, 생명 따위를 의미하는 대표 개념이다. 따라서 이 말은 '피를 흘린 그 책임이 바로 네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다. 
즉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것이니"(창 9:6)라는 원리에 따라 다윗은 사울을 살해한 피의 대가를 아말렉 소년에게서 찾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활 노래라' 
원문에는 노래라는 말이 없고 오직 '케쉐트' , 즉 '활'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애가'를 '활'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사울이 죽게 된 이유중 하나가 블레셋인의 화살을 맞은 때문이다(삼상 31:3). 
2)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요나단의 활이었기 때문이다(삼상 20:17-42). 
3)사울과 요나단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활쏘는 자들로 유명했었기 때문이다(대상 8:40, 12:2). 
4)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윗의 노래 중에 '요나단의 활'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22절).

'야살의 책' 여기서 '야살' 은 '의로운 자'(righteous one)란 뜻이다. 그러므로 '야살의 책'은 '의로운 자의 책'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책은 이곳외에 수 10:13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이 최소한 여호수아와 사무엘 이전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기원이나 그 정확한 내용도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컨대 이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나 큰 사건을 노래한 서사시를 수록했던 고대 문서였을 것이다.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여기서 '산'은 '길보아 산'을 가리킨다(삼상 31:1). 그런데 '너의 영광'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사울 및 요나단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의 용사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대표하는 사울과 요나단만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이 중 보다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견해는 후자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절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하여 지은 애가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절내에서 '너의 영광'은 '두 용사'란 말과 서로 호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영광'에 해당하는 원어 '체비' 는 '광채', '영광'이란 뜻 외에도 '가젤 영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수리아 역본(the Syriac Peshitta)은 이를 '가젤 영양'으로 번역하고 있기도 한다. 아마 이는 사울과 요나단의 민첩성 및 그 용모, 즉 가젤 영양과 같이 재빠르고 아름다운 용모를 염두에 둔 번역일 것이다(삼상 9:2, 10:23).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5, 27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구절로 본 애가의 후렴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슬픔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20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가드...아스글론' 블레셋의 5대 성읍중 가장 대표적인 성읍들로서(삼상5:8, 10, 6:17) 그 땅 전체를 두 성읍으로 나타내는 시적 표현이다. 한편 여기서 '가드에 고하지 말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재난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서 이는 훗날 하나의 격언이 되었다(미 1:10).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이스라엘의 비극을 원수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금한 이유는 원수의 기쁨이 하나님의 백성의 슬픔을 배가 시키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여인들이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용사들을 기쁨으로 맞이하며 춤과 노래로써 축하하는 것은 근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습(출 15:20, 삼상 18:6)이다. 다윗은 거민들과 수치와 슬픔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조시키는 가운데 더욱 애잔한 심정으로 애가를 읊고 있는 것이다.

'할례 받지 못한자' 특히 이 말은 블레셋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 되었는데(삼상14:6, 17:26, 31:4) '개 같은자'라는 의미를 지닌 경멸어이다. 아마도 이는 이스라엘의 선민(選民) 사상에서 기인된 것으로 오직 할례받은 자만이 하나님 안에서 존재 의의를 지닐 수 있다는 의식(意識)의 반영일 것이다(창 17:9-14).

21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길보아 산들이...없을지어다' 이는 자연에 대한 실제적 저주라기 보다는 길보아산도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함께 애도해야 한다는 시적 표현이다.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여기서 '제물'(트루마)은 거제를 의미한다(레 7:14, 32). 그런데 이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 떡'을 드리는 것이니(민 15:20) '제물 낼 밭'이란 곧 풍성한 첫 열매를 내는 비옥한 땅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 절에서 다윗은 길보아 산이 메말라 박토가 되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함께 애도해 주기를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됨이로다' 
옛날에는 적의 무기가 잘 미끄러져 빗나가도록 하기 위해 방패에 기름을 바르는 것(사 21:5)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제 '사울의 방패가 기름칠도 않은 채 버려졌다'(공동번역)는 것은 곧 사울은 전사하고 그의 방패는 피묻은 채 나뒹구는 비극적 상황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 랑게(Lange)는 논평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이스라엘의 현상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였다.

22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과거 사울과 요나단의 무용(武勇)을 회상하며 찬양하고 있는 구절이다. 개역 성경의 표현은 다소 그 뜻이 애매 모호한데 다음과 같이 공동번역은 "요나단이 한번 활을 쏘면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그 살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라고 표현하여 그 뜻이 비교적 명쾌하다.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화살은 피에 취하고 칼은 육체를 삼킨다'(신 32:42)는 것과 같은 시적(詩的) 표현이다. 즉 이는 과거 사울이 '천천'이나 되는 (삼상 18:7) 많은 적들을 살육하였음을 회상하고 있는 구절이다.

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 
이 말은 다윗의 친구 요나단 뿐만 아니라 초기에 유능한 지도자의 미덕을 보여 주어 백성에게 칭송을 받은 사울(삼상 11:12, 13)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에게 악을 행한 정적(政敵) 사울의 단점은 숨기고 장점, 곧 존경할 만한 점들만을 이 애가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성격상 이노래가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다윗의 성품이 매우 관대한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장차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의 고귀한 신앙 인격을 드러내 준다.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자식으로서 끝까지 아비를 버리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신하로서 충성을 다한 요나단의 효심과 충정을 기억케 해주는 구절이다. 즉 과거 요나단은 다윗과의 우정으로 인해 아비 사울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당하기까지 하였다(삼상 20:30-34). 그러나 요나단은 결코 그러한 사울을 배반치 아니하고 조국을 수호하다가 사울과 함께 한 자리에서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삼상31:1-6).

'독수리보다...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전쟁에 능하였던 위대한 용사나 영웅들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던 개념이다. 즉 독수리 같은 날쌤(욥 9:26, 잠 23:5, 함 1:8)과 사자와 같은 힘셈, 용감함(신 33:22, 시 104:21, 호 13:8)은 고대의 용사들에게서 찾아 볼수 있던 특징이다

24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붉은 옷... 금 노리개' 아마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가져온 전리품(戰利品)들일 것이다. 사울 생전에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러한 전리품을 하사받아 자신들을 치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는 사울의 통치 기간 중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안정과 번영을 시사해 준다.

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내 형 요나단' 여기서 '형'에 해당하는 원어 '아흐' 는 단순히 연령적으로 손위에 있는 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이는 마치 친형제와도 같이 친근한 관계에있는 자를 가리킬 때가 많다. 다윗이 요나단을 가리켜 '내 형'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도 바로 후자와 같은 의미에서이다.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NIV는 이를 '그대는 나에게 매우 친절했다'(you were very dear to me)로, RSV는 '그대는 나에게 심히 기쁨이 되었다'(very pleasant have you been to me)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생전에 요나단이 다윗에게 베풀어 주었던 은혜가 지극하였음을 의미한다. 사실 과거에 요나단은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도 개의치 않고 그를 자기 목숨처럼 위하며 사랑했었다(삼상 20:12-17).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기이하다'에 해당하는 '파라' 는 '경이롭다', '불가사의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출 15:11, 욥 5:9, 9:10, 시 17:7, 78:4, 139:14, 사 29:14, 슥 8:6).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것은 실제로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경이로울만큼 자기 희생적이었으며 영원 불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최상급으로 표현한 말이다. 남녀의 결혼은 단순히 육체적 결합만이 아니라 영혼의 결합도 의미한다(창 2:24, 25, 엡 5:22-33). 따라서 남녀의 영적 결합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도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은 이보다 승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저들의 마음이 통하고 그들 사이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는 극찬의 말이 아닐 수 없다(삼상 18:1). (시적인 표현임으로, 다소 과장되었을 것임. 문맥 전체가 그러함)

27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 여기서 병기는 칼이나 창, 화살 또는 병거와 같은 실제적 병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이는 '싸우는 군인', 즉 사울과 요나단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블레셋과의 싸움에 스스로를 병기처럼 내던졌으나 불행히도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삼상 3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