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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장 활의 노래

LNCK 2023. 4. 10. 18:31

 
◈활의 노래       삼하1장     06.07.16.스크랩, 정리

◑도입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제일 먼저 한 편의 영화를 본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담긴 대하드라마를 보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자기가 살아 온 일생이 영화처럼 죽 펼쳐진다는 거죠」

이런 얘기가 약간 수긍되는 것은, 성경에 이런 말씀도 나오기 때문이죠.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20:12 

여러분의 일생을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여러분이 앉아서 본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떨 것 같습니까? 
저 같으면 민망해서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것 같습니다. 
아마 대부분이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기의 모습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게 되면, 
막상 그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되지요. 
내가 저랬을까 싶은 일도 참 많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그 영화가 대폭 편집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사람의 일생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보여주는 게 아니라, 
어떤 부분은 삭제하고 편집했을 거라는 거지요. 

아마도 그렇게 삭제된 부분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일들일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용서 받았으면, 
그건 하나님의 기억에서 다 지워졌기 때문에, 
더 이상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니까, 그 영화에서도 빠져있을 거라는 거지요.

계20:12절에 나오는 ‘행위를 기록한 책들’에서도 빠져 있겠지요.
진심으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그 회개가 받아들여졌을 때!

◑다윗의 애가 ‘활노래’  (19~27절)

본문 삼하1장에 소위 ‘활노래’라고 불리는 ‘다윗의 애가’가 나옵니다.  주1)
길보아 산 전투에서 사울 왕과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애가를 지어 부릅니다.  19~27절.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네 영광'은 사울과 요나단을 가리키는데, 넓게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합니다. 주2)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5, 27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구절로 본 애가의 후렴구라고 할 수 있죠. 
이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슬픔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를 
잘 드러내 줍니다.

20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가드에 고하지 말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재난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뜻
으로서 이는 훗날 하나의 격언이 되었습니다(미 1:10).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이스라엘의 비극을 원수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금한 이유는 
원수의 기쁨이 하나님의 백성의 슬픔을 배가 시키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죠.

21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길보아 산들이...없을지어다' 이는 자연에 대한 실제적 저주라기 보다는
길보아산도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함께 애도해야 한다는 시적 표현이죠.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제물 낼 밭'이란 곧 풍성한 수확이 있어야, 그 수확을 제물로 바칠 터인데,
제물을 못 바친다는 말은.. 앞서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처럼
길보아 산들이 황폐해 질 것을 노래한 것으로.. 애가의 시적 표현이죠.
그만큼 슬프다는 뜻이지, 실제로 그렇게 되기 원한다는.. 예언은 아니죠.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됨이로다' 
옛날에는 적의 무기가 잘 미끄러져 빗나가도록 하기 위해 방패에 기름을 
바르는 것(사 21:5)이 보통이었죠. 
그런데 이제 '사울의 방패가 기름칠도 않은 채 버려졌다'(공동번역)는 것은 
곧 사울은 전사하고 그의 방패는 피묻은 채 나뒹구는 비극적 상황입니다. 

랑게(Lange)는 논평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이스라엘의 현상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22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과거 사울과 요나단의 무용(武勇)을 회상하며 찬양하고 있는 구절이죠.
개역 성경의 표현은 다소 그 뜻이 애매 모호한데 
공동번역은 "요나단이 한번 활을 쏘면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그 살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라고 번역했습니다.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과거 사울이 '천천'이나 되는 (삼상 18:7) 많은 적들을 살육하였음을 회상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 
이 말은 요나단을 칭송한 말일 뿐만 아니라
 초기에 유능한 지도자의 미덕을 보여 주어
백성에게 칭송을 받은 사울(삼상 11:12, 13)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에게 악을 행한 정적(政敵) 사울의 단점은 숨기고 
장점, 곧 존경할 만한 점들만을 이 애가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의 성품이 매우 관대한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장차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의 고귀한 신앙 인격을 드러내 준다.

'독수리보다...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전쟁에 능하였던 위대한 용사나 영웅들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던 개념이죠. 
이렇게 높이 칭송한 것입니다.

24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이는 사울의 통치 기간 중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안정과 번영을 시사하며
일종의 사울의 치적을 노래한 것입니다.

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내 형 요나단' 여기서 '형'에 해당하는 원어 '아흐' 는 
단순히 연령적으로 손위에 있는 자만을 의미하지 않죠. 
대신 이는 마치 친형제와도 같이 친근한 관계에있는 자를 가리킬 때가 많죠.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NIV는 이를 '그대는 나에게 매우 친절했다'(you were very dear to me)로, 
RSV는 '그대는 나에게 심히 기쁨이 되었다'(very pleasant have you been to me)로 번역하죠. 

생전에 요나단이 다윗에게 베풀어 주었던 은혜가 지극하였음을 의미하죠. 
사실 과거에 요나단은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도 개의치 않고 
그를 자기 목숨처럼 위하며 사랑했었죠(삼상 20:12-17).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기이하다'에 해당하는 '파라' 는 '경이롭다', '불가사의하다'는 뜻으로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최상급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는 저들의 마음이 통하고 그들 사이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는 
극찬의 말로써(삼상 18:1). 
시적인 표현임으로, 과장법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애가 문맥 전체가 과장법이죠.

27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그들은 블레셋과의 싸움에 스스로를 병기처럼 내던졌으나 
불행히도 패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삼상 31:1-7).

◑1. 다윗의 사울 왕에 대한 평가, 너무 후하지 않나요? 
그도 그럴 것은, 다윗은 백성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적 평가를 하고 있죠! 

다윗이 의미 없는 ‘외교적 수사’ diplomatic rhetoric을 남발한 것일까요?
아니면 다윗이, 자기의 인기를 의식해서, 자기 표정관리를 한 것인가요?
이렇게 사울을 높여주어야, 자기 인기가 올라갈 것을 의식한 것일까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그만큼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단순하지 않다는 겁니다. 

▲지금 다윗은, 이제 백성들을 대표해서,
<백성들이 평가하는 사울과 요나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또 다른 평가나 인상을 남길 수 있죠.

전체 백성들에게 다 존경받지는 않아도, 그를 존경한 백성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평가를 보더라도 마찬가지죠. 평가는 엇갈리죠)

어떤 사람을 한 마디로 ‘그 사람은 나쁜 놈이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평가하는 게 가능할까요? 
아무리 나쁜 사람도 칭찬받을 구석이 있는 법이고 
그런 사람도 어떤 사람에게는 은인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부끄러운 부분도 있고 
남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는 법입니다. 

사람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아주 다르게 보입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내가 함부로 내 관점에서 재단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건 참 조심해야 할 일이죠.

다윗이 자기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사울을 보았다기 보다는
최대한 객관화해서 사울을 보려고 노력한 점이
그의 애가에 잘 묻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울은 나쁜 왕, 다윗은 좋은 왕, 요나단은 속없이 착한 사람, 
그냥 이렇게 평가하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만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나쁜 왕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모습에서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주인공과도 같은 
영웅적인 풍모도 엿볼 수 있는 겁니다. 특히 재위 초기엔 전쟁영웅 이었죠.

그런가 하면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는 다윗을 위대한 왕,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좋은 왕이라고 평가하지만, 
그가 저지른 개인적인 죄악은 사울보다 훨씬 컸으면 컸지, 결코 작은 죄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객관적인 평가로 볼 때,
사울은 한 마디로 나쁜 왕이고, 
다윗은 무조건 좋은 왕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요?
(다윗도 삼상27:8~8에서, 아말렉, 그술, 기르스 등을 학살시킨 적도 있었죠) 

◑2. 개인의 사적 감정보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했던 다윗

다윗이 이토록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들을 기릴 뿐만 아니라, 
유다의 백성들에게도 이 노래를 배우도록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삼하1:18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사울은 아무런 이유 없이, 아니, 이유가 있다면 단 한 가지 
질투심 때문에 다윗을 그토록 죽이려고 쫓아다녔던 사람인데,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피해서 오죽하면 블레셋 사람에게까지 도망을 가서, 
블레셋 왕의 신하로 지내야 할 지경이었는데, 
왜 다윗은 이다지도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을까요?

그 이유는, 다윗은
개인의 사적 감정보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사울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그냥 중동의 일개 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울 왕과 그 후계자 요나단이 엎드러진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패하고 엎드러진’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윗이 20절에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라고 노래한 데서 잘 드러납니다.

비록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약 10년간 추격전을 펼쳤으나
공동의 적 블레셋 앞에서는, 즉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다윗은 사울과 언제나 한 편이었던 것이지요. 
(사울은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으나, 다윗은 큰 그림을 보는 거죠!)

▲요즘 ‘더 글로리’라는 연속극이 높은 시청율을 기록하면서
‘복수의 짜릿함’이 마치 전염병처럼 우리 사회에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은연 중에 ‘(내가 망하는 것을 각오하더라도) 기필코 복수하고야 말겠어!’
이런 비성경적인 사상이 사회에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어서.. 
교회가 급히 막아야 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일부만 막아도 파급효과가 있죠!

또한 요즘 젊은이들은 과거와 달리 ‘직장 이직율’이 아주 높습니다.
그런데 직장을 떠나면서 이렇게 저렇게 복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하죠.
아주 우려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이전 직장의 약점을 고발하거나
직장 상사, 동료들로부터 학대를 당했다는 식으로 민원을 넣거나
심한 경우 고소, 고발을 한다고 합니다. 이게 사회적 문제로 커지고 있습니다.

이게 ‘큰 그림’을 보지 못할 때 나타나는 근시안적 악수가 될 때가 많죠.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엡6:5
여기서 ‘종’은 노예가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직원’에 가까운 개념이죠.
그러니 고용인은 고용주를 존경하고 헌신하는 것이, 성경의 큰 그림이죠.
가정에서/직장에서/교회에서 다 그렇게 권위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사울의 죽음을 그토록 애도하고 슬퍼하는 이유는, 
외교적 수사나 ‘악어의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을 바라보니.. 사울의 패배가
바로 자신의 패배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다윗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슬퍼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그림을 보기 때문이죠.

개인적인 사적 이익, 사적 감정으로 따진다면
다윗은 지금 기뻐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춤을 춰야 할 입장이지만
원수는 사울이 아니라, 마귀의 나라 임을.. 다윗은 혼동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귀감이죠.

▲이런 동일 선상에서, 다윗은 앞서
‘자신이 사울 왕을 죽이고 그의 왕관과 팔의 사슬을 벗겨가지고 왔다’는
아말렉 용병을 죽입니다. :10

칭찬과 상을 받을 줄 알았던 아말렉 용병 소년은
오히려 다윗으로부터 심판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4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14

이런 애가를 부르는 다윗의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요?

다윗이 ‘악어의 (위선의) 눈물’을 흘린다고 보지는 않았을 거예요.
왜냐면 진심은 언제나 통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꾸밈 없는 다윗의 슬픔의 표현!

그것은 그를 따르는 6백인의 용사들로 하여금
‘내가 죽을 때까지 충성할 주군을 만났다’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정말 ‘주군에게 충성하는 사무라이 정신으로’ 다윗을 섬겼습니다.
나중에 ‘베들레헴 우물가’까지 가서, 세 명의 용사가
적진을 뚫고 가서 우물을 떠오지 않습니까. 삼하23:16

◑3. 그럼 사울이 잘못한 것까지도 다 잘했다고,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무조건 두둔해 줘야 하나요?

사울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게, 
삼상13장과 15장에 나오지 않습니까!

물론 그건 아닙니다. 
분별은 하되, 비판을 할 자격은 없습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시므로!  약4:12

그러나 보기에 따라,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각도가 있습니다.
사울도 잘 했던 때가 있었으며 (재위 초기)
사울을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  삼상31:12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각도   (펀 글)
사람이든 식물이든 물건이든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위치와 각도가 있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고, 추하게 보이기도 하며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고, 부드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진작가들이 카메라를 들고 그냥 찍지 않고,
그 각도(앵글)를 잡으려고, 이리 저리 카메라를 돌려대며 애를 쓴다.

우리는 화병에 꽃을 꽂을 때도,
보기에 좋은 위치와 각도를 잡아서 꽂는다.
아무렇게나 꽂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분명 그 사람에게도 좋은 점이 있을 텐데
그것은 찾아보지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방향과 시각으로만 줄곧 바라보면서,
그를 미워하거나 무시한다.

사람은 그가 누구냐인 것보다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의 중요도와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오늘은 그를
어제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으면.. 한다.

그러면 사람마다 다른 성격과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새롭고 놀라운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안산 동산고 이야기」라는 책이 있다. (펀 글)
이 고등학교 이사장이신 김인중 목사님이 쓰신 책이다.

이사장님은 학생들을 몹시 사랑하셨다. 
그래서 교육사업에 한평생을 바치셨다.

그는 학생들의 다양함을 파악했다. 
그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는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내성적인 학생은 생각이 진지해서 좋다.
사교적인 학생은 정직하고 과장이 없어서 좋다. 
소심한 학생은 실수가 없고 정확해서 좋다.
질투심이 많은 학생은 의욕이 넘쳐서 좋다.
말이 많은 학생은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자신감이 없는 학생은 겸손해서 좋다.
직선적인 학생은 속정이 깊어서 좋다.

이사장님의 생각에는 모든 학생이 다 좋아 보인다.
왜?
학생 각자의 중심의 선한 면을 보고 있으니까... 

△오늘도 우리들은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가까운 가족들, 형제들, 친척들로부터 시작해서
교우들, 직장 동료들, 친구들, 동창들, 이웃 사람들...

그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끝이 없습니다. 
부모님 빼고는 모두가 다 기피해야 될 대상들입니다. 
그 결과, 내가 불행해집니다. 내가 ‘피해 망상’이 점점 되어 갑니다. 

그러나 그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사람들이 보는 각도에 따라, 긍정적인 점이 한 두 가지는 있기 마련이죠.
그리고 나와는 ‘원수’라도, 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그 결과, 내가 행복해집니다. 내가 ‘대인 기피’에서 점점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서 손해를 당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 손해는 아마 ‘피해 망상’으로 인한 손해보다는, 훨씬 가벼울 것입니다.

주위 사람을 좋게, 선하게, 선한 눈으로 기도하며 바라보기 시작해 보십시오.
금방 당신은 하루가 행복해 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어느 분이 하천변 공원 길을 걷다가, 어느 날 악취(비료)가 나서
너무 당황하고 불쾌해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그 근처로 얼씬거리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우연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곳을 다시 지나며 산책하다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 악취가 났던 자리에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어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꽃을 아름답게 피우기 위해, 아마 두 달 전에 배설물 비료를 썼나 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악취나는 인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또 거기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 지.. 누가 알겠습니까!

△어떤 목자는 이렇게 본다고 합니다. 
‘내가 저를 목자의 시각으로 보느냐?, 아니면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보느냐?’

목자의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면,
-용납 못할 죄인이 없고,
-이해 못할 사건이 없고,
-덮어주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를 자꾸 비난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목자의 시선’이 아닌 거죠. 
‘삯꾼의 시선’인 거죠!

다윗은 지금 목자의 시선으로, 사울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직 긍휼, 사랑, 이해, 관용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구약에서 가장)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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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활노래‘

삼하1: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활 노래라' 
원문에는 노래라는 말이 없고 오직 '케쉐트' , 즉 '활'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애가'를 '활'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사울이 죽게 된 이유중 하나가 블레셋인의 화살을 맞은 때문이다(삼상 31:3). 
2)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요나단의 활이었기 때문이다(삼상 20:17-42). 
3)사울과 요나단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활쏘는 자들로 유명했었기 때문이다(대상 8:40, 12:2). 
4)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윗의 노래 중에 '요나단의 활'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22절).


주2)
한편 여기서 '영광'에 해당하는 원어 '체비' 는 
'광채', '영광'이란 뜻 외에도 '가젤 영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수리아 역본(the Syriac Peshitta)은 이를 '가젤 영양'으로 번역하고 있기도 한다. 
아마 이는 사울과 요나단의 민첩성 및 그 용모, 즉 가젤 영양과 같이 재빠르고 
아름다운 용모를 염두에 둔 번역일 것이다(삼상 9:2, 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