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삼하3장 절별 해석 및 주석

LNCK 2023. 4. 12. 15:59

◈삼하3장 절별 해석 및 주석

3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길르압' 길르압은 대상 3:1에서 '다니엘'로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암논과 압살롬이 죽은 후 네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장남 행세를 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왕상 1:5-10) 그도 일찍 죽은 것 같다.

'그술왕 달매의 딸 마아가' 
'그술'(Geshur)은 요단 강 상류의 동쪽 지경에 위치하고 있던 작은 독립국으로(수 13:13), 당시 다윗 왕가와는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다윗은 이 나라의 공주 마아가와 정략 결혼을 한 셈인데, 그 결과는 오히려 훗날 큰 반역을 일으킬 압살롬을 낳게 된 것이다. 즉 어떤 이유에서든 아내를 많이 거느리는 것은 명백히 신정 국가의 왕에 대한 율법에 위배되는 행동으로서(신 7:3, 17:17), 그는 이 일로 인해 마침내 큰 곤욕을 치루게 된 것이다(15장).

4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아도니야'는 훗날 이복 동생 솔로몬과 왕위 쟁탈전을 벌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마는 비정한 인물이다(왕상 1:5-2:25).

'스바댜'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이다. 그러나 이드르암(5절)과 더불어 그 행적은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8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이스보셋의 질문에 대한 아브넬의 분노에 찬 답변이다.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NIV는 이를 '내가 유다 편에 선 개 대가리냐'(Am I a dog's head an Judah's side)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개를 경멸의 대상으로 보았다(출 22:31, 삼상 17:43, 24:14, 왕하 8:13, 시 22:16, 20). 왜냐하면 그들은 의식법(儀式法)상 사체(死體)에 닿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생각하였는데, 개는 썩은 고기나 시체를 먹는 동물로 여겼기 때문이다(왕상 4:11, 16:4, 21:23, 왕하 9:10). 

'내가 오늘날... 내어 주지 아니하였거늘' 
아브넬이 애초부터 이스보셋에게 반역할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하는 내용이다. 결국 아브넬의 이같은 주장은 사울왕의 첩 리스바를 취한 일에 대한 변명이다. 즉, 자신이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리스바를 취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애정 때문에 취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자기가 그동안 사울 가에게 보여 준 충성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양심이 마비된 자의 소리이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이 이스보셋 정권의 실질적 권력자로서 자신의 어떠한 행동도 정당하다는 패역한 생각을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9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10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아브넬이 이스보셋 앞에서 그를 배반하고 다윗을 따르겠다고 하는 충격적인 선언이다. 즉 아브넬은 자신이 이스보셋에게 반역자로 간주될 바에야 차라리 전이스라엘을 다윗의 휘하에 들어가게 만들겠다고 호언(豪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브넬의 돌변하는 태도를 볼 때, 우리는 그가 이스보셋을 옹립하여 정부를 수립한 것(2:8-10)은 사울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괴뢰 정부를 수립한 것에 불과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무튼 이제 이스보셋과 대립하게 된 아브넬은 다윗 휘하에 들어가 자신의 생명과 지위를 유지하려 꾀한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요압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27절). 이상과 같은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두어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째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라는 점이다(잠 16:9). 둘째는,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결국 패망이라는 점이다(시 1:6).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직접 맹세하신 것에 대한 성경적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아마 이는 하나님께서 사울 왕가의 패망과 관련하여 주신 말씀(삼상 15:28, 29)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듯 하다. 왜냐하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과 같은 한 시골 여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삼상 25:28)때문이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세우리라' 여기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란 말은 가나안 땅 전역(全域)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24:2, 삿 20:1, 삼상 3:20, 대상 21:2, 대하 30:5). 따라서 이는 다윗의 왕권을 온 이스라엘 위에 확립하겠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보셋 사후(死後),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등극함으로써 실제로 성취되었다(5:1-5).

12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전령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또 이르되 당신은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니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아브넬의 이 말에는 복선(伏線)이 깔린 이중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이말의 표면적 뜻은 '이 모든 이스라엘의 땅은 바로 다윗 당신의 것입니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 땅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아브넬입니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즉 아브넬은 이같은 말로써 다윗이 통일 왕국의 위업을 순조로이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돌아가게 하리이다' 
아마 아브넬은 이같은 제의를 통하여 다윗으로부터 적절한 보상과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 다윗의 왕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이해치 못한 행동이다. 즉 아브넬은 능히 자신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13 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이는 다윗이 아브넬과 화친을 맺는 조건으로 건네는 요구이다. 그런데 이처럼 다윗이 미갈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했던 이유에 대하여 혹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을 펴기도 한다. 즉 다윗이 정략적인 차원에서 다시금 사울 왕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는 견해이다. 
물론 우리는 그같은 측면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다윗이 아직도 미갈을 사랑하여 잊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첫째, 미갈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양피 백을 베고 정혼한 여인이며(14절), 
둘째, 그녀는 사울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여인이었으며(삼상 18:20, 19:11), 
셋째, 그녀 자신이 다윗을 사랑했음에도(삼상 18:27, 19:11, 12)불구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지금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25:44). 
아무튼 다윗이 다시금 미갈을 되찾게 된다면 그것은 곧 사울에 의해 부당하게 박탈된 자신의 공적 권리와 신분을 회복하게 된다는 의의를 지닌다.

14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전령들을 보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그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로 나와 정혼한 자니라 하니 

'이스보셋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이 사울 왕가를 대표하고 있는 이스보셋에게 정식으로 사절단을 파송한 것을 가리킨다. 즉 다윗은 아브넬과 이미 밀약(密約)을 맺은 상태이지만, 어디까지나 정식 외교 절차를 밟아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려 한 것이다.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으로 정혼한 자니라' 일전에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 다윗을 죽게할 목적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陽皮)일백을 폐백(幣帛)대신 원한 적이 있었다(삼상 18:25). 그런데 오히려 다윗은 쉽게 블레셋인들을 치고 그 양피를 갖다 바친 후 사울의 딸 미갈을 아내로 취하였으니(삼상 18:27), 바로 그 사건을 뜻한다.

15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 

'이스보셋이 보내어... 취하매' 이는 이스보셋이 자의로 행한 행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의 위(位)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적수인 다윗의 요구를 자기 스스로 들어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보셋이 이와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아브넬의 협박 때문이었다. 즉 다윗이 아브넬과 언약을 맺는 조건으로 미갈을 데려오라는 요구를 하였는 바(13절), 이에 아브넬이 이스보셋에게 공공연히 압력을 가하였음이 분명하다.

'발디엘' 삼상 25:44에는 '발디'(Phalti)로 나와 있다. 

16 그의 남편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바후림' 베냐민 지파의 한 성읍으로 예루살렘 동북방 근교에 위치하였다. 훗날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의 고향이자(16:5), 다윗의 첩자인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압살롬을 피해 그곳 우물에 숨었던 곳이기도 하다(17:17-20).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아마 아브넬은 다윗의 심경(心境)을 고려하여 발디엘이 베냐민 지경(地境)을 넘어 유다 지파의 땅에 들어서는 것을 허용치 않았을 것이다.

17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너희가... 다윗으로 너희 임금 삼기를 구하였으니' 
본절은 아브넬이 이스보셋과 다툰 후(7-11절) 아브넬과 장로들 사이에 접촉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때에 분명히 아브넬은 다윗을 흠모하는 장로들의 마음을 읽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기브온 전투에서의 패배 이래(2:12-32) 이스보셋 정권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다윗에게로 마음이 기울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이스보셋이 아브넬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환영받지 못했던 무능한 인물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여러 번' 이에 해당하는 '테몰 쉴솜' 을 직역하면, '어제도 그저께도'란 뜻이다(Keil & Delitzsch). 이 말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흠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따라서 다윗이 이제라도 온 이스라엘 왕위에 오르는 것은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억지나 무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마 13:31, 32).

18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벗어나게 하리라 하였음이니라' 이같은 아브넬의 진술 내용 역시 성경에서 그 전거(典據)를 찾아볼 수 없다. 아마 이는 그당시 온 이스라엘에 퍼져 있던 예언적 전승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아브넬이 이 전승을 믿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이스보셋을 보필하여 온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 거부한 것이 된다. 따라서 그의 말은 지나친 모순을 지니고 있다. 즉 아브넬은 자신의 명예와 이권에 집착하여 기회주의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은 것이다.

19 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아브넬이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말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베냐민 지파는 왕가(王家)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삼상 22:7)사울 왕가의 옹위(擁衛)를 반대하고 이스보셋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였다. 그러므로 아브넬은 특별히 그들을 설득하는 데 신경을 썼던 것이다.

'베냐민의 온 집이 선히 여기는' 이상과 같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사람들이 아브넬의 말을 선히 여겼다는 것은 이스보셋과 사울 왕가의 완전한 몰락을 시사해 주는 사건이기에 충분하다.

20 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아브넬이... 헤브론에 이르러' 아브넬은 이미 밀사(密使)를 보내 다윗을 돕겠다는 의사를 타진한 적이 있었다(12절). 그리고 이스보셋에게 압력을 가하여 다윗의 요구대로 미갈을 돌려보내기까지 하였다(13-16절). 그리하여 다윗으로부터 어느 정도 신뢰와 호의를 얻은 그는, 이제 확실한 신변의 안전과 지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친히 다윗을 찾아가 최후 협상을 벌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이...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한 나라의 실권자를 위해 잔치를 베푼 것은 단순히 즐긴다는 의미 보다는 쌍방간의 언약을 확증한다는 의미(창 26:28-31, 31:53-55)를 가진다. 따라서 다윗이 아브넬을 위해 잔치를 배설한 것은 (1) 아브넬이 제시한 언약이 기만책(欺瞞策)이 아니었음을 그가 믿었고, (2) 이와 같은 움직임을 그가 자기와의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는 증거가 된다.

21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 

'내 주 왕' 아브넬이 처음으로 다윗을 주(lord)라고 부르는 장면이다. 즉 지금껏 이스보셋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겼던 그(2:8-10)가 이제는 다윗을 새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공식 표명을 한 것이다.

'온 이스라엘 무리를... 더불어 언약하게 하고' 이 말은 공식적으로 다윗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언질이다. 즉 성경에 보면, 왕이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를 때 백성들과 언약을 맺었으며 백성들은 왕을 순전히 따를 것을 서약했던 것이다(5:1-3, 삼상 11:15).

'마음의 원하시는대로... 다스리게 하리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아브넬의 교만과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사고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자신이 능히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의 왕권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하시는 자를 왕위에 올리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이는 어디까지나 전우주의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 뿐이시다(사 45:9). 둘째, 그는 다윗이 장차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다윗의 뜻대로 나라를 통치할 줄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정(神政)왕국의 왕인 다윗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려야 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22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요압이 적군을 치고... 돌아오니' 아마도 요압이 싸움터에 나가있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아브넬과의 중요한 협상을 위해 요압을 일부러 변방에 파견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아마 다음 두 가지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1) 당시 지나치게 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요압(39절)을 견제하고, 아브넬과의 협상에서 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2)요압과 아브넬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크게 노략한 물건' 요압이 유다를 공격해온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出征)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변경 지대에 약탈하러 나갔었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같은 노략물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삼상 27:8, 9).

23 요압 및 요압과 함께 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말하여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갔나이다 하니 

'왕이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갔나이다' 다윗도 일전에 아브넬에게 죽임당한 아사헬과 같은 유다 지파이자, 더욱이 그의 외삼촌이었는 바(2:28) '피의 복수'(14:7, 민 35:19)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도 다윗이 아브넬을 그냥 돌려보냈다는 가시돋힌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24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그를 보내 잘 가게 하셨나이까 
25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모든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다윗이 아브넬과 모종의 협상을 체결한 후 그를 평안히 보내준 데 대해 요압이 불평하는 장면이다. 이 불평은 표면상 다윗을 위하는 양 표현되었으나 실상 그가 불평한 이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즉 (1) 다윗이 중요한 협상에서 자기를 배제시킨 데서 느끼는 불쾌감, (2) 다윗이 자기보다 아브넬을 신뢰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3)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에 대한 복수심 등이다(2:23, 27, 30).

'어찌하여... 하셨나이까' 요압의 방자(放恣)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장면이다. 즉 그는 마치 다윗이 국사(國事)를 진행함에 있어서 모든 일을 자신과 의논한 후에 처리했어야 했다는 투로 대들고 있는 것이다.

'왕도 아시려니와... 왕을 속임이라' 요압은 아브넬의 방문 목적을 매도(罵倒)하기 위하여 먼저 아브넬의 인물 됨됨이에 대하여 다윗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즉 요압은 다윗을 향해 '당신은 아브넬이라는 작자가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모른단 말입니까? 그 자는 뻔한 놈입니다. 따라서 그가 온 이유 역시 당신을 속이기 위해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26 이에 요압이 다윗에게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시라 우물'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이곳은 헤브론 북방 약 4km 지점으로, 거기에는 대상(隊商)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 있었다는 견해이다. (2) 헤브론 서북방, 곧 예루살렘 방면으로 2. 4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아인 사라'(Ain Sarah)저수지라는 견해이다. 이 두 견해 중 어느 것이 보다 정확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어쨌든간에 아브넬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피하여 이곳에서 쉬면서, 행군하기에 알맞은 서늘한 저녁 때를 기다리다가 요압이 보낸 사자들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요압이 다윗의 이름을 이용하여 아브넬을 데리고 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아브넬은 일전에 요압의 아우 아사헬을 죽인 연고로 요압을 경계했을 것이다(2:22, 23). 그리하여 요압이 자신의 이름으로 그를 불렀을 경우 아브넬은 틀림없이 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요압은 다윗이 미처 아브넬에게 못다한 말이 있는 것처럼 꾸며서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고 아브넬을 헤브론으로 소환했을 것이다.

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조용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쉐리' 는 '개인적으로'라는 뜻이다. 즉 이는 요압이 마치 아브넬에게 개인적으로 은밀히 얘기할 것이 있는 것처럼 꾸며 그를 유도한 것을 가리킨다.

'성문으로 들어가서' 당시 '성문'은 공공 행사를 위항 모임의 장소였을 뿐 아니라 사교(社交)의 장(場)이기도 하였다. 창 19:1 주석 참조. 따라서 그곳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니 요압이 아브넬은 은밀히 처리하기에는 부적당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혹자는 여기서 가리키는 '성문'이란 '성문 근처의 한적한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70인역(LXX)이 바로 이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공동 번역 역시 '성문 한 옆'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본절은 아브넬의 죽음이 요압의 복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일전에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것은 수차례의 경고 후에 어쩔 수 없이 정당 방위로 행한 것이었다(2:21-23). 따라서 이는 피의 복수가 될 수 없다(민 35:22-25). 그런데도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으니 이에는 다른 까닭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곧 아브넬이 이스라엘의 총사령관이자 실력자로(6절) 다윗의 신임까지 받고 있었던 터라(20절), 자신의 지위를 아브넬에게 빼앗길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요압의 이와 같은 악의에 찬 욕망은 다시 아마사를 살해하는 일로 나타난다(20:11).

28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후에 다윗이 듣고'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26절)는 말과 대구(對句)를 이루는 구절로, 아브넬의 죽음에 다윗이 전혀 무관함을 시사해 준다.

'나와 내 나라는... 무죄하니'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공적(公的)인 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감정과 이기심에 의거한 사적(私的)인 일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책임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돌릴 수 없고 오직 요압에게만 돌아가야 할 뿐이라는 강조적 의미이다.

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그 죄가... 돌아갈지어다' 다윗이 자신의 신복인 요압을 이토록 저주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요압이 저지른 죄 때문이었는데, 그 죄의 내역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요압의 행위는 정당한 복수(復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사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아브넬보다 아사헬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2:21, 22). 
(2) 아무리 정당한 복수라 할지라도 복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레 19:18, 눅 6:27, 롬 12: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복수했던 것이다. 
(3) 요압은 이 일과 관련하여 왕인 다윗과 전혀 의논을 하지 않았다. 이는 곧 국정(國政)의 최고 책임자인 다윗을 무시한 처사로서, 일종의 반역 행위가 아닐 수 없다. 
(4) 무엇보다도 요압은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5:1-5, 삼상 16:28, 29)을 얼마만큼 지연시켰다. 즉 그는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만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죄의 내역으로 보아 다윗이 자신의 신하 요압을 저주한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니라 아주 공의로운 처사였음을 알 수 있다.

'백탁병자' 이에 해당하는 '조브' 는 '흐르다', '유출하다'는 뜻의 '주브' 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이는 레위기 15장에 기록된 유출병(流出炳)을 의미하는 듯한데, 그 증세는 임질(淋疾)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 '목발을 의지하는 자'또는 '막대기를 짚는 자'(NIV) 란 뜻이다. 이에는 절름발이나 소경이 해당된다.

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죽인 것은' 아브넬 살해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아비새도 관계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추측컨데 요압은 사전(事前)에 아비새와 공모하여 아브넬을 유인, 살해하였을런지도 모른다.

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다윗이 요압... 백성에게 이르되' 이처럼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요압조차 아브넬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애통케 한 것은, 아마 그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반성케 하기 위함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후 요압이 이번 경우와 유사하게 아마사마저 살해한 것으로 보아(20:9, 10), 요압이 자신의 죄악을 전혀 회개치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서' 여기서 다윗이 특별히 '왕'으로 언급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즉 다윗이 왕의 신분으로서 마치 자신이 상주(喪主)인 양 아브넬의 장례식을 주도하며 상여 뒤를 따라간 것은 곧 아브넬의 장례식의 국장(國葬)으로 치뤄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다윗이 이처럼 아브넬의 장례식에 특별히 신경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백성들의 의혹을 불식(拂拭)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아브넬의 죽음은 다윗이 요압과 짜고서 행한 짓으로 오해받기 충분하였다. 때문에 다윗을 불신한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시금 이스보셋과 결탁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자신과는 무관함을 백성들에게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37절).

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히브리인들에 있어서 애곡(哀哭)은 장례식의 첫째 요건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슬픔의 발로이자 죽은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주나 친족 뿐 아니라 모든 문상객들 역시 빈드시 애곡을 하여야 했다. 본문에서 아브넬의 장례식에 참석한 다윗과 모든 백성이 애곡한 것도 이와 같은 풍습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러한 풍습은 훗날 소위 직업적인 호상인(護喪人), 즉 '애곡하는 여인들'을 생기게 하였다(대하 35:25, 전 12, 5, 렘 9:17, 암 5:16, 마 9:23).

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애가를 지어 가로되' 여기서 '애가'는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 즉 '키나' 를 가리킨다. 1:17 주석 참조.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이스라엘의 총사령관이자 실권자인 아브넬이 요압에게 살해된 것은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크나큰 과오라는 뜻이다. 즉, 블레셋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생존한 그가 요압의 얕은 꾀 하나 짐작하지 못하고 죽은 사실에 대해 다윗은 놀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놀라움 때문에 다윗은 아브넬을 '미련한 자'에다 비유한 것이다. 한편 공동 번역은 본절을 보다 의역(意譯)하여 '어이없이 개죽음을 당하다니'로 번역하고 있다.

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네 손이...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본절의 의미에 대하여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를 달리한다. 그중 하나는 이 말이,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할 당시 아브넬은 요압의 공격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만큼 자유스러운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두번째 견해는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행위 (2:23)로 인하여서는 결코 포박당하거나 투옥되지 아니하였음을 뜻한다는 견해이다. 
이 중 그 어느 견해를 취하여도 전체 문맥에는 별 지장이 없다. 다만 이는 아브넬이 의외의 죽음을 당하였음을 강조하는 데 그 의지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원문에서 '불의한 자식'은 복수형인 '불의한 자식들'로 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서 '불의한 자식들'은 강포, 폭행을 일삼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아브넬이 그와 같은 무리들로부터 폭행을 당하여 죽은 것처럼 비참하게 살해 당했다는 뜻이다.

35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이 말은 백성들 각자가 다윗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음식을 가져왔다는 말이 아니다. 대신 이는 그 당시의 풍습을 보여 주는 말로서, 장례식 이후에 참석자들을 위해 마련한 음식(렘 16:7, 겔 24:17, 22, 호 9:4)을 백성들이 다윗에게 권했다는 뜻이다.

36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다윗의 행동을 본 백성들이, 그제서야 다윗이 요압과 결탁하여 아브넬을 죽였을 것이라는 의혹을 푼 것을 뜻한다(37절). 그리하여 다시금 백성들이 다윗을 신뢰하며 호의(好意)를 갖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다윗의 진실된 행동은 오히려 위기를 극복하고 온 백성들의 마음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진리(롬 8:26)또한 확인할 수 있다.

37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짓이 아닌 줄을 아니라 

'이 날에야... 아니라' '이 날에야'라는 말은 이전에는 백성들이 아브넬을 살해한 범인으로 다윗을 의심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 이 말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유다 지파까지도 다윗을 의심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이제 다윗 왕을 믿게 된 것은, 다윗의 논리적인 말이나 권모 술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의 진실된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다(36절 주석 참조).

38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는 대인' 여기서 '방백'에 해당하는 '사르' 는 간혹 '왕'을 뜻하기도 하지만(시 45:16, 사 9:6, 단 8:25), 대개는 군대 장관(단 10:13)이나 한 성읍의 최고 지배자(10:3, 삿 8:6, 에 3:12)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대인'에 해당하는 '가돌' 은 '위대한 자'란 뜻이다. 그런데 공동 번역은 이 두 단어를 합하여 '위대한 장군'으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다윗이 아브넬을 가리켜 이처럼 칭한 까닭은 그가 막강한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던 이스보셋의 군장(軍長)이었을 뿐 아니라, 통일 이스라엘 왕국 건설에 조력하였던 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내가... 약하여서' 이는 아마 다윗이 아직 유다 한 지파의 왕으로써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한 상태일 뿐 아니라(2:1-4), 적대 세력인 이스보셋 정권도 존속하고 있음(2:8-10)을 염두해 둔 말일 것이다.

'여호와는... 그 악한대로 갚으실지로다' 이처럼 다윗이 아브넬 살해 사건을 보고 받자마자(28절) 즉시 요압을 처벌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께 심판을 맡긴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즉 (1) 군장으로서 요압이 지니고 있던 강력한 세력때문, (2) 그를 처벌할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유다 지파의 내분 때문, (3) 전 이스라엘의 통일에 있어서 요압과 같은 용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의 이유들 때문에 다윗이 처벌을 일시 유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압을 사면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죽기 전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끝내 회개치 않고 왕국에 대한 반역 행위를 계속 저질렀던 요압을 처형토록 지시하였기 때문이다(왕상 2: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