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다윗의 집이 강해진 이유를 삼하 5:10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하여 가니라’
또한 삼하 5:24에 ‘그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앞서 가 주시니.. 다윗은 점점 더 강해져 갔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는 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집입니다. 다윗은 시68:7에 보면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 가족은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산업화와 더불어 다가오고 있는 세속화는 우리의 가족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가정도 하나님을 앞에 세우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경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경제적인 여건은 좋아지고 문화적인 삶은 누리고 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 은혜가 점점 메말라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 바쁘기 때문에 찬송과 기도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가정의 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자식이 상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정들은 점점 약해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주인 되시고, 함께 해 주시고 우리보다 앞서가신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차이가 반드시 드러납니다! 성경에 보면, 항상 가문 중에 싸움이 있었습니다. 아벨과 가인,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그런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는 항상 약하고 힘없는 쪽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가 항상 승리했습니다.
본문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 왕이 죽고 난 후에, 우리 생각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대부분 다윗을 지지해야 될 것 같은데,
유다만 다윗을 지지하고, 대부분 11지파는 이스보셋을 지지한 것입니다. 다윗은 또 약자요, 소수자 minority 가 되고 말았습니다. 21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위 아브넬의 말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사울 가의 실세인 아브넬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차이가 반드시 드러납니다!’ 다윗가는 흥왕해 가고, 사울가는 쇠패해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벨과 가인,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도 마찬가지였죠.
행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오늘도 참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흥왕케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만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울가는 쇠퇴하고, 다윗가는 흥왕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전쟁다운 전쟁 한 번 안 하고.. 하나님의 때와 시간을 그냥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시간이 말해줍니다. 당장 모든 것이 그럴듯해 보이고 만사형통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모든 것이 불만족스럽고 잘 안 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모든 것은 시간이 말해줍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며 복을 주시는지 밝히 드러납니다.
전쟁이 오래갔지만 다윗가는 점점 융성해져 갔습니다. 반면에 사울가는 점점 약해졌습니다. 한쪽 가문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또 다른 가문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행5장에,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나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복음을 힘써 전하다가 대대적 박해를 받게 되었죠. 공의회에 불려가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점 두려움 없이 복음 전파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베드로와 사도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격분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을 무마하면서 가말리엘이라는 교법사가 나섰습니다. 가말리엘의 설득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 전에 '드다'라는 사람이 일어나 자기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해서 약 4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따르던 사람이 순식간에 흩어졌습니다.
그 후에 인구 조사할 때 갈릴리 사람 유다가 또 일어나 백성들을 꾀어서 자기를 뒤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그 무리들 역시 흔적도 없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두 가지 역사적인 예를 든 가말리엘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행5:38-39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옳습니다. 어떤 일이 사람에게로부터 온 것이면 지금 당장 아무리 흥해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아무리 핍박을 가하고 죽이고 말살하려고 해도 그것을 없앨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기를 쓰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기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잔존 세력인 이스보셋 왕가가 다윗왕가를 크게 위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양가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일어났습니다.
불법적인 정권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몰아내고 새 정부를 세우게 되었을 때 쓰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서, 영국의 청교도 혁명 이후에 다시 영국을 가톨릭 신앙 중심의 전제정치로 되돌리려 했던 왕을 폐위시키고 소위 '권리장전'을 통하여 입헌군주정을 수립시켰던 '명예혁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무혈혁명이라 할 만한 사건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다윗을 왕으로 모신 남쪽의 유다 지파와 사울의 잔당들이 모인 나머지 지파들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처럼 한 나라 안에 두 정권이 공존하던 상태가 드디어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즉 나머지 지파들이 다윗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흡수통일되어 들어오게 됩니다.
다윗으로서는 그야말로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남북통일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본문 1절에서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말씀하는 대로, 다윗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걸지 않고 그저 가만히 인내하며 기다리던 동안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으로써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북조 지파들은 어떻게 스스로 와해되어 다윗의 통치하에 복속되게 되었습니까?
분명히 북쪽 지파들이 수적으로는 상대도 되지 않게 훨씬 더 많았고 사울 왕가라는 정통성도 내세울 수 있는 쪽이었는데 왜 그처럼 제풀에 넘어지게 되었던 것이며, 단일 지파에 불과했던 유다 지파의 다윗 정권이 전 이스라엘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하여 두 가지 대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지도자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권위로써 다스리는(섬기는) 나라나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됩니다. 6~11절
북쪽의 사울 왕가의 잔존세력은 합법적인 리더십의 부재로 인하여 이미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6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고 했습니다.
'사울의 세력이 점점 더 약해진' 것은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은' 것과 비례되었습니다.
2장에서 보았듯이 사울 가는 처음부터 군대장관 아브넬이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5년 반 동안이나 군사독재 정치를 하다가 대외적으로 정통성이 인정이 되지 않으니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여전히 섭정 같은 위치에서 또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은 문자 그대로 허수아비 왕으로 옹립되어 겨우 2년 정도 왕 노릇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불안하기 짝이 없는, 서로의 이해타산만 가지고 형성된 군신관계마저 깨어지는 사건이 갑자기 터지게 됩니다.
바로 아브넬이 사울 왕의 첩이었던 "리스바"란 여인을 차지해 버린 일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첩은, 왕의 재산이나 마찬가지였고, 다음 왕이 이어서 차지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나중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에 자기 아버지 다윗의 첩들을 백주에 왕궁 옥상에서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취한 것도 이제 왕권이 자기 손에 들어왔음을 과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넬이 사울의 첩 리스바와 동침한 것은 스스로 왕처럼 행동한 것과 다름없으며, 윤리적 죄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사실상 반역 행위나 마찬가지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지난 이년 동안 별소리 하지 않고 그저 아브넬 하자는 대로만 따라왔던 이스보셋도 이것만큼은 도무지 참을 수 없어서 "네가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했느냐"하고 :7 처음으로 아브넬에게 한 마디 싫은 소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보셋의 그 말 한 마디에 아브넬은 당장 심보가 틀어지게 됩니다.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8 '내가 다윗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개대가리 같은 사람이냐?'라는 말로서, '나는 다윗의 유다 쪽에 붙지 않고 끝까지 당신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 아니냐?'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 딴에는 사울 왕가를 충성스럽게 섬겨 주고 있는데 그 공은 몰라주고, 그까짓 여자 하나 취했다고 그렇게 섭섭한 소리 하느냐 하면서 자기가 지금 주군이라고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대어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넬이 지금까지 이스보셋을 모신 실제 동기는 결코 사울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이해타산 때문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겨우 그 이스보셋의 말 한 마디 때문에 그 '형식적인 충성'까지도 다 팽개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이제 당장 다윗에게 모든 정권을 넘겨주겠다고 맹세까지 했던 것입니다.
아브넬이 이처럼 뻔뻔스럽고 불순하게 나오는 데도 이스보셋은 자기 왕권을 빼앗아 남에게 주겠다는 소리를 바로 자기 면전에 대고 하는 자기 부하 장군에게도 단 한 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얼굴이 벌개졌을 이스보셋을 버려두고 아브넬은 당장 정권 이양 교섭을 다윗을 상대로 벌이기 시작합니다. :12~16
아브넬은 오늘날로 치자면 일종의 ‘합당’ 공작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라는 아브넬의 말은 :12 '이 나라의 왕권이 다윗 당신의 것 아닙니까?'라는 뜻입니다. (중의적으로, ‘11지파가 자기 땅이다’라는 뜻도 포함한다고 보기도 하죠)
그 역시 어차피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대세를 더이상 억누를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겠다."라고, 마치 자기가 다윗에게 큰 공로나 베풀어 주는 것처럼 생색을 내었던 것입니다. :12
"나로 언약하사이다"라는 말도 자기와 정치적 협상을 맺자는 뜻으로서 '내 공로를 생각해서 합당 이후에 내게 그 어떤 정치적 보복을 하지 말고 잘 대접해 주십시오.'라는 뜻이었습니다. :12
가만히 앉아 있는 상황에서 호박이 넝쿨 째 굴러 들어오게 된 다윗은, 한 가지 조건만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옛날 자기가 왕궁에서 도망친 후에 사울 왕이 다른 남자에게 강제로 시집보내어 버렸던 아내 미갈을 자기에게로 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런 요청한 이유는, 사울이 자기 생명을 노릴 때 자기를 살려 주었던 그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던 까닭이었으며, 또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울의 사위 집안까지 완전히 깨어지고 그 대신 자신은 사울 왕의 사위였음을 재확인시킴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킬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합당 내지는 왕국 통일 작업에 정작 이스보셋은 무슨 발언 한 마디는커녕 얼굴도 내밀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국사에 대한 발언은 고사하고 자기 아버지 명예 지키는 말 한 마디도 전혀 통하지 않는 자리를 왕위라고 앉아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허수아비 왕이 앉아 있고, 아브넬 같은 자기 불법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가 약해지고 망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요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그와 같은 '영적 쿠데타'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목사는 허수아비가 되고 장로들이 실권을 잡는 교회입니다. 참 죄송한 표현이지만 별난 장로들이 정말 많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목사 청빙을 자기네들이 하니까 마치 자기네들이 '고용주'나 되는 것처럼 행세를 합니다.
목사 사례를 자기네들이 책정한다고 해서 자기네들이 마치 '사장'이나 '회장' 쯤 되는 줄로 착각하는 장로들이 이 서울 장안에만 해도 수두룩합니다.
장로들이 젊은 목사를 선호하는 이유를 두고 교회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고 시대에 맞는 신선한 분위기로 교회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라고 말은 좋게들 하지만, 실상은 나이든 목사보다 훨씬 쉽게 자기네들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는 장로들이 꽤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는 목사가 아무리 옳은 소리 하고, 좋은 설교를 한다 해도 그 말에 도무지 권위가 실리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기를 당회장 자리에 앉혀 준' 장로들 앞에서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기는커녕 옳은 소리 한번 제대로 못하고, 그저 예배나 인도하고 당회석상에서는 조용히 자기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는 허수아비 목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도 그 모양이 되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데 교회라고 그런 꼴로 제대로 될 리가 있겠습니까?
교회는 어찌하든지 목사의 영적 권위가 존중되어지고 그 말씀 선포에 지도자로서의 힘이 실려야만 제대로 세워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부여해 주신 영권과 지도권을 중심으로 교회의 기반을 더욱 든든히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나라나 교회가 결국 크게 부흥하게 됩니다. :17~21절
다윗 왕과 더불어 남북 통일정권 수립을 위한 사전교섭을 끝낸 아브넬은 이제 북쪽 지파들을 설득하는 장면에서 "너희가 여러 번 다윗으로 너희 임금 삼기를 구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17
그러니까 아브넬에게 있어서 그들을 설득이라고 할 일은 실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넬의 결심이 있기 훨씬 전부터 벌써 민심의 대세는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넬도 그런 백성들의 마음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저 무력으로 억누르고 있다가, 이제 와서는 마치 자기가 남북통일을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생색을 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한술 더 떠서 말했습니다. :18
실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의 왕권을 예정하시고 선포해 놓으셨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모든 대세의 조류를 조성해 놓고 계셨던 것인데, 아브넬은 그 하나님 말씀과 뜻을 인용하는 것까지도 자기 입장 세우는 데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넬은 그런 식으로 이제 "베냐민 사람의 집"들까지 설득했습니다. :19
베냐민 지파는 혈통적으로 가장 사울 왕가에 가까웠고 따라서 가장 사울 왕가에 충성스러울 수밖에 없는 지파였지만 이제 다윗은 이들까지 손댈 필요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북쪽의 다른 모든 지파들이 오래 전부터 다윗을 지지해 왔고 이제 아브넬까지 돌아선 마당에 이 베냐민 지파 역시 자연히 대세의 조류에 딸려 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북쪽의 사울 왕가의 잔존 세력은 지금까지 절대다수의 민심을 거스르면서 그저 무력으로써 불법적인 권력을 유지해 왔던 까닭에 한 군데만 금이 가도 당장 터지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죠.
그 7년 반 동안 다윗이 11 지파 사람들에게 그 어떤 압력을 주거나 위협을 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그렇게 모으시고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민심은 아브넬 같은 권모술수의 대가요 군부 통수권과 경찰 지휘권과 외교권 등 모든 권력을 한 손에 다 쥐고 있던 독재자조차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끌어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남쪽 유다 지파의 장로들과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하여 누구를 기름 부어 세우셨는지를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뜻대로 순종하여 다윗을 자기 지파의 왕으로 제일 먼저 세웠습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무력시위를 동원해서 왕이 된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유다 지파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새 이스라엘을 세우려 했으며, 그래서 그 한 지파에 불과했던 유다가 결국에 가서는 북쪽의 절대다수의 나머지 지파들을 다 흡수통일하게 되었으며, 그 유다 지파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세운 다윗 왕이 '이스라엘 땅 전체'를 다 다스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목사의 영권과 리더십을 따라 운영된다고 하는 것이 결코 목사의 독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처럼 자신의 직분에 따른 권위는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신 것인 줄을 자각하고 있는 목사일수록 항상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겸손한 자세를 지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인들의 신앙양심을 극히 존중하게 됩니다.
목사의 권위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소중한 양떼들을 잘 돌보라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목자적 영권임을 깨닫고 있다면 어떻게 그 권위를 가지고 양들을 압제하거나 마음대로 잡아먹는 삯군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원로목사님께서 제게 자주 하시는 말씀 중에 하나가 "교인들 정말 무섭다."라는 말씀입니다. 목사는 정말이지 교인 무서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인들은 얌전히 있는 것 같아도, 목사의 진실성 여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장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속속들이 다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분자 피택 투표를 해 보면 교인들이 얼마나 평소에 잘 보고 잘 알고 있는지가 무서울 정도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후보 한 명 한 명에 대해서, 그 사람의 평소 신앙과 생활이 너무나 정확하게 그 득표 숫자에 반영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고백을 진심으로 한 교인의 양심적 판단은 정말 함부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목사와 장로야말로, 교인들의 신앙 양심을 그 누구보다도 두려워하고 존중하는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냥 '다수를 존종한다'는 말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말입니다.
중우정치(衆愚政治)란 말은 민주주의의 최대의 약점을 잘 지적하는 것이며, 교회 역시 '성경중심'이라는 표어 대신에 '민주주의'를 더 내세울 때는 영락없이 중우정치의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12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의 땅이었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교회는 누구의 교회인가요?' 당연히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를 진행시켜 나가고 계시는 '하나님의 지상왕국'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권위로 다스려져야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되어야 마땅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정당한 권위가 없는 사울의 왕가는, 아무리 수가 많고 우세해 보여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점점 더 약하게 만드시고 종내 무너뜨리고 마신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우리 가정이 힘있고 강하게 되는 원리입니다. 반대로 하면 우리 가정이 점점 쇠약해지는 원리도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이 두 집을 대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집은 점점 더 강해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더 약해졌다!‘
왜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해졌는가? 하나님이 강하게 하셨습니다. 왜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졌는가? 하나님이 약하게 하신 겁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강하게도 하시고 약하게도 하십니다. 대부분의 경우 공동체 단위, 집 단위로 하십니다. 복도 주시고 벌도 주십니다.
사무엘하 2장에서 다윗은 드디어 유다 지파에 의해서 왕으로 추대됩니다. 아직 열 두 지파 모두에게 아직 왕으로 인정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5장에 가면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공식적 추대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3장 4장은 다윗의 왕권, 다윗의 집이 어떻게 강하게 될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하나님 보실 때, 다윗의 집을 강하게 해야되겠다고 결심하시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문맥입니다.
반대로 사울의 집은 사울이 죽고 완전히 약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3장 4장을 거치면서 그 집은 점점 완전히 기울어버립니다. 그리고 흩어져버립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각 가정의 장래와 관련하여 매우 중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 좀 더 잘 나가는 가정도 있고, 아직 뭔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쌓여있는 가정도 있습니다.
더 큰 집에 살기도 하고 더 작은 집에 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말씀을 귀 기울여서, 이걸 청종이라고 합니다, 귀를 기울여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대로 따라간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을 점점 더 강하게 하십니다.
▲사울의 집이 점점 약해진 것은 오늘 아브넬 때문입니다. 아브넬이 갖고 있는 생각을 여러분과 제가 갖게 된다면, 그 가정은 힘 있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다윗의 집이 강해진 것은 다윗 때문입니다. 다윗이 가진 생각, 다윗이 취한 행동에서 배웁시다.
사무엘 하를 읽으면서, 도대체 하나님은 왜 다윗을 이렇게 높이시는지 그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구약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견고한 나라가 다윗왕국이거든요.
아브넬 방식으로 살 것인가, 다윗의 방식으로 살 것인가, 아브넬의 방식은 강한 것 같지만 갈수록 약해지구요, 다윗 방식은 처음에는 약한 것 같지만 강해집니다. 하나님이 강하게 하십니다.
성공을 목표로 하여 내 유익을 따라가면 잘 되는 것 같으나 점점 쇠약해지죠. 아브넬을 보면 사울이 죽은 후 사울의 집에서 가장 큰 권력을 잡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넬은 자기 성공을 너무나 확고한 목표로 잡습니다.
’넬의 아들 아브넬‘이라고 나오는데, 넬은 사울의 큰 아버지예요. 사울과 아브넬은 사촌이 됩니다. 그런 인맥으로 사울 왕의 군대장관이 된 인물입니다.
2장에 보면 사울이 죽고 힘의 공백이 생기니까 강력한 파워를 행사합니다. 사울의 아들 중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웁니다. 여러분 킹 메이커라는 게 그 파워가 대단합니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고 '온 이스라엘은 들으라! 오늘 새 왕이 탄생하셨다!' 그런데 이스보셋이 왕이지만 실제 모든 권력은 아브넬에게 집중됩니다. 아브넬은 매우 권력지향적입니다. 성공을 목표로 사는 사람이예요. 아브넬은 가만히 보니까 모든 권력이 사실상 자기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요.
그런데 거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아브넬은 그래서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하나 벌입니다.
▲7절 보면 아브넬은 사울왕의 후궁 리스바를 데려다가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왜 그런 일을 벌일까요? 이것은 자기 권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궁중 전체에 드러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공을 목표로 하면 사람은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질문 하나 합니다. 아브넬이 실수로 그랬을까요? 군대장관 정도 되어서 그 여자가 사울왕의 후궁인 줄 모르고 건드렸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매우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우리가 승진하고 지금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것은 그것 자체가 탐욕이 아닙니다. 그 자리까지 가려면 정상적인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밟아가면 됩니다. 교만과 탐욕은 그 자리까지 가는 길이 없는데, 내가 성공해야 하니까 길 아닌 곳으로 자기가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잠언에는 그걸 ’굽은 길‘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거짓’이라는 방법이 등장합니다. 이걸 편법이라고 합니다.
아브넬은 왜 이런 월권을 저질렀을까요? 군대장관 쯤 되면 그 당시 여자들 맘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인데 다른 여자들을 다 놔두고 왜 하필 사울왕의 후궁인가요?
그것은 제가 생각할 때 ‘자기 권력을 시위하는 것이다’ 이렇게 밖에 볼 수 없죠. 내가 어느 정도 위치인가? ‘왕은 이스보셋이지만, 나는 사울왕의 후궁을 데리고 잘만큼 그정도 위치다 알겠느냐?’ 자기가 왕같은 실세라는 거죠!
이걸 궁중 전체에 알리고, 이스보셋 앞에도 알리는 것입니다. 난 사울 왕과 동급이다! (당시 문화에 왕이 죽으면, 그의 첩을 데려가는 자는, 바로 다음 왕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도 백주 대낮에 다윗 왕의 첩들을 데리고 자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었지요. ‘내가 다음 왕이다!’는 메시지였죠)
스스로 성공을 목표로 놓고, 그 때를 자기 스스로 단축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죠. 이러면 벌써 아브넬은 하나님을 실제로 믿지 않습니다. 탐욕으로 교만해서 거짓 방법 쓰기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고 할 수 없죠. ‘이스보셋! 사실상 내가 너보다 높다 알겠냐?’ 이겁니다. 이러면 공동체가 벌써 깨집니다.
왕 이스보셋이 너무 기가 막혀서 ‘아브넬,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한마디 하니까 아브넬이 도리어 화를 벌컥 냅니다. “당신이 지금 누구 덕분에 임금자리에 앉아있는데, 내가 누군 줄 알고 함부로 간섭이야? 지금이라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 나라는 저 다윗 것이 되고 당신은 찬밥이야, 알아?”
▲11절을 보면, ‘이스보셋이 더 이상 한 마디도 말을 못했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아브넬은 또 하나의 계획을 세웁니다. 20절 보세요. 아브넬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윗을 찾아갑니다.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이 다윗을 찾아간다는 것은 이스보셋에게는 배신이 됩니다.
배신은 신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넬은 다윗을 찾아가 ‘우리 사울 진영 전체가 다윗 왕을 따르겠습니다!’ 아브넬은 멋진 말을 많이 합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왕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십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할 때 아브넬은 믿음으로 하지 않아요.
‘내가 이 시점에서 누구에게 가면 가장 유리한가? 내가 이스보셋을 버리고 다윗에게 가면 나는 얼마나 권력을 얻겠는가?’
다윗이 아브넬을 환대해주고 잔치를 해주었기 때문에 아브넬은 ‘아, 일이 정말 잘됐다’ 생각하고 돌아갑니다.
그는 내가 정말 지혜롭게 판단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넬은 돌아가는 길에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을 만나, 요압의 칼을 맞고 길에서 죽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집은 쑥대밭이 되어버립니다. 사울의 집은 아브넬의 죽음과 함께 극도로 쇠약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성공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은 그 길이 가장 빠는 길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계략을 쓰고, 신의를 저버리고, 유리, 불리, 이해관계를 따져 움직입니다.
아마 세상에서는 이게 일반상식일 것입니다. 확실히 권력을 잡겠다고 사울의 후궁을 취하면 내 위치가 확고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이제는 다윗을 찾아가면 거기서 내 위치는 더 확실해질 것이라고, 꿈에 부풀어있던 아브넬은 허를 찔립니다. 요압의 칼에 그 인생이 끝나버립니다.
사울의 집은 그것으로 힘없이 무너집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빠른 길, 지름길을 ‘넓은 길’이라고 하셔요. 그 길은 넓어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멸망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잠28:18
아브넬의 파워는 강한 것 같으나 점점 약해집니다. 그 세력은 하나님이 약하게 하십니다.
순종을 목표로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가면 느린 것 같지만 점점 강해집니다.
뭘 목표로 한다구요? 순종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은 내 유익과 내 이해관계를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삶의 원칙이 있고 그것을 따라갑니다.
저는 다윗이 이 원칙을 따라 일관되게 살았다고 봅니다. 그게 뭔가요? 정직과 진실, 용납과 포용입니다. ‘어떻게하든지 정직하기’ 이것을 목표합니다. 내 자신에게 엄격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포용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줍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랬어요.
이 길은 성공이 목표가 아니라 순종을 목표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리고 더딥니다. 다윗은 이 길을 갑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 길을 한참 가다보면 어느 새 사람들이 여기저기 붙어요. 그런데 이 길을 많은 사람들이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부하 중에 요압은 다윗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22절부터 보면 요압이 등장합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을 만나러 왔을 때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넬이 다녀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을 찾아가 항의합니다. 왜 아브넬을 살려보내셨는가? 그 놈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수였어요. 그래서 요압이 아브넬을 만나자고 하고는 갑자기 칼로 찔러 살해합니다. 보복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놀라운 것은 말이죠. 영적으로 감동을 주는 리더 바로 밑에 있어도 그 모습을 전혀 배우지도 않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압은 다윗 밑에서 다윗을 배우지 않습니다. 다윗이 원수 사울에게 어떻게 하는가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다윗을 전혀 배우지 않습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보자마자, 뭔가 국가적으로 중대한 비밀을 얘기하려는 듯이 데리고 가서 아브넬을 찌릅니다.
▲28절을 봅니다. 다윗은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다는 이 소식을 듣고 무엇을 하는가? 여기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어요. 바로 이 부분이 다윗의 포용입니다. 이 부분을 하나님이 주목하십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 소식에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28~29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은 아브넬이나 요압이나 “둘 다 똑 같구나!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압을 가만 놔 두지 않으시리로다!” “요압의 집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아마 다윗은 너무 허탈했을 것입니다. ‘내 부하 요압! 그 친구 아 정말! 이건 아니야! 그는 하나도 변화되지 않는구나!’
여러분, 파워게임에 가치관이 한번 무장된 사람은, 정말 변하기 힘듭니다. 내가 권력지향적인 사람인가?
폴 투르니에는 <강자와 약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강자의 증상은 뭐냐? 어떻게든 내가 그 사람을 지배하리라,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그를 잡아야 한다! 이게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기 내면속에 장착되는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 곁에서 전혀 다윗을 배우지 않아요. 그 사람의 세계관 그 사람의 인생관입니다.
다윗과 요압은 왕이고 신하지만, 둘은 자기 인생에 무엇을 힘으로 삼는지 그게 전혀 다릅니다.
요압은 자기 꾀와 자기 방식을 힘으로 삼고,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아요. 요압의 방식은 빠르고 신속합니다. 반면 다윗의 방법은 매우 더딥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아브넬이 죽은 소식을 듣고 다윗이 뭘 하는가 잘 보십시오.
▲31절부터 35절까지를 읽어보십시오. 다윗이 뭘 합니까? 아브넬을 위하여 극도로 잘 갖춰진 장례예식을 거행합니다. 다윗 왕이 아브넬의 상여를 따라가면서 소리를 높여 웁니다. 그리고 애가를 지어 부릅니다.
33절, 다윗왕이 아브넬을 슬퍼하면서 우는 모습에 백성들이 다 따라서 울었다, 애도했다 그랬어요.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36절을 보면 온 이스라엘이, 이것은 열두지파 전체를 가리킵니다. 온 이스라엘이 다윗 왕이 이일, 아브넬이 죽은 것을 진심으로 슬퍼하면서, 애도하면서, 극진한 예우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했다 그랬어요.
무슨 말입니까? 다윗이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유다 지파 외에 아직 다윗을 자기 왕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열한 지파의 마음을 얻어버렸다는 뜻입니다.
혹시 사울이 죽고 요나단이 죽은 일이, 혹시라도 다윗의 사주에 의한 일이 아닐까, 사울이 죽었을 때 다윗이 슬픈 애가를 지어 노래한 것도 악어의 눈물이 아닐까, 쇼를 하는 것이 아닐까! 의구심을 갖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더우기 이번 아브넬이 죽은 것은 다윗의 최측근 군대장관 요압의 칼에 죽은 것인데, 이것은 누가 봐도 다윗의 오더를 받지 않고 순전히 요압 자신의 단독범행이었다 이렇게 보아지지 않는 사건입니다. 이 혐의를 무엇으로 벗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이혐의를 벗고자 아브넬의 장례를 치른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진정으로 요압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다고 본 것입니다.
아브넬의 죽음이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 진정성 있는 장례 예식을 보고 백성들은 아 아브넬의 죽음에 다윗 왕이 개입하지 않았구나, 이걸 깨달은 거예요.
이스라엘 왕권을 다윗에게 넘기기 위하여 협상을 벌이고 돌아가던 아브넬이 피살된 사건은 다윗의 도덕성에 큰 흠집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먼저 상대방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능히 오해하고 분개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잘못하면 모든 협상이 무산될 뿐 아니라 두 나라 사이에 다시 한번 내전이 일어날 소지가 있는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와 같은 위기를 특유의 인간미와 인격적 진실성으로 잘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전 이스라엘을 통합하는 계기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위기를 만날 때마다 또 다른 기회가 됨을 믿으십시오!
진실만이 승리합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다윗은 모함받을 수도 있고 크게 오해받을 수도 있는 상황 속에서 평소에도 늘 그랬지만 특유의 진실과 인격적 성실성으로 행동했습니다. 결코 꾸며낸 위선적인 행동이 아니었기에 다윗의 진심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감동을 받았습니다.
힘든 상황일수록 의연하십시오. 진실하십시오. 진실이 이깁니다! 아멘.
▲38-39절을 봅니다. 다윗은 지금 내가 아직 힘이 약하다고 고백합니다. 자기가 왕이지만 요압같은 사람을 다루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파워게임에 무장된 내 부하를 통제를 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살인과 음모와 권력 쟁탈에 지쳤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기름부음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렵다!’
다윗은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순종을 목표로 합니다. 자기 유익을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정직한 길을 갑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대로 나와 껄끄러운 사람까지도 포용합니다.
이 길은 매우 더딥니다. 다윗은 7년반동안 한 지파의 왕으로 있습니다. 언제 빨리 열두지파 전체의 왕이 될까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마음을 넓히면서 갑니다. 그런데 이 중심을 하나님이 보십니다. 그리고 다윗을 강하게 하십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는 권력자가 됩니다.
여러분, 성공을 목표로 하지말고 순종을 목표로 하여 하나님이 강하게 해주시는 인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