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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순종합네다> P7

LNCK 2023. 4. 13. 11:22

[Ep7.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내래죽어도순종합네다 
◈도서 <내래 죽어도 순종합네다> P7        <지난 글 보기>

◑2부 6장. 우리는 부자야

통독 학교 학생들에게 부유함과 가난함의 기준은 오로지 돈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부자들이다. 
진정한 부유함과 가난함의 기준은, 하나님과의 거리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당연히 계속 도움을 받아야 하고, 늘 섬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 때문에, 끊임없이 섬김을 받고 도움을 받아도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바꿔놓아야 했다. 
잘못된 습관과 버릇들은, 훈련과 잔소리를 꾸준히 해 나가면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과 생각은,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오랜 사역을 통해 배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그들을,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눠주는 사람들로 바꿀 수 있을까?' 

'인간을 정말로 부하게 하고 가난하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라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큰 충격과 큰 사건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고민하다가.. 가난한 나라로 전도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태껏 많이 가진 사람들, 많이 배우고 능력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만 받았지만 
이제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나누어 주는 훈련을 시키고 싶었다. 

비록 지금 당장 가진 것이 작더라도 
그것을 나눌 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지... 
그래서 자기들이 왜 부자 인지를 가르치고 싶었다. 

처음에는 중국으로 데려가려 했다. 
선배들이 중국 공안들에게 쫓기고 체포되면서 통독했던 현장, 
북한 보위부에 납치되어 가고, 순교했던 현장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중국의 가난한 지역으로 찾아가서, 그곳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 생각을 접었다. 
탈북자 집단이 중국에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면 
괜한 정치적 문제가 생길 것 같았고, 또 안전문제도 불안했다. 

고민 끝에 필리핀에 가기로 결정했다. 
적합한 나라였다. 탈북자들에게 특별히 위험하지 않은 데다
한국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였다. 

문제는 그곳으로 전도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현지에서 협력하는 교회나 선교단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작정 필리핀으로 떠났다. 
필리핀에서 선교사역을 하시는 김해석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필리핀 마닐라 지역의 한인교회를 찾아가서 
탈북민 통독반의 전도여행의 협조를 부탁했다. 

'탈북청소년들이 은혜를 받고 도움을 받으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통독하면서 받았던 은혜를 나누고 섬기려고 합니다. 
집회와 일정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자비로 부담하겠습니다. 
집회 때 나오는 헌금도 가져가지 않겠습니다.' 

기대했던 두 교회는 허락하지 않았다. 
우연히 마닐라 지구촌교회 고창업 목사님을 만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우리의 방문을 허락해 주셨다. 

한국으로 돌아와 통독반 학생들에게 광고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요. 

그러나 이번 집회는, 우리가 은혜를 받으러 가는 것도, 
물질적인 도움을 받으러 가는 것도 아니에요. 그 반대예요. 
우리가 그들에게 은혜를 나누어 주고, 도움을 주고, 돈도 주려고 가는 겁니다.'

'우리가?' 
학생들은 입이 벌어졌고 눈빛들이 멍해졌다. 
그래도 가 본 적 없던 외국으로 간다고 하니 금방 좋아했다. 

민혜가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학생들 사이로 쏘다니면서 잔소리를 했다. 
'거기가면 화장실에 휴지가 없어, 휴지를 꼭 챙겨야 해! 
그리고 거기 엄청 더운 나라야. 여기는 겨울이지만 거기는 지금 여름이야. 
여름 옷을 가지고 가야 해!' 

남학생들의 눈이 커졌다. '저게 어떻게 저렇게 잘 알지?' 하는 눈빛 들이었다. 

민혜가 눈을 부릅뜨고 자랑하듯이 말했다. 
'나 가 봤다고.. 그러니까 내 말 들어. 그러면 나쁘지 않아!' 
남학생들은 찍 소리도 못 하고 그대로 했다. 

민혜 말이 옳았다. 
인천공항을 출발할 때는 11월에 초겨울 날씨여서 다들 겨울옷을 입고 출발했다. 

하지만 현지에 도착하니 30도를 웃도는 숨막히는 무더운 여름 날씨였다.
갑자기 바뀐 계절에 다들 헉헉거리고, 에어컨 앞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마중나온 고창업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여러분 좋은 때에 오셨습니다. 지금이 1년 중 가장 시원한 때입니다.' 

학생들의 눈이 커졌다. '이게 가장 시원하다고?' 

다들 나른하고 피곤했지만, 집회하는 시간을 빼고는 
계속 말씀을 암송하게 하고, 기도도 매일 3시간 이상씩 진행했다. 

통독반 학생들은 방언으로 뜨겁게 기도했다. 
외국에 나왔기에 말썽꾸러기들도 딱히 도망갈 곳이 없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열심히 기도했다. 

집회 전 찬양은, 마닐라 교회 찬양팀과 함께 호흡을 맞추기로 하고 연습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통독학교에서 자기들끼리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다가
처음으로 외국 교회에 나와서인지.. 다들 기가 죽어 버벅거렸다. 

계속 반복해도 호흡이 잘 맞춰지지 않으니 
여전도사님이 찬양팀을 모아 놓고 진지하게 물었다. 
'너희들 오늘 왜 이러니? 그냥 교회에서 하던 대로 하면 돼!' 

예지가 울면서 말했다. '전도사님, 저는 원래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제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 해요. 
외국인들 앞에 선다는 게 정말 두려워요.' 

여전도사가 달랬다. '아니야 예지야, 괜찮아 기죽을 필요 없어! 
너희들이 여태까지 얼마나 잘 해 왔는지 아니? 
여기는 그냥 외국에 있는 교회일 뿐이야 
한국에서 우리가 예배 드릴 때 하고 똑같이 생각해도 돼!' 
찬양팀은 성령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고, 다시 찬양 준비를 시작했다. 

집회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현지 교민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 

현지 교민들은 멀리서도 달려와 강의시간에 잘 맞춰 참석했고 
찬양 시간에 탈북 학생들과 함께 손을 들고 뛰며 찬양했다. 

탈북민 강사들의 간증과 설교 시간에는 모두 말씀에 집중했고 
이어지는 기도 시간에는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여태껏 북한에 대해 무관심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회개했다. 

고창업 목사님이 말했다. 
'선교사님, 우리 지구촌교회 중직자들이 결의하기를 
이제 우리도 매일 3시간씩 기도 시간을 가지기로 결정했습니다.' 

주일이 오자 마닐라 지역 여러 한인교회 들에서 
탈북민 강사(선생)들을 데려가 
자기들의 교회에서도 간증과 강의를 하게 했다. 

예지도 첫날에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워 울었지만 
나중에는 기쁨으로 찬양했다. 
기죽어 있던 마음은 어느새 활발하고 쾌활하게 바뀌어 있었다. 

통독반 학생들은 서울의 작은 지하실에서 누리던 은혜를 
마닐라 교회 사람들과 함께 누리면서 
자기들이 누렸던 은혜가, 평범한 은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가 찬양을 하고 춤을 추고 간증하니, 사람들이 이렇게 기뻐하고 좋아하는구나' 

지우는 태도와 외모가 한국청년 같았고 머리도 비상했다. 
이 때문에 성경도 지식적으로만 이해하려고 애를 많이 쓰다가 
필리핀에 와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여태까지 지우는 자기가 탈북자라는 사실을 매우 싫어했다. 
'왜 하필이면 북한이냐? 차라리 아프리카에서 태어나지!' 
지우는, 항상 자신이 탈북자라는 것을 숨기고 다녔고, 
모이기만 하면 사고나 치고 거친 행동만 하는 탈북 청년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힘들어했다. 

하지만 필리핀 집회를 통해서 이것이 풀렸다. 
'우리는 저주받은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이구나!' 
그때부터 지우는 이 땅을 떠나, 미국 시민권을 가지려고 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 군사로 선택하셨고 
북한을 복음화 하실 날이 올 텐데 
이런 훈련을 받고 어려운 일을 미리 겪은 우리가, 얼마나 그 일에 적합한가. 
지금 내가 겪는 일들이 정말 복된 일이구나 
그때 북한에서 겪었던 일들은, 어차피 겪어야만 했던 일들이구나!' 

요한이는 지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가난한 이유는, 돈 벌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길을 막아놓았기 때문이야.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라고 말이야! 
나는 그것을 여러 번 느꼈어!' 

지우도 동의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탈북청소년들의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느라 많은 비용이 들었다. 
비행기 티켓에서부터, 이곳에서 먹고 자고 이동하는 크고 작은 모든 비용을 
우리 선교회에서 부담하다 보니,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전도사들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한꺼번에 다 써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서는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정말 많은 돈을 쓰면서 왔기에, 꼭 목표를 이루고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한 발 더 나가기로 했다. 

기도 시간에 학생들에게 광고했다. 
'필리핀의 가난한 지역 들에는, 아직 교회가 없는 곳들이 많아요. 
그런 곳에서는 한국 돈으로 3~4백만 원이면 교회 하나를 지을 수 있어요. 
이번에 온 김에 한 사람이 교회 하나씩 개척 했으면 좋겠어요! 
다들 기도해 보세요!'

'이건 또 무슨 말이야?' 
학생들은 모두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집회 중간중간에 이곳저곳을 참관했다. 
김해석 선교사님이 사역하고 있는 필리핀 감옥에도 찾아갔다. 

여자 수감자들이 갇혀 있는 감방 복도 한 구석에 
천으로 대충 둘러막아 경계를 정한 교회가 있었다. 

간수들도 한국 학생들이 왔다고, 여자 수감자들을 방에서 나오게 하고 
빨래를 너는 넓은 로비 쪽에서 집회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학생들은 여자 수감자들과 어울리면서, 함께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불렀다. 
탈북 학생들은 상처가 많은 이들이기에, 낯선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데,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필리핀 감옥에 와서는 그렇지 않았다. 
감옥에 있는 교인들과 쉽게 어울려 지냈다. 

자기들끼리 안 통하는 영어를 몇 마디씩 주고 받으며 깔깔거리고 웃고 장난쳤다. 
위층에서 웃고 떠들고 찬양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아래층 남자 감방 들에서 난리가 났다. 

물건들을 쌓아놓고 올라가, 천장에 뚫려 있는 공기 통풍구를 통해서 거울을 밀어넣고는
거울을 이리저리 돌려 비춰보면서 아래 층에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간수들도 말리지 않았다. 
발아래 이쪽 저쪽 구멍들에서, 손바닥만한 거울들이 올라와 반짝거리자 
여학생들이 놀라 기겁을 하다가 
사연을 알고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래쪽 남자 수감자들은 그때마다 좋다고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할렐루야' 하면 '아멘!' 하고 화답해 주었다. 

이곳에 들어와 있는 수인들 대부분은생계형 수감자들이었다.
재판을 받으면 기껏해야 서너 달 정도의 형을 받을 사람들이었지만 
재판을 대기하는데 몇 년씩 걸린다고 했다. 

미결수들은 넘치고 판사들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했다. 
거기에다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은 자꾸만 뒤로 밀려나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감옥생활을 길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학생들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일처럼 마음 아파 했다. 
설경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북한에 살 때, 마음 아파해 본 적이 없었어요. 
불쌍한 사람을 봐도 동정이 안 가고 
잘 되는 사람 보면 질투하는 마음만 생겨났어요. 

북한에서는 내가 먹고 살기도 급한데, 남을 위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마음도 없었어요. 그런데 여기 오니, 가는 곳마다 마음이 아프네요. 
그리고 찬양을 하는데 막 눈물이 나와요. 

내가 가진 것을 다 주고 싶고, 이렇게 힘들게 사는 모습들 때문에 
막 속상하고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내 안에서 이런 마음을 느끼기는 처음이에요.' 

다음 날은 산속에 있는 가난한 동네를 찾아갔다. 
동네는 가파른 산비탈에 있었다. 

바위에 다닥다닥 들러붙은 조가비들 처럼 
오두막들이 서로의 어깨를 맞닿은 채로 비탈면에 힘겹게 매달려있었다. 

동네 한편에 벽도 없이 양철지붕만 대충 씌어 놓아 
비를 가릴 수 있게 해 놓은 뼈만 앙상한 오두막이 있었다. 
그것이 교회라고 했다. 다들 깜짝 놀랐다.  *벽이 있으면 더워서 일부러 안 만들 수도 있음

그것도 천주교에서 옛날에 만들어 놓은 곳이라서 
개신교회가 와서 사용하려면, 허가를 받고 사용료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통독반 학생들은 개의치 않고 찬양을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왔다고.. 동네 사람들이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무리지어 몰려나왔다. 
학생들이 서툰 영어로 연극도 하고 
현지교회 전도사님이 복음도 전하면서 한나절을 함께 지냈다. 

남학생들은 그곳 남자 아이들과 쉽게 어울렸다. 
마치 그 동네에서 살던 사람들처럼, 동네 애들과 함께 장난도 치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광철이는 말도 통하지 않는 그 애들과, 어느새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앉아 
사진도 찍고, 음료수도 나누어 마시고 있었다. 

돌아갈 때는 버스 안에서 아예 정식으로 선포해 버렸다. 
'나 통독 학교 끝나고, 여기 선교사로 올 겁니다. 
여기에 교회 하나 지어 놓고, 이 사람들과 함께 살 것입니다!' 

다들 손뼉을 치고 와~ 와~ 하며 웃으면서 좋아했다. 
성근 선생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애들을 보니까 너무 애처롭습니다. 
이곳은 땅값도 싸고, 집 짓는 것도 얼마 들지도 않는데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여기에다 집을 지어 놓고 
이곳 애들과 함께 지내면서 복음도 전해 주고, 성경도 가르치고 싶습니다. 
여기 오니까 이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필리핀에는 가난한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장마당에 가도 우리를 졸졸 따라 다녔고 
이곳 저곳을 다닐 때에는 버스를 좇아오면서 고함을 질렀다. 
'머니, 머니, 기브 미 머니'

나는 통독반 학생들을 지켜보았다. 
이 순간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지갑들을 열어 돈을 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자, 버스 창문으로 삐라 던지듯이 돈이 나가기 시작했다. 

지폐 액수도 작은 것이 아니었다. 
필리핀 사람들 노동자 한 달 인건비가 4천 페소 가량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100페소 짜리 지폐를 나눠주고 있었다. 
평소에 돈이라면 그렇게 벌벌 떨던 탈북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챙겨 온 돈들이 없으니 
여행하면서 먹으려고 챙겨왔던 과일들과 음료들도 
박스 채로 창문으로 내 보냈다. 

옆에서 어른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몽땅 내던질 것 같은 기세들이었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시장에서 지우는 담배를 피우다가 전도사님에게 들켰다. 
'너 담배 피우는 거야?' 전도사님이 꾸짖었다. 

그러는 사이 장마당에 있던 아이들이 
전도사님 앞에 우르르 몰려들어 농성하듯이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기브 미 머니, 기브 미 머니'

지우가 꾸짖듯이 쳐다보는 전도사님에게 다가와 
입을 쓱 닦더니 신이 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전도사님, 저기 저놈은 돈 주지 마요. 그리고 얘를 줘요. 
그리고 이쪽에 있는 놈도 돈을 주지 말고, 얘를 줘요.' 

지우는 돈을 주면 안 되는 녀석들을 꽤 많이 가리켰다. 
'왜 그러니?' 

전도사가 의아해하자 지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이미 줬거든요. 그러니까 애들에게 골고루 주시라고!' 

돈을 뿌리듯이 나누어주는 외국인들을 만나자 
필리핀 애들은 한 푼이라도 더 얻으려고 열심히 사람들 사이로 뛰어다녔다. 

그 가운데 시장 한 켠에 넘어져있는 
굴뚝 속에 가만히 누워 있는 한 남자 아이가 보였다. 

성가시게 매달리는 다른 아이들 때문에 그 아이를 보지 못했지만 
유정이의 눈은 그 아이에게 꽂혔다. 

흙탕물에 담갔다가 건져낸 것 같은 옷과 얼굴을 한 남자 아이가 
몸을 작게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유정이는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속이 울렁거리며 놀라울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그 아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유정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였고, 기력이 없어 일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유정이의 손이 닿자, 아이가 눈을 뜨고 유정이를 올려다 보았다. 
꿈에서나 봤을 아름다운 천사가, 그 남자아이의 새까만 눈동자에 비췄다. 

놀란 것 같은 눈이 멍하니 유정이를 올려다 보았다. 
아이에게서 나는 악취와, 유정이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가 서로 뒤엉켰다. 

유정이는 뒤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몸으로 가리고 
500페소 짜리 지폐를 그 아이의 손에 꼭 쥐어 주었다. 

흙처럼 새까만 아이의 얼굴이, 꿈을 꾸듯이 밝아졌다. 
유정이는 아이에게서 풍겨나는 악취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유정이와 아이의 눈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운 기쁨이 튕겨 나와 춤추고 있었다. 

통독반 학생들은, 어릴 적에 이 아이들과 같은 생활을 해 보았다. 
그 때문에 지금 이 배고픈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어떤 방식으로 돈을 주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유정이는, 한 눈에 그 아이가 먹지 못해 기진맥진해서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애들이 보는 앞에서 돈을 주면 
우리가 떠난 후, 힘센 애들에게 모두 빼앗긴다는 것도 알기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몰래 쥐어주었다. 

그 아이는 깨어나면 정말 먹을 것이 필요한 아이였다. 
통독반 학생들은, 필리핀 아이들을 단순히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있었다. 

필리핀 마지막 일정으로 팍상한 폭포에서 래프팅을 했다. 
버들 잎처럼 가늘고 긴 보트에 두 사람이 타고 
두명의 필리핀 청년들이 강 위쪽을 향해 배를 밀고 올라가다가 
바위들이 나타나면 아예 배와 사람을 함께 들고 올라갔다. 

유명한 곳인지 우리 팀 말고도 외국인들이 많았다. 
다른 외국인들은 노예 부리듯이, 보트 위에 거만하게 앉아 있었지만 
통독반 학생들은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 못 했다. 

설경이는 아예 내려서 그들과 함께 보트를 밀려고 나섰다가 제지 당했다. 
래프팅이 끝나고 많은 사람이 팁을 주지 않고 
주어도 100페소 정도씩 주었지만 
통독반 학생들은 500페소를 팁으로 주면서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서 쩔쩔맸다. 

 

남학생들이 투덜거렸다. 
'아니, 이런.. 처음부터 이렇게 사람을 노예 부리듯이 하는 건 줄 알았으면 
타지 않는 건데, 괜히 탔어. 필리핀 청년들이 너무 힘들어 하니까 마음이 아프고 
막 미안해서 하나도 재미가 없었어!' 

래프팅 Rafting이 끝나고 설경이도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돈을 주고 서비스 받으면 한없이 당당했는데 
이제는 너무 미안해서 경치고 뭐고 구경 할 수가 없었어. 그래도 기분은 좋아! 
살면서 처음으로 팁이라는 걸 줘봤어.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어. 
미안해서 더 주고 싶었는데 돈이 그게 다 여서 아쉬워!' 

한국으로 돌아와 학생들은 필리핀 다녀 온 소감들을 나누었다. 
에스더가 말했다. 
'신발도 없어서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을 보니까 도와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돈을 주었는데, 그때 그 순간 너무 기뻤어요. 
나한테도 사랑이 있구나..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힘이 있구나..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이 있구나..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면서 웃는 것을 보니까 
제 마음이 너무 행복했어요. 
이 마음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요한이는 이렇게 고백했다. 
'애들을 보니까 북한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저도 15살때 집을 뛰쳐나와 저렇게 살았습니다. 

이전에도 동점심 같은 것은 느껴 보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네요. 
그냥 그 아이들을 보면 뭉클해지면서, 
얘네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고 
제가 겪어 봤던 그 아픔들이 다시 마음 속에서 살아 올라오더라고요. 

이번에는 도움을 받고 온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눠 주고 왔는데 
돌아오는 길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한 말씀이  행20:35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정이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북한에서 떠돌아다니면서 배고플 때 
돈이나 어떤 큰 것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사탕 한 개, 빵 하나 라도 건네 주었을 때 
그 기쁨, 그 행복감을 저는 알아요. 

제가 주면서 그 애가 느낄 기쁨을 생각하니 너무 행복했어요. 
그 아이의 눈과 제 눈이 마주친 순간 
저도 그 아이처럼 해맑게 웃을 수 있었어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야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 애가 정말 사랑스러웠어요. 
그 아이에게서 나는 냄새가 전혀 싫지 않았고 
오히려 씻겨 주고 싶고, 옷도 입혀 주고 싶었어요. 
옛날에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새로운 마음이 제 안에 생겨났어요. 

이 선한 마음은,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때 
말할 수 없는 행복을 제 안에 가득 채워 놓더라구요. 
그리고 더욱 기분이 좋은 건, 이 선한 마음이 
제 안에서 점점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커진다는 거예요.' 

설경이는 다시 추억해도 기분이 좋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제 모습에 막 놀랐어요. 제가 변했어요. 
제 자신이 장해 보여, 스스로에게 칭찬을 했어요. 

필리핀 가기 전에는 항상 저는 가난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늘 도움만 받고 싶고,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고 나니까, 이제는 저도 다른 사람을 섬겨야 겠다는 마음이 생기네요. 
받았을 때 보다 주었을 때 마음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통독반 학생들은 모두가 다 비슷한 고백을 했다. 
그동안 그들은 남에게 아무 대가없이 무언가를 공짜로 줄 수 없었다. 

준다는 것이 쉽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그런데 필리핀에 가서, 어느새 달라진 자신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들 스스로가 정말 놀라웠다고 고백했다. 
   
나는 기뻤다. 
줄 때 기쁨을 누리는 것! 누구나 가능할까? 

아닌 것 같았다. 재물이나 돈을 신처럼 의지하는 이들은 절대로 주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준다고 해도, 그렇게 큰 기쁨이나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 
오히려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나는 자주 보았다. 

그러나 통독반 학생들은, 줄 때 기쁨이 느끼고, 그 만족감을 맛보고 있었다. 
부자들은 아무리 많이 나누어 주어도 
통독반 학생들이 누렸던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통독반 학생들이 누렸던 그 기쁨은 
그들 속에 거하신 하나님과, 그들이 함께 누린 기쁨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힘들게 쌓아야 행복을 느끼지만 
이제 우리는 나누어 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과 우리의 다른 점이다. 
하나님이 어느새 통독반 학생들 속에서 행하신 신비한 일이었다. 

필리핀에 다녀온 후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렇게 가르쳤다. 
'밖에 나가 보세요. 여러분과 똑같은 탈북자들 중에 
우리보다도 이 나라에 온 지 훨씬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교회들을 돌면서 도와달라고 구걸하듯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니에요. 이제는 신분이 달라졌어요. 
받아서 풍족해지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제부터는 주세요. 
어려운 사람들에게 손을 펼쳐서 주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밖에서 열심히 돈을 버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여러분이 더 부유해진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거예요...' 

나누어 주었더니, 괴롭고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즐거웠고 더 풍요로워졌다! 

이것은 통독반 학생들에게 열린 은혜의 길이었다. 
이것은 이들이 암흑과 가난속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하늘이 열어준 길이었다. 

이것을 가르치려고 나는 이들을 필리핀으로 데려갔고 
이들은 그것을 어렴풋이 터득했다. 

이후부터 나는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제부터는 십일조를 하세요. 그리고 감사 헌금도 하세요!'

학생들은 십일조를 하기 시작했고, 감사헌금도 드리기 시작했다. 
십일조를 하면서 이렇게 고백하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목사님 참 신기해요. 십일조를 하지 않을 때는 맨날 돈이 모자라더니 
십일조를 하고 감사헌금을 했더니 오히려 돈이 더 남아요.' 

유정이는 한국의 온 후 방문했던 필리핀 산 속에 교회를 세우라고 
300만 원을 헌금했다.

북한에 있는 동생을 데려오겠다고 오랫동안 꼬깃꼬깃 모으던 돈을 깨뜨려 
하나님께 드렸다. 동생은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필리핀 아이들의 모습이, 어릴 적 북한에서 굶주린 배를 채워 주지 못해 
구걸하며 다니던 자신을 보게 했고,
그들의 모습이 유정이의 마음에 아픔으로 남았다. 

다시 유정이는 적금을 붓고 있다. 
필리핀에 더 많은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2부 7장. 사랑은 낭비 

강원도로 소풍 갔다 오는 길에, 봉고차를 운전하던 성근 선생이 
차 안에 있는 학생들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너희들 그거 아니? 우리가 지금 남한 사람들하고 통한다고 생각하지?"  

학생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가 뭐 외국인가요?"  

성근 선생이 웃었다. "사실 우린 말이 전혀 안 통한다."
"왜요?" 다들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우리는 기분이 좋으면 웃고, 나쁘면 찡그리고 화를 내잖아 
숨기지 안 잖아? 
그래서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하고 막 말을 해버리잖아 

그런데 남한 사람들은 절대로 그러지 않아. 
기분이 나빠도 웃고, 좋아도 웃거든..."  

다들 '정말 그런가?' 하는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남한 사람들은 말을 직설적으로 안 해. 뱅뱅 돌려서 해!"

조수석에 인철이가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창유리를 내리고 바람을 맞으면서 가고 있었다. 

성근 선생이 그러는 인철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우리는 바람 맞기 싫으면 '창문 닫아!' 이렇게 말하잖아? 
근데 이 사람들은 안 그런다. 어떻게 말하는지 알아? 
'바람을 좋아하시나봐요?' 이렇게 말해! 

나는 처음에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어. 
'아니 그냥 좋아할 때도 있고, 안 좋아할 때도 있다고. 
뭐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습니다'고 말이야 

 

나는 '정말 바람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것으로 들었거든.."  

학생들이 웃고 떠들면서 말했다. 
'아 그렇구나, 정말 다르구나' 

'최대한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하느라고 그러는 걸 거야. 그렇게 봐주자' 
성근 선생은 졸음운전을 피하려고 일부러 말을 많이 했다. 

안 그러면 녀석들이 다 죽은 것처럼 자 버려 
네 시간 이상을 차 안에 가득한 졸음과 사투를 벌이면서 운전해야 했다. 

"내가 몇 년 전에 어떤 교회에 가서 이렇게 말했거든? 
'나 사역자로 좀 받아주세요!'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후에 봅시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정말 '후에 다시 보자'는 말로 알아듣고 며칠 지나서 또 갔어.  
그랬더니 '금식 삼일 해보세요!' 그러더라고 

그래서 정말 삼일 금식을 하고 전화를 했더니 
'왜 자꾸 전화해요?'  

해서 '다시 보자고 했잖아요. 삼일 금식하라고 했잖아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얘 그래요. 성공하세요.' 하더니 전화를 끊더라고. 
받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금식까지 시키냐고? 
나 참 원망 많이 했어!" 

학생들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요? 기분 나빠! 
야 정말 너무 뱅뱅돌린다. 그냥 확 제대로 말을 해주지!' 

서울까지 거의 와서 성근 선생은 대화를 정리했다. 

"우리는 언어가 같기에 통한다고 생각했어. 
사실 우리는 이곳 사람들과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어. 
우리가 이곳 사람들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이곳 사람들도 우리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아. 

맞아, 우리는 서로 정말 모르면서도 
말이 조금 통하는 것 때문에 서로 안다는 착각속에 살아왔어."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사역하면서 경험했다. 

탈북 학생들은 아무리 돈이 없어도, 제일 먼저 휴대폰부터 마련했다. 
북한과 중국에서 가장 부럽게 바라보던 물건이, 휴대폰 이었다고 했다. 

학생들은 밤12시에 일과가 끝나면 
새벽 3 시, 심하면 4 시까지 휴대폰을 들여다 보았다. 

성근 선생과 순교 선생이 통제하면 
이불 속에 들어가서 보았다. 
그러니 통독 시간에는 졸 수밖에 없었다. 

어떤 학생들은 통독 시간과 기도 시간에도 휴대폰을 들여다 보았다. 
아무리 설명하고 꾸짖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한국의 청소년들보다 더 빨리, 더 깊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휴대폰에 중독되어 가고 있었다. 

한국 애들은 하나만 있으면 만족했지만 
이들은 한 두개는 기본이고, 많게는 다섯 개까지 가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한 달에 휴대폰을 20만원 안팎으로 냈고 
심한 경우에는 50만원까지 겹쳐서 내는 학생들도 있었다. 

휴대폰 때문에 통독을 하지 못하고 
돈 벌러 나가야 하는 학생들도 자주 생겼다. 

우리 통독반 학생은 아니지만, 한 탈북 청년은 
신형 휴대폰이 나올 때마다 바꾸다보니 
휴대폰 비가 천만원 가까이 쌓인 경우도 보았다. 

탈북 청소년들에게 휴대폰은, 알코올과 마약못지 않은 심각한 중독을 유발했다. 
휴대폰 때문에 전체적인 생활이 허물어졌고 훈련이 불가능했다. 

결국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이제부터 휴대폰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회수합니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휴대폰을 내놓으세요.' 

민혜는 신경질이 잔뜩 실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남학생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 때릴 기세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항의가 돌멩이처럼 날아왔다. 
'아니 꼭두새벽부터 밤 12 시까지 계속 뺑뺑이만 돌리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이것 뿐인데 
이걸 빼앗아 버리겠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요?

이제부터 통독 시간에 휴대폰 안 볼게요. 그러면 되잖아요. 
휴대폰 뺐으면 나는 이 학교 더 이상 다닐 수 없어요!'

그래도 나는 강하게 이 문제를 밀고 나갔다. 
그래도 몇몇이 자진해서 내놓기 시작하자 
다른 학생들도 어쩔 수 없이 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아는 휴대폰을 요구하는 순교선생에게 
눈도 돌리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 
'순교 선생도 내놓으세요. 그러면 나도 내 놓을께요.' 

순교선생의 마음에 얼음 같은 것이 비수처럼 박혔다. 
순교선생은 오전 내내 끙끙앓다가, 오후에 다시 용기를 내서 부드럽게 말했다. 
'진아야, 다른 사람들이 다 내놓는데, 너만 안 내놓으면 형평성 문제가 생기거든'

 

찔러버릴 것 같은 눈으로 순교 선생을 바라보던 진아가 말했다. 
'오늘 하루 저 결석한 걸로 하세요!'

진아는 횡하니 일어나 나가버리더니, 사무실로 들어가 인터넷만 했다. 
결국 순교선생이 폭발했다. 
'목사님, 나는 못합니다. 나도 이제 더는 못할 것 같습니다!' 

순교 선생은 삼일 동안 휴가를 받고, 쉬면서 회복해야만 했다. 
나는 강압적으로 휴대폰을 빼앗지 않았지만, 스스로 내놓도록 계속 요구했다. 
이제는 스스로 절제하는 법도 배워야 했다. 
그렇게 배울 때 진짜로 배우는 것이었다. 

통제에 의해서 한 순간 된 것은 
통제가 사라지면 곧바로 자기 자리로 돌아갈 뿐이었다. 

일 년 동안 꾸준하게 요구하고 설득했더니 
이제는 다들 자발적으로 휴대폰을 제출했다. 

성근 선생과 순교 선생이, 이 문제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다. 

▲통독 반 학생들 중에는, 이상할 정도로 의지가 약한 학생들이 있었다. 
공부를 할 수 있는 총명한 머리도 있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분명하고 
또 하고 싶은 의욕도 있었지만 

조금만 어려워지고 감정이 상하면 
쉽게 허물어지고 팽개치고 나가버렸다. 

머리들이 좋기에, 밖에 나가도 별로 좋은 일이 없다는 것도 바로 깨닫고 
나갈 때처럼 다시 금방 뛰어 들어왔다.
이 때문에 나가고 들어오는 일을 자주 반복했다. 

그러나 내가 놀란 것은, 같은 북한 사람이고 같은 또래라고 하더라도 
인내심과 절제력의 차이, 그리고 성숙함의 차이가 극심하게 다른 것이었다. 

어떤 학생들은 통독이 지루하고 졸리고 고통스럽더라도 끝까지 인내하지만 
어떤 학생들은 조금밖에 참지 못하고 
또 어떤 학생들은 아예 참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어 냈는지 늘 궁금했는데 
그들을 상담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인내심과 절제력이 약한 학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다들 어릴 적에 부모를 잃었다는 점이다. 

어려서 이집 저집 친척집들을 기웃거리다가 쫓겨나서
꽃제비로 살아왔던 광철, 정철, 성철이가 그랬고 
유진이와 광수도 그랬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어려서 고생을 많이 한 학생들이 
더 강인하고 절제력이 더 강할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이었고, 자기 절제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내와 자기 절제의 크기는, 분명하게 부모와 함께 있었던 시간만큼의 차이를 보였다. 

요한, 지우, 철명이 같은 학생들은 
가난하기도 했고 풍파가 있는 가정이었지만 
그래도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장을 하다가 
십대 중반의 집을 나온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흔들리기는 했어도 마구 허물어지지는 않았다. 

에스더는 통독 반에서 나이는 제일 어렸지만 
내면은 작은 고추처럼 매웠고 강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가 선 자리에서 절대로 흐트러지지 않았다. 

에스더는 온 가족이 다 한국으로 와서, 현재까지도 부모 슬하에서 살고 있었다. 
그 외에도 지금까지 부모와 함께 사는 학생들은 
에스더와 비슷하게 모든 어려움과 훈련을 이겨나가고 있었다. 

부모와 함께 있었던 시간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이런 현상을 만들어 낼까? 
나는 고민해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의 부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생을 한 것 만큼 성숙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랑을 먹은 것만큼 성숙해 있었고 
성숙한 것 만큼 인내심, 자제력, 판단 능력, 의지력이 균형 있게 나타나고 있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였다. 
부모의 사랑과 보호 속에서 자라지 못한 학생들은, 성품이 거칠고 공격적이었다. 

하지만 내면은 또 그만큼 여리고 약했다. 
어려웠던 그들이 부모 없이 홀로 살아왔을 고통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갔다. 

이들은 부모가 없는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과 두려움을 늘 달래면서 살아야 했다. 
너무 어린 것이 홀로 먹을 것을 얻어내야 했고 
복잡하고 암담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 살길을 개척해야 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평생을.. 생존을 위한 버거운 싸움에 시달리면서 살아왔기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리고 연약한 그들이 살아남아야 했던 세상은 
동정이 많고 인간을 사랑하는 세상도 아니었다. 

미움과 증오가 가득한 세상에서, 
저 어린 것들이 예의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 보면 '그들의 난폭함과 무례함은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문득 '왜 하나님이 그들의 무례함에 대해서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러우신지..' 
이해가 되었다. 

채워져야만 했다.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훌륭한 가르침이 먼저가 아니라 밥을 먹이는 것이 먼저이다. 

그들은 어려서 부모의 관심과 보호, 사랑을 받아먹지 못해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그대로였다. 

그러나 몸은 시간이 흘렀다고 청년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어른의 옷을 입고, 어른들의 세계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연약한 어린 아이들이었다. 

부모 슬하에서 자란 아이들은 두려우면 운다. 보호해 달라는 신호이다. 
그러나 부모가 없고, 의지할 곳이 전혀 없이 자란 어린 아이들은 
두려우면 울지 않고 가면을 뒤집어쓴다.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최대한 보기 싫고 
또 무서운 모습의 가면을 뒤집어쓴다. 그것이 공격성이다. 
이빨을 드러내고 그 조그마한 주먹으로 위협한다. 

그 가면으로, 두려움에 떠는 약한 자기의 모습을 감추려고 애를 쓴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뒤집어쓴 가면을 
청년이 될 때까지 벗어던지지 못하고 줄곧 그 속에 숨어서 살아오고 있었다. 

난폭하고 무례한 그들의 모습은 
거칠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어린 것들이 살아남고 싶어 뒤집어쓴 가면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끊임없는 용납과 용서, 다시 받아주기를 반복하자 
학생들은 조심스럽게 자기의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봄이 오고 날이 따뜻해지니, 단단한 껍데기속에 숨어있던 달팽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듯이, 자기의 원래 모습을 조용히 내밀면서 
경계 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왔구나!' 오랫동안 알을 품고 있던 어미 새가 
새끼가 껍질을 벗고 나오기를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가면을 벗은 그 모습이, 바로 그들의 진짜 모습들이었다. 
난폭하고 무례한 스무 살 소년이라는 껍데기를 벗고 나온 모습은 
놀랍게도 네살 때, 다섯 살 때 집을 나오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속에서 조금도 자라지 못한 아이의 모습! 
두려움에 지치고 지친 연약한 그 모습은 
마치 금방 알을 까고 나와 제대로 서지도 걷지도 못하고 지쳐 축 늘어져 있는 아기 새의 모습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서글픈 모습인가! 
이 얼마나 경이로운 생명의 태어남인가! 

'여기에서는 나를 용납해주고 인정해 주는구나, 나를 받아들여 주는구나! 
여기는 안전하구나..' 하고 느낀 순간부터 
둥지 안에 아기 새들이 입을 벌리고 짹짹 거리면서 먹이를 요구하듯 
사랑을 원했다. 

덩치는 말처럼 큰 녀석들이, 사역자들에게 응석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떤 때에는 꾸중을 하면, 아주 사소한 것을 얻어내겠다고 떼를 쓰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져주면서 운다. 너무 행복해서! 
그때부터 그들은 자란다. 조용히 마음을 다지기 시작한다. 

'그래 나도 하나님을 찾아 봐야지, 하나님을 만나봐야지!' 한다. 
그리고 기도를 드린다. 

'기독교가 무엇인지, 종교는 또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불교에 잠깐 다니다가 들어온 진아가, 
그 긴긴 기도시간을 꼼짝없이 앉아 기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찾으려 노력했다. 말을 하면 듣기도 하고, 고치려고 한다. 
이제는 이곳이 집이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밝아졌다. 채워졌고 성숙해졌다. 

금란이 처음에는 가만히 앉아서 놀지도 않고, 장난도 안 치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기가 먼저 와서 반갑게 안기고 장난을 친다. 

화가 나면 물건부터 팽개치고 울고 뛰쳐나가던 유정이는, 참는 법을 배워나간다. 
자기를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노력했다. 

남학생들도 점차 무례한 모습이 없어졌다. 
이제는 어른스럽게 다른 사람을 배려도 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경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먹어야 한다. 사랑은 받아 먹은 만큼 나온다. 

얼마만큼 받아먹어야 하는가? 
채워질 때까지 받아먹어야 한다. 

사랑이 전혀 채워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너 사랑해야 해! 사랑이 나와야 해!' 하는 것은 좀 맞지 않는 말인 것 같다. 

너무 못 먹어서 밑바닥이 텅텅 울리는 소리가 나는 그들은 
나와 선생들, 전도사들, 집사님들로부터 계속 사랑을 받아먹어야 했다. 

그 사랑이 채워지기 전까지는, 말썽도 부리고, 이상한 짓도 하고 
약속도 수십 번 어기겠지만 
그러나 끝까지 사랑을 부어 주고, 또 부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어느 정도 부어진 사랑이 차야, 비로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아! 내가 사랑을 받고 있구나, 사랑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끼고 깨닫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사랑에 의해서,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그제야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사랑을 체험하고 해보며 배운 만큼 주님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이 성경을 많이 배워 주의 종으로 세워진다고 해도 
이렇게 사랑을 받으며 세워져야만, 
이런 방식으로 그들도 사역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들락거리고 오만가지 사고를 다 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용납해주고, 품어주고, 져 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하다가 힘에 부쳐서, 저 그릇들에 사랑을 다 채우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변화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끝까지 사랑을 채워줄 것이다. 
그러면 혹시 내가 죽고 난 뒤에 라도 깨닫지 않겠는가? 

못 깨달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오랫동안 내가 북한사역을 하면서 터득한 방식이고 
옳다고 결론을 내린 사역방식이다. 

그렇기에 학생들이 아무리 들락거려도 계속 받아주었다. 
한 사람의 탈북자를 변화시켜, 주의 일꾼으로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일을 해본 사람들은, 다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그들의 변화는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런 통독사역을 통하여, 한 탈북자가 변화되어 
주님의 종으로 세워지면.. 그들은 정말 귀하다. 

나는 중국에서부터 탈북자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씀을 전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세워진 탈북자들은.. 훗날 순교자의 길을 걸어갔다. 

살아서 한국까지 온 이들은 지금 대부분 목회 현장에서 
훌륭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 

현재 김성근 목사가 그렇고, 김권능 전도사가 그렇다. 
최순교 전도사도 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주의 종으로 된 사람들이다. 

이렇게 세워진 주님의 종들은, 천만금을 써도 아깝지 않은 사람들이다. 

나는 탈북자들의 이런 미래를 내다보기에, 이들에게 돈을 투자한다. 
탈북자들은 돈이 없다. 다들 혈혈단신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기에 
돈도 없고,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남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면 된다는 경험도 없다. 

그래서 탈북자들은 돈에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공통점이다. 

이 때문에 탈북자들은 돈에 약하다. 
나는 통독반 학생들에게 매달 오십 만원의 장학금을 준다. 

그들은 그 돈으로 임대주택의 관리비를 내고, 통신비, 교통비와 용돈 등등 
비용을 지불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나는 이것 때문에 욕을 많이 먹는다. 
'왜 돈에 약한 아이들에게, 돈을 줘서 끌어들이냐고?' 

그러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저 꿀먹은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서 감내해야만 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탈북 청소년들에게 돈을 내고 공부를 시키라고?' 
그것은 그들에게 공부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면 공짜로 공부를 시키라고?
하나님에 대해서 이제 금방 알게 된 탈북청소년들이 
성경을 배우고, 선교사가 되는 훈련을 한다고?' 

요즘은 일반 신학생들도 성경통독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다들 스펙 맞추기에 급하다. 

성경을 모르고, 신학만 잔뜩 공부해서 무슨 일을 한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탈북 청소년들은, 아직 하나님의 관해서도, 성경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지금 그들은 남한에서 힘겨운 생존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남한에서 터를 닦고 오래 산 사람들에게야 
생계비 해결하는 것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그들에게는 힘에 버겁다. 

'무료로 수업해 줄 테니 와서 공부하고 
생계문제는 알바를 하든지 해서 스스로 해결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공부하지 못한다. 

청년의 때를 그저 밥이나 먹고 살면서 지내다가 끝내 버린다. 

거기에다 자기만 살아서도 안된다. 
북한에서 부모들이, 가족들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온다. 

'살려 줘, 배고파!' 
그런 외침을 듣고도, 도울 힘이 없어 덤덤이 침묵해야만 하는 고통을 
배부른 사람들이 알까? 

그들은 북한에서 가족들이 손을 내밀면 무조건 준다. 
돈이 없으면 대출을 받아서라도 보낸다. 

뛰쳐나간다.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노가다 판에 달려가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다. 

그렇게 했는데도 힘이 안 되면 하늘을 향해 운다. 
그들은 배고픔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없을 때에 비참함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안전한 곳에서 배부르게만 살았던 사람들이 이 고통을 알까? 
이들은 혼자 살겠다고.. 가족을 버리고 뛰쳐나온 사람들이 아니다. 
가족을 살리겠다고.. 목숨을 걸고 뛰쳐나온 사람들이다. 

민혜는 16살에 19살이라고 속이고 탈북했다. 
이유를 물으니 감옥에 들어간 오빠를 구하고 
가난한 엄마를 도우려고 그랬단다. 

어린 녀석이 가족들을 살리겠다고 
못된 사람들에게 시달리다가 죽을 수도 있고 
내일을 기약할 수도 없는 길에 뛰어 들었다. 

유정이는 어려서 부모를 다 잃었다. 
의지할 곳이 없어서 이모의 손을 잡고 탈북했다. 

이곳에 와서는 북한에 남겨진 동생을 구하려고 사방에 도움을 호소했다. 
텔레비전에까지 나가서 호소하고 울었다. 
그러나 뚜렷한 도움을 받지 못했다. 

광수는 8살 때부터 혼자서 병든 아버지를 먹여 살렸다. 
그 작은 녀석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팔아 먹을 것을 벌었다. 

어느 날에는 무거운 나무 짐을 멀리서부터 메고 오다가 
시장 앞에까지 와서까지 와서 기진해서 주저앉아 울었다. 

장이 끝나기 전에 빨리 가서 팔아야 하는데, 일어날 힘은 없고 
아버지는 집에서 앓고 계시고, 
어린 놈이 어찌할 바 몰라서 그냥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엉엉 울었다. 

그걸 보고 그 메마른 북한사람들도 무리로 몰려와서 
광수의 장작을 다 사주었다. 
그렇게 살다가 아버지가 죽자 탈북했다. 

이렇게 살다가 왔기에, 그들은 고통과 아픔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누가 그들에게 사랑을 가르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런 처절한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이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자기들이 해 보았기 때문이다. 

해봐서 알고는 있는데, 받아먹지 못했기에 
더욱 더 사랑에 목말라하고, 그것을 찾아 헤매고 다닌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려고 만든 학교를 
고집스럽게 사랑을 받아먹는 집으로 만들어버렸다. 

'돈이 없어서 마음속에서 피 같은 눈물을 흘리는 그들에게 
그저 고상하고 거룩하게 앉아서 성경만 배우게 하라고?' 

글쎄 나에게는 그럴 힘은 없는 것 같다. 
나는 예수 믿는 것을 대가로 (탈북민들에게) 후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래이지 후원이 아니다. 

일을 해서 돈을 벌듯이 
예수 믿고 예배를 드린 대가로 돈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이 
과연 거기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교회에 나와 쭈그리고 앉아 눈치 보듯 나를 쳐다보고 있으면 
무조건 돈(장학금)을 준다. 

교회가 요구하는 것을 모범적으로 수행한 대가로 오는 장학금이나 후원금이 아니라 
개판치고 말 안듣고 말썽부렸는데도 돈을 주었을 때 
그들은 마음에 따뜻함을 느낀다. 

저 청소년들은 본심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안다. 
자기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고 장학금을 줄 때 
그 돈 앞에서 사랑을 느낀다. 

자기 벌어서 생긴 돈이 주지 못하는.. 또 다른 기쁨을 느낀다. 
만족을 느끼고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을 느낀다. 

나는 선교사가.. 선생이나 목회자가 아니라, 
먼저는 아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비의 마음이라면 무엇을 못주겠는가?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논밭을 팔고 재산을 다 써서라도 
남이 욕을 하든 말든, 의식할 이유도 없다. 
그런 아비의 마음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돈을 준다. 죽을 각오로 돈을 준다. 
어떤 때에는 돈을 빌려서 주기도 한다. 

사람을 불러 모으기 위해 돈을 주는 것과 
사랑을 해서 돈을 주었더니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다. 

북한 사람들은 한국 목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한국 목사들도 탈북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서로 신뢰하지 않는 상태에서, 돈만 준다고 해서 탈북자들이 모이지 않는다. 
또 모인다고 해도, 통독이 되지 않는다. 
돈을 줘서 모이기 전에, 먼저 신뢰가 있어야 한다. 

나는 신학공부하는 동안 등록금과 생활비를  *총신대학원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이렇게 저렇게 후원받았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신학생들도, 교회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공부를 하고 
생계 문제도 교회에서 해결해준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북한 선교사를 목표로 공부하는 탈북 청소년들에게 
생계비 얼마를 해결해 주는 것이 정상에서 어긋난 일일까?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기에 공부 잘하는 청소년들에게 주는 돈은 투자이고, 
가난하고 훈련받지 못한 탈북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돈은 왜 낭비인가? 
그래도 낭비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렇다고 하자.. 사랑은 낭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