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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4장, 절별 해석 및 주석

LNCK 2023. 4. 13. 14:53

◈삼하4장, 절별 해석 및 주석

1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사실 아브넬의 피살 소식은 온 이스라엘(11지파)을 당혹감과 두려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영웅적인 한 인물에게 국가의 운명을 의존하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는 그러한 인물의 급작스런 죽음은 전국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2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지휘관 두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바아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레갑이라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더라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니

'군장' 이에 해당하는 '사리 게두딤' 은 2:8에 나오는 군장, 즉 '사르 차바' 와는 다른 말이다. 왜냐하면 '사르 차바'는 '군대 사령관'(chief of army)이란 뜻이지만 '사리 게두딤'은 단순히 '무리들의 우두머리'(captains of bands)란 뜻이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군장'은 군 전체의 지휘권을 행사하는 총사령관이 아닌 그 휘하에서 한 단위를 책임지던 자를 의미하는 듯하다. 공동 번역은 이를 '특공대 대장'으로 번역하고 있다.

'바아나... 레갑'
'바아나'(Baanah)의 뜻은 '낙타를 타는 사람'이다. 이들은 친형제로서 악을 행하는 데 서로 손을 적시었다(5-7절).

'베냐민 족속... 림몬의 아들들'
바아나와 레갑의 혈통이 소개된다. 그들은 이스보셋과 같은 베냐민 지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울 왕가를 무너뜨리는 반역의 선봉이 되었음은 비열한 공명심과 사악한 출세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8절 주석 참조.

'브에롯'
이스라엘이 기브온과의 조약(條約)을 맺을 때 얻은 네 성 중 하나이다(수 9:17). 후에 이 성읍은 베냐민 지파의 14성읍 중 하나로 편입되었다(수 18:25).

3 일찍이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우거함이더라

'일찍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깃다임'이 어디인가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느11:33에 의하면 바벧론 포로 귀환 후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 중의 하나로 '깃다임'이 언급되어 있는데 동일 지명 인지도 확실치 않다.
그런데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이주해 우거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다음과 같이 두 견해로 나뉘고 있다.
(1) 길보아 전투 (삼상 31장) 이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을 습격하자 브에롯을 버리고 깃다임으로 피신했다고 하는 견해.
(2)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21:1, 2) 그곳을 떠났다고 하는 견해.

그런데 벧하우젠(Wellhausen)은 깃다임의 블레셋 '가드'(Gath), 또는 '림몬(Rimmon)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1)번의 견해는 모순된다. 왜냐하면 블레셋의 지경인 깃다임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증명할 길은 없지만, (1)번의 견해보다 (2)번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 같다.

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절뚝발이 아들... 므비보셋' '므비보셋'의 뜻은 '부끄러움을 없애 버리는 자'이다.
그런데 다른 성경에 보면, 그의 본명은 '므립바알'(Meribbaal)인 것으로 나와 있다(대상 8:34, 9:40). '므립바알'은 곧 '바알로 만족하는 자'란 뜻이다.
따라서 이같은 이름이 므비보셋으로 바뀌게 된 동기는 아마 에스바알이 이스보셋으로 바뀐 그것과 똑같을 것이다. 즉 바알 우상 숭배와 관련 '바알'이란 이름을 혐오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이름 속에 철저히 '바알'이란 말을 배격한 것이다.

한편, 여기에서 저자가 므비보셋의 신상을 자세히 소개한 이유에 대하여선 다음과 같은 두 견해가 있다.
(1)단순히 뒤에 벌어질 사건(9장)의 배경을 보여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견해.
이 견해는 므비보셋의 불구 상태(절뚝발이 상태)가 사울가의 몰락(이스보셋의 죽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입장이다.
(2)사울가의 완전한 몰락을 보여 주기 위해 기록하였다는 견해이다
즉 이스보셋이 죽은 후(5-7절)에 사울가의 유일한 후계자로 므비보셋이 남았으나, 그는 절름발이어서 도저히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이다. (장애인 차별이 아니라, 과거에 왕이 전장에 나갔는데, 절뚝발이는 전장을 지휘하는 왕이 될 수 없기 때문)

따라서 사울가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몰락했음을 본 구절이 보여준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1-4장까지의 문맥이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몰락을 다루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위 두 견해 중 두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올 때에'
길보아 전투에서의 블레셋과의 싸움 중 요나단이 전사하고 사울은 자결한 소식(삼상 31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된 때를 가리킨다.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아마도 블레셋군의 승전(勝戰)소식을 접한 므비보셋의 유모는 블레셋인들이 사울 왕가를 멸절시킬 목적으로 므비보셋마저 제거할 군사를 보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심각한 위기 의식에 젖어 므비보셋을 안고 은신처를 찾아 도피하였을 것이다.

5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볕이 쬘 때 즈음에... 낮잠을 자는지라'
여기서 '볕이 쬘 때 즈음'이란 '정오', '대낮'을 의미한다. 팔레스틴 지역의 풍습으로 볼 때, 이때는 이 지역 사람들이 오침(午寢)을 즐기는 시간이었다(2:29, 32, 3:26).
이러한 습관은 사막 지대의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보셋이 이때에 낮잠을 잔 것은 헨리(M. Henry)가 해석한 대로 이스보셋의 극단적인 나태를 보여 주는 행위는 아니었다. 한편, 이스보셋의 두 군장 레갑과 바아나가 이때에 이스보셋의 집에 온 것은 그가 잠들고 있는 동안 그를 암살하려고 했던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6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두 군장이 어떻게 해서 이스보셋의 침실에까지 들어올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주는 구절이다. 여기에서 밀은 병사들에게 줄 군량(軍糧)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은 군량, 곧 밀을 가지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이스보셋의 침실에까지 무사히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들은 이러한 군량 수송의 일을 자주 맡아 했기 때문에 문지기들의 의심을 조금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70인 역과 벌게이트 역은 이 구절을 엉뚱하게도
'그 집의 문지기가 밀을 까부수다가 조는 동안에 몰래 숨어 들어갔다'라고 해석해 놓았다.
영어 성경 중 이같은 해석을 따르는 것으로는 RSV와 Jerusalem Bible등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가장 오래된 성경이자 전통적 권위를 지닌 맛소라 사본(Masoretic Text)과 상충된다.
그리고 그같은 개역(改譯)의 근거도 어디서 취하였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그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KJV, NIV, Living Bible 등도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을 취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7 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

'집에 들어가니' 5, 6, 7절에서 두 군장이 이스보셋의 집에 들어갔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그 집에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출입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중복적(重複的)표현법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점진적으로 세밀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즉, 5절은 두 군장이 이스보셋의 집에 들어간 단순한 사실만을 보여주며, 6절은 5절보다 더 상세하게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들어갔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7절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 저지른 잔인한 범죄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복된 말들은 한 가지 사실을 점진적으로 확대 설명해 주기 위한 표현들이다.
이렇게 볼 때, 6절에서 두 군장에게 배를 찔리운 자는 어떤 이의 견해처럼, 그 집의 문지기가 아니라 본절에서 두 군장이 쳐죽이고 목을 벤 바로 그 이스보셋인 것이다. 한편 같은 맥락에서 6절의 '도망하였더라'는 말은 본절에서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행하여'라는 말로써 확대 설명되어 있다.

'아라바 길'
아라바 길은 당시 이스보셋의 왕도(王都) 마하나임(2:8)에서 헤브론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이곳은 아브넬과 그 군대가 기브온 전투에서 요압과 휴전한 후 마하나임으로 퇴각할 때 거쳐갔던 길이기도 하다. 2:29 주석 참조. 그런데 마하나임에서 헤브론까지의 거리는 약 95km였다. 따라서 레갑과 바아나는 밤새도록 쉬지않고 약 20여 시간 동안 시속 5km 이상의 속력으로 걸어 헤브론에 도착했을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을 향한 악인의 열심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롬 3:13-17).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이러한 열심은 자신들의 죽음을 재촉하였을 뿐임을 유의해야 한다(8-12절).

8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이 말은 두 군장, 곧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 바치면서 이스보셋을 비난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와 같은 비난의 말은 근거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보셋 진영과 다윗 진영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보셋이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고 다윗을 살해하고자 했던 흔적을 우리는 조금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이러한 말은 다윗의 후한 보상을 바라고 저지른 자신들의 잔인한 범죄(5-7절)를 마치 당연한 처사인 양 미화시켜 보이려 했던 비열한 언사(言辭)였음을 알 수 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이처럼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이 '사울의 아들' 임을 강조한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 옛날 사울로부터 당한 생명의 위협을 회상토록 함으로써 사울 왕가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삼상 18:10, 11, 19:8-17, 23:14).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는데(9-12절)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간의 의식(意識)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 같으셨나이다' 바아나와 레갑이 이렇게 말한 동기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국을 반드시 세우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상당한 보상을 바라고 다윗에게 이스보셋의 목을 가져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호도(糊塗)하기 위해 이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인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이스보셋을 거명할 때, 단순히 이스보셋이라고 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의 아들’이라고 말한 사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잔인한 범죄를 다윗 앞에서 감추기 위해 이와 같은 얕은 꾀로 공정한 마음을 혼란케 하려 하였던 것이다.

9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생명을... 건지신 여호와' 다윗이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은 레갑과 바아나의 범죄 행위가 다윗의 생명 유지에 아무런 필요도 없었던 것임을 밝히기 위함이다. 즉, 다윗 자신이 지금까지 여러 환난 가운데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누구의 도움 때문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바아나와 레갑이 말한 대로 실제로 이스보셋이 다윗을 죽이려 했다 할지라도 다윗이 자신의 생명을 위해 그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는 의미이다.
즉 여기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무마(撫摩)해 보려 한 그들의 말이 신앙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모순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10 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

여기에서 다윗은 레갑과 바아나아게 일전에 사울 왕의 죽음의 소식을 보고한 아말렉 소년을 자신이 시글락에서 처벌한 사실(1:1-16)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목적은 곧 바로 이 두 죄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정당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즉, (1)과거 죽임을 당한 사울 왕은 실제로 무고한 다윗을 죽이려 했던 죄인이었고(2) 사울을 죽였다고 주장한 아말렉 소년은 어쩔 수 없는 상황 중에 그렇게 했다고 사려(思慮)됨에도 불구하고(1:9, 10)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함부로 죽였다는 이유로 아말렉 소년을 처벌하였다(1:14-16). 따라서 이제 (1) 다윗을 살해하려 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는 무죄한 이스보셋을 (2)그것도 무자비하게 고의로 목을 벤 레갑과 바아나의 행위(5-8절)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인 것이다.

'그 소식의 갚음을 삼았거든' 여기서 '갚음'에 해당하는 '베소라' 는 본래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악한 소식에 대한 죽음의 보상을 의미한다.

11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악인이 의인을... 죽인 것이겠느냐' 여기에서 다윗은 신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법적인 차원(the legal sphere)에서 악인(wicked man)과 의인(righteous person)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이스보셋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볼 때는 죄인일지 모르나, 법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사울의 왕권을 찬탈하거나 혹은 어느 누구를 죽이려 한 죄인은 아니었다. 반면 바아나와 레갑은 법적으로 무고한 이스보셋을 잔인하게 살인한 악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살인 행위는 법적으로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분명한 범죄 행위였다.

12 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

'수족을 베어... 머리를 가져다가... 장사 하였더라' 다윗의 공정한 심판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즉, 다윗이 바아나와 레갑의 수족(手足)을 벤 것은 그들이 손과 발로 무고한 자의 목을 베어 헤브론까지 가져왔던 까닭이다.
또한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장사지낸 것은 그가 법에 저촉될 만한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아말렉 소년을 죽인 그 사건(1:1-16)과 마찬가지로 (1)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2) 의와 불의를 공정하게 가리어 처단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의로운 통치의 결정적인 요소, 곧 공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다윗이 바아나와 레갑의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 달은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백성들에게 악인의 처참한 말로(末路)를 보여 줌으로써 범죄치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함이다. (2)다윗 왕국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공의(公義)를 널리 증거하기 위함이다. (3)아브넬의 죽음의 경우(3:31-37)와 마찬가지로 이번 이스보셋의 죽음의 경우에도 전혀 무관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브넬의 무덤에' 이처럼 다윗이 이스보셋의 시신을 아브넬의 무덤에 합장(合葬)한 것은 생전에 저들의 관계를 고려해서였을 것이다. 즉 그들은 생전에 사울 왕가의 왕과 군장 간이었으니(2:8, 9)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