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 이름의 뜻은 '기름 짜는 틀' 입니다. 감람산은 Mount of Olive, 올리브 나무가 가득한 산이죠.
올리브 나무가 가득한 그 가운데 거기서 기름을 짜는 틀이 겟세마네 oil press 인 거죠.
이곳에서 예수님이 정말 자기 영혼의 진액을 짜내는 기도를 하시게 되죠. 본문에 그 기도 장면을 아주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 있으라 나는 저기 가서 기도하겠다' 그래서 제자들을 일정 거리를 떨어뜨려 놓고 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집중적으로 기도를 하시는 장면입니다.
37~38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 외 8명의 제자는 조금 더 멀리 두셨고 그 세 명의 수제자를 데리고 가서 가까이 두셨는데
이어지는 39절에 '조금 나아가사' 예수님은 그렇게 좀 더 나아가서 (거리를 두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37 뭘 고민하셨나요? 그런데 원어로 보니까 '고통하다' 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굉장히 내적 고통을 겪으셨어요.
그리고 '슬퍼하셨다' 이 단어도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두려워하셨다' 이런 의미가 원어적으로 강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힘드셨는지 38절에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을 지경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죠. 이렇게까지 연약한 모습을, 우리가 본 적이 있는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와 질병과 약함을 담당하셨다는 것이 그냥 쉽게 하는 말씀이 아니고
뭐 영적인 의미, 교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나의 모든 연약함을 그분이 대신 경험하셨던거죠.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나의 상황을 예수님은 모르시겠지?' 아니요. 예수님은 너무나 정확하게 우리와 똑같은 경험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 개역에서는 '체휼하신다' 이렇게 표현했죠. 그래서 우리를 정말 깊이 있게,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이시다.. 라는 거예요.
죽을 것 같은 마음의 고통과, 우울과, 슬픔과, 불안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대신 경험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극심한 불안과, 우울과, 슬픔과,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혀질 때, 다 씻겨지는 줄로 믿습니다.
◑본론 / 같은 제목을 세 번이나 기도하신 예수님
▲첫 번째 기도 :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예수님의 기도를, 오늘 하루동안 깊이 묵상하시면 좋겠어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만약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잔이 내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나의 아버지 아니십니까, 나를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가장 극단적인.. 극악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어서 아버지께 버림을 받는 것이잖아요. 그 예수님의 영혼의 고통,
사람이 존재적으로 경험하는 여러가지 고통이 있지만 '분리 불안'이라고 하죠.
어린 자녀들은 엄마가 항상 옆에 있으니까 평소에는 잘 지내다가 엄마가 잠시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갑자기 아이가 뭐 까무러치게 놀라고 막 울고 난리가 나잖아요. 이게 '분리 불안'이죠.
사람은 다 존재론적으로 '분리 불안'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버림을 받으시고 또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게 되시죠.
그래서 예수님이 경험하셨던 굉장히 많은 고통이 있는데 육체적인 고통, 세 개의 못과 가시 면류관.. 십자가를 지시는 이 고통도 어마어마한 고통이었는데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보면, 고통의 가장 시작점이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 중에 가장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신' 거거든요. *일종의 '분리 불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능하면 이 잔이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 잔을 마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고백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40 절에도 제자들을 의지하는 모습을 좀 보이세요. 40절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이 세 명의 수제자는, 예수님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었어요. :39 예수님이 얼마나 애를 쓰며 기도하시는 그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는 지척의 거리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예수님의 신음소리, 이런 소리도 들리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잠이 들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제 곧 나를 버릴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연민을 구하신 거잖아요. '좀 나와 같이 깨어서 기도 해주면 안 되겠냐?'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고 또 그 한편에 있는 제자들은 이제 곧 닥칠 일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는 상황인 것이죠.
이 예수님의 세 번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같은 내용이지만) 이렇게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너무너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서 제자들을 의지하시잖아요. 그런데 그 제자들을 의지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너무나 힘드시니까... 그 제자들을 의지하는 모습을 처음에는 가지셨죠.
그러면서 '나와 함께 기도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 요청을 하세요. :40
우리가 뭐 수술실에 들어갈 때, 어차피 혼자 들어가게 될 걸 알면서도 '내 손 한번 잡아줘!' 이런 부탁을 하게 되는 게 사람의 마음인 거죠. 그러나 결국 그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이 혼자 가셔야 되는 길이었던 거예요.
▲2. 두 번째 기도 41~42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이 말씀은 제자들을 위한 말씀이잖아요. 지금 예수님의 자세로 놓고 보면 제자들한테 기대려고 하시다가
지금은 오히려 제자들을 위해서 권면하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좀 이제 마음의 안정을 찾으시고 '내가 어차피 이 길을 홀로간다'
그리고 본인은 마음 가운데 이제 결심이 어느 정도 서기 시작하면서 제자들을 오히려 걱정하시는 그런 말씀을 하신 거죠.
그러면서 이제 42절에 두 번째 똑같은 기도를 하십니다.
근데 똑같은 기도이면서도 결국에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지는데 '내가 (십자가) 하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다면.. 내가 꼭 해야 된다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셨어요.
여러분 '잔'이라는 표현이, 성경에 여러 차례 나오는데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 입니다.
제가 묵상을 하다가, 물론 표현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독이 든 성배' 라는 표현을 가끔 쓰잖아요.
물론 인간들이 권력의 자리를 탐하는데 결국에는 그게 독이 든 성배가 되어서, 자기한테 독이 될 수 있다는 거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니까 거룩한 잔이긴 한데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셔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마시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그러면 지금 나의 소원과 아버지의 소원이 달랐던 거잖아요.
인생의 딜레마는 나의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이 다를 때 생기는 거죠.
좀 다르게 표현한다면, '해야 할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면 좋은데 '해야 할 일'이 내가 정말 하기 싫은 일일 때...
여러분 자녀들이 학교를 다녀요. 그런데 공부를 너무 하기 싫어 해요. 그러면 인생 자체가 고통인 거죠.
내가 직장을 다녀요. 그런데 출근하기가 너무 너무 싫은 거예요. 그러면 이제 너무나 고통스러운 거죠.
'나의 원함' 과 '하나님의 원함'이 같아지는 것, 이게 사실 신앙의 성숙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면, 그게 완전히 일치할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갈등이 있거든요.
★예전에 하목사님께서 '저는 선교지에는 절대 안 갑니다' 그런 사람은 꼭 선교지에 보내시고
'저를 좀 선교지에 보내주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처음에 미국에 비전교회 세울 때 거기로 보내셨어요.
왜냐면 미국에 가고싶어 하는 사람을, 미국에 보내 놓으면 사고 친다... 그래서 서로 바꾸어 보내신 거죠. (예수님도 자기 원대로 되지 않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셨듯이)
즉 선교지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미국에 보내고... 선교지 가기 싫어하는 사람은.. 선교지로 보내시고...
그래서 저도 그때 선교지로 가기 원했기 때문에, 밴쿠버로 보내진 거죠.
'하나님, 저는 이거 절대 못합니다!' 그런 기도를 여러분 하시는 것이.. 결국에는 손해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하필이면 그거를 시키시더라고요.
요나 선지자를 보면, 요나 선지자는 평생에 북왕국의 최고의 예언자로 활동했던 사람이에요. 요나는 요나서에 나오는 그런 한심한 요나가 아닙니다.
굉장히 억울한 게, 이 분은 평생에 정말 아주 훌륭한, 거룩한 선지자로 활동을 했다고요. 그런데 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마지막 한계선이 '니느웨로 가는 것'이었어요.
'난 절대로 니느웨로 안 간다. 적국에 좋은 일은 절대로 못 하겠다!' 하나님은 그를 보내시잖아요!
우리나라가 1990년대에 한창 부흥해서 선교사를 보낼 때 선교헌신자들 중에 '난 일본은 절대로 안 가겠다!' 이런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그런 사람들을 일본에 보내시죠. 결국은 그들을 끌어안게 하시고...
저도 제 마음 가운데 제가 하나님께 '하나님 저를 오지를 보내시면 오지로 가고, 저를 아프리카로 보내시면, 아프리카로 가겠습니다. 근데 저는 절대로 개척은 안 하겠습니다...' 그랬거든요.
근데 하나님은 다른 길을 다 막으시더라고요. 다 막으시고 결국은 개척하게 하시잖아요.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얘기는 결국에 아버지의 원대로 될 텐데 왜 그 길을 그렇게 가기 싫어하고.. 시간을 끌고.. 뭐 고통스러워하고.. 도망다니고...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콜링을 젊은 날에 너무너무 명확하게 받았는데 그걸 피해 다니다가 막 인생이 망가지기도 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원대로 될 텐데...
모세가 어차피 애굽에 갈 텐데... 뭐 그렇게 나는 못 가겠다고... 죽겠다고 그러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어차피 가나안 땅에 들어갈 텐데... 왜 그렇게 가데스바네아 에서 두렵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저앉아서... 결국 40년을 돌게 되잖아요.
그런데 또 그 40년을 도는 것도 그러면 어차피 광야를 지나가게 될 텐데 이왕 가게 될 바에는 기쁘게 찬양하면서 가고 '하나님, 제가 힘들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이 길을 가겠습니다. 내게 주어진 이 십자가의 길을 내가 담대하게, 담담하게 가겠습니다.' 이런 결단이 필요한 거죠.
예수님도 처음에 그게 힘드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도 육신을 입고 계시기 때문에, 그게 힘드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기도가 똑같은 기도 이면서도 또 바뀌고요. 기도가 점점 성숙돼죠!
▲3. 세번째 기도를 보면 44절에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여러분 성경이 중요한 내용은 그대로 씁니다. 그런데 여기 이 내용을 보면 '세번째 같은 말씀'이라고만 간단하게 요약 정리를 했잖아요.
예수님이 이제 소화가 되신 거죠. 그 기도가 편안해지신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막 몸부림을 칠 때가 있잖아요. 우리도 답답해서 똑같은 기도를 반복해서 드릴 수가 있는데, 몇 주~몇 달 기도하는 가운데 점점 더 기도가 성숙해지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소화해 내어서 기도하게 돼죠! 근데 그 기도가 이제 소화가 되신 거예요. 그래서 43절에 보면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제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은 더 피곤하셨을 텐데...' 근데 덜 피곤했을 제자들은 피곤해서 눈이 감긴다는 거죠.
◑이어지는 말씀은 가룟유다의 배신과 예수님의 체포 장면입니다.
47~48절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몽치 : 짧고 단단한 몽둥이, club
갸룟유다가 큰 무리를 데리고 옵니다. 칼과 몽치를 들고 군호를 짜서 예수님을... 그렇게 하지 않아도 체포할 수 있었을 텐데 마치 정말 극악한 죄인을 잡아가듯이 그렇게 와서 예수님께 접근을 합니다.
49~50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이 장면이 정말 주목할 만한 장면이죠. 중동에서 당시 사람들이 입을 맞추는 인사를 했죠. '샬롬' 이라고 인사를 해놓고 예수님을 체포했어요.
근데 또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이 배신자!'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친구여!' 그러시잖아요.
왜 '친구여!' 라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으로서는 지난 3년 반 동안 늘 옆에 데리고 다녔으니까 '친구'라는게 가깝고도 오래된 사이인 거잖아요.
주님이 유다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끝까지 있으셨던 것 같아요. 차라리 '너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 그런 말씀을 하시잖아요.
▲어떤 분들은 '가룟유다가 배신하지 않았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지 못했고,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못 받고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안 이뤄지니까 가룟유다는 하나님의 예정가운데,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가룟유다가 무슨 잘못이냐?'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과연 그럴까요? 두 가지를 생각해야 되는데
1) 유다가 평소에 엄청 착했는데, 난 절대로 배신하기 싫었는데, 억지로 배신하게 하셨나요? 그게 아니죠.
사울 왕도 그렇고, 애굽의 바로도 그렇고 다 너무 착한데 절대로 그러기 싫은데 하나님이 억지로 배신하도록 시킨 게 아니거든요.
2) 유다가 아니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못 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오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다 배신했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잖아요.
결국에는 모두가 배신했는데, 유다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 너무 안타까운 거죠. 여러분, 친교의 동산이 배신의 언덕이 되었어요. 이 겟세마네 동산이라는 곳은, 감람산 안에서도 예수님과 제자들많이 아는 아지트 같은.. 그런 늘 그곳에 오셔서 쉬기도 하시고 대화도 나누시던 그런 동산인데
예수님이 거기에 가셨을 것을 알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끌고 온 거잖아요. 그리고는 거기서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의 기도를 하시고 그리고 나서 마음의 결심을 하시고 잡히신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 잡히신 게 아니고 스스로 잡히신 거죠.
가룟유다도 하나님이 억지로 시켜서 간 게 아니고,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거죠. 여러분, 인생의 길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그분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은 '내 원이 하나님의 원과 같아지는'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죠.
사람은 내가 바른 길이 뭔지 알아도 마음의 방향이 그 쪽으로 기울지 않기 때문에 힘든 것이거든요.
내가 남편이 좀 미워도, 사랑하고 축복해야 된다는 걸 알아요. 내가 아내가 자꾸 힘들게 해도 내가 아내를 품어야 된다는 걸 알아요. 다 아는데.. 그게 하기가 싫은 거예요.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고, 잘 지내야 된다는 걸 알아요. 아는데도, 그게 마음이 그 방향으로 가는 게 힘든 거예요.
정리하면, 오늘 예수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이 스스로 그 길을 가기 힘드셨는데 그래서 제자들을 의지하며 '나와 함께 기도해 주면 안 되겠느냐?' 그런 연약한 모습을 계속 보이셨지만
결국에는 그 길을 사람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담담하게 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게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보여주는 거죠. 여러분, 여러분에게 맡겨진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왜 꼭 사명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어야 되느냐?
저는 인생에 대해서 해석이 약간 우울한 해석일지 모르지만 인생은 long suffering 과 short happiness 라고 생각하거든요. 긴 고통과 짧은 행복!
자녀들을 키우는 것도 뭐 잠들면 정말 천사같다 이러잖아요. 그러다가 깨면 얼마나 많이 어지럽히고, 문제를 일으키고 정말 그야말로 뭐 뒤치닥꺼리 하느라고 엄청 고생을 하잖아요.
그래도 그 아이가 정말 예쁜 짓을 할 때 그 잠깐 순간의 기쁨이 긴 서퍼링을 다 녹여 주는 힘이 있잖아요.
학생들이 12년 동안 고생고생 공부를 해서 대학에 들어갈 때 '와 합격했다!' 그 기쁨은 잠깐이죠.
그러면 또 4년 동안 또 고생고생하면서 또 공부하고... 여러분 인생은 긴 서프링과 짧은 해피니스 이에요.
그래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의 길을 간다는 게 사실은 힘겹고 어려운 십자가의 길이 될 때가 많습니다.
'나만 왜 이렇게 십자가 길을 가게 하시는가?' 아닙니다. 각자가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길을 갈 때, 사람을 의지하고 싶고 '나 좀 도와주세요. 제가 너무 죽을 것 같아요..' 이런 게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가셔야 돼요.
수술실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줄 수 없고 학생들이 입시장에 들어갈 때, 부모가 아무리 사랑해도 친구들이 아무리 친해도, 결국엔 나 혼자 그 입시장에 들어가는 거잖아요.
여러분, 십자가를 내가 홀로 지지, 제자들이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길을 혼자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시면서, 여러분 담담하게 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어차피 가야되는 길이에요.
'나는 절대로 십자가, 나는 안 지겠습니다' 그런 미숙한 어린아이 같은 마음 갖지 마시고
'나의 소원이 아버지의 소원과 지금은 다르지만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