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죽음 이후 어디로 가는가? - 김영준목사 설교 - YouTube
◈사람은 죽음 이후 어디로 가는가 막12:18~27, 계6:9~11
◑1. 세상의 대부분 종교에는 내세관이 없습니다
막12: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이 본문에서 이 질문을 한 이유는
본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고, 영생을 믿지 않고, 내세를 믿지 않고
천사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내세는 믿었음
유대교 신자들 중에,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어떻게 내세도 믿지 않고, 천국도 믿지 않고, 영혼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종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여러분 이 세상의 종교 중에, 확실한 내 세관이 없는 종교가 태반입니다.
그 사실을 아십니까?
유교를 종교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유교에는 내세관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가 무엇을 강조합니까?
제사를 강조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가르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모순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가 있지요.
그 사상의 한계가 거기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내세관이 불분명합니다.
환생에 대한 믿음이 있지만.. 그것은 힌두교에서 비롯된 것이고,
또 극락에 대한 믿음은.. 민속신앙에서 온 것이고
열반을 말하는데.. 사실 열반은 내세도 아니고, 천국도 아니고,
소멸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불교도 분명한 내세관이 없습니다.
또 무속신앙이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분명한 내세관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무속신앙에 의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세에 가지 못해요. 그 이유가 뭡니까?
한이 많아서 구만리 장천을 귀신으로 떠들어 다닌다고 믿어요.
그러면 그 죽은 자들이 어떻게 평안하게 내세를 갈 수 있다는 말인가요?
뭐 그들이 굿도 하지만, 사실 무속신앙에서는 어느 누구도
죽은 자의 영혼이, 좋은데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요.
무속인들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무슨 능력이 있길래, 무슨 의가 있길래
죽은 자가 자기 스스로도 찾아가지 못하는 곳을
무속인이 가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건 다 허구에요. 그건 다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슬람교, 유대교도.. 내놓을 만한 내세관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매우 희미하고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 어떻게 되느냐, 어디를 가느냐?
라고 물어보면.. '그건 알라에게 달렸다' 라고 말한다든가,
이처럼 분명하게 '여기에 약속이 있고, 여기에 증거가 있다' 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어느 종교도
내세에 대한 교리가 없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만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셨어요.
석가모니도 부활하지 못했고, 공자도 부활하지 못했고,
모하멧도 부활하지 못했는데.. 예수님만이 부활하셨어요.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그저 죽음 이후의 세계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죽음 이후의 영계라든가, 죽음 이후의 영혼을 말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서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마지막 날에 내가 너희를 일으키리라'
'일으킨다'는 말은, 죽음에서 살아나는것을 (부활을) 가르치는 것이지
죽음 이후의 세상을 (영혼불멸설을) 가르치는 것이 아납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느냐?'
여기에 대해서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1. 첫번째 '잠잔다'는 설입니다.
스테반이 순교하는 순간에 '그가 자니라' 라는 성경 구절이 있어요. 행7:60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잔다" 이렇게 보는 사람들도 일부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의 근거는
살전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라고 불렀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설에 의하면,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은
'자는 상태로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나팔소리와 함께 그들이 죽음에서 영생으로 부활한다..
이렇게 믿습니다.
▲2. '잠을 자는 게 아니고, 세상을 떠나는 즉시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눅16장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보면,
이것은 비유입니다.
'죽은 이후에 어떻게 된다'고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구절이라기 보다는
그 비유의 주제는
'이 세상에서 누리던 특권이 내세에서도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바뀐다'라는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의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강조 또는 약간의 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비유라서.
모든 스토리와 모든 비유는,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전달하기 위하여
'과장'이라는 도구를 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에도 어느 정도의 '과장'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이 말은.. '죽고 나서 한참 자고 있다가
이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죽자마자 나사로도 천사들에게 받들려, 즉 천사들의 에스코트를 받고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갔다고 했고 (본문에 '즉시, 당일에'라는 말은 없지만, 정황이 그렇다는 거죠)
부자도 (잠 자며) 기다렸다가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고
죽어 장사되매... (즉시 심판을 받았습니다) *물론 재림 때의 심판은 아니지만
거지 나사로는 아무도 장사 지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천사들의 에스코트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도 '천국'이란 말 대신에 '아브라함의 품'이라 한 것은 '중간상태'를 뜻하죠)
이 부자는 장례는 지내줬어요. 아마 아주 호화로운 장례를 지내주었을 것입니다.
아주 큰 무덤에 돈을 많이 들여서, 많은 사람들이 동원돼서 장사를 지내주었을거예요.
그러나 장사를 아무리 잘 지내준다고 해도
그것이 그 이후의 상태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애굽사람들은 애굽의 바로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장사를 했죠.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인부들을 동원해서 피라미드를 지어서
그 안에 뭐 사후세계에서 필요한 물건들까지 다 묻어가지고..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쓸모없다는 얘기입니다. '부자' 보세요!
한국인은 '부모님의 묘지 자리를 잘 선택하면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
말도 안 되는 얘기죠.
고인이 스스로 자신도 도와주지 못하는데 *부자를 보면
무슨 후손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부모님을 좋은 데 모신다고, 부모님이 좋은데 가시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 부자도 좋은데 갔을 거예요.
부자가 그 많은 돈으로, 왜 좋은 땅과 좋은 묫자리를 얻지 못했겠습니까?
아마 얻었을 거예요.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부자가 죽어 장사되며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눅16:23
비유에는 과장의 요소가 있다고 전제를 하더라도
예수님이 죽은 후에 곧바로 이러한 변화, *'곧바로'라는 말이 없지만 정황상
갈 데가 정해지고, 그곳으로 가고,
그것뿐만이 아니고 망자들이 자신의 상태를 인지한다는 겁니다. 자는 게 아니라요!
그래서 이 부자가 이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눈을 들려면, 어떤 형태로든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자는 자기의 상태를 알았다는 얘기에요. 깨어있었다는 거죠.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는구나'
그래서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내게로)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불꽃 가운데서 고통당하나이다' 주1)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몸은 장사되고 썩지만
그 영혼이 음부(중간상태)에 갔다는 얘기인데요.
몸이 없는 상태에서, 감각을 통해 고통을 받았으리라고 보기는 어렵죠.
몸이 없는 상황에서 뜨거운 것이든/ 차가운 것이든/ 서늘한 것이든
감각적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부자가 지금 영혼의 상태가 아니라, 몸을 입은 상태)
그러나 이 부자의 고통은 '고민한다'
이것은 심리적인 것이고, 몸의 감각이 없어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음부의 고통이 감각적으로
불구덩이에서 감각적으로 뜨겁다든가.. 이런 것보다 더 괴롭게 "고민한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일리가 있기 때문에 하시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죽은 후에 한참 동안 '동면상태, 영면한다' 라는 말을
하는데, *영혼수면설
제발 기독교인은 장사 지낼 때 뭐 '영면하십시오!' 이런 말을 하면 안 돼요.
그건 '영원히 잔다'는 말인데, 영원히 자는 걸 누가 원합니까?
깨어나야지요.
자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깨어나기 때문에 즐거운 것입니다.
'영면'이란 말은 성경적 용어가 아니에요.
계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자고 있지 않죠)
요한계시록이 신약성경의 다른 어떤 책도 말하지 못하는
요한계시록만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다른 어떤 책도 말하지 못했는데
계시록에서만 (독점적으로) 말한 것 중의 하나는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다른 신약 성경 저자도 말하지 못했는데
요한은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과 하나님 아버지가
하늘에서 누리시는 영광을 봤어요. 그리고 그것을 기록했습니다.
그 면에 있어서도 다른 어떤 신약성경이 말하지 못한
계시록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3. 또 하나는, "쉰다"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 이전에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의 기도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계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
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이건 이 순교한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말씀입니다.
순교한 사람들이 당연히 죽었죠.
이 죽은 자들이 예수님이 재림 하시기 전에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를 말하는데요,
그런데 여기에 '영혼들이' 라고 했어요.
그들이 '제단 아래에 있다'고 했어요.
거기서 '그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그래요.
기도의 내용은, 공의의 심판을 구하는 것입니다.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
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이 요청에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냐면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의 '임시 상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잠자고 있는 건 아니고
잠자고 있다면 활동을 할 수가 없죠.
깨어 있는데, 하나님께 하나님의 신원하심과 심판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주님이 (하나님인지, 예수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잠시 동안 쉬되' .. 그러니까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은.. '쉬고 있다'는 뜻입니다.
'쉰다'는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우리가 몰라요.
어렴풋이는 알겠지만, 나중에 천국에 가봐야 정확히 알겠죠.
뭐 야자수 드링크를 마시면서 낮잠을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지금 이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외쳐 기도하고 있는' 것이고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얘기죠.
이것은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이죠.
이와 비슷한 성경 구절이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여기서 '증인'이란, 이전에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을 일컫는 거죠.
그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으냐 하면 '구름같이 둘러싼' 이라 했죠.
마치 경기장의 관중을 상기시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이들이 무엇을 지켜보고 있느냐?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지켜보고 있다는 거죠.
*'쉰다'는 게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언급이 11장에 나옵니다.
히11: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말은, 믿음으로 살았지만
자기가 믿었던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는 말이죠.
(재림, 최후의 심판, 그리스도의 승리, 몸의 부활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구름 같이 둘러싼 관중처럼'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이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입니까?
왜냐하면 아직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은, 믿음으로 살던 사람은 죽은 후에도
자기가 살아있을 때 간절히 믿음으로 바라던 것들을
기다리고, 바라고, 응원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말씀처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언제 신원하시겠나이까, 언제까지 심판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정리하면
생각해보면 긴장이 되는 부분이에요.
우리는 죽은 다음에는, 모든 일을 쉬고 그냥 피서갈 줄 알았는데
성경 몇 곳에 '쉰다'고 했으니까요.
-그게 아니고 '하늘에서 같은 믿음을 가지고 기다린다'는 겁니다.
-지켜보면서
-기도하면서
그건 그냥 '자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죠.
그러니까 성경이 '잔다'고 말하는 것도.. '쉰다'는 의미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진짜로 자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쉰다'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쉼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다른 구절과 대조할 때)
◑3. 죽으면 낙원이나 음부 같은 '임시 처소'에 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한 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눅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오늘'이라고 하셨어요.
또한 '나와 함께'
여러 사람들은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에 부활하시기 전까지
지옥에 내려가셔서 잡힌 자들을 살리셨다느니.. 이런 설이 있지만
예수님이 이 강도에게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낙원이 어디를 말하는지는 우리가 몰라요.
그래서 '임시 처소'라고 일단 부르는 겁니다. *중간 상태
'임시 처소' 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이 제일 임하신 후에는
낙원이 아니고, 새하늘과 새땅의 새예루살렘 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임시 처소'라고 일단 부르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막12:18절 이하에 보면,
사두개인들은 의문으로 가득 찬 채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확신으로 가득 찬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내세에 대하여 질문할 때
예수님은 한 번도 모호한 대답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분명하게 대답하셨어요. 사복음서에서 다 마찬가지입니다.
요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본문 마가복음에서도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막12: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
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금 살아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시며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하셨는데, 모세가 그 말을 들은 것은, 4백년 종살이 끝나는 지점이에요. 아브라함이 살았던 때보다 적어도 6백년이 까마득하게 지난 시점인데, 다 잊혀졌을 만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마치 지금 하나님 곁에 살아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가 영혼불멸설과 다른 것은 (영혼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기독교는, 지상에서 연장된 영적인 세계에 들어간다든가,
영혼이 불멸해서 계속 존재한다든가 이런 개념이 아니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죠. '죽음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거죠.
죽음을 전제하고, 그 이후의 삶을 말하는 게 아니고
죽음을 취소하는 의미입니다.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겁니다. 그걸 보여주려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어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몸으로 부활하셨어요.
영적인 부활, 상징적인 부활이 아니에요. 죽음을 이기신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믿는자들도
'내가 마지막 날에 그들을 일으키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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