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예배와 온전한 기쁨 삼하6:11~22 2020.02.09.
▲6: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언약궤를 간절히 다윗성에 모시고 싶었지만
1차 시도에 '웃사의 죽음'으로 인해 실패하고 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마음에 굉장히 많이 상심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석달이 지나서 보니 :11
언약궤를 옮겨놓았던 오벳에돔의 집이 많은 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1차에 시도했던 '언약궤를 옮기는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2차 시기에는 그 방법을, 율법에 따라 올바르게 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1 차에서는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고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언약궤를 레위인들이 채에 꿰어서 어깨에 메고 갔죠.
(언약궤를 손 대지 말라는 것이죠. 민4:7~8)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서 규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규정을 주셨는가요?
그 언약궤의 덮개위에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 수레나, 예전, 예식에 임한다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이 직접 운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화려한 성소나 성전보다도
예배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만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어떤 만남에 초대를 받았는데 가보니까
장소가 너무나 화려하고, 좋은 곳이고, 음식도 좋고 뭐 모든 프로그램이 좋아도
정작 만나는 상대방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형식에 불과한 것이죠.
1차 시도에 실패했던 다윗의 마음은 상당히 더 겸손해지고 갈급해졌습니다.
13절에 '여섯 걸음을 갔을 때 소와 살진 양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했어요. 주1)
△자 우리는 인생에서 이렇게 뭔가에 대해서 간절해 본 적이 있는가요?
대학시험이 끝나고 나서 합격자 발표할 때 굉장히 간절했었던 기억이 나지요.
또 고시공부를 하셨던 분들은, 몇 년씩 고시원에 들어가서,
독서실을 밤을 새면서 공부할 때 굉장히 간절함이 있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만큼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해 줬으면..' 그런 마음이 생겼을 때도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서 '과연 나는 하나님을 향해서 다윗이 느꼈던
영적인 간절함이 있는가, 그런 것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내 영혼안에 그런 간절함이 문득문득 올라오는데도
나는 그것을 덮어놓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자신을 좀 돌이켜 보기를 원합니다.
이어지는 14절에 그의 간절함이 어떻게 표현됐는지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14절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언약궤가 다윗 성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1차에 실패를 했기 때문에 2차에는 정말 걸음걸음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조심해서 운반해 갔던 것이죠.
그래서 처음에 여섯 걸음만 가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고 :13
(여섯 걸음 떼고 나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성공했다고 제사 드림)
그렇게 조심스러움과 간절함으로 언약궤를 모셔오다가,
기럇여아림에서 다윗성까지 거리가 약 15킬로 돼죠.
그 살얼음 걷듯 했던 먼 거리를 마치고, 언약궤가 드디어
다윗성 성문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다윗은 감격의 폭발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온 힘을 다해 춤을 췄던 것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시절에 동기들과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갔었는데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춤을 추는 걸 봤어요.
그들의 민속 노래를 틀어놓고, 조금 단조로 우울한 곡에 맞춰서
천천히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는 것도 좋았고
아주 경쾌하고 빠른 곡에 맞춰서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것도 봤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춤을 췄겠죠.
다윗은 온 마음을 다해 제사했고, 또 온 몸을 다해, 온 힘을 다해 춤을 췄습니다. 몸으로 드리는 제사,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린 것이죠.
△제가 2004~2005년에 청년부를 담당할 때였는데요. 밴쿠버로 가기 전이었죠.
토요일날 저녁 5 시에 모였습니다.
그때는 주 5일제가 아니라 6일제 였기 때문에
토요일에 다들 직장에 갔다가, 퇴근하고 청년들이 모였어요.
굉장히 많이 지쳐있는 청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전력으로
예배드리는 그런 예배였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예배가 많이 부흥을 했어요.
충만해지고 사람들도 많이 늘고...
근데 한 석달쯤 지났을 때 한 자매님이 등장했어요.
그 자매님은 예배실 오른쪽 맨 앞에 앉아있다가
딱 찬양이 시작하면 일어나서 복도에 나와서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췄어요.
긴 치마를 입고 춤을 추셨는데, 저는 '그런가보다..' 그러고선 지켜보았죠.
그런데 2 주, 3 주 이렇게 지나니까 사람들이 저한테 와서 그러더라고요.
'저 자매의 춤을 멈추게 하십시오!'
그래서 제가 약간 의아해했어요. 그래서 제가 정색을 하면서
'나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첫번째,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예배를
내가 무슨 자격으로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나는 저렇게 춤출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럽습니다.
두 번째는, 아니 누구한테 가서 같이 춤추자고 한 거 아니지 않느냐?
누구를 방해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
세 번째는, 예배는 하나님을 집중해야지 왜 그 자매를 쳐다보고 있느냐고?'
그런 얘기를 제가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유하게 춤추며 기쁨으로 찬양하는 것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항상 찬양 인도하는 한영철 전도사님 찬양인도자를
제가 참 많이 좋아하는데, 하나님 앞에 정말 뜨겁게 찬양합니다.
그래서 해외에 집회가 있을 때 가끔 같이 가기도 하는데요.
한번은 해외 비전 교회에서 저녁 집회를 하는데
90% 이상 성인 성도님들이시죠. 그런데 찬양을 시작하면서
바로 그 성인 성도님들에게 '오늘은 막 뛰며 춤을 추며 찬양을 합시다'는 거예요.
제가 순간 긴장했어요. '뭐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과연 얼마나 반응을 할까?
좀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실까?'
게다가 이제 저하고 그 교회 담당목사님하고, 둘이 맨 앞줄에 있었거든요.
근데 뭐 춤을 추자고 제안을 했는데, 저희가 가만히 목석처럼 서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물론 제일 열심히 뛰며 찬양했어요.
물론 저는 몸치 입니다.
제가 이십 대 때 아웃리치 여행을 하는데,
아웃리치 가면 앞에 나가서 다같이 워십 댄스도 하잖아요.
전부 다 연습을 해야 된다고 해서, 저도 워십 팀에 포함되어서 열심히 연습했는데,
한 두 시간 지나서, 가르치는 분이 저를 가르쳐 보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해서 나가시라고요. 그래서 그 팀에서 제가 탈락한 적이 있어요.
그 정도로 제가 몸치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뭐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큼은 안돼도
내가 하나님 앞에 춤을 추고 뛰면서 찬양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지금 제가 '꼭 반드시 춤을 춰야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과연 우리 안에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려는 기쁨이 있는가?'
원래 점잖은 사람이라서, 기쁨을 몸으로 잘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러실 수도 있겠죠.
그러나 여러분 안에 여러가지 상황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기쁨을 표현해봤던 적들은 당연히 있을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대학에 합격했을 때
-너무나 들어가고 싶은 회사에 입사하게 됐을 때
-점프 하던지, 손을 치켜들던, 외치든, 샤우팅을 하든.. 뭐든 하지 않았겠어요.
축구 좋아하시는 분들은, 월드컵에서 상대 팀을 꺾었을 때
풀쩍풀쩍 뛰면서 기뻐하지 않나요?
예전에 술 좋아하시던 분들은, 술을 드시면서 또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즐거워하지 않으셨나요? 우리는 사실 이렇게 기쁨을 표현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세상적인 엔터테인먼트는 늘 충만하게 그런 삶을 살면서
우리 안에 영혼의 기쁨은 존재하지 않을까요?
△다윗의 인생을 보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기뻐했어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과 기쁨의 표현을 마음껏 올려드렸어요.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하나님, 내가 단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는데 One thing!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자기 인생이 너무나 평안할 때 그리고 나라가 태평성대 때
이 노래를 한 줄 아십니까? 아니죠.
2절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합니다.'
3절에서는 '군대가 나를 대적해서 나를 둘러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 절박함가운데, 쫓기는 한 가운데서
'나는 이 전쟁이 빨리 끝나고 하나님 앞에 가서 성전에서 예배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 우리가 다윗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를 잘 알고 있잖아요.
그는 탁월한 장수였지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기쁨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의 기쁨이 더 컸던 사람입니다.
그는 최고의 왕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지만
왕좌에 오르는 것보다, 하나님 보좌앞에 엎드리는 것을 더 기뻐했던 사람이었어요.
주변에 그가 정복하지 못한 민족이 없을 정도였지만
'하나님만이 온 세상에 유일한 통치자가 되십니다!' 이것을 선포할 때
그의 영혼가운데 가장 큰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높여 드릴 때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의 희열을 느꼈던 사람이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예배의 기쁨은, 구원의 기쁨을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나의 인생을 건져주신 분, 이렇게 나의 인생을 회복해주신 분,
그 하나님에 대한 구원의 체험이, 그의 예배에 감격으로 표현됐던 것이죠.
자 그런데, 그런 다윗의 예배에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게 16절인데요.
▲16절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이 왕으로서 그렇게 기뻐하고 있는데
왕비인 미갈이 창문 밖에서 바라보며 비웃고 있었죠. 춤추는 다윗과 굉장히 대조를 이루는 장면입니다.
20절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왕이 체통도 없이, 신하들도 아니고, 신하의 계집종들 앞에서
'몸이 드러날 정도로 그렇게 껑충껑충 뛰면서 춤을 춰야 되느냐?
그게 뭐 하는 짓이냐?'
미갈이 볼 때는, 다윗이 어린아이들이나 할 법한
아주 유치한 감정을 드러내고, 유치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지점에서 질문하는 것은
'순수함과 유치함의 차이가 무엇일까?'
미갈은 다윗의 영적인 동심을 파괴하려고 했어요. 왜 그럴까요?
자신의 영혼이 동심의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이겠죠. 주2)
자기가 영혼이 동심이 파괴된 사람은,
다른 사람 것도 파괴하려고 하거든요.
△제가 20여년 전에 사역을 시작할 때, 저는 청소년 사역을 먼저 했는데요.
그 당시에는 중등부 고등부 학생들 중심으로 '파워 웨이브 Power Wave' 란
예배모임을 만들었어요.
그 당시에 '청소년들이 하나님 앞에 가장 행복한 예배를 드릴 수 없을까?'
그래서 '패션 Passion' 이라는 집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중고생들이 서빙고 본당에 들어오려고
몇 천 명이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줄을 서서 들어와서
한 시간 찬양, 한 시간 설교, 한 시간 기도...
뜨겁게 춤을 추며 뛰면서 찬양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울면서 기도하고
정말 그 예배가 충만한 예배였어요.
그래서 저희가 다른 교회들과도 연합집회를 시도하게 됐고
한 번은 부산에 있는 교회에 가서도 청소년 집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눈높이에 맞는 음악(찬양)을 하기 때문에
그게 좋아서 그 집회에 올까요?
저희가 그 '패션(열정)'이라는 집회를 하기 2년 전에
'청소년 열린예배'라는 것을 시도해 봤습니다.
청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문화적인 순서들, 음악들, 그런 걸 많이 사용했어요.
첫번째 두번째는 좀 오더니.. 세번째 네번째 시간에는 청소년들이 안 오는 거예요.
결국 나중에는 실패해서 문 닫았습니다.
제가 청소년들에게 물어봤거든요. '아니 왜 안 오냐?
너희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순서와 프로그램을 많이 하는데...'
그랬더니 그 당시에 청소년 친구들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전도사님, 그 정도는 방송국 공개홀에 가도 다 볼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얘기냐면 '우리가 그런 문화적인 미끼 때문에 오는 줄 아느냐?
우리도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러 오는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하는 거죠.
여러분, 청소년들도 단순히 문화적인 컨텐츠 때문에 오는 게 아닙니다.
이곳은 정말 영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그 감격과 은혜가 있어야만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거든요.
인간안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주릴 때 음식을 먹는 것도 기쁜 것이고요,
목 마를 때 물을 마시는 것도 기쁘고
또 사람들과 교제하는 기쁨도 굉장히 큰 기쁨이죠.
놀이나 유희를 통해서 얻는 기쁨, 사회적인 성취나 성공을 통해서 얻는 기쁨..
기쁨의 근원은 다양합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기쁨은 '영혼의 기쁨'이죠.
나를 변함없이, 온전한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이렇게 기뻐하는 존재가 된 것은, 어떤 이유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도 기뻐하신다'는 표현이 나오고요.
그 '주님의 기쁨을 우리에게 나눠주신다'라고 되어 있어요.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지금 이 시간에 '온전한 기쁨'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면,
기쁨은 우리 말이고, 한자는 '쾌락'입니다.
쾌락 이란 말의 뉘앙스가 좀 안 좋아서 그렇지, 사실 쾌락은 가치중립 입니다.
철학사조에는 에피쿠로스 주의, 쾌락주의 라는 게 있잖아요.
쾌락주의 라는 건, 쾌락만 있으면 그게 '절대 선'인 거예요.
그런데 쾌락을 추구하는게 절대 선이 될 수 없는 게,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걸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고요.
-불법으로 이득을 취하면서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험악한 말을 하고 공격적인 말을 하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그거를 기뻐하는 사람도 있어요.
-비뚤어진 성적 취향을 가지면서 그것을 기뻐하는 사람도 있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쾌락, 기쁨'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에요.
그러므로 '쾌락, 기쁨'이라는 것 자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만
극단적으로 그것을 지향하는 '쾌락주의'도 잘못된 것이고
또 정반대로 극단적으로 지양하는 '금욕주의'도 잘못된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온전한 기쁨'이 누려지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뻐하세요.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기뻐하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건강한 기쁨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자 그러면 다윗이 어떻게 미갈에게 답변을 했는가요?
▲21절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배우는 참된 온전한 기쁨이 무엇인가요?
1) 온전한 기쁨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 앞에 춤 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춤춘 것이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사람 앞에 평가받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면
늘 불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만족과 불만사이를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 인생을 평가하고 인정하는 그 사람들이
온전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리고 영속적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품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임재안에 들어갈 때만, 온전하신 분 안에 들어갈 때만
온전한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있어요.
제가 앞서 예배의 여러 경험들을 나누었는데요.
왜 어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지 못할까요?
그런 기쁨을 표현을 못할까요?
사실 팔순 노모 앞에서 육순 아들이나 딸은, 어린 아이에 불과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팔십 노모께서, 육순 자녀가 밖에 외출하려고 하면
'건널목 조심하고, 밥은 챙겨 먹고 다녀라' 이렇게 얘기하시는 거잖아요.
나이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병원에서 그런 분을 뵈었는데
식당이나 병원이나 공공장소에서 아주 연세 많으신 팔순 구순의 노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공손하게 아이처럼 섬기는 육순의 자제분들을 보면
참 마음이 이렇게 따뜻하고 훈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똑같은 상황에서
'내 나이가 있지.. 내가 체면이 있지.. 내가 사회적인 지위가 있지..'
그러면서 느리게 움직이시고, 잘 못 알아들으시는 노부모님에게
막 화를 내고 이래라 저래라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게 되잖아요.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부모님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여러분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내 체면이 하나님의 임재보다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내가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상에서 나이가 백세가 되든, 아니면 최장수를 살았던 므두셀라처럼
969세를 살던..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광을 부려야 되는,
사랑의 노래를 불러야 되는 어린 자녀들이 아닙니까.
제가 밴쿠버에서 부서들을 탐방하면서 보다가 충격적으로 본 장면이 있어요.
한번은 유치부에서 찬양을 하고 있는데
앞에서 선생님들이 율동을 하니까
네 살 다섯 살 어린 아이들이 너무 즐거워서 율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율동을 하지 않고 저 뒤에 벽에 뒷짐지고 서 있는 애들이 있더라고요. 6살, 7살들이 딱 얼굴 표정에 '내가 이 나이에 그런 거 하게 생겼나?'는 거죠.
아동부 가면 똑같아요. 6학년 애들이 그럽니다.
중고등부 가면 똑같아요. 고 3 애들이 그럽니다.
다 해봤던 거고, 별 재미도 없고, 신선하지도 않고 뒤에서 그냥 고개 푹 숙이고
스마트폰이나 하고... 합니다.
여러분 인생에 나이 라는건 상대적인 거에요.
근데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잖아요.
그분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며 예배하는 존재인 줄로 믿습니다.
2) 온전한 기쁨은,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신 인생,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세워주셨다!' 다윗의 고백이에요.
'아니 목동으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부모도 버리고, 형제들도 미워하던 나를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왕으로 세워주셨는데
내가 어찌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겠느냐?'
저는 이 장면에서 미갈의 인생과 비교를 해보니까
너무나 충격적인 거에요.
우리가 아까 미갈이 왜 기쁘게 찬양을 할 수 없는 사람인지
인생의 이유들을 열거했었잖아요. 주2)
그러나 반전의 증거가 여기있습니다. 그게 다윗입니다.
기뻐할 수 없는 인생의 이유를 찾는다면
다윗의 인생이야말로 정말 심각한 인생이었잖아요.
'나는 노래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난 찬양 못 하겠다' 한다면
다윗이야말로 침묵을 해야 되는 인생이었잖아요.
근데 그런 다윗이, 가장 많은 찬양시를 남겼습니다.
그는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던 목동시절에도
빈 들에서 밤을 새며 노래했던 사람이에요.
사울에게 버림받고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던 그 광야시절에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수많은 그 시대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게 했고, 감동시켰고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시킨 그런 찬양
또 그런 예배를 하나님 앞에 올렸드렸던 사람입니다.
다윗이 왜 그렇게 찬양했을까요?
내가 찬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거에요.
내가 찬양하지 않고는, 인생에 아무런 노래할 근거가 없고
인생에 즐거운 게 아무것도 없는 이 상황에서
찬양조차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송두리째
절망과 슬픔의 늪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니 그렇게 하나님 앞에 찬양할 때마다 내 인생을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니까..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거에요.
찬양하는 것이 너무나 큰 기쁨이었던 거에요.
♪주 음성에는 참 기쁨없도다♪ 이런 찬송가가 있잖아요.
주님의 음성, 내가 정말 고난의 한 가운데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주님이 그 위로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 외에는
다윗의 인생에 더 다른 기쁨이 없었습니다.
♪날 사랑하신 주 늘 계시옵소서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
여러분 이 찬양이, 사실 멜로디는 굉장히 구슬퍼요.
그런데 가사는 '기쁘고 기쁘도다!'
마치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 편지하기를
자기가 로마 감옥 안에 갇혀서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노라' 이야기하는 거죠.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이 마냥 희낙락해서 노래하고 춤을 춘게 아니었다는 것이죠.
인생의 모든 고난과 역경, 인생의 모든 슬픔과 아픔과 외로움을 다 겪은 이후에도
이러한 찬양과 춤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던 거에요.
영국의 낭만파 시인 중에 블레이크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블레이크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순수한 것, 그것은 순진함일 뿐이다.
나이브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세상의 모든 어둠을 경험하고도 순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순전함이다!'
여러분 다윗이 집에서 곱게 곱게 잘 자라서, 인생이 늘 꽃길을 걸었기 때문에
노래하고 춤추는 그런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야말로, 야곱처럼 험악한 세월을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그는 찬양했어요.
다니엘처럼 타국을 전전하면서 살지 않았습니까.
모세처럼 평생을 외로운 지도자로 살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단 한 가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이 영혼의 기쁨!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예배하는 그 기쁨!
그 기쁨 하나를 붙잡고 살았던 것이에요.
저는 교회에 10 여년째 이렇게 사역을 하고 예배를 같이 드리고 있지만
저희 교회 예배는 굉장히 잘 준비돼 있고, 잘 정돈돼 있고, 나이스 합니다.
밴드도 있고, 싱어팀도 있고, 성가대도 있고, 음향, 영상, 조명, 안내팀,
또 성찬팀, 주차팀, 심지어 1분 단위로 씌어있는 큐시트 까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형식을 우리가 왜 준비하는가요?
이 모든 형식은, 다윗이 하나님을 만났던 그 감격을 위해서 준비돼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영혼의 감격이 없이, 우리가 형식만 따라가며 예배드리고
그냥 가버린다면, 예배의 심장이 다시 뛰도록 만들어야 돼요.
예배의 감격이 다시 회복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구경하는 구경꾼의 예배가 아니라
내가 영이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진정성이 있는 예배자로서 참여하는 그런 예배!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오늘 다윗이 보여준 것처럼
롬12:1절이 말씀하는 것처럼 '그냥 자기 자신이 예배자 일 뿐만 아니라
산 제물로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
'왜 그렇게까지 예배를 해야 되나요?' 라고 반문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습3:17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이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여기 '기뻐하시니라'는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춘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천상에서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시면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나 기뻐서
마치 이제 아장아장 걷는 손자 손녀를 보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막 그 앞에서 재롱을 부리잖아요.
애가 재롱을 부려야 되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재롱을 부리는 것처럼
천상에서 하나님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계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점잖을 빼고 앉아있을 수 있는가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셨는데
어찌 나는 그분께 내 존재를 산 제물로 드릴 수 없겠는가요?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에, 평생을 살아가는 그 시간도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거하는 그 시간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게 합당하신 분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절망과 수렁에서 건지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
그 구원의 감격이 있다면, 다윗처럼 예배하는 기쁨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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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 대상 15:11에 의하면 이들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레위인 우리엘, 아사야, 요엘, 스마야, 엘리엘, 암미나답 이렇게 8명이었음을 알 수있다.
'여섯 걸음을 행하매' 혹자는 '여섯 걸음을 행할 때마다'로 해석하나 결코 지지할 수 없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이 견해를 따를 경우 다윗이 드린 제물의 총수는 엄청난 것이 될 것인데 대상 15:26에는 그 수가 모두 수송아지 일곱, 수양 일곱 마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2) 미갈이 왜 그랬을까요? 미갈은 사울의 둘째딸이죠.
다윗이 청년이었던 시절에 서로가 사랑해서 결혼했어요.
하지만 다윗이 사울 때문에 도망갈 수밖에 없었고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에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그러나 그 이후에 자기 부친 사울이 그녀를 발디엘 이란 다른 남자에게
재혼 시켜버리죠. 그렇게 다윗이 10년 동안 광야에서 방랑자의 삶을 살았고,
다윗이 유다 족속의 왕이 된 이후에도 통일시키기까지 7년 반이 걸렸다고요.
그러니까 미갈은, 거의 17년 동안을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았어요.
그런데 통합 이스라엘 왕국이 된 후에, 다윗이 자기 아내를 되찾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자 그러니까 불행하게도 그녀는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기쁜 마음으로 예배
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어요.
아버지 사울 왕의 실패, 이것은 가정의 뿌리 깊은 상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앞으로의 평생 지고 가야되는 수치였습니다.
둘째 남편인 발디엘이, 다윗에게 돌아가는 미갈의 등뒤에서 계속 좇아오면서
눈물흘리며 우는 그 장면을 보면서 '야 정말 이 여자의 인생은 기구하다.
어떻게 아버지가 사울이고, 다윗을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재혼한 남자랑 살다가, 17년 만에 전남편이요, 첫사랑이자,군주가 된 다윗에게
다시 돌아오게 됐죠. 아내로 돌아왔고, 왕비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이미 그녀의 인생에는 '불행'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젊은 날의 순수함도, 기쁨도, 열정도 다 빛이 바래고 사라져 버렸어요.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에 정말 스스로 내 힘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다면
하나님 앞에 반드시 가지고 가지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여러분의 내면가운데 꼭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건강하지 못한 영혼, 치유 되지 못하면
미갈처럼 두 가지 이상한 증상을 보이기 때문이에요.
첫번째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지 못하는 마음,
영혼의 감격, 영혼이 기쁨을 표현할 수 없는 상태,
영적인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이죠.
두 번째는 가족과도 이웃과도 기뻐하지 못하는 상태,
롬12: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는데.. 이게 건강한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즐거워하는 사람을 보면 '뭐가 저렇게 좋아?'
우는 사람들이 있으면 '왜 저렇게 질질 짜?'
이런 내면의 돌처럼 굳어진 마음, 강팍한 마음이 되어버리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