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민수기에 제일 먼저 나오는 말씀은 진군을 위한 일꾼들, 군사들, 리더들은 세는 count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저 사람들을 카운트 했다'는 것으로 보는데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그냥 점프해서 넘겨버리는 부분들이 있어요. 민수기같이 숫자가 너무 많이 나오면 넘겨 버리고, 누가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고 또 어느 지파가 몇 명이고, 몇 명이고 ... 그러면 읽지 않고 넘기죠.
근데 것은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읽는 것입니다. 사실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숫자는 오늘날 우리가 물리적, 정량적으로 숫자의 개념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역사를 기록할 때 앞부분에 인구조사표나, 계보를 항상 거기에 기록합니다.
그 이유는, 그 계보에 나오는 숫자들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함축,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민수기 1장은 바로 이 숫자로 시작하는데요. 이 숫자가 가지는 의미를 우리가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민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여기서 '계수할지니' 라는 말을 원어적으로 번역하면, '머리를 세우다'는 뜻입니다.
'계수한다 count'의 히브리어가 '나싸 로쉬'인데 *로쉬는 머리 그 원래 의미는 '머리를 세우다, 머리를 들게 하다' 입니다. lift up, rise up 그 외 '감당하게 한다 bear' 라는 뜻도 있죠.
당연히 그렇죠. 계수하려면 머리를 쳐들어야 쉽게 계수가 되겠죠. 그런데 이 말은 '그저 숫자를 세는' 목적이나 의미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민수기에서 '계수할지니'의 뜻은
-'지도자로 세운다'는 뜻입니다. -또는 '사람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의 가치나 능력을 인정해주고, 지지해준다..는 뜻을 담고 있죠.
'어떤 직무, 임무를 맡긴다'는 의미도 그 속에 내포되어 있겠죠. '인정해준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겠습니다.
즉 '글레디에이터' 나 '브레이브 하트' 같은 영화를 보면, 군대가 쭈욱 늘어 서 있고 장군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사열 같은 것을 하면서 그 군인들을 한 명, 한 명 격려해 줍니다. 아론이 그런 식으로 '계수' 한 거죠. '계수(머리를 세다, 머리를 들게 하다)'에 그런 뜻이 들어있다는 거죠.
랑게는 '점호하다', '정열하다'는 뜻의 군사적인 용어로 번역함이 좋다고 했죠. KJV는 'sum 총계를 내다'는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다른 영어성경들은 'census 인구조사'로 번역했습니다.
요지는 '숫자를 센다'는 말의 원어가 '머리를 세우다, 들다'인데, 단순한 숫자 파악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는 거죠.
광야 진군의 앞서서 사람의 머리를 세라는 것은 이것은 그냥 숫자를 세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광야로 나가려면 가장 급한 게 뭘까요? 제가 감히 모세라면, 먼저 음식과 물이 얼만큼 있는지 준비해야 하며 그 외 광야에서 생존에 필요한 기구들을 점검하고 준비할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의 준비는 먼저 각 지파의 리더들을 세우고 군대를 조직할수있는 20세 이상의 사람들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유대 랍비들은, 민수기1장의 주제를 '나싸' 라고 합니다. lift up, rise up 랍비 주석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말로 '계수하다 count'로 번역했죠.
그러니 모세는, 본문에서 단순히 숫자를 센 게 아니라 그들을 '세워준' 것입니다. 용사로, 군대로, 지도자로 세워준 것이죠!
◑1:3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2절에 나온 '계수'는 히브리어로 '나싸'였다면 3절에 나온 '계수'는 히브리어로 '파카드' 입니다. '방문하다 visit, 주의깊게 보다 pay attention to, observe'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영어성경에서는 주로 'number (숫자 세다)'라고 번역했죠. 아마 문맥에 따라 의역한 듯 보입니다.
사람의 숫자를 물리적으로 세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광야진군을 앞두고 준비하는 일은 그들의 머리를 세워주는 일입니다. 그들을 인정해주고, 그들을 주의 깊게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니까요!
◑적용
여러분, 우리는 사람을 숫자로 세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가 돈이 얼마 있는지 -얼마나 큰 집에, 몇 평에 사는지 -얼마짜리 큰 차를 타고 다니는지.. -키가 얼마나 큰지.. -의료보험을 얼마나 내는지.. -학위를 몇 개 가지고 있는지..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세지 않으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세고 계시죠.
근데 실제로 구약에서 하나님은 권력을 목적으로 숫자를 세는 그런 인구조사에 대해서 진노하셨습니다. 삼하24장에 보면 다윗이 그런 의도로 인구조사를 했다가...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오만하게 자기 권력을 드러낼 의도에서 사람의 머리를 단순히 계수 하는 것에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숫자를 세는 분이 아니십니다. count, number
대신에 사람을 세워 주시고, 주의 깊게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lift up, observe
오늘날 교회들이 성도 머리 숫자를 세는 일에 너무 과도하게 민감하지는 않는지요! 그것과 성도의 머리를 세워주는 일은, 전혀 별개의 다른 일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면서 자녀들의 목표, 그 성취를 숫자로 정해 놓고, 그 숫자 달성을 세고 있는지요? 아니면 진정으로 우리 자녀를 인격으로 인정해주고 있는지요?
광야로 나가기 전에 우리가 준비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도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 되어야 될까요? 서로를 세워 주는 겁니다. 단순히 그가 가진 숫자를 세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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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보다 나은 사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막9:40
여기서 '위하는' 이 헬라어로 휘페르 ὑπέρ 인데 *영어성경에 for 또는 on으로 번역 이 단어는 above, hyper (더 위에) 로도 번역됩니다. 원래 전치사가 여러 뜻으로 번역되죠.
헬라어로 휘페르 ὑπέρ 가 above(위에) 뜻으로 번역된 구절이 마10:24절입니다. ↙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휘페르) 못하고,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휘페르) 못하나니'
그렇게 above로 번역해서 본문을 보면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보다 위의 사람이니라'
즉 '우리 보다 수준이 높은 자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해석을 하는가 하면, 지금 제자들은 다분히 '시기, 질투'하는 상황입니다.
앞서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으나 9:17~29 예수님의 제자 그룹이 아니면서도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서 9:38
제자들이 그것을 금하였다는 것은, 그 속에 다분히 '시기, 질투'도 포함되어 있는 상황이지요.
그때 예수님의 반응은 '우리를 위하는 for 자니라' ... 그 사람이나 제자들이나 똑같은 수준이 되지만 '우리보다 나은 above 자니라' ... 상대방을 더 추켜세워주는 워딩을, 예수님이 구사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교파장벽주의, 신학적 정통주의 등으로 타교파, 타신학 사람을 무시하고 깎아내리기 쉽지만
본문에서 예수님의 입장은, 그저 '동등하게' 대우하라.. 가 아니라 '더 존중하라'.. 입니다.
이것이 성경 또는 예수님의 평소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눅22:37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23:11
이렇게 예수님은 상대방을 동등하게 대하라가 아니라, 평소에 상대방을 나보다 더 존중하라, 높이라는 식으로 말씀을 가르치시고 몸소 행하셨습니다.
▲미국의 어느 교육청에서 한 번은 연구를 했었는데 <학생들에게 보충수업을 시키는 제도에 대한 연구>를 한 거죠.
보충수업은 학업이 떨어지는 애들을 모아서, 보충수업을 하는데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왜냐면 보충수업 대상자로 분류되는 순간,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나는 실패자다. 나는 탈락자다' 그런 자의식 속에서 학생들에게 학습 효과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죠.
근데 예외가 한 명 있었습니다. 한 여학생은 보충수업의 효과로 성적이 향상되었는데, 그래서 그 학생에게 연구의 초점이 맞춰진 거죠.
'도대체 모든 학생들에게는 보충수업에 전혀 효과가 없는데 왜 이 학생에게만 효과가 나타난 것일까요?'
그 여학생은 육상선수 였다는 거예요. 그 여학생의 보충수업을 지도한 교사는, 이렇게 증언했죠.
'제가 여학생에게 말한 것은, 열심히 공부하라는 게 아니라, 그 학생이 운동할 때, 육상경기 할 때, 힘껏 열심히 응원해 주었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찾았다는 거죠. 그 운동 잘 하는 학생의 운동을 격려해주고, 응원해주고, 지지해 주니까
그를 응원해 준 그 힘이 그 여학생에게 변화를 일으켜 열심히 공부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를 응원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부어질 때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우리 가운데 부어지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그래서 죄를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적극적으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죠. 그 교사와 여학생처럼)
하나님을, 자기가 잘못하면 책망하고 진노만 하는 그런 분으로만 알면 우리는 점점 자기를 보호하게 되고, 겉으로만 율법을 행하는 척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용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지, 격려, 응원을 경험한 성도는 즉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