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성전 건축의 본심과, 본의 아닌 위험성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는 본심
그저 '건축을 화려하게 하겠다'는게, 그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장막"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시행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매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집)
오늘 본문의 다윗을 보면서 놀라운 것이
하나님께 '도대체 하나님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지 않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것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 주변의 모든 민족들도 정복하고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높여주시고
왕궁 안에 들어가고
하나님이 '야 이제 다윗, 좀 헌신하지?' 이렇게 말씀할 타이밍이 되는데
다윗이 자기가 먼저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뭘 하고 싶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시는지,
나의 인생에 대해서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그런 거 눈치 보며 살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세워줄지/ 말지' 그런 것에 마음을 많이 두지 않았어요.
그게 그의 인생에 빅딜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게 자기 인생의 핵심 주제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저 다윗은 빈들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왕이 되어서도 늘 '나를 도와주시고 높여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게 너무나 황송할 정도로 감사한 거에요.
그런데 그런 하나님은, 오래되고 낡은 이동용 천막에 계시니
하나님께 좋은 집을 지어드리고 싶은 것이죠.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기특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 시대에 처음에 만들어졌고
다윗 시대에 계속 되었던 이 장막, 주1) '다윗의 장막'
이 "다윗의 장막"을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장면을 보면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행15:16 '이 일 후에 내가 돌아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을 것이다.
폐허가 된 것을 내가 다시 짓고, 내가 회복시킬 것이다.'
여러분 이 말씀은, 초대교회의 첫번째 공의회에서
사도 야고보가 말했던 메시지 중에 아주 중요한 첫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아모스 선지자가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무너져가던 때 전했던 메시지를 인용한 것입니다. 암9:11
'하나님은 다윗 시대에 이 장막이 너무나 그리워서
그 장막을 다시 짓고 싶으시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
그 이후에 아모스서에,
그리고 신약시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럼 왜 그런가요?
하나님은 가장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이 너무나 그립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포로귀환 때 재건했던 스룹바벨 성전에 대해서 추억하시는 것도 아니었어요.
가장 규모가 크고 현대식이었던 헤롯성전도
하나님이 추억하시는 것이 아니었어요.
가장 초라했던 가장 보잘것 없는 "다윗의 장막"을
하나님은 그리워하셨어요.
왜 하나님은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 추억을 했냐면
그 외적인 어떤 조건때문이 아니라
그 성소 안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 때문이었어요.
그 시대에 예배자들 첫번째는 다윗이죠.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예배자를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예배에 헌신한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에, 자기의 평생을 헌신한 사람이었어요.
참고로, 토미 테니의 <다윗의 장막>이라는 책이 있어요.
너무너무 좋은 책이에요.
예배에 관해서 너무나 성경적으로 잘 고찰을 했고
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는 책입니다.
그는 열정을 다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그 다윗 성에 모시고 싶어 했던 사람입니다.
과연 누가 그의 열심을 따라할 수 있을까요?
너무나 하나님의 임재가 들어오는 것이 기뻐서
정신없이 춤을 추었던 다윗!
다윗의 시대의 예배자들!
하나님은 다윗의 시대에 그 다윗의 장막에서 드려졌던 예배를
지금도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꿈의 예배'를 만들어 드렸기 때문이었어요.
*대상16:4~6, 37, 23:5절 등에 의거 매일 경배찬양을 드린 것을 알 수 죠.
(매일 경배찬양을 드렸으므로, 이렇게 했으리라 추정합니다.
1년 12달 동안 열심히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24반차 라는 제도가 원래 모세 시대 때부터 레위인이 섬기던 제도였는데,
다윗 때에, 거기에 '성가대'를 끼워넣은 것입니다.
원래 있었던 '성막 봉사'에 이제 '성가대'까지 끼워넣어서 확대, 시행된 것이죠.)
그런데 "다윗의 장막"은 매일 일주일 7일, 1년 365일
계속되는 예배와 찬양이 성소에서 끊이지 않도록 만들었어요. 아마 낮에만 드렸을 것임. 주2)
상상이 됩니까? 여러분 그 섬기는 팀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얼마나 헌신적이었겠습니까?
그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는 도시를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외적인 건물은 가장 초라했지만
그 예배는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보좌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실 수 있도록 만드는 예배였다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과거의 예배를 추억하시도록 만드는.. 그런 강력한 예배였어요. 행15:16, 암9:11
다윗이 그저 번듯한 집 하나, 하나님께 만들어 드리겠다는
말뿐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진심이 '아, 나는 백향목 궁에 있는데
하나님의 임재는 아직도 텐트안에 있다니...'
그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하나님께, 자신의 최선을 드리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에게는 자신의 왕좌보다, 하나님의 보좌가 중요했고
자신의 왕궁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더 중요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너무나 좋아하셨던 것이죠.
오늘 사실 하나님이, 다윗의 소원에 대해서
'괜찮다. 네가 무슨 나를 위해 집을 짓냐?' 하며 거절하시잖아요.
그러나 어찌보면 하나님은 성전이 필요가 없으신거죠.
'다윗, 너 같은 예배자라면 너 하나면 난 족하다!'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이에요.
사실 삼하7:1절과 2절에 보면 다윗의 고백이지만
나머지 16절까지 나오는 그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고백'이에요.
'야,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냐?
너를 향한 나의 생각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줄까?'
그게 하나님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향해서 '난 성전이 없어도 된다.
나는 너만 있으면 된다!'
이게 감격적인 예배죠.
하나님과 다윗이 서로를 향한 사랑의 고백,
본문을 '사랑의 세레나데' 이렇게 제목을 붙여도 될 것 같아요...
'하나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다윗아,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한다..'
이런 사랑의 고백이 오고 가는 진정한 예배,
중심을 다해서 드리는 예배인 것이죠.
◑성전건축의 본의 아닌 위험성
220925 사무엘하(5) 하나님을 위하여 (삼하 7장) | YouTube
*3분경 부터 녹취
왜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막으셨을까요?
역대상22장과 28장을 보면, 그 이유는
'다윗이 피를 흘려 많은 전쟁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삼상27:8~9의 전쟁 포함)
다윗은 전사로서 많은 전쟁을 치렀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최대한 확장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성전을 짓기는 어려웠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한 부차적 이유이고요.
본문 삼하7장에 따르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성전을 짓지 못하게 하신 데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삼하7:1 '주님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원수에게서 다윗왕을 안전하게 지켜주셨고,
그래서 다윗이 이제 자기 왕궁에서 평안히 살게 되었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이 외적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되었다는 말인데요.
다윗이 왕이 될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강국 블레셋의 잦은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1절은 다윗이 블레셋 군대를, 이스라엘의 영토로부터 완전히 몰아내어
더 이상 넘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마 그렇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하 6장과 7장사이에는, 적지 않은 시간 간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서는, 그 전쟁의 긴 과정을
1절에 짧게 요약하고 지나가는데요.
그 이유는 삼하6장과 7장을 연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6장에는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 일어난 일들입니다.
7장에는 다윗이 언약궤를 들여놓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6장과 7장이 언약궤로 연결됩니다.
언약궤는 사무엘기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지요.
언약궤 이야기를 통해 사무엘서가 전하는 메시지는
"언약궤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 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왕과 관련해서는 '신권' 과 '왕권'이라는 주제로 발전합니다.
언약궤를 앞세우는 것이,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앞세운 것 같지만
사실은 '신권'을 이용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수단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성전을 짓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날,
그날 밤에 주님께서 나단에게 말씀하십니다.
삼하7:5~7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
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휘장, 곧 천막 안에 있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살고 있는 백향목 궁은 화려한데
그에 비하면 성막은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면만 보았을 뿐, 본질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집은 성전이 아니라, 성막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전이 아니라 '성막'을 지으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셨을 뿐입니다.
출25장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시며
그 설계도를 자세히 알려 주셨습니다.
성막이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서 거기에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막에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구름이 덮여 있었고
그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투과하며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성막에 현현하신 하나님은, 자유롭게 이동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광야 40년간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에 구름이 이동할 때, 그 구름을 따라 이동했고
그 구름이 멈출 때, 그들도 멈추여 그곳에 진을 치고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묶여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에 따라 성막이 이동하고,
그 성막을 따라 이스라엘이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다릅니다. 성전은 이동할 수 없는 건물입니다.
성전을 짓고 하나님이 성전 안에 머무시게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은 이동하시지 않는 분이 됩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짓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전에 갇혀 계시지 않는 분입니다.
사람이 성전을 짓는다고, 하나님을 거기 가둘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무섭습니다.
성전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교회가 성전안에 머물게 되면
사람들은 그때부터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위해 정주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고
어디든지 가실 수 있는 자유로운 하나님은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성전 안에 가두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조종하고 싶은 유혹에..
'언약궤의 함정'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성막에서 → 성전으로의 변화는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일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정착했고
이제는 더 이상 이동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러 살게 될 터이니
하나님의 집도, 이제는 이동형 천막에서 → 고정형 건물로 바뀌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성전을 짓는 일 자체를 막지는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왕상8장을 보면, 언약궤를 성전의 성소에 모신 후에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가득찼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승인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일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후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던 그 나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고, '신권'을 단지 '왕권'을 강화하는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주되심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져 간 것입니다.
그 후로는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임했다'는 언급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 임하지 않으셨고
결국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겉만 화려한 건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예언자 나단에게로 관심을 돌려봅시다.
사무엘까지 이어진 사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예언자의 역할과
나라를 정치적으로 이끄는 통치자의 역할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세워진 후로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집니다.
예언자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 전달하고
왕은.. 통치행위를 통해 그 뜻을 온 나라에 실현하는 것으로 나뉩니다.
그래서 왕실에는 항상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왕은 늘 예언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이 뜻이 하나님의 뜻과 충돌할 때
그것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예언자가 있느냐?
그리고 왕이 그 조언을 받아들여서, 행동을 바꾸느냐 입니다.
다윗에게는 그런 존재가 있었습니다. 예언자 나단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 막으셨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남편 우리아를 최전선으로 내보내 죽게 했을 때도
예언자 나단이 하나님의 꾸짖음을 전달했습니다.
다윗은 그 때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엔, 이스라엘 왕실에 그런 존재가 없었습니다.
왕실에서 그 역할을 해야 할 존재는 제사장입니다.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예언자였듯이
또 엘리와 사무엘이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예언자였듯이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 왕에게 전달해야 할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에는, 제사장이든 누구든
왕의 뜻을 거슬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예언자의 목소리가
왕실에서 사라져버립니다.
그것은 성전이 왕에게 사유화 되어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신권이 왕권에 종속되어 버린 결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고자 했지만
한 장소에 고정된 건물로서, 왕궁 안에 있는 성전은
처음부터 이렇게 왕권의 도구가 되어버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성전이 아니라
왕을 위한 성전으로 사유화 되어버릴 '가능성'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기특하게 보셨습니다.
성전을 지으려 했기 때문에, 기특하게 보신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주되심을 이루려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뜻은, 하나님이 그의 왕궁에 주님이 되시게 하고
그는 하나님께 굴복하여, 그 뜻을 수행하는 종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5절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여기서 '집'은 히브리어로 '베트' 입니다.
구약성경에 '성전'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많이 쓰이는 단어가 '베트 (집)' 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가리켜서 그냥 '집' 또는 '그 집'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그러한 시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먼저 9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모든 원수를 물리쳐 주시고
그 나라를 평안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1b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워주겠다'
이 말은, '그뿐만 아니라, 나 주가 너의 집안을 한 왕조로 만들겠다는 것을
이제 나 주가 너에게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새번역)
'네가 나를 위해 집을 지어주겠다는 말이냐? 그 마음 고맙게 받겠다.
그러나 내 집은 짓지 말아라.
그 대신 내가 너를 위해 집을 세워주마!'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시는데요.
하나는 다윗 대신 그의 아들이 성전을 짓게 하시겠다는 약속이고
다른 하나는 다윗의 왕조를 영원히 튼튼하게 세워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첫번째 약속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성전건축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약속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의 왕위(왕조)를 영원히 이어지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이어지기는 커녕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면서, 다윗왕조가 일견 끊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워서
종국에는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고 믿고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망 신앙'입니다.
▲삼하7장에서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주신 말씀을 가리켜 '나단의 신탁'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망 신앙'의 근거가
바로 이 나단의 신탁입니다.
롬1:2~4 절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정의에
나단의 신탁에서 나온 두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의 씨'
-또 하나 '하나님의 아들' 이죠.
이 두 가지 개념이, 롬1:2~4절에 나오는 복음의 정의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롬1:2~4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고, 또 그 일을 실행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고자 하는 일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어른에게 주는 선물과 같아서
어설프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리 쓸모없고, 심지어는 위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대개 '무엇을 하느냐, 마느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업을 벌일지'
'어떤 시스템을 만들지'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지' ... 주로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일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한 일이
사실은 내 이름을 내는 일이 되거나
그저 자기 만족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저 하나의 관습이 되어
명목상으로만 하나님을 위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안 하는 것만 못 하겠죠.
그러나 우리가 하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마음 한가운데 주님으로 분명히 자리잡으시고
우리 삶에 하나님의 주되심이 한 걸음 더 진전되며,
공동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된다면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위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주님으로 삼는 그 마음입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려 하거나
자기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을 통해 내가 주님 앞에 온전히 무릎을 꿇고
주님께서 온전히 이끄시고 다스리시게 하는 그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잘 변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하나님을 위해 시작한 일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자주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는 성찰이 한 두 번으로 끝나면 안되고
평생을 통해 계속되어야 합니다.
성찰이 끝나는 순간, 모든 일은 관습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주님의 주되심을 이루어가는 사랑하는 모든 교우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대견하게 보시고 기쁘게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
주1) 다윗의 장막
다윗의 장막은 다윗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모세의 성막'이 모세에 의해 세워졌다면 '다윗의 장막'은 다윗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기원전 1050년에 다윗 왕이 75년동안 이방인의 손에 놓여져 있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왔을 때에 다윗의 궁 옆에 장막을 치고
그 안에 언약궤를 안치해 놓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곳은 '다윗의 장막'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다윗의 장막은 대략 40년동안 존속되어졌는데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기까지였습니다.
다윗의 장막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모세의 성막에서는 짐승을 죽이는 일과 태우는 일과 떡과 포도주를 진설하는
일과 분향하는 일과 피를 뿌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다윗은 '다윗의 장막'에서 일할 사람을 세웠습니다.
다윗은 레위 사람으로 하여금 다윗의 장막에서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의 할 일은 항상 여호와를 찬양하며 감사를 경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비파와 수금을 타고 제금을 치면서 찬양했습니다.
다윗은 가급적 큰 소리나는 악기를 사용토록 지시했습니다.
"[대상16:4]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5 그 두목은 아삽이요 다음은 스가랴와 여이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맛디디아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이라 비파와 수금을 타고
아삽은 제금을 힘있게 치고
:6 제사장 브나야와 야하시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
다윗 때에 레위 사람들 중 30세 이상된 남자들의 수가 모두 38,000명인데
그중의 4,000명을 성가대로 세웠습니다.
다윗 때의 그렇게 많은 성가대원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렇게 많은 성가대원을 두고서 예배를 드렸으니 얼마나 그 예배가 은혜 충만했겠습니까?
"[대상23:5] 사천은 문지기요 사천은 다윗의 찬송하기 위하여 지은 악기로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라"
다윗은 아삽과 그 형제들로 하여금 다윗의 장막을 총괄케 하면서
24시간 항상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이는 다윗의 장막에는 매일 열려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든지 매일 언제든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낮 시간만)
"[대상16:37]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
‘So he left there before the ark of the covenant of the LORD Asaph and his brethren, to minister before the ark continually, as every day's work required’
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