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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얼마만큼 살면, 살만큼 산 것인가?

LNCK 2023. 4. 25. 11:18

사람이 얼만큼 살면 살만큼 산 것인가? -  23.04.23 - YouTube
*위 설교 30분부터 녹취                ★ 호스피스 설교 모음 (잘 죽는 준비)

◈사람이 얼마만큼 살면, 살만큼 산 것인가?     눅2:25~33    23.04.23.

저희 교회에 처음 나오시는 분들은 
'이 교회는 왜 찬양을 그렇게 중요히 여길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것도 '즉흥찬양, 영적인 찬양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길까?' 

저도 설교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설교를 중점적으로 하기보다는, 찬양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성도님들이 예배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도록 도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면,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목사의 설교를 통해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지식만을 얻는 것으로는 족하다고 여기지 않고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경험해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보시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는 예배야말로 
강력하고 은혜로운 예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첫번째 반응으로 찬양을 했습니다. 

눅1장과 2장을 보면, 여기에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모든 인물들이 성령께서 충만케 하실 때 
찬양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사례가 엘리사벳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문안하는 소리가 들릴 때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기뻐뛰고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여자 중에 당신이 복이 있도다' 라면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다음에 찬양한 사람이 마리아입니다. 
소위 '마그니피캇' 라고 부르는 
'내가 주를 찬양합니다' 라는 찬양을 즉흥적으로 마리아가 불렀습니다. 

그 다음에 찬양을 한 사람은 사가랴입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사가랴의 입이 풀리면서 예언하고 찬양을 했고 

그리고 네 번째 사람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므온입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에 들어갈 때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시가 오늘 본문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뮤지컬을 보는 것과 같아요. 
사람들이 대화하다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엘리사벳, 사가랴,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죠. 
얼마나 감격이 되고,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면 하나님께 노래를 불렀겠습니까! 

우리도 자식이 대학에 합격을 했다든가 
누가 병이 나았다든가 하면.. 하나님을 찬양하겠지요. 
얼마나 이 사람들이 감사하면, 하나님께 이런 찬양을 불렀을까요! 

▲그러나 시므온은 경우가 좀 다릅니다. 
시므온은 자기 아내가 아기를 낳아준 것도 아니고 
자기의 무슨 소원을 이룬 것도 아닌데 
시므온의 찬양 내용을 우리가 곰곰히 읽어보면 

'자기가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으니, 내가 평안이 죽게 해달라' 라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사람이 어떤 경우에 찬양을 하느냐?' 
즐거운 일, 성전 미문 가에 앉은뱅이가 일어섰을 때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는 것처럼 
강력한 은혜를 경험할 때 찬양하겠지... 라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러나 시므온은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이제 세상 떠날 때가 됐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사실입니다. *주제
여러분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눅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 말만 들으면 무슨 말인지 약간 의미가 모호할 수 있습니다만
<북한어 성경>을 읽어보면  (*북한어성경 : 북한선교기관인 모퉁이돌선교회가
2021년 펴낸 북한식 표현으로 성경 66권을 번역 출판함)

'주님 이제 당신의 종이 약속하신 대로 평안히 죽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정확한 번역이에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2:29절 말씀은
설교자는 '평안히 죽게 해 주십시오' 즉 자기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라고 해석, 설교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찬양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다 천국을 믿고,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천국의 갈 때가 되면 어느 누구도 (죽음을) 이런 식으로 환영하지 않습니다. 

가는 사람도 환영하지 않고, 떠나보내는 사람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가는 사람도 찬양하지 않고, 떠나보내는 사람도 찬양하지 않습니다. 

떠나보내는 사람은 그렇다고 칩시다.
어느 자식이 부모님 앞에서 '아버지, 천국가실 준비하세요!' 
이렇게 대놓고 말한다면 불효자식이죠. 

그러나 적어도 아버지는 '내가 이제 갈 때가 되었다. 너희는 대장부가 되어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도 너희를 위해 기도하리라! 
하늘 아버지여, 나를 평안히 떠나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정말 믿는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이 시므온의 기도문에서 
우리는 성도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첫째는 사람이 <얼마만큼 살아야, 살 만큼 산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만큼 살아야 여한이 없고 
'살 만큼 살았어, 이제는 갈 준비가 되었어!'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 낳고 딸 낳고, 집을 짓고 이층집을 세우고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재미있는 곳에 가고 
맛있는 음식 다 찾아다니며 먹고, 여한이 없이 살면... 살만큼 그럼 산 것입니까? 
아니에요. 끝이 없어요.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세상에는 여전히 맛있는 음식이 널려 있어요. 

아무리 재미있는 곳을 다녀도, 세상에는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이 있죠. 

어떻게 하면 '살 만큼 산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면 살 만큼 산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서 시므온이
26절에 '저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아니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이것이 시므온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는데 
이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시므온이 기도, 찬양하는 것이
'이제는 약속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29

내가 얼만큼 살면 살만큼 산것이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면' 살 만큼 산 것입니다. 
(사명을 다 감당하면, 살 만큼 산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죠)

그러려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알아야, 
-그 약속이 이루어졌는지도 알고 
-내 인생의 목적도 알고 
-내가 얼마만큼 목적에 가까이 갔는지를 알고 
-내 때가 되었다..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얻는 교훈은 <그때가 되면 주님이 알려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떠날 때가 되면 
적어도 믿음의 사람에게 그 때를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놀라지 않고, 경악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히 갈 준비가 되게 하십니다. 

마틴 루터킹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어요. 
"나도 여러분처럼 장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약속의 땅(흑백차별 철폐) 에 들어갈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산에 (천국에) 올라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총을 맞아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틴 루터킹 목사님은, 자신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나도 장수를 하고 싶지만 
그러나 내가 여러분처럼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내가 산 위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말은 '(흑백 차별 철폐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떠난다고 해도 여한이 없다..' 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인물들
모세, 엘리야, 다윗, 바울, 예수님.. 이런 모든 믿음의 인물들은 
세상을 떠날 때가 왔을 때, 알고 있었어요. 

엘리아가 그걸 알았어요. '내가 이제 올라갈 때가 되었다' 
모세도 '내가 이제 갈 때가 되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에게 안수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선한 싸움싸우고 믿음을 지켰다' 
때가 됐다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더 말할 필요가 없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타의에 의한 강요된, 예수님이 예측할 수 없었던 
그런 사건이 아니고,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떤 일이 생길거라는 걸 알고 계셨고 

언제 그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그래서 유월절 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살이다. 피다.'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어요. 

당신의 죽음만 다 알고 계신게 아니고 '사흘 만에 살아가리라' 
그리고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가족들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믿음의 사람은 
'내가 이제 갈 때가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내 인생의 가장 기쁜 일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요. 
너희를 자식으로 얻은 것이요. 너희와 함께 살았던 것이다. 
내가 떠나면 너희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대장부가 되어라!' 
이 정도 되어야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할렐루야! 

▲3. 세 번째는 세상 떠나는 일을 <하나님이 놓아주시는> 것입니다. 

29절에 '주재여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놓아준다' 라는 말은, 마치 고무줄을 잡아당겼다가 
고무줄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있는 상황에서 '손을 놓으면' 
그 고무줄이 릴리스 release 되는 것과 같다는 거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마치 고무줄을 잡아당기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염려, 세상의 근심, 나의 의무, 나의 염려..
이런 모든 것이 나를 고무줄처럼 잡아당깁니다. 

더 이상 당길 수 없을 때까지, 팽팽한 긴장과 쉴 날이 없을 정도로 
인생은 우리를 고무줄처럼 잡아당겨서
우리가 늘어날 대로 늘어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늘어날 대로 늘어나고, 팽팽한 긴장, 쉴 틈이 없는 현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놓아 주시는 순간에 
마치 우리가 새처럼 날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매여 있지 않는 것입니다. 

'놓아준다'는 말은 그러므로 '풀어준다. 해방한다. 자유케 한다' 
그런 면으로 주님이 우리를 놓아주시는 것을, 우리가 환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환영할 만한 일이에요. 거부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왜 사도 바울이 '내가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낫다' 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되는 거죠. 

물론 이건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고 
각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믿어야 되는 부분이에요. 

◑그리고 이제 더 중요한 질문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도대체 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느냐? 
그 해답이 30절에 있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제 놓아주십시오' 라는 말을 하는 것이죠.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 첫째는 나의 구원 
- 둘째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구원 
- 그리고 모든 사람의 구원 

시므온이 말하기를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눅2:29~32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시고 
이런 저런 시련을 겪으면서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는 내 구원 
-가족의 구원 
-민족의 구원, 이방인의 구원 등
모든 사람의 구원을 보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요,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시는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의로우시고, 하나님이 옳게 행하셨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 옳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분들은, 남은 세월은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미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 남은 세월은 감사하면서, 사랑하면서, 섬기면서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잘하는 설교는 짧은 설교입니다. 
우리가 손을 들고 기도하십시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태어난 날은 기억을 하는데 
떠날 날은 사람마다 다르고, 
우리는 시므온처럼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우리의 눈이 주의 구원을 보기를 원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원합니다. 

얼마만큼 살면 살만큼 산 것이냐? 
그것은 주님에게 달렸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경험한 사람은 
살만큼 살고, 그리고 잘 산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