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12: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다윗에게 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다윗의 이 회개는 사실 누가 주도하신 회개인가 하면 다윗이 스스로 시작하고 주도한 회개가 아닙니다. 이 회개는 사실 하나님이 주도하신 회개입니다. 이게 진짜 회개예요.
우리 기독교는 여기서부터 근본적으로 세상의 참회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넘어지고, 실수도 하고, 연약해서 추함도 드러내지만 또 돌이키기도 하고, 참회를 하지만
기독교의 회개는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회개케 하지 않으면 절대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회개하는 것마저도, 내가 붙들고 있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세요. '하나님 나를 정말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여기 중요한 문장 하나를 우리가 발견하는데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선지자를 보내면서부터 다윗의 회개는 실질적으로 시작이 된 겁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복음적 기초에요.
그러니까 내가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우리는 회개마저도 '자기 의'로 삼는 경우가 있어요.
'나 회개 했어!' 우리 <밀양>에서 그런 모습을 만나지 않습니까?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러 갔더니 '나 이미 용서 받았어!'
'누가 당신을 용서했나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어요!'
그것은 참된 기독교가 말하는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감동주시고,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회개가 진짜 회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어요. 진짜 회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지금 다윗의 상태는 어때요? 11:27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성경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증언하죠. 그러나 이 시점까지도, 다윗이 무슨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거나 불편한 표정조차 없습니다. 다윗은 평온한 상태입니다.
지금 궁궐 안은 원래 평온한 상태로 돌아갔어요. 어쨌든 우리아는 제거되었고, 그의 아내 밧세바는 다윗의 정식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덜커덕 들어선 불륜의 상징인 아이까지 태어났어요. 아기는 새록새록 귀여운 모습을 보이면서, 궁궐안에서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평안한 하루하루를 그려나갔겠죠. 아무 이상이 없었어요. 고요했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 하나님은 정확하게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11:27 다윗이 전혀 미동도 없이 회개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하나님은 드디어 말씀을 가지고 있는 나단이라는 선지자를 보냅니다.
성경에서 '보낸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인생의 주도권을 쥐시고 이제 하나님이 다윗에게로 그를 정죄하고 회개로 인도하기 위해서 나단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이렇게 볼 때 12:25에서 나단을 보내서 '여디디야'라 하신 것도, 장차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실 것을 암시한 것이지, 그저 작명 주러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나단은 단도직입적으로 딱 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슬그머니 이야기 하나를 시작합니다.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고 있었고,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잣집에는 많은 소떼 양떼가 있었고 그 가난한 집에는, 애지중지 딸처럼 귀하게 키우는 양이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부잣집에 손님이 한 사람 찾아옵니다. 그 손님이 누굴까요? 죄입니다. 오늘날 죄가 들어온 거예요. 그 부자는 누구죠? 다윗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가 자기 마음의 집에 찾아온 죄를 대접하기 위해서 자기 집에 많은 양떼 중의 한 마리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한 것이 아니라 그 옆에 가난한 농부가 딸처럼 키우던 양을 빼앗아서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했다면, 왕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러자 다윗이 쇼를 하거나 위선을 떤게 아니라, 진실로 얘기했어요. 진실로 얘기했다는데 문제가 있어요.
차라리 위선을 떨었다면, 그의 끔찍한 영적인 상태는 덜 폭로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진심으로 얘기했어요.
'아니 이스라엘 하늘 아래 이런 천인공노할 인간이 숨 쉬고 있단 말이요? 그런 자는 죽어야 마땅하지요!'
그리고 다윗은 율법을 인용합니다. 12:6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여기서 '4 배나 갚아야 된다'는 말은, 도적질한 경우 율법의 처벌규정을 다윗이 인용한 말입니다. *출22:1
그래서 삭개오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내가 누군가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거든 4배로 갚겠나이다' 라고 했죠.
「다윗은 아직은 율법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영적인 상태예요. 아직은 종교인이에요. 사실은. 그가 언제 신앙인이 되죠? 이 문제가 내 문제로 들어올 때, (진정 회개할 때) 드디어 그때 신앙인이 됩니다.」 *위 단락은 많은 argue(논의, 토론)가 요청됩니다.
다윗이 여기서 나단 선지자의 그 이야기 스토리 속에 점점점 빠져들면서 몰입이 됐어요. 몰입이 되는데도 아직 그 문제가 자기 문제로는 인식되지 않았어요. 여기까지는 종교인이에요.
'아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 자는 4배를 갚게 하고, 그런 사람은 죽여야죠!' 이렇게 된 겁니다.
뭘 몰랐어요? 죄가 뭔지 몰랐고, 인간이 누군지 몰랐어요. 이게 죄인의 속성이에요.
그리고 훗날 (회개한 후) 다윗이 시를 쓰죠. 뼛속 깊이 그는 죄에 대해서 정체를 드러냅니다. '내가 모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죄악중에 출생하였으며...' 시51:5
▲그러자 나단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7
'당신이 그 사람이라!' 여러분, 다윗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설마 자기 일줄이야 꿈에도 생각을 못했겠죠. 근데 나단이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여기에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가 있어요.
요19: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빌라도가 예수님께 했던 유명한 말입니다. '보라 이 사람이라!' 이것이 나단이 다윗에게 했던 이야기에요. '바로 당신입니다!'
무슨 얘기에요? '당신이 바로 죽어야 될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지금 누가 서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서 있어요. 기가 막힌 그림이에요.
'보라 이 사람이라!' 요19:5 그 십자가는 우리 각자가 죽어서 달려야 할 자리에요. 여러분, 이게 동의가 안 되면 우리는 아직 종교인이에요.
거기는 내가 달려야 될 자리입니다. 수백번 생각해도 그 십자가는 내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내가 죽어야 될 자리에요.
저는 진실로 그렇게 스스로 인정이 돼요. 제가 스스로 겸손한 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의 앞에 그 하나님의 의 앞에 설 때마다 햇볕 앞에 촛불이 무의미하듯이 거기가 내가 죽어야 될 자리인데... 눈물이 나요.
'내가.. 내가 달려죽어야 될 자리인데.. 어쩌다가 우리 예수님이 그 자리에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나?' 이 자리까지 오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이에요.
다윗이 분기탱천에서 부르르 떨며 진심으로 얘기했던 것처럼 '그런 죽일 인간이 있습니까?' (자기 죄를 보지 못했던 거죠)
우리 예배 때마다 그런 광분을 해서는 안 돼요. 그래서 사람이, 은혜가 제대로 들어오면... 눈물이 나요.
분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고 '정말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큰 긍휼을 입었는가?' '어떻게 나 대신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바로 당신입니다!' 나단의 이 지적 앞에 다윗은 아무 소리도 못 내고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려요.
진짜는 소리가 나지 않아요. 진짜 제대로 무너지면.. 소리도 못 내요. 숨도 제대로 못 쉬어요.
덜 부서졌을 때 땡그랑 땡그랑거리고 소리를 내고 돌아다니죠. 뭐 시끄러워요.
그런데 정말 소리도 못 낼 정도로 가루가 되어 빻아져서 무너질 때는... 소리도 못 냅니다. 소리도 안 납니다. *용각산처럼
▲7절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절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주1)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절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여러분 9절은 오늘 본문의 핵심구절 입니다. 결국 다윗이 이렇게 서서히 붕괴음을 내고 무너지게 되었던 결정적 이유를 나단이 뭐라고 지적합니까? 9절를 잘 보세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이게 무슨 말이냐면, 다윗이 율법, 또는 십계명을 업신여겼다는 뜻이에요. 6계명 살인도 어겼고, 7계명 간음도 어겼고, 8계명 도적질도 어겼고, 9계명, 10계명, 1계명(우상)까지도 다 어겼고, 멸시했다는 지적이죠! 주2)
그런데 이 '말씀을 업신여겼다'는 얘기를 사울왕도 들었었어요. 삼상15: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울이 무너질 때도 그 결정적인 동기가 뭐예요? 여호와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다윗이 무너질 때도 그 결정적인 동기가 뭐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겁니다.
엘리아가 로뎀나무 아래 누워서 '이제 내 생명, 이만하면 됐으니 거두어 주십시오' 자결에 가까운 탄식을 토해낼 때도 그 엘리아의 침체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이에요.
무슨 정서적인 우울증이 와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래서 그를 다시 어디에다 세웁니까? '호렙산 굴 앞에 세밀한 소리' 가운데 세우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시 호렙산 앞에 세움으로써 '네가 모세의 전통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 호렙산은,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던 산이었기 때문이죠.
고대시대로부터 오고 오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결국 답은 질리도록 말해도 질려서는 안 되는.. '진리'밖에는 답이 없어요.
하나님 말씀만이 매 시대마다 언제나 정답입니다.
10절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긴 것이 :9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이죠. :10
▲11절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절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13절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율법에 간음은 사형이나, 회개로 사형은 면함)
14절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15절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여기에 우리가 한 가지 좀 이해하지 못할 문장이 나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나단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을 용서하십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먼저 한 가지 전제해야 될 게 사울의 죄와 다윗의 죄는, 솔직히 다윗의 죄가 훨씬 더 커요. 사울의 죄에 비하면, 상대적 비교에 의하면 사울의 죄는 잽도 안 돼요. 다윗의 죄는 엄청나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세요. 사울은 버리시죠. 가장 중요한 근본적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 가문을 버리지 않기로 언약했어요.
먼저 그 언약의 신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약속에 붙들린 다윗은 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버림을 당하는 자와 버림을 당하지 않는 자의 근본적 차이가 뭐냐 하면
-첫번째는 언약의 문제지만 -두 번째는 두 사람이 죄를 범한 이후에 태도가 달라요.
사울은 계속 변명을 합니다. 변명은 회개가 아니에요. 그런데 다윗은 몇 배의 엄청난 큰 죄를 저질렀지만 그는 바로 나단 앞에 자기의 죄를 직고 하죠. '제가 범죄하였습니다' 하고 변명하지 않아요. (변명은 말이 길지만, 인정은 말이 짧아요)
자 그런데 여기 우리가 가진 질문은 뭐냐면 '그래서 용서를 받았다면 그가 낳은 아기를 왜 죽입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오묘함이 있어요. 하나님은 지은 죄에 대해서는 수천 번이고, 어떤 크기의 죄도 용서하세요. 진정으로 회개하고 고백만 한다면!
그런데 대가는 지불하게 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입맞춤이에요.
'네가 회개했으니, 없던 걸로 할게!'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대개의 경우, 죗값 또는 죄의 결과 consequence of sin 를 치르게 하십니다.
만약 회개만 하면,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시고, 죄값도 없애 주신다면.. 그러면 십자가사건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옳았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값으로 지불된 자리입니다.
이 아들은 '죄의 삯은 사망'에 의해, 죄값이 지불된 극명한 예죠. 죄는 용서받되 그 값은 지불해야되는 게, 하나님의 공식 입니다.
그런데 그 값을 누가 지불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이 지불하세요.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기에 우리의 구원의 그림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난 아들은 죽어야 해요. 죄값 때문에 죽어야 해요. 하나님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인 그림이에요. '죄 지은 값은 (용서받아도) 반드시 지불되어야 한다'는 암시입니다.
그리고 이 이후로 다윗은 절정을 향해 가다가 절정에서 급전직하 해서, 이후로 엄청난 내부적인 풍랑과 곤경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피바람이 불어요. 원래 제일 감당하기 어려운 게 배반의 아픔인데 그 중에서도 제일 지독한 배반이 '자녀를 통한 배반'입니다.
그 배반을 겪게 함으로써, 다윗은 이 세상과 우주 한복판에 '철저히 주밖엔 의지할 이 없음'을 수많은 시로 만들어 내죠.
그 시들은, 고독을 경험해 보지 않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에요. 친 아들에게 마저도 배반을 겪은 아버지의 심정에서 나오는 '오직 주만이 나의 소망'임을 노래하는 수많은 시들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압살롬을 피해 벌판에 울며 울며 맨발로 돌아다니다가 만들어내는 시예요. 그러니까 그 시가 그냥 그냥 술술술 잠이 안 오면 읽는.. 무슨 그런 글이 되어서도 안 되고 그런 시도 아닙니다.
그렇게 아들은 죽고 누가 태어납니까 15b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23절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아이는 그렇게 숨을 거둡니다. 너무너무 혹독한.. 정말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다윗이 이보다 더 진하게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어린 자식을 가슴에 묻는 아비, 특별히 그것이 자기의 죄 때문에 이런 대가를 지불받았다는 사실에 깨달을 때,
그 아버지는 어떤 심정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건 너무 너무 가혹한...
그러나 다윗이 저지른 범죄에 비해서는 가혹하지 않죠. 마땅한, 마땅한 대가죠!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24절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절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여러분 여기 재밌는 사실 하나가 발견되죠. 아들을 낳았을 때 아버지는 솔로몬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그 뜻은 샬롬이에요. 여러분 왜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요? 자기가 겪어보니까 살아보니까 '샬롬의 복'만큼 큰 복이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 (나단을 통해) 예고된 피바람, 칼바람은 늘 다윗의 마음에 묵직한 두려움이었어요.
그러니 '앞으로 내 남은 노년이 평안했으면 좋겠다' 이 염원이 아들 솔로몬의 이름 속에 슬쩍 얹어져 있습니다.
누구나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는 아비로서 어미로서 그런 어떤 기대가 있단 말이죠.
다윗은 너무 파란만장한 생애를 지금까지 살았는데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저질러진 살인과 간음때문에 나단선지자의 예언은, 매우 엄정하고도 무서운 예고였어요.
그 결과로 첫번째 아들은 죽지만 이어서 밧세바에게 태어난 둘째 아들의 이름은 그래서 다윗이 샬롬으로, '평안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지은 겁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 샬롬 이라는 이름 속에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어 이름을 뭐라고 도 지어 줍니까?
'여디디야' 이 말은 '사랑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사랑하는 자' 라고 불려진 유일한 인물이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 첫 발을 디디실 때 하늘이 열리죠. 이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면서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이 그리스도 예표의 그림인 솔로몬이 태어나는 겁니다. '여디디야!'
△그래서 시127편에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그 잠은 '쉐나' 죽음을 얘기해요. 왜 사랑하는 자에게 '죽음'을 줍니까?
사람이 집을 세우는 수고도 헛되고 성을 지키는 수고도 헛되고 일찍 일어나서 늦게 누우며 평생 수고하는 게 헛되다.. 그랬어요.
그 시에 '헛되다' 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그건 완전한 헛됨을 얘기합니다.
이 땅에 인간의 경영과 수고가 사실은 다 헛돼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말이에요.
거기서 말하는 '잠'은 생물학적인 잠만 말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뜻하며) '그러므로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소망이 있다'는 것을 구속사적으로 그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가정을 하나님께서 평안케 하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해석을 했더라고요. '하루종일 일한 사람만이 저녁에 평안히 금방 곯아떨어져서 잠을 잘 수 있다' 거의 소설에 가까운 해석을 하는 경우도 봤어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인류는 숲의 그림으로 보던, 미시적인 나무의 그림으로 보던 그리스도 밖에는 다른 소망이 없어요. 예수로만 구주로 삼아야 돼요. 오늘도 우리는 그분으로만 구원이 매일매일 새로워져야 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 이상한 장면으로 본문 12장이 마쳐지는데 그 부분을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26절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 royal city 을 점령하매'
이 개역이 원문의 의도가 덜 드러났는데 영어 성경은 그 의도를 잘 드러냈어요.
영어성경 NIV에는 26절 서두에 Meanwhile 라는 단어가 하나 붙어있죠. '그러는 와중에' 라는 뜻이죠. *히브리어는 접속사 와우
랍바 성은, 암몬의 수도이고, 오늘날의 암만입니다. 지금 이 전체 배경, 우리아가 죽고 밧세바를 범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게 암몬과의 전쟁 중에 일어난 거예요. 11:1
"이 와중에 Meanwhile" 다윗의 간음과 살인과 범죄가 일어난 거에요. 그런데 이제 본문 12장을 마치면서 그 와중에 하나님의 하나님의 일은 중단 되었어요? 진행이 되고 있었어요? 네, 여전히 계속 진행되고 있었어요.
26~30절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이 다윗의 엄청난 범죄의 와중에 요압은 열심히 하나님의 계획과 큰 그림 속에서*구속사 계속 점령해야 될 암몬 땅을 전명하고, 왕성을 점령했어요.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다윗이 와서, 차지하라고 양보합니다. 요압은 굉장히 정치공학적인 머리가 있는 장군이에요. 랍바 성을 차지한 공로를 다윗 왕에게 돌립니다. 그리고는 그 왕관을 빼앗아서 자기 머리에 쓰죠.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 추함, 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이 멈추거나 중단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다윗이 한 거 뭐 있어요? 죄 지은 거 밖에 없어요. 근데 마지막에는 그 영광의 관을 누가 쓰죠? 다윗이 써요.
이게 성경 전체에서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스케치에요. 성경에는 모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구약성경에 보면 거의 수준들이 진상수준 들이에요.
그 일대기와 행적을 좇아 가보면, 뭐 다른 사람 거론할 것 없고 아브라함만 봐도 정말 치사찬란한 행적이 많아요. 자기 와이프를 곤경에 빠뜨리고 말이죠... 그렇게 치사할 수가 없어요.
근데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고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죠? 믿음이 좋아서 믿음의 조상이 아니고 '믿음이란 은혜다!'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이 아브라함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신약에 가면 전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나님이 어떻게 포장을 시켜주시냐 하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히11:8, 17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잘했대요. 잘 믿었대요.
그런데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똑같은 짓을 하고 있어요. 부모가 먹여 주고, 진자리 마른자리 봐주고 힘들여 키워놓으면,
그래서 아이가 좋은데 앉으면 '우리 아들 훌륭하다!' 하고 박수 쳐 주죠.
다 엄마 양육으로, 아빠 후원으로 거기 가서 앉아 있는 거 아니에요. 맞죠. 그런데 엄마 아빠는 뭐라 그래요? '우리 아들 기특하다. 우리 아들 잘했다!'
이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죠. 그런데 우리는 또 진짜 내가 잘난 줄 알고, 막 폼 잡고 재고 다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이제 내 생명이 다해서 하늘 나라에 갔어요. 하늘나라에 갔더니 그 가운데 보좌에 우리 예수님이 앉아계신데 이게 다 내 공로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죽임당하신 어린 양의 공로였다는 것을 거기서 보게 돼요.
그래서 그 장로들이 다 머리에 쓰고 막 폼 잡고 있던 면류관을 벗어가지고 어린 양께 벗어드리는 거에요. 그게 계시록의 그림이죠.
'이게 내 공로가 아니었구나. 주님의 은혜였고, 주님의 공로였구나!' 이게 정확히 본문에 나와 있죠.
성경을 참 이렇게 사랑과 은혜의 관점에서 읽으면 우리는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고맙기도 하고, 얼굴도 못 들겠고 그래서 성경에 코를 박고 읽을 수 밖에 없어요.
오늘도 이 다윗의 언약 속에 저와 여러분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또 한 주간도 그냥 일어나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묵직한 순종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주1)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정권이 교체될 때 정복 군주가 이전 군주의 후궁들을 모두 거느렸던 당시의 관습을 언급한 말이다. 3:7참조.
그러나 이 말은, 다윗이 사울을 대신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실을 의미할 뿐(2:1-4, 5:1-5) 다윗이 실제로 사울왕의 전처들을 차지했음을 입증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성경 기록에 따르면(3:7, 삼상14:50). 사울 왕은 본처 한 명과 후첩 한 명만을 거느렸는데 그 중 한 명은 아브넬이 차지한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주2) 다윗이 9계명 거짓증거 죄를 범한 것은, 지금 다윗은 총체적으로 '속이고' 있다. 그가 우리아를 데려온 것도 본심을 속임이요, 그에게 잔치를 베풀며 위로한 것도 본심을 감추는 속임과 거짓이요, 그를 전선에 내보내 죽게 하도록 편지를 쓴 것도 본심을 감춘 속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