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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2장 절별 해석 및 주석

LNCK 2023. 4. 26. 06:34

◈삼하12장 절별 해석 및 주석

1 여호와에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신 때는 다윗이 범죄한 이후(11:4, 5) 약 1년 정도는 되었을 때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미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해산한 때였기 때문이다(14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다윗이 범죄한 즉시 견책하지 않으시고 약 1년 후에 견책(譴責)하신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다윗으로 하여금 죄로 말미암은 영적인 고통의 실상을 경험케 하여 다시는 죄를 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시32:3, 4). 
(2) 다윗의 완악해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지기를 기다리시기 위함이다(시 32:5). 아무튼 이처럼 여호와께서 다윗을 회개시키기 위해 선지자 나단을 보내신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범죄한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겔 34:11, 12). 사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여전히 죄와 절망의 자리에 버려진 상태에 있을 것이다(롬 1:28). 
한편 나단은 앞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상의한 적이 있는 선지자이다(7:2). 특히 왕의 권세앞에서도 당당히 진리의 말씀을 외치며 죄악을 지적하는 이 선지자의 용기는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힘과 소명감을 고취시켜 준다(행 4:13-22, 고전 4:1, 2).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이는 다윗의 무서운 범죄를 지적하기 위한 나단 선지자의 비유이다. 나단이 이처럼 비유를 들어 다윗을 책망코자 했던 이유는 다음 서너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한 나라의 왕인 다윗의 권세에 대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여 다윗의 완고해짐을 막기 위함이다. 
(2)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 다윗 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고백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3) 자신의 죄의 실상에 대해 둔감한 다윗에게 비유를 통해 그 죄의 참담한 실상을 환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비유는 완악하고 어리석은 죄인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한 방법이다(사 5:1, 겔 17:3, 19:2, 3, 24:3, 마 13:34).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적절한 비유까지 예비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2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여기서 '부한 자'는 바로 다윗을 의미한다. 그리고 '양과 소'는 다윗의 수많은 처첩(妻妾)을 의미한다(3:2-5, 5:13-16, 대상 3:1-9). 나단이 이러한 비유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처럼 다윗이 많은 아내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치 아니하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눈길을 돌렸다는 점(3, 4, 9절, 11:2-5, 27)이다.

3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가난한 자는...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 뿐이라' 여기서 '사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나' 는 '한 개인의 사유 재산으로 획득한다'는 의미이다. 즉, 이 말에는 개인의 소유 개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창 4:1, 잠 4:7, 15:32, 16:16, 19:8, 룻 4:9, 10). 따라서 이 말은 작은 암양 새끼 하나가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한 가난한 사람의 절대 소유임을 강조해 준다. 
한편, 혹자는 여기서의 '작은 암양 새끼'에 대하여 단순한 재산의 개념으로 이해하려 하였다(Lange). 즉, 고대 근동 사람들은 가축을 그들의 부의 척도로 삼고 있었다는 지론(持論)이다(창 30:25-43, 민 32:1, 욥 1:3). 그러나 여기서 '작은 암양 새끼'는 단순한 재산 이상으로 주인의 온갖 사랑을 받고 재롱을 떠는 애완용 가축을 의미한다. 그 근거로서 우리는 근동 지방에서는 지금도 애완용 양을 키우는 관습이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1) 이 '작은 암양 새끼'는 다른 사람이 앗아갈 수 없는 오직 '가난한 자'의 고유 소유였다는 점이다. 
(2) 또한 그것은 가난한 자가 극진히 사랑하고 길렀던 애완용 양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비유는 오직 하나뿐인 자신의 아내 밧세바(11:3)에 대한 우리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라며... 먹으며... 마시며... 누우므로' 암양 새끼와 가난한 주인 간의 동고 동락(同苦同樂) 관계를 묘사한 말로서 곧 우리아와 밧세바 간의 애정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다윗이 우리아의 가정을 파괴하기 이전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하였지만 우리아의 가정이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5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다윗은 이 말을 통하여 간음(11:4)과 살인(11:15)을 저지른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스스로 율법에 따른 형벌(레 20:10, 24:17)을 선고한 셈이다.
 
6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사 배는 도둑에 대하여 율법이 규정한 배상 기준이다(출22:1). 지금까지 율법을 무시하고 범행을 저지른 다윗이 율법의 기준을 언급한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모순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큰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타인의 적은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타락한 인간성을 보게 된다.

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당신이 그 사람이라' 지금까지의 나단의 비유를 남의 일로만 알고 정죄하던 다윗의 무딘 양심을 결정적으로 일깨워 주는 나단 선지자의 신적(神的) 선포이다. 즉, 나단은 자신의 사사로운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엄위한 권위로써 이제 범죄한 다윗을 정죄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나단 선지자의 직고(直告)를 통하여 참된 선지자의 사명과 오늘날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사명의 배후에는 무엇보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관용의 정신이 있어야지 그렇지 못할 때에는 남을 무조건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마 18:21, 22).

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정권(政權)이 교체될 때 정복 군주가 이전 군주의 후궁들을 모두 거느렸던 당시의 관습을 언급한 말이다. 3:7 주석 참조. 그러나 이 말은 다윗이 사울을 대신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실을 의미할 뿐(2:1-4, 5:1-5) 다윗이 실제로 사울왕의 전처들을 차지했음을 입증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성경 기록에 따르면(3:7, 삼상 14:50). 사울 왕은 본처 한 명과 후첩 한 명만을 거느렸는데 그 중 한 명은 아브넬이 차지한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더 주었으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부족함 없도록 채워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과욕을 부려 범죄한 것을 책망하는 말이다. 즉 다윗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탐욕과 정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범죄하였던 것이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탐욕과 정욕을 경계토록 교훈하고 있음도 바로 이 때문이니, 귀 있는 자는 듣고 마음에 새겨 삼가야 할 것이다(잠 5장, 눅 12:15).

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다윗이 범죄하게 된 근본 원인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경(輕)히 여겼기에 그에 따를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치 않고 탐욕(11:2, 3)과 간음(11:4), 살인죄(11:15, 17)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진노를 발하신 것(10-12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란 말씀이 정확히 적용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윗 당대 뿐 아니라 다윗의 후손 대부분이 전쟁과 살인 사건에 휘말려 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같은 예고는 훗날 암논의 죽음(13:28, 29), 압살롬의 반란 사건(18:14), 그리고 아도니야의 죽음(왕상 2:24, 25)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통일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서로 반목 질시하게 된 것도 넓게는 이같은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다윗가의 재앙은 무고한 우리아를 살해한 죄(11:15)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형벌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 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여기서의 '재앙' 역시 다윗의 간음죄에 상응하는 형벌이다. 이에는 암논의 근친 상간(13:1-19), 그로 인한 압살롬의 암논 살해 사건(13:20-29)등을 들 수 있다.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이 같은 예고 역시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역한 후 이스라엘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한 사건(16:21, 22)으로 인해 온전히 성취되었다.

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백주에 이일을 행하리라' 다윗이 은밀하게 밧세바를 상관하고(11:4) 그 죄악의 열매를 감추려(11:5) 부지런히 애썼듯이(11:6-27) 인간의 모든 범죄는 사람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저질러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모든 죄악은 도저히 숨겨질 수 없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모든 인생을 하감(下鑑)하사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기 때문이다(시 33:13-15). 따라서 인간의 모든 죄악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정죄당하고 심판당할 날이 있는데 그 같은 하나님의 심판은 공개적이고 공의로운 심판이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전 12:14, 계 20:11-15).

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비록 간단한 한 마디이지만 다윗의 진심이 응결되어 있는 진정한 회개요 자복이다. 즉 다윗은 자신의 범죄가 인간을 상해(傷害)한 것이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9절) 대신(對神) 관계에서의 죄악이었음을 자백한 것이다. 
이때 다윗이 지은 회개의 시(詩)가 곧 시 32:51편이니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을 참조하라. 아무튼 이러한 다윗의 회개는 참된 회개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바 이제 그 특성을 살펴보면 곧 다음과 같다. 
(1)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들은 즉시 회개하였다(Lange). 이는 사울의 경우와 달리 그가 선지자의 대언적(代言的)인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았다는 증거이다. 
(2) 다윗의 회개는 매우 짧았다(Keil). 즉, 그의 회개에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려는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삼상 15:15, 20, 21, 시 51:3). 
(3) 다윗의 회개는 자신의 죄에 대해 숨김없이 토설(吐說)한 것이었다(시 32:5). 즉 그는 어떻게든 자신이 지은 죄악 중 하나만이라도 숨기려 획책치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죄를 다 내어 놓고 사유(赦宥)하심을 간구한 것이다(시 51:3, 9). 
(4) 다윗의 회개는 겸손한 회개였다. 즉, 그는 일개 선지자의 찌르는 듯한 말 앞에서 왕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죄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고백한 것이다(시 51:1, 2).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여기서 '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르' 는 '치우다', '제거하다'란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서 죄를 거두어 가신 후 본래 죄 없었던 것처럼 여겨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는 특히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으므로(레 20:10, 24:17) 하나님의 이러한 사죄하심은 곧 그의 목숨을 살려 주시는 은총이었다. 따라서 특별히 본절에는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이처럼 죄는 미워하고 반드시 심판하셔도 회개하는 죄인에게 대해서만은 사유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한 특성이다(겔 18:23). 그러나 다윗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은 하나님의 부정적(父情的)인 사랑 외에도 다윗 언약(7:4-17)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기초한 것이었다는 또 다른 특징을 지닌다.

14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여호와의 원수로... 얻게 하였으니' 이는 다윗의 범죄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범죄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의 범죄로서 신정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 공적인 성격의 범죄였음을 알려 준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 특징으로 삼는 신정 국가인데(출 19:5, 6, 신 6:1-9) 그 나라의 왕이 율법을 어기므로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훼방거리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훼방거리를 없애기 위해 나라의 왕에게도 율법에 따라 공평하게 형벌하신다는 사실을 외적으로 보여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여호와의 원수'에 대하여 혹자는 이방인들, 혹자는 이스라엘 내의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꼭 그렇게 보기보다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인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반대하는 모든 자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13절의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는 말고 대조를 이루는 구절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사유(赦宥)해 주신 대신 당신의 공의를 이루며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해 다윗의 죄의 열매인 '아이'(11:5, 27)를 요구하신 것이다(엡 5:2, 벧전 3:18). 이는 곧 기독교의 대속(代贖)의 진리를 예시해 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들을 사유해 주시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요구하신 것과 같다(히 9장).

15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다윗이...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여기서 '안에 들어가서'란 말은 다윗이 성소(sanctuary)에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철저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조그마한 골방(마 6:6)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다윗이 골방에서 7일 동안(18절) 금식 기도를 드린 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14, 15절)를 하나님의 은총에 호소하여 살리기 위함이었다(22절). 특히 본절에서 다윗이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있었다'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께 구할 자격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만을 기다린 애절한 형편을 잘 보여 준다.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그 집의 늙은 자들' 이에 대해 혹자는 이들이 다윗의 숙부들과 나이 많은 형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근거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늙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켄' 은 성경에서 '장로'(창 50:7, 삼상 4:3, 왕상 8:1, 3)로도 번역된 말로서 '가장 나이 많고 신뢰받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창 24:2). 따라서 여기서 이 말은 다윗의 신하 중 다윗에게 가장 신뢰받는 원로급(元老級) 인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지금은 죽었으니' 한번 떠난 인간의 생명은 돌이킬 수 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죽은 아이에 대해 계속적으로 미련을 가지는 대신 하나님의 최종적 결정에 스스로를 복종시키므로 세상적 욕심을 버린 것이다. 이처럼 비록 범죄하였지만 회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다윗의 자세는 매우 모범적이다. 즉 다윗은 인간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확신하므로 이제 자신의 아이의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욥 1:21, 시 36:9, 42:8).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아니하리라' 이는 자신의 아이가 이제 죽어 행복한 곳에 갔을 것이라고 하는 다윗의 확신이 아니다. 대신 이는 단지 아이가 죽은 자들의 거처인 스올(Sheol)에 들어갔으므로 이제 다윗 자신은 생전에 아이를 만날 수 없고 자신의 사후에나 만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피력한 말이다. 즉,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죽어서 곧장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세계인 스올로 내려가 거주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천국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발전되지 못한 까닭에 형성된 것이었다.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그의 아내 밧세바' 본서 기자는 이제 밧세바를 더 이상 '우리아의 처'(15절, 11:26)라 하지 아니하고 '다윗의 처'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이제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다윗의 처로 인정하셨음과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嫡子)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위로하고' 이 말은 단순히 정신적인 차원의 위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위로의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즉, 다윗 왕은 아이를 잃고 허탈감에 빠져 있는 그의 처 밧세바에게 새로운 아이를 낳아 주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그녀를 위로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어지는 '동침하였더니'란 말과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기서 '솔로몬'(쉘로모)은 '평강의 사람'이란 뜻이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솔로몬(Solomon)이라고 지은 동기에 대하여, 혹자는 이제 이 아이의 시대에는 다윗 자신의 시대에 있었던 것과 같은 피흘리는 처절한 전쟁(8, 10장)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이라고 하는 아이가 자신의 범죄에 대한 다윗의 진실한 회개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 가정에 사랑의 표시로 주신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다윗이 그의 새 아이를 솔로몬이라고 이름한 것은 솔로몬의 출생이 하나님과 그 가정 사이에 '화목'관계가 회복된 사건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이 아이의 이름을 재차 지어주신 것(25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그런데 이같은 솔로몬은 실상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넷째 아들이다(5:14, 대상 3:5).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이 앞서 죽은 아이(18절)의 바로 다음에 태어난 것처럼 기술된 까닭은 아마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25절). (2) 장차 다윗의 왕위를 이을 계승자로서 솔로몬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왕상 1장). 
한편, 본장에서 솔로몬의 출생 기사는 랍바 성 함락 사건(26-31절)보다 앞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솔로몬의 출생 사건이 랍바 성의 함락 사건 이후에 있었을 것으로 확실히 사려된다.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여기서 '보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솰라' 는 '어떤 특수한 임무를 맡기어 보낸다'는 의미를 가진다(민 13:16, 27, 14:36, 16:28, 29, 렘 19:14, 25:17, 시 105:26, 28, 사 55:11, 61:1). 따라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내방(來訪)한 것은 다윗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알리기 위한 직무 수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Keil).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여기서 '여디디야' 란 이름은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란 뜻이다. 이 이름은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의 '다윗' 과 내용상 같은 점을 시사해 주기에 충분하다. (1) 하나님께서 회개한 다윗을 전보다 더욱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솔로몬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이다. (2) 다윗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5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총을 베푸사 그의 아들 중에 하나를 후계자로 선택하여 다윗 왕조가 영구히 계속되도록 하셨다는 사실이다(7:14-16). 즉, '여디디야'(Jedidiah)라고 하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다윗의 후계자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셨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7:4-16).

26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요압이...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되매' 랍바 성 함락 사건이 솔로몬의 출생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임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이다. 24절 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왕성'(the royal city)은 랍바 성을 이루고 있던 두 성중 하나의 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성은 27절의 '물들의 성'(the city of water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 둘은 랍바 내의 각기 다른 두 성이다(Lange). 11:1 주석 참조.

27 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물들의 성' 이는 왕성(王城)과 더불어 랍바 성을 이루고 있던 또 하나의 성이다. 즉 이는 얍복 강에서 흘러 들어온 물을 가두어 두었던 랍바의 수원지(水源池)를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성이었다. 11:1 주석 참조.

28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이제 왕은... 취하소서' 랍바 성의 두 성 중 하나인 왕성(王城)을 탈취한 요압(26절)이 나머지 하나인 '물들의 성'을 탈취하기 전에(27절) 예루살렘에 있던 다윗 왕을 모셔오는 장면이다. 거의 다 점령해놓고 마침표만 다윗에게 양보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처럼 요압이 직접 랍바성을 완전히 함락시키지 않고 다윗을 초치(招致), 그로 하여금 랍바 성을 정복케 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음과 같이 견해를 달리한다. (1) 이러한 일은 그 당시 원정군(遠征軍)에게 흔히 있었던 일로서 이 일의 동기를 특별히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견해이다. (2) 암몬족의 재산을 사적으로 노략하지 않고 당시의 국제적 계약(契約)에 따라 합법적으로 인수하기 위해서라는 견해이다. (3) 그러나 이상의 제 견해는 본장의 전체 문맥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요압의 처신은 다분히 개인적인 소신이나 야망에서 나온 행위로 보아야 한다(Lange). 즉, 요압은 자기의 주인인 다윗 왕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에서 그렇게 했거나 아니면 군대 장관이라는 자신의 현 위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다윗왕에게 아부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서에서 자주 보여지는 다윗왕에 대한 요압의 맹목적인 헌신과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이중적인 성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1:17 주석 참조.

29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다윗이... 랍바로 가서' 당시 다윗이 거처하던 예루살렘(11:1)에서 암몬의 수도 랍바(Rabbah)까지는 약 70km 정도의 거리이다. 따라서 요압의 전갈을 받은 다윗(27, 28절)은 그다지 많은 시간을 소요하지 않고서도 랍바에 당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30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 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그 왕의 머리에서' 여기서 '그 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캄' 은 문법적으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이는 암몬족의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또한 암몬 사람들의 우상인 '말감'(밀곰)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첫번째 해석을 취할 경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난점에 봉착하게 된다. (1) '그 왕'에서 '그'를 암몬 사람들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로 보려면 그 앞절에 암몬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나와야 하는데 없다는 점이다. (2) 또한 본절에 나오는 '보석 있는 면류관'의 무게가 금 한 달란트에 달하는데 이는 사람이 오래 쓰고 앉아 있을 수없는 무게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의 '그 왕'이란 당시 암몬인들이 자신들의 왕과 같은 존재로 섬기던 신(神)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금 한 달란트라' 여기서 달란트는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무게를 측정하던 도량형으로 1달란트는 34. 27kg에 해당된다.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34kg이나 나가는 면류관은 다윗이 머리에 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암몬족의 면류관에서 보석만을 빼어 자신의 면류관에 부착한 후 이를 머리에 썼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행위는 헛된 우상을 섬긴 암몬 사람들의 실패와 다윗 왕이 이제 암몬의 정복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행위였음이 분명하다.

31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톱질과 써레질... 하게 하니라' 본절은 학자들간에서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원문상 본절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1) 다윗이 암몬인들에게 톱질이나 써레질 등과 같은 고역(苦役)을 시켰다는 해석이다. (2) 다윗이 톱이나 써레 등과 같은 도구로써 암몬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해석이다. 이 중 어느 해석이 보다 타당한지는 섣불리 판단키 어렵다. 그러나 과거 암몬인들이 다윗의 신복에게 크나큰 수치를 안겨 주었던 점(10:4, 5)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은 다윗이 어떤 식으로든 암몬인들에게도 잔인하게 복수한 것을 가리키는 구절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