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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3장 절별 해석 및 주석

LNCK 2023. 4. 26. 07:46

◈삼하13장 절별 해석 및 주석

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그 후에'란 용어는 구약에서 대개 다음 두 가지 용례(用例)로 사용되었다. (1) 시간적인 전후 관계를 연결하는 접속사(삼상 24:8 , 에 2:1). (2) 시간적인 전후 관계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상이한 두 내용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접속사(2:1 , 8:1 , 10:1). 8:1 주석 참조. 그런데 여기서 이 용어는 첫번째 경우로 사용되었다. 즉 이는 본장에 기록된 다윗가의 재난이 나단 선지자의 예언(12:10-12)대로 하나님의 보응의 결과로 나타난 사건임을 보여 주기 위한 연대기적(chronological) 접속사이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다말이라' 이들은 다윗이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에게서 얻은 자녀들이다(3:3). 당시 그술은 이스라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아람 소국이었는데 다윗은 이 이방 나라와의 화친을 위해 정략 결혼을 하였었다. 3:3

'암논' 다윗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에게서 얻은 장자이다(3:2). 따라서 다말은 그의 이복(異腹) 누이동생이 된다. 5:13-16 

2 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 

'저는 처녀이므로' 여기서 '처녀'에 해당되는 '베투라' 는 '동정녀'(virgin)란 뜻으로 단순히 시집가지 아니한 여자가 아닌 지금껏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정숙한 여인을 의미한다. 즉, 다말은 순결을 소중히 여기는 품위있는 여인이었으므로 암논이 함부로 접근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보듯 다말이 암논에게 연정(戀情)을 품게 할 정도로 성숙한 것을 보아 적어도 이때 다말은 15세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말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딸이니(대상 3:5-9) 본장의 시대적 배경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한 지 최소한 15년은 경과한 때임을 알 수 있다(5:1-5).

3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다윗의 형 시므아' 그는 이새의 셋째 아들이며(대상 2:13) 삼마 라고도 불리운다(삼상 16:9, 17:13). 여기서 '간교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 하캄' 은 좋은 의미에서 '지혜로운 자', '능숙한 자'를, 그리고 나쁜 의미에서 '교활한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요나답은 자기의 지혜로 암논의 부도덕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으므로 약한 지혜의 소유자, 곧 교활한 자였다 하겠다. 어쨌든 본장에서 그는 사람의 마음과 사건의 정황(情況)을 정확히 판단할 줄 아는 매우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어 있으니(5, 32절) 그 지혜가 아깝지 않을 수 없다.

4 그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당신은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냐 내게 말해 주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랑함이니라 하니라 

'내가...다말을 연애함이니라' 여기서 '연애하다'에 해당하는 '아하브' 는 '성적(性的)으로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사랑을 느끼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암논은 다말의 전인격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육체만을 사랑했었음을 알 수 있다. 암논의 이러한 충동적이고 쾌락 일변도적인 성적 욕망은 그가 다말을 범한 후 오히려 그녀를 싫어한 사실(14, 15절)에서도 잘 드러난다.

5 요나답이 그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다가 네 아버지가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그에게 말하기를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게 떡을 먹이되 내가 보는 데에서 떡을 차려 그의 손으로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하니 

'네 부친이 너를 보러 오거든' '보러 오거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 는 여기서 단순히 '우연히 보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여 보다', 또는 '병의 진행 정도를 진찰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출 1:16, 레 13:3, 6, 8, 56, 민 13:18, 왕하 8:29, 시 41:7). 따라서 요나답의 아와 같은 말은 다윗 왕이 암논의 병을 염려하여 병문안 올 것을 예상하고서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내 누이 다말로...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이는 자식에 대한 다윗 왕의 남다른 애정을 이용하여 암논의 욕망을 이루게 하려는 요나답의 간교한 계략이다. 한편 이와 같이 요나답이 암논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를 도와 준 까닭은 아마 암논이 다윗 왕의 장자로서(3:2) 왕위 계승의 서열 제1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요나답은 자신의 입신 출세를 위해 차기 왕의 지목에 있어서 가장 유리했던 암논을 가까이 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추론(推論)은 왕위 계승의 서열상 장자가 우선이라는 당시 고대 사회의 통념으로 볼 때 매우 일리가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앞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 왕의 계승자로 이미 솔로몬을 넌지시 지목하셨다. 12:25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당시 이러한 사실을 공식 발표하지 않은 것은 아마 왕자들 간의 실권(實權) 다툼(왕상 1:13)을 우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6 암논이 곧 누워 병든 체하다가 왕이 와서 그를 볼 때에 암논이 왕께 아뢰되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가 보는 데에서 과자 두어 개를 만들어 그의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니 

7 다윗이 사람을 그의 집으로 보내 다말에게 이르되 이제 네 오라버니 암논의 집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 한지라 

'다윗이...이르되' 암논의 범죄에 다윗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다윗은 후에 발생되는 압살롬의 범죄 때에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입되었다(23-28절). 이러한 사실은 다윗 가문의 모든 재난이 다윗 자신의 범죄(11장)로 말미암아 발생하고 있음을 다윗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 고 볼 수 잇다. 즉 이 같은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다윗으로 하여금 이전과 같은 죄악을 범치 않도록 채찍질하고 계시는 것이다.

'가서...음식을 차리라' 히브리 관습에 따르면 여인들은 음식만드는 일에 초청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다(Jamison). 비록 암논의 요구(6절)가 좀 부자연스럽긴 했지만 다윗이 그 요구를 받아들였던 것도 그 같은 관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8 다말이 그 오라버니 암논의 집에 이르매 그가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가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다말이 그 오라비 암논의 집에 이르매' 본절은 당시 왕의 자녀들이 그들의 어머니(3:2-5, 5:13-16, 대상 3:1-9)와 함께 각기 다른 거처에서 생활하였으므로 또한 장성한 아들들은 각기 독립된 주택에서 생활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히브리인들은 실내에 있는 화로(火爐)나 벽난로에서 요리를 하였다. 즉, 저들의 가옥 구조는 부엌과 거실이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대하33:1-11  따라서 다말은 암논이 지켜보는 가운데 요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9 그 냄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거절하고 암논이 이르되 모든 사람을 내게서 나가게 하라 하니 다 그를 떠나 나가니라

'암논이 먹기를 싫어하고...나가게 하라 하니' 이처럼 암논이 다말의 요리를 거절한 것은 병이 악화되기나 한듯이 방문객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즉 이렇게 하여 그는 다말 이외에 모든 사람들을 밖으로 나가도록 한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꾸몄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암논의 꾸밈은 모략가인 요나답의 지시(5절)를 받아 이루어진 것임에 분명하다.

10 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음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하니 다말이 자기가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의 오라버니 암논에게 이르러 

'다말이...침실에 들어가 그 오라비 암논에게 이르러' 다말이 미처 오라비 암논의 흑심을 눈치채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즉 그녀는 암논이 자신을 강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어떻게든 병든 암논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해 구운 과자를 들고서야 기꺼이 암논의 침실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11 그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이르되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하는지라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암논이 하나님의 율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간음(레 18:9)을 요구하고있는 장면이다. 암논은 인간의 눈을 피하기만 한다면(9절) 자신의 죄악이 숨겨질 것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다(욥 24:15). 그러나 다윗의 경우처럼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암논의 극악한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계셨으며 끝내 그를 징계하셨다(29절). 이처럼 인간의 범죄는 반드시 자신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 특징이다(갈 5:19-21). 따라서 우리가 각종 탐심과 욕정을 억제함으로 범죄치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시 119:9 , 벧 4:2).

12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초해 건설된 신정 국가 였다(출 19:5, 6). 따라서 율법에 의거, 근칭 상간자는 수간(獸姦)하는 자와 남색(男色)하는 자와 더불어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반드시 제거 되어야만 했다(레 18:9 , 20:17 , 신 27:22).

'괴악한 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발라' 는 히위 족속인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겁탈한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된 것과 같은 말이다(창 34:7). 이 말은 구약에서 대개 다음 두가지를 의미하였다. (1)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짐승같은 행위를 뜻한다. (2) 주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악독한 일, 그중에서도 특히 음행과 관련된 악한 일을 의미한다(수 7:15 , 삿 19:23, 24 , 20:6, 10 , 삼상 25:25 , 사 9:17 , 32:6 , 렘 29:23).

13 내가 이 수치를 지니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어리석은 자 중의 하나가 되리라 이제 청하건대 왕께 말하라 그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되 

'왕께 말하라...거절치 아니하시리라' 다말의 이러한 말은 표면적으로만 이해할 때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다말은 왕께 말씀만 드리면 근친간(近親間)이라도 결혼이 가능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율법에는 엄연히 근친 상간과 근친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레 18:6-18). 그런데 이에 대해 혹자는 근친 상간에 대한 율법의 조항이 남매간의 결혼을 완전히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율법에 명시된 분명한 사실을 아무 근거없이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탈무드(Talmud)는 다말이 다윗의 친딸이 아닌 누군가의 사생아였기 때문에 암논과의 혼인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다말이 다윗의 친딸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으니(1절 , 대상 3:9)이 역시 그릇된 주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남매간의 결혼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다말이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이같이 둘러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14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15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심히 미워하니...연애보다 더한지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병이 날 정도로(2절) 애모했던 자를 이제 성적 욕구를 채우고 난 후에는 도리어 심히 미워하는 암논의 심리현상은 변태 성욕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즉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이 하등 동물적인 욕정에만 사로잡혀 있을 경우, 일단 육체적 욕망이 충족되고 나면 심한 수치감과 허탈감, 상대방에 대한 혐오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 심리 현상인 것이다.

16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그를 듣지 아니하고 

'가치 아니하다...그 악보다 더하다' 암논이 다말을 자기 집에서 쫓아내는 것은 방금 자신에게 추행(醜行)을 당한 다말의 수치심을 더욱 자극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암논의 행위는 자기 때문에 불행한 생(生)을 맞이하게 된 다말에 대하여 약간의 동정심도 베풀지 아니한 잔악한 행위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다말은 자기를 쫓아보내는 암논의 행위가 이전의 그의 추행보다 더 악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7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문빗장을 지르라' 암논의 이러한 행위는 실로 자신의 양심에 빗장을 지르는 것이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문빗장을 스스로 지르는 짓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가 다말에게 조금이라도 정신을 가다듬고 수치심을 억누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만이라도 주었더라면 다말과 하나님으로부터 일말의 긍휼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암논은 스스로를 차꼬 채우듯 보다 철저히 악으로 일관하였으니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38, 29절).

18 암논의 하인이 그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 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채색 옷'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토네트 파심' 은 '소매가 달린 긴 겉옷'이란 뜻이다. 아마도 이는 공주와 같은 귀족 신분이 입는 소매가 길고 아름답게 장식된 나들이 옷을 의미할 것이다. 창 37:3 
 
19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 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 

'재를 그 머리에 무릅쓰고' 이는 자신의 수치스럽고도 비참한 현실에 대한 슬픔과 고뇌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행동이다(삼상4:12, 왕하 5:8). 1:2 주석 참조. 아마도 다말은 조금 전 과자를 구울 때 사용한 화로나 벽난로에서 취한 재(8절)를 머리에 뒤집어 썼을 것이다.

'채색 옷을 찢고' 옷을 찢는 행위 역시 금식이나 굵은 베옷을 입는 행위(왕상21:27, 에 4:3 , 시 35:13)와 더불어 참을 수 없는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던 히브리인들의 한 표현법이었다. 1:2 주석 참조.

'손을 머리 위에 얹고' 머리는 그 사람의 명예를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말이 손을 머리 위에 얹은 것은 자신의 머리에 수치스러운 것이 임한 것을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표현이었다(렘 2:37). 아마도 다말은 이러한 행위로써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당한 억울함(11-14절)을 표함한 아울러 자신의 순수함과 결백함을 나타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20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매우 슬피 울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고 있는 다말의 모습을 본 압살롬이 암논의 추행을 짐작하고선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완곡하게 따져 묻는 말(euphemism)이다. 여기서 즉, '...너와 함께 있었느냐'하는 물음은 남녀의 동침 여부를 우회적으로 묻는 말인 것이다(창 39:10). 한편, 본절의 원문에는 '암논' 이 '아미논'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필사자의 잘못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아미논'이 '암논'에 대한 경멸어(輕蔑語)라고도 주장한다. 그런데 사건의 흐름상 이 두 견해 중 후자의 주장이 비교적 설득력 있게 보인다.

'시방은 잠잠히 있고' 이 같은 압살롬의 말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1) 아버지 다윗이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이다(21절). (2) 암논에게 복수할 좋은 묘책이 떠오를 때까지는 경거 망동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사실 암논에게 일언 반구도 하지 않은 채 2년 동안 기회를 노린 점을 볼 때 압살롬의 복수심은 대단했었음을 알 수 있다(22-29절).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라' 당시 일부다처제가 성행하던 세태 속에서 오라비는 자기 누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창 34:31). 따라서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자기 누이를 진정시킨 것이다.

'처량하게 지내니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멤' 은 '황폐한', '다 망가진'이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 이 말은 마치 폐인처럼 되어 이제 괴로운 나날만을 보내고 있는 다말의 비참한 삶을 잘 드러내 준다.

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다윗 왕이...심히 노하니라' 이 처럼 다윗 왕은 암논의 범죄 소식을 듣고선 일시적으로 크게 노하기만 했을 뿐 율법에 따라 암논을 사형에 처하지는 않았다(레20:17). 그 이유에 대하여 70인역(LXX)은 "암논이 장자인 고로 다윗이 그를 사랑하여 암논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았다"라고 보충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외에도 또 다른 이유를 댈 수 있다. 그것은 곧 다윗 왕 자신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이미 지은 자로서(11:4) 자기 아들의 죄를 심판할 자격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란 점이다. 그리고 또 자식에 대한 다윗 왕의 약한 마음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상의 점에 비추어 볼 때 다윗은 인간적인 면에서 좋은 아버지였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부모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음을 알수 있다(잠 23:13, 14, 엡 6:4). 때문에 이러한 다윗의 잘못은 결국 엄청난 가정의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즉 다윗의 우유 부단한 처신에 불만을 품은 압살롬은 결국 암논을 살해하고(23-29절) 더 나아가 다윗에게 반기(叛起)하고 만 것이다(15장).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 가정 교육의 주안점은 자녀의 영혼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즉 자녀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준엄하게 징계하여 그로 하여금 바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곧 부모의 참된 역할인 것이다(딤후 3:16, 17).

22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시비간에 말하지 아니하니라' 누이 동생 다말의 일로 인해 암논을 미워하게 된 압살롬이 그 일에 대하여 암논에게 한 마디도 따지거나 변론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압살롬이 속으로 암논과 절교(絶交)를 선언하고 또한 잔인한 복수극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23 만 이 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이 주년 후에' 즉 '만 2년 후에'(after two full years, KJV, RSV)란 뜻이다. 이 말은 압살롬의 복수극이 즉흥적인 감정에 의해 돌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숙고와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압살롬의 이러한 음모는 단순히 자기 누이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일종의 쿠테타였을 것이다. 즉 다윗 왕의 세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다윗의 차남인 길르압이 일찍 조사(早死)하였으므로 장남인 암논만 제거하면 권좌에 오를 수 있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3:3 주석 참조.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 바알하솔(Baal-hazor)은 에브라임 성에서 북쪽으로 약4km,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24km 떨어진 산지(山地)마을이다. 이곳은 해발 1, 200m 가량 되는 고지로서 목양(牧羊)하기에 아주 적합한 목초지였다. 압살롬은 다른 왕자들처럼 이곳에 자기 토지를 마련하고 많은 양들을 사육했던 것 같다.

'양털을 깎는 일' 당시 목축업을 주산업으로 삼고 있던 이스라엘에서 양털을 깎는 일은 축제(祝祭)의 분위기 속에서 행해졌다(삼상 25:2-8). 따라서 압살롬은 이 일을 미끼로 자연스럽게 형제들을 불러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24 압살롬이 왕께 나아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 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왕은 신하들을 데리시고 당신의 종과 함께 가사이다 하니 

'청컨대 왕은...가사이다' 압살롬은 먼저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들을 청한 후 (23절) 이제 다윗 왕을 잔치에 청한다. 그러나 압살롬이 왕을 청한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암논을 자기의 계략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펼쳤던 포석 작전이었다. 즉, 그는 다윗이 신하들을 대동하여 자신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국정상(國政上)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미리 계산하고, 그 대신에 왕의 실질적인 대표라고 간주되었던 암논을 보내달라고 간청하기 위해(26절) 계획적으로 다윗을 잔치에 청하는 척 한 것이다.

25 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아니라 내 아들아 이제 우리가 다 갈 것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하니라 압살롬이 그에게 간청하였으나 그가 가지 아니하고 그에게 복을 비는지라 

26 압살롬이 이르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청하건대 내 형 암논이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이는 압살롬의 요청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다윗이 완곡하게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는 말임에 분명하다. 즉, 다윗은 암논에 대한 압살롬의 미운 감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암논을 보내 달라는 압살롬의 요청을 받고선 내심 불안해 한 것이다.

27 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그와 함께 그에게 보내니라 

'압살롬이 간청하매...보내니라' 이처럼 압살롬의 요청에 대해 다윗이 결국 승락하게 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음과 같이 서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1) 다윗이 암논의 추행 사건 이후 2년 동안 압살롬으로부터 자기 누이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어떠한 조짐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2) 암논은 잔치에 참석할 수 없었던 다윗 왕을 대신할 수 있는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압살롬의 요구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주장이다. 
(3) 미리 모든 왕자들을 초청한 압살롬의 행위(23절)가 다윗의 의혹을 다소 희석시켰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상의 모든 사실들이 다윗의 행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직감적으로 불안을 느꼈으면서도(26절) 압살롬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다윗 자신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8 압살롬이 이미 그의 종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그를 죽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 한지라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 70인역(LXX)에 보면, 27절끝에 "압살롬이 왕의 주연(酒宴)을 따라 주연을 베풀었다"라는 기록이 부가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이 해설적인 구절을 원문의 일부로 인정할 수 있다면, 압살롬은 암논을 일단 술에 취하게 만들기 위하여 왕에게나 대접하는 것과 같은 진수 성찬을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에 따르면, 압살롬은 자신이 암논을 차기 왕위 계승자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암논에게 왕의 주연을 베풀었고, 그 결과 암논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술에 취하도록 계획했었음을 알 수 있다.

29 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암논에게 행하매' 암논의 죽음은 압살롬의 주도 면밀한 음모하에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23-28절) 아울러 암논의 부주의함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암논은 압살롬의 주살(誅殺) 음모를 간파하지 못하고 술에 취함으로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술을 즐기는 미련한 자의 결과는 패망이라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잠 19:3, 20:1, 23:1-3). 
한편 이처럼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행위는 비록 다말의 수욕(受辱)에 대한 복수이기는 하나 이 역시 온당치 못했다. 왜냐하면 암논의 범죄는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율법적인 차원에서 징계되어야 했는데도(신 32:35) 압살롬이 자신의 분노한 감정에 따라 암논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 행동의 준거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지 않는 한 항상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다. 즉 아무리 인간적인 측면에서 동정을 얻고 합리화 시킬 수 잇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배치된 행동은 또 다른 죄악을 낳고 마는 것이다.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히브리 사회에서 노새(mule)가 최초로 사용된 사건이다. 노새는 수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난 잡종이기 때문에 이종 교배(異種交配)를 금지한 율법에 따라(레 19:19) 히브리인들은 노새를 사육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윗 왕 때에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노새가 귀족들의 운송용으로 수입되었다(18:9, 왕상 18:5). 기록에 따르면 압살롬과 다윗 왕, 그리고 솔로몬도 노새를 자주 타고 다녔음이 분명하다(18:9, 왕상 1:33, 10:25), 후에 노새는 전쟁용이나 짐을 나르는데도 널리 사용되었다(왕하 5:17, 대상 12:40).

30 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왕의 모든 아들을 죽이고...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본절에서 사실과는 매우 다른 보고가 다윗 왕에게 전달된 것은 그 당시 현장에서 도망쳐 나온 자들이 절박한 상황속에서 미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모든 왕자들이 죽임 당했으리라는 지레 짐작하에 성급하게 보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31 왕이 곧 일어나서 자기의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눕고 그의 신하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 

'신복들도...모셔 선지라' 여기서 '모셔 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차브' 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의 신하들이 자신들의 옷을 찢은 후 다윗 앞에서 부동 자세(不動姿勢)로 서 있었음을 보여 준다.

32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아뢰어 이르되 내 주여 젊은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그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3절의 암논의 친구 요나답과 동일 인물)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요나답의 정확한 상황 판단이다. 이처럼 요나답이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그 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가까이서 살펴 왔음이 틀림없다. 즉, 그는 자신의 묘략을 베풀어 주어 일어났던 암논의 말에 다말에 대한 추행 사건(1-14절)이 그 오라비 압살롬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기에 지난 2년 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추적해 왔을 것이다.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이를 직역하면, "압살롬의 입에(으로) 그 일이 결심되어 있었나이다"이다. 물론 여기서 '그 일'이란 암논을 살해할 음모를 의미한다(23-29절). 그런데 본절을 좀더 정확히 해석하려는 시도가 학자들간에 잇었으니 저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1) 혹자는 본절을 압살롬이 요나답에게 이미 자신의 속으로 결심한 사실을 입으로 발설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압살롬이 생사를 다투는 중대한 일을 요나답에게 말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 어렵다. 
(2) 갈대아 역(Chaldean)은 본절의 원문에 나오는 '입'을 '마음'으로 고쳐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본절의 의미는 '압살롬의 마음에 그 일이 결심되어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원문에 치중하였다기보다는 해설에 치중한 오역(誤譯)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에 지지할 수 없다. 
(3) '암논을 죽이려는 그의 결심이 굳게 닫친 그의 입술에 잘 나타나 있었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입장이 있다. 이 해석은 요나답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묘략가인데다 그 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면밀히 추적해 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비교적 타당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33 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상심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하니라 

34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파수하는 청년이 눈을 들어 보니 보아라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는도다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이는 29절의 상황과 이어지는 구절이다. 즉, 본서 저자는 29절에서 압살롬의 암논 살해 사건을 이야기하다가 30-33절에서는 장면을 바꾸어 다윗궁을 상황을 이야기하였으며 다시금 본절에서는 29절 사건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잇는 것이다. 한편 본서 기자는 본장에서 '압살롬이 도망하니라'는 말을 반복 기술함으로써(37, 38절) 압살롬이 친족을 고살(故殺)한 큰 범죄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좁은 팔레스틴 땅에서 압살롬의 도망은 실질적으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당시 다윗의 권세로 보아 그가 잡고자만 한다면 압살롬을 체포하는 것은 시간 문제 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윗이 그리 하지 않은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요인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27절 주석 참조.

'뒷산 언덕길' 히브리인들은 동쪽 방향을 앞쪽이라고 불렀고 서쪽 방향을 뒤쪽이라 불렀다(출 3:1, 사 9:12). 따라서 이 말은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산길을 의미한다.

35 요나답이 왕께 아뢰되 보소서 왕자들이 오나이다 당신의 종이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하고 

'종의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요나답의 간사힘이 그대로 드러나는 구절이다. 즉 그는 이미 압살롬이 다말의 일로 인해 암논을 살해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하였었다. 32절 주석 참조. 그렇다면 그는 미리 이 같은 사실을 다윗에게 귀띔하여 사전에 비극을 막도록 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이를 외면하고서는 요나답은 마치 다윗을 위로라도 하듯 자신의 추측(32절)이 맞은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36 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소리를 높여 통곡하니 왕과 그의 모든 신하들도 심히 통곡하니라 

'왕과...심히 통곡하니라' 다윗이 이처럼 대성 통곡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즉 31절에선 자신의 모든 아들들이 죽임당하였다는 보고를 접하고 나서 혼절(昏絶)하였지만 이제 암논만이 죽을 것을 알고서도 대성 통곡한 까닭은 자신의 죄와 잘못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즉 다윗은 압살롬이 다말 사건으로 인해 암논을 살해한 사실을 알고선 과거 자신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우리아를 살해했던 죄를 기억했을 것이다(11장). 그리고 자신이 암논을 엄히 징계하지 못한 결과(21절) 결국 형제간의 살육이란 비극을 초래한 데 대하여 심한 자괴감(自壞感)을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 죽임당한 암논에 대한 안타까움, 압살롬에 대한 염려 등이 어우러져 심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7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 그술은 아람 소국들 중 하나로서 이스라엘 바로 북쪽에 인접해 있던 나라이다. 즉 '그술'이란 말의 뜻은 '다리의 땅'(bridge land)으로서 이는 헤르몬 산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북부 요단강 양편으로 다리처럼 길게 뻗어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한편, 다윗은 당시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여 그술과의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마아가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압살롬이다. 따라서 그술 왕 달매는 압살롬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3:3 주석 참조.

'날마다 그 아들을...슬퍼하니라' 카일(Keil)은 본절을 가리켜 다윗이 죽은 암논(28, 29절)을 생각하고 슬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39절에서 다윗은 이미 죽은 암논을 잊어버린 지는 오래이고 다만 도주한 압살롬만을 생각한 것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 왕이 슬퍼했던 아들은 암논이 아니라 압살롬인 것이다.

38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삼 년이라' 다윗이 압살롬의 죄악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애끓기에 충분한 만큼의 세월이 지났음을 시사해 주는 구절이다. 39절 주석 참조.

39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다윗 왕의 마음이...간절하니' 본절은 원문을 의역(意譯)한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 '테칼 다윗 하멜렉 라체아트 엘 압살롬' 을 직역하면, '다윗 왕(의마음)이 압살롬에게 가기를 그쳤더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에게 간다'는 표현, '라체 아트 엘...' 은 '...에게 가서 그를 벌하다'는 뜻을 가진다(신 28:7). 따라서 본절을 보다 정확히 해석하자면 '다윗 왕이 마음속으로 압살롬을 법에 따라 처벌할 의지를 포기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분노는 시간이 지나자 점차 누그러지고 오히려 압살롬에 대한 연민의 정이 되살아 났음을 알 수 잇다.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는 하반절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보다 잘 입증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