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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5장 절별 해석 및 주석

LNCK 2023. 4. 26. 08:02

◈삼하15장 절별 해석 및 주석

1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여기서 '호위병’은 히브리어로 '이쉬 라침' 인데, 이는 '달려가는 사람', '경주자'란 뜻이다. 즉 당시 왕의 마차 앞에서 뛰어다니며 마차가 지나갈 길을 정비하고 왕을 경호하던 경호부대(警護部隊)를 가리킨다.

2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일찌기 일어난 성문 길 곁에 서서' 여기서 성문이란 왕궁의 문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 마을의 성문은 장로들이 앉아서 재판하는 장소였다(창 23:10, 18, 욥 29:7, 잠 24:7, 31:23, 신 21:19, 22:15). 때문에 이러한 관례에 따라 이스라엘 왕은 자기의 성문, 곧 궁궐 문에 합법적인 재판관을 세워 재판을 베푸는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재판관은 먼저 예루살렘 주민들을 재판하고 다음에 타성읍의 소송 문제들을 재판하였는데, 그 재판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다. 따라서 압살롬은 성문에서 열리는 왕의 재판을 전적으로 방해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성문 길 곁에 섰던 것이다.
지금 압살롬은 다윗에 이은 실제 서열2위이다. 충분히 재판하고 판결할 힘이 있었다.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압살롬의 왕이 재판을 받으러 올라가는 사람들을 세워놓고 개인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장면이다. 백성들에 대한 압살롬의 이러한 친절은 자기를 왕으로 보이기 위해 거창하게 병력을 대치한 오만 불손한 행위와는 아주 대조적이다(1절). 그렇지만 이 역시 그가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취한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는 음흉한 행동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없다(6절).

3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재판도 하기 이전에 사법적인 결정을 내려주고 있는 압살롬의 독단적 발언이다. 즉, 압살롬은 상대방에게 무조건 유리하게 말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살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장차 다윗 왕에 대하여 불평할 수 있는 여지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압살롬이 다윗을, 백성들에 대한 자기의 기본 의무를 감당하지 않고 무책임하고 불의한 자로 매도(罵倒)하고 있는 구절이다. 한편 여기서 '송사 들을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페트' 는 사법적 처리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재판관, 또는 사법 관리를 의미 한다. 이는 왕이 직접 임명한 자였기 때문에 왕적 권위로 재판할 수 있었고, 이 사람이 한번 결정하면 더 이상 상소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다윗이 이러한 사람을 세운 것은 아마도 혼자서 모든 소송을 검토하고 재판하기에는 너무 벅찼으며, 또한 재판에는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윗이 이러한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하는 압살롬의 거짓 증거는 다윗이 사법적 의무에 대해 방임하고 있는 양 매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4 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내가...재판관이 되고' 이처럼 압살롬이 왕자란 신분을 이용, 스스로 백성의 재판관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재판관 조직이 아직 체계화되지 못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이스라엘에서 그 같은 조직이 전문화된 형태를 갖춘 것은 유다 왕 여호사밧 때의 일이다(대하 19:4-1).

5 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입을 맞추니' 본래 입을 맞추는 것은 반가움의 표시이며 진정한 화해의 표시이다. 그러나 압살롬은 여기서 백성들에게 자기를 선전하고 부각시키기 위해 이를 이용하고 있는 중이다. 14:33 주석 참조.

6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지금까지 압살롬은 백성에게 관심을 보이고(2절), 현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며(3절), 약자를 동정하고(4절), 그들에게 애정을 보였다(5절). 그런데도 본서 저자가 이 모든 압살롬의 행위를 가리켜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 하였다'고 언급한 까닭은,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성실한 통치를 베풀어 신망(信望)받는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기만하는 술책으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7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압살롬이 하나님께 어떠한 서원(誓願)을 드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압살롬의 패역한 행동과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이는 다윗을 속이고서 헤브론으로 가려 한 압살롬의 거짓말 이었음이 거의 확실시 된다. 즉 그는 다윗으로부터 아무런 의혹도 사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 거사(擧事)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이제 하나님까지 팔아 먹고 있다 것이다(9-12절).

'헤브론에 가서...이루게 하소서' 본래 이름이 기럇아르바(Kirjath-arba)인 헤브론(Hebron)은 예루살렘 남쪽 약 30여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여호와 신앙의 발상지이다(창 13:18). 따라서 당시 예루살렘이나 기브온(대상 16:39)과 같은 종교 중심지가 있긴 하였지만, 압살롬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헤브론으로 가겠다고 한 것(8절)은 그다지 이상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8 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암논 살해 사건 후 압살롬이 외조부인 그술 왕 달매에게로 도망쳐 그 곳에서 3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던 때를 가리킨다(13:37, 38). '서원하기를...여호와를 섬기리라'는 압살롬의 말은 그가 헤브론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뜻이다(7절). 그런데 압살롬이 이 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까닭은 그가 헤브론에서 반역의 기치(旗幟)를 들기 위함이었다. 즉 압살롬은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며(3:1, 3), 다윗이 그곳에서 기름 부음 받은 것(2:1-4)을 생각하고 자기도 그곳에서 기름 부음을 받으려 작정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은 다윗이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5:1-10)으로 옮긴 탓에 생긴 헤브론 주민들의 섭섭한 감정도 충분히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즉 다윗이 헤브론을 수도로 삼은 동안 그곳 거민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상당한 기득권(旣得權)을 향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고 난 후에는 자연히 그같은 이권을 상실하였을 터이니, 헤브론 주민들은 점차 다윗에 대하여 불만과 섭섭한 감정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압살롬은 자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최적지(最適地)로서 헤브론을 지목하고서, 어떻게든 반역의 무리를 규합하려 했던 것이다(10-12).

9 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평안히 가라' 다윗 왕의 이러한 허락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란의 움직임에 대하여 다윗 왕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아마 온유한 성품을 지닌 다윗 왕이 압살롬을 단지 사랑스런 한 아들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6:12-19, 신 12:4-14)을 놔두고 굳이 헤브론에까지 가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한 압살롬의 요구에 대해 아무런 의혹도 갖지 않고 쾌히 승락했던 것이다.

10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정탐을...두루 보내어' 압살롬이 이처럼 반란 전에 정탐을 이스라엘 각지에 보낸것은 아마 각 지파의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고(Kiel), 자신이 거사(擧事)할 때 반발하지 않도록 미리 정지(整地) 작업을 해놓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팔 소리를 듣거든' 여기서 나팔 소리는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기(叛旗)를 든다는 신호이다. 그런데 당시 압살롬이 나팔 소리 하나만으로 전국에 거사를 알린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혹자의 주장처럼 압살롬이 순전히 나팔 소리로만 거사를 알렸다고 볼 수 없으며, 나팔 이외에도 다양한 신호 방법을 사용했으리라고 생각된다.

11 그 때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이백 명이...저와 함께 갔으며' 압살롬이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데리고 간 이백 명의 인사(人士)는 단순히 평범한 인물들이 아닌, 예루살렘 성의 고위 관리들이었을 것이다. 즉, 압살롬은 이들이 자기의 거사에 동조(同調)해 줄 경우 자기의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질 것을 계산하고 이들을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는 명목(7, 8절)으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이백 명의 인사들은 압살롬의 반란 기도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압살롬에게 유인당한 셈이므로, 아마 압살롬은 이들이 반항할 경우 이들을 살해하려고까지 했을 것이다.

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하도벨' 길로(Giloh)은 유다 남쪽 산지에 있는 한 성이다(수 15:51). 이곳은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약4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늘날의 '길벱 잘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곳 출신 아히도벨(Ahithophel)은 지략이 뛰어나 다윗의 모사(謀士)로 중용(重用)되었던 자로서(31절), 이스라엘 가운데 그의 지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압살롬은 자기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그를 영입하였는데, 과연 그의 기대대로 아히도벨은 기발한 모략을 제공하여 압살롬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16:20-23, 17:1-3). 

그런데 한때 다윗 왕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모사로 활약했던 아히도벨이 이처럼 쉽게 다윗 왕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모사가 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항을 놓고 추정해 볼 때, 그 까닭은 아마도 다윗 왕의 악행에 대한 그의 반발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11:3과 23:34 또는 대상 3:5 등을 통해서 볼 때 밧세바는 아히도벨의 손녀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아히도벨이, 자기의 손녀를 추행하고 또한 손녀 사위인 우리아를 모살(謀殺)한 다윗 왕의 파렴치한 행위(11장)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가 압살롬의 제의가 있자 이렇게 빨리 변심할 수 있었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이처럼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이제 급속도로 압살롬에게 크게 유리해진 반면, 다윗 왕에게는 크게 불리해졌다. 그 원인은 아마도 압살롬의 매력적인 외모(14:25, 26)와 그의 간교한 여론 조성(1-6절) 이외에도 백성들에게 비추어진 다음과 같은 다윗 왕의 부정적인 모습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1) 밧세바 간음 사건과 우리아의 죽음(11장), (2) 암논의 범죄에 대한 그의 우유부단한 조치(13:21), (3) 영토 확장 사업(8장)에 따라 상대적으로 약화된 다윗 왕의 대국민 관심(對國民關心)과 과다한 세금 징수 등으로 인해 상당수의 백성들은 이제 다윗 왕의 공정성과 윤리성, 그리고 통치력에 의혹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13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이스라엘의 인심이...돌아갔나이다' 이 말은 문맥상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백성들이 이제 압살롬을 왕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2) 백성들이 이제 이익을 위해 압살롬의 편에 붙었다는 뜻이다.

14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일어나 도망하자'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소식을 듣자마자 이처럼 즉각적으로 피신하려 한 것은 아마 나단 선지자가 그에게 예언했던 재앙(12:10, 11)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다윗은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도성(都城) 예루살렘이 전화(戰火)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윗이 이처럼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 길에 오르면서도 궁을 지키도록 후궁 10명을 남겨둔 것(16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우리 한 사람도...피하지 못하리라' 다윗은 2년 동안이나 벼르다가 기어코 암논을 살해하고야 말았던 압살롬의 강한 복수심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13:23-29). 따라서 이번에도 2년 동안의 연금(軟禁) 상태(14:28)를 비롯하여 다윗과 여러 가지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압살롬(13:20, 21, 31, 14:24)이 잔인한 복수극을 펼칠 것으로 충분히 예상 했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피난길을 재촉하였는데, 이때 다윗 왕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탈출한 사람은 그의 호위병과 6백 명의 병사들 그리고 많은 대신(大臣)과 백성들이었다(17절).

15 왕의 신하들이 왕께 이르되 우리 주 왕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보소서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더라 
16 왕이 나갈 때에 그의 가족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왕이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니라 

'권속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명을 남겨 두어' 다윗 왕은 자기에가 앙심을 품은 압살롬이 자기의 이복 형제들과 왕비들까지 모두 살해할 것을 염려하여 이들 모두는 피난 길에 함께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후궁(後宮)열 명은 죽을 염려가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궁을 지키게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 왕의 이러한 조치는 결과적으로 나단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2:11, 16:20-22). 즉 하나님께서는 인긴의 생각까지도 친히 주장하사, 한번 선고한 죄악의 징벌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17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멈추어 서니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여기서 모든 백성이란 다윗 왕을 따라 나온 예루살렘 성내의 모든 사람들, 곧 왕의 가족들과 그의 신하들 및 성내 주민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벧메르학' 은 '먼 집', 또는 '먼 궁'이란 뜻이다. 이는 동네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 있던 다윗의 별궁(別宮)이었던 것 같다. 학자들은 이 별궁이 다윗 성(5:9) 동편 기드론 시내를 넘기전에 위치한 것으로 추측한다.
이렇게 볼 때, 다윗과 그 추종자들은 기드론 시내를 넘기 전에 이 별궁에서 안전한 탈출을 위한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제 이와 관련 본절에서부터 언급되는 다윗의 도피 경로를 지도상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1) 예루살렘 벧메르학에서 감람산 길로 진행함(18, 30절) 
(2) 감람 산 부근의 바후림에 이르름(16:5) 
(3) 요단 강을 건너 마하나임에 당도함(18:5) 
(4) 에브라임 수풀에서 압살롬군과 격돌함(18:6-8).

18 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 이 왕 앞으로 행진하니라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 여기서 그렛(Cherethites)과 블렛(Pelethites)은 다윗 왕의 시위병들을 의미한다. 이 중 그렛은 왕명을 따라 중죄인을 처벌하는 사형집행 기관의 병사들이며, 블렛은 왕의 보발군(步撥軍)들이다. 8:18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육백 인' 우리는 이들을 다윗 왕이 블레셋의 수도인 가드(Gath)를 점령했을 때(8:1)포로로 잡아온 병사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윗 왕이 대적의 포로들로 자기의 근위대(近衛隊)를 조직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드에서 온 육백 인'이란 다윗이 사울 왕으로부터 핍박을 받던 시절에 그의 도피처였던 블레셋의 자드에서부터 충실히 다윗 왕을 추종했던 용사들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들은 가드에서부터(삼상 27:2) 시글락(삼상 27:6, 30:1), 헤브론(2:3)을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5:6)다윗 왕을 보필하는 데 초지 일관(初志一貫)한 신실한 용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왕의 근위대로 임명되어, 지금은 다윗을 경호하고 있는 것이다.

19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가드 사람 잇대' 여기서 '가드 사람'(the Gittite)이란 말은 '블레셋의 가드에서 망명하여 온 사람'이란 뜻이다. 즉, 지금 다윗 왕을 따르고 있는 잇대는 그의 고향에서 어떠한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자 자의(自意) 또는 타의에 의해서 본국을 떠나 다윗에게로 망명하여 온 용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의 본국에서 대단히 용맹을 떨쳤던 큰 용사였기 때문에 다윗 왕은 그의 무용(武勇)과 지위를 인정하여 자신의 군대 장관 중 한 명으로(18:1, 2) 임용하엿던 것이다. 잇대는 얼마 후에 요압과 아비새와 동등한 위치에서, 반란군을 진압하는 다윗군의 지휘자가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너는 쫓겨난 나그네니' 여기서 '쫓겨난 나그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골레' 는 비단 포로(스 1:11, 10:8, 렘 28:6, 겔 1:1, 3:11) 뿐 아니라 이주민, 또는 망명자, 추방자까지도 의미하는 단어 이다(대상 5:22 ' 스 4:1, 렘 29:16, 겔 12:7, 왕하 24:14, 25:11). 그런데 다음과 같은 점에 의거할 때 여기서는 후자 곧 망명자, 추방자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1) 잇대는 혈혈 단신으로 다윗 왕에게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가족과 시종들까지 거느리고 왔기 때문이다(22절). 즉, 만일 잇대가 포로나 인질로 예루살렘에 끌려왔다면 혼자서 왔을 것이나, 그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온 점으로 보아 그는 포로가 아니라 망명자인 것이다. (2) 잇대는 가드 사람으로서 다윗 왕의 측근이 되었으며, 심지어 다윗군의 사령관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이다(18:1, 2).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단순한 포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한 용사임을 증거해 준다. 왜냐하면 다윗 왕이 적군의 포로를 자기 곁에 두거나 군대의 사령관으로 삼았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잇대는 다윗 왕의 전쟁 포로가 아니라, 분명히 정치적으로 망명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여기서 '왕'은 현재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켜 이스라엘의 왕임을 자처하고 있는 압살롬을 가리키는 말이다(10-12절). 따라서 본절은 다윗 왕이 진퇴 양난(進退兩難)의 곤경에 빠져 잇으면서도 한 사람의 무고한 외국인을 깊이 생각하고 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잇대는 본토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이기 때문에 공연히 타국의 정치적 내란으로 인해 목숨을 내걸 필요가 없다고 다윗 왕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다윗 왕의 언사를 통해 자신의 곤경 중에도한 사람의 난감한 처지를 이해하여 주는 그의 깊은 사려(思慮)와, 용사의 힘을 의지하려는 인간적인 도모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난국을 타개하려는 그의 대담한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20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너는 어제 왔고' 여기서 '어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트몰' 은 반드시 문자적으로 어제만을 의미하지 않고, 가까운 과거 곧 얼마전을 의미하기도 하는 단어이다(창 31:2, 5, 출 5:7, 8, 14, 신 4:42, 수 3:4, 룻 2:11, 욥 8:9).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잇대의 앞날에 대한 다윗 왕의 축원(祝願)인 이 말에 대해, 혹자는 부사적으로 해석하여 '은혜롭고 진실되게 너와 함께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는 의미인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여기서 '은혜와 진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과 밀접하게 관련된 말이다. 즉 구약의 모든 용례들을 살펴볼 때, 이 용어들은 거의 모두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은혜)과 신실성(진리)을 의미하는 것들이다(출 34:6, 시 25:10, 40:10, 11, 57:3, 61:7, 잠 3:3, 14:22, 16:6).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곧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것과 같은 언약의 축복들이 너에게도 함께 하기를 원하노라는 다윗 왕의 신앙적인 축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21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의 사심과...맹세하옵나니' 이 말은 잇대가 다윗 왕에게 망명한 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즉 이는 이제 잇대가 블레셋의 우상 종교를 버리고 여호와의 종교로 개종(改宗)했음을 시사해 준다.

'어느 곳에 계시든지...그곳에 있겠나이다' 다윗 왕의 깊은 배려에 대한 잇대의 충성스런 대답이다. 이러한 잇대의 결심은 다윗 왕의 신앙 인격에 매료된 나머지 자기의 목숨까지라도 아까와하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다윗 왕은 한때 스스로 죄악에 빠지고(11장) 자녀 교육을 제대로 시행치 못하는(13:21)등 인간적 잘못을 보이긴 하였지만, 근본적으로 이방인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는 순수한 신앙 인격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다윗은 그러한 신앙 인격으로 말미암아 한 충성스런 용사를 얻을 수 잇었고, 후일 왕권 회복에 있어서 큰 도움을 받기까지 하였던 것이다(18:2). 이처럼 바른 인격과 참된 신앙의 소유자는 이웃에게 감화를 끼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정녕의 성도가 힘써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마 5:14-16, 고후 2:15).

22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수행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그와 함께한 아이들' 여기서 '아이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프' 는 본래 (1) 어린이, 유아들을 의미하나 (2) 딸린 식구들, 처자들을 의미하기도 한다(출 12:37, 창 47:12). 그런데 여기서의 의미는 후자로서, 이 말은 잇대에게 속한 식구들, 곧 그의 모든 처자(妻子)들을 가리킨다.

23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온 땅 사람이 대성 통곡하며' 여기서 '온 땅 사람'이란 17절의 '모든 백성'과는 의미가 다른 말로, 다윗 일행이 피난 중 거쳐 지나간 지방의 모든 주민들을 의미한다.

'기드론 시내' 예루살렘과 감람 산 사이에 잇는 깊은 골짜기로서, 강우량이 많은 겨울에는 물이 흐르지만 건기인 여름에는 메말라 있는 간헐천(間歇泉)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동편의 여호사밧 골짜기(욜 3:2)에 위치해 있다.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에서 요단 계곡이나 여리고 방면으로 여행하는 자들은 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 산 비탈길을 넘는 루트(root)를 애용한다고 한다.

'광야 길' 예루살렘 북쪽 벧엘에서 여리고에 이르는 유다 광야상의 길이다. 다윗 왕은 이 길을 거쳐 요단 강을 건너 마하나임으로 가고자 했던 것이다. 

24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사독과...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이처럼 사독과 그와 함께한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언약궤를 메고 나와(6:12-19) 다윗과 동행하려 한 사실은, 그들 전체가 다윗 왕을 지지하고 나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단지 내란 중(10-12절)에 언약궤를 안전히 보호해야겠다는 의도보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장물인 언약궤를 다윗 편에 둠으로써 장차의 전투에서 다윗 왕에게 유리하게 하고픈 심사(心思)에서 그리하였던 것이다. 한편 사독은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후손으로서, 다윗 치하에서 아비아달 가문과 더불어 제사장작을 수행하던 자이다. 

'내려놓고...기다리더니'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내려놓은 장소는 기드론 시내(23절) 건너편에 위치한 감람 산이다(30절). 즉, 사독과 레위인들은 예루살렘 성내의 사람들이 미처 다 빠져 나오지 못하자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감람 산에 언약궤를 잠시 안치해 놓고서 기다렸던 것이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다윗이 이처럼 행동한 내면적인 이유는, 그가 지금의 곤경을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26절). 즉, 다윗은 자신이 현재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한 언약궤를 모신다 해도 과거의 죄에 대한 징계(12:10-12)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윗이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의심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오히려 예루살렘 성을 떠날 때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확신하였다(14절 주석 참조). 따라서 그가 언약궤를 반환한 것은, 비록 하난미의 임재의 가견적(可見的)인 상징물이 곁에 없다 할지라도 자신의 나라를 영원히 지속시켜 주시갰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7:16)을 믿은 까닭임이 분명하다. 또한 다윗이 언약궤를 반환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현재 피신길에 오른 자신과 더불어 정처없이 유리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을 염려하였기에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낸것이다.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보이시리라' 이는 다윗 왕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미신적(迷信的)으로 섬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그의 곁에 있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과 함께 함을 더욱 중요시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다윗의 신앙 고백이며, 그토록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하는 순전(純全)한 신앙의 표현이라 하겠다.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언약궤 보존을 위한 조처 선히 여기시는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본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뻐하지 않으실지라도 하나님의 처사에 자기 자신을 모두 맡기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복하겠다고 하는 다윗의 진정한 겸손과 순종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삼상 15:22).

27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읍으로 돌아가라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여기서 '선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에' 는 '보다', '감찰하다'는 뜻의 동사 '라아' 에서 파생된 말로서 관찰자(觀察者)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윗 왕이 사독을 가리켜 선견자라고 부른 것은 대제사장의 관찰 기능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즉, 당시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는 임무 뿐만 아니라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관찰하여 왕이 나아갈 바를 자르쳐 주는 임무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삼상 22:10, 23:6). 따라서 본절은 다윗이 사독 제사장에게 이스라엘 왕인 자신을 위하여 그가 모든 일을 관찰해야 할 임무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다윗은 이로써 사독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남아 압살롬의 동태를 살펴 자신에게 나아갈 바를 가르쳐 주도록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28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광야 나룻터' 이는 요단강 나루터로서 사해 입구에서 약 4.5km 떨어진 지점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여차하면 요단강을 건너 먼 곳으로 도망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다윗 왕은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보고를 기다렸던 것이다(17:16, 21, 22).

29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 

30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 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머리를 가리운 행위는 깊은 슬픔으로 인하여 자연스러운 동작이다. 또한 머리는 그 사람의 명예의 상징이므로, 다윗의 이러한 행위는 곧 자신의 명예가 상실된 것을 부끄러워한 행동이기도 하다(에 6:12, 겔 24:17, 렘 2:37). 즉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파생된 압살롬의 반역(12:10-12)에 대하여 이제 큰 고통과 수치, 슬픔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와중에서 다윗이 맨발로 울며 행했다는 말은 그가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동시에 이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낮아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31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이미 앞서 압살롬의 모사(謨士)가 된(12절) 아히도벨을 언급하고 있다. 아마 이는 그에 맞서 싸우게 될 다윗의 모사 후새(32-37절)을 소개하기 위한 도입부인 듯하다. 즉, 이들이 지략의 대결은 본 사건의 이름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그 전(前)단계로 여기서 아히도벨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17:1-23).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이는 다윗 왕의 간절한 기도이다. 애통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심정에서 드려진 이 기도는 비록 짧지만 하나님께 그대로 상달되어 이루어졌다. 즉, 아히도벨의 모략은 뒤에가서 후새에 의하여 완전히 무력화(無力化)되었던 것이다(17:14). 여기서 우리는, 마음을 다한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능력이 있음을 보게 된다.

32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 이는 감람산 꼭대기를 가리킨다(30절). 한편 여기서 '경배'란 말은 제사보다 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24절 주석 참조). 한편 이곳은 지리적으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나누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도 생전에 이곳에서 기도하신 적이 있다(마 26:30, 눅 21:37, 22:39).

'아렉 사람 후새가...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후새가 자신의 옷을 찢으며 흙을 머리에 무릅쓴 채 다윗을 맞이하였다는 것은, 곧 통일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 길에 나서게 된데 대한 자신의 충격과 슬픔을 토로(吐露)한 것이었다(1:2 주석 참조). 아무튼 다윗이 이처럼 피난 길에서나마 후새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간절한 기도(31절)의 응답(應答)이었다. 즉, 다윗 왕은 여기서 후새를 만남으로써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할 수 잇는 결정적인 전기(轉機)를 마련할 수 있게된 것이다(17:1-23). 
한편, 후새(Hushai)는 다른 곳에서 다윗의 친구로 기록되어 있는데(37절, 16:16, 대상 27:33), '친구'에 해당하는 '레에' 는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왕에게 직고하는 대신(8:18)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후새는 다윗 왕의 단순한 친구 이상으로 왕의 정책 결정에 상당 부분 관여한 모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렉 사람(the Archite)이란 요단강 근처 아렉 성 출신자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의 거주지는 벧엘과 아다롯 사이였다.

33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내게 누를 끼치리라' 다윗 왕이 후새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아마 후새가 나이가 매우 많아 자신의 일행을 따라오기 힘들 것으로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말 가운에는 아히도벨에 버금가는 모사인 후새가 예루살렘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압살롬 측의 정보를 탐지하고, 저들의 계략을 파하는 것이 휠씬더 유익하다는 의미 또한 담겨있을 것이다(34절).

34 그러나 네가 만일 성읍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전에는 내가 왕의 아버지의 종이었더니 이제는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압살롬에게 말하기를...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다윗이 후새로 하여금 이러한 모략을 꾸미게 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 였다. (1) 아히도벨이 다윗 왕을 추격하는 일에 대하여 압살롬에게 모략을 베푸는 일을 후새가 중간에서 방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17:1-14). (2) 압살롬의 결정 사항을 사독과 아비달에게 알려 주어 다윗 자신에게 기별하기 위함이다(35, 36절, 17:15-23).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고 있음을 볼 수 잇다. 이처럼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는 그분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가운데 인간적으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믿음과 기도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35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 네가 왕의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알리라 
36 그들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요나단이 그들과 함께 거기 있나니 너희가 듣는 모든 것을 그들 편에 내게 소식을 알릴지니라 하는지라 

이 부분은 다윗의 비상 연락망이 어떻게 짜여졌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것은 곧 후새-사독-아비아달-아히마아스와 요나단-다윗의 순으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37 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읍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 

'후새가 곧 성으로 들어가고' 앞의 대제사장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29절) 후새도 다윗 왕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이다. 사실상 이러한 순종은 압살롬에 의해 그 음모가 발각될 경우 살해를 당하게 될 지도 모르는 모험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새가 이를 감행한 것은 그만큼 그가 다윗 왕을 존경했음을 의미한다. 아무튼 이와 같이 국내의 종교 지도자(대제사장들)과 정치 지도자(후새)가 충성스럽게 다윗 왕을 지지했다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급히 피신 길에 오른 소식(13-18절)을 들은 압살롬이, 이제 반란지(反亂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승리의 입성(入成)을 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7-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