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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아들 2 압살롬

LNCK 2023. 4. 27. 08:45

[데스티니] 29. 다윗의 아들 2 - 압살롬 (삼하 13:22-29) - YouTube
◈다윗의 아들 2  압살롬                삼하13:22~29            ▣ 내적 치유 

데스티니 시리즈 설교 29번째 시간입니다. 
데스티니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작정'이란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계획을 가지고 창조하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인생은,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에다가 
새로운 그림을 그려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계획, 밑그림, 설계도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데, 우리가 새롭게 뭔가를 만들어나가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은 발견해 나가는 겁니다. 무엇을 발견해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그 계획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설계도를 다 그려졌고, 디자인한 밑그림이 있다는 거예요. 

이미 우리 인생을 향한 설계도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고 
또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축복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를 향한 계획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어 나갈 때 
가장 행복하고 기쁘도록 창조하셨고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걸 하고 있으면 
아무리 세상에서 많은 것을 성취하고 
아무리 돈과 명예와 또 좋은 것들을 얻었다고 해도 
그 안에 만족함이 없어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놓으셨어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 가운데 
이 하나님의 축복이 더 충만하게 넘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들을 발견하시고 
이루어 가셔야 돼요. 

그래서 <데스티니 설교 시리즈>를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온 인물들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하면 데스티니를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거나 
-어떻게 하면 데스티니를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 주변에 있는 세 명의 사람, 아도니야, 요압, 오늘 살펴볼 압살롬까지
이 세 명은, 다윗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불행하게도 이 세 명의 공통점은 뭐냐면 
자기 데스티니(하나님의 계획, 작정)를 다 말아먹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어떻게 해서는 안 되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이 망가지게 되는지.. 그 길을 피하자는 거지요. 
(반면교사의 교훈을 삼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살펴보았던 아도니야 기억나세요? 
다윗의 아들이었지요. 사실은 넷째 아들이었는데 
자기 위에 세 명이 죽었기 때문에, 가장 큰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 아도니야의 그 문제는 뭐였죠? 
다윗의 카피가 되고 됐던 거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을 이루려 했던 게 아니라 

주변에 자기가 보기 좋아 보이는 거, 
부러워 보이는 거, 그것에 자기 인생을 걸어서 
그 카피로 살려고 했던 사람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그의 아버지였던 다윗 왕을 똑같이 흉내 내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왕이 되는 것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고 
또 다윗처럼 살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다윗의 마지막 여인이었던 아비삭을 달라고 했다가 죽음을 당하고... 

이런 이야기들은 아도니야가 자기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 카피캣이 되려고 했다는 거죠.  *Copycat. 모방하는 사람, 흉내쟁이
즉 모조품, 짝퉁이 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어떻게 인생이 망가질 수 있는 가를 보여 준게 아도니야 입니다. 

근데 오늘 날, 이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팽배해 있지요. 
특별히 한국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의 삶이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거 같아요. 
그래서 거의 비슷한 삶들을 살도록 강요받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나오고, 그 다음에 기업에 취직했다가 
나이 되면 퇴직하고, 애들 장가보내고...

어쨌거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이 거의 예외 없이
비슷하게 공장에서 찍어내는 사람들처럼 살아갑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지 않으셨어요. 
우리를 향한 오리지날 계획이 있으시고 
우리 각자를 향한 독특한 계획이 있으시고 
그것들을 이루어 가도록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가운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카피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독특한, 또 유일한 그 계획들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다윗의 또 다른 아들이었던 압살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압살롬이 말아먹은 데스티니.. 를 살펴볼 텐데요. 
압살롬은 다윗이 가장 아꼈던 아들 중에 한 명이었죠. 

불행하게 압살롬의 인생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마지막에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죠. 

압살롬의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사건을 이해해야 됩니다. 
-암논의 다말 범죄 사건과  *삼하13장 본문
-압살롬의 모반 사건이죠.

암논은 다윗의 장자입니다. 
둘째 아들은 길르압인데, 어렸을 때 죽은 것 같아요. 성경에 기록이 더 없어요.

셋째 아들이 압살롬이었어요. 
넷째 아들이 아도니야. 
물론 어머니는 전부 다른 사람입니다. 배다른 형제들이죠.

그래서 압살롬의 인생을 보면 
인생이 꼬이게 되는 결정적인 두 가지 사건이, 바로 이 사건들이었죠.

그가 왕자로서 잘 자랄 수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인생이 망가지고 꼬이기 시작하는 게 첫 번째는 '암논 사건'이죠. 
이거는 압살롬의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암놈이 먼저 잘못을 한 거지요... 

그런데 이 두 사건을 좀 더 우리가 깊게 묵상을 해보고 성경을 살펴보면 
사실은 압살롬의 인생을 망가뜨린 진짜 이유는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사건이 아니었어요. 

그 사건에 대한 압살롬의 반응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래서 사실 압살롬의 인생을 망가뜨린 진짜 이유는 
압살롬의 내면적인 이유였다는 거죠. 

그래서 이 압살롬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삼하14:25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과 같이 아름다움을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었더라' 

압살롬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흠이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이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가 
형 암논을 죽이고 
아버지 다윗을 죽일 것을 계획했다... 그런 무서운 내면의 소유자였던 것이죠. 
여러분,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런 억울한 일이 있었고,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친형인데, 형을 죽이는 일이 쉬웠겠어요? 

더 나아가서 나중에는 아버지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거는 더 쉽지 않은 일이지요.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죽이려고 하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내명과 외면의 차이가 아주 컸던 사람이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었고, 
또 사람들이 따를 만큼 카리스마도 있었던 거 같고, 지도력도 있었던 거 같고 
하여간 외면적으로 좋은 조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굉장히 정리되지 않고, 혼돈스럽고, 무서운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압살롬의 인생을 망가뜨린 진짜 이유였다는 거죠. 

△왜냐면 여러분, 물론 압살롬의 인생 가운데 
결정적으로 그의 인생을 꼬이게 하는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사실 사람이 인생을 살다 보면 
인생을 꼬이게 할 만한 사건들은 누구나 한 두 번씩 겪게됩니다. 

다윗이라고 그런 사건이 없었겠습니까? 
다니엘은 나라가 망해 가지고서 포로로 잡혀 가서 내시로 살게 되는데 
이것도 다니엘의 인생을 꼬이게 하려면 얼마든지 꼬이게 할 수 있었죠.

다윗도 왕의 사위요, 이스라엘의 장군으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도망자 위치에서 10년 이상을 도망다니게 되는데,
이것도 다윗의 인생을, 꼬이게 하려면 얼마든지 꼬이게 할 수 있는 거였구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압살롬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우리 인생을 망가뜨리고 꼬이게 할 만한 위험한 사건들은 
한두 번씩 다 겪게 된다는 거예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인생이 망가지는 건 아니거든요.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들을 충만하게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압살롬이 망가졌던 진짜 이유는 
암논 사건과, 반란사건 때문이 아니고 
사실은 자기의 내면적인 이유(분노)였다는 거죠.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 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이 망가지고 파괴되는 이유는 
드러나는 사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사건에 내가 반응하는 방식 때문인데, 
그건 우리 내면에서부터 나오는 거지요. 

우리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또 우리 안에 어떤 가치관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 
이런 것들에 의해서 나오는 반응들에 의해서 
우리 인생이 망가지기도 하고, 채워지기도 한다는 거예요. 

▲압살롬이 망가진 첫 번째 사건은 "암논 복수 사건"입니다. 
어느 날 그의 누이 다말이, 암논으로부터 못된 짓을 당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압살롬이 암논을 미워하기 시작하지요. 
복수를 계획합니다. 

근데 압살롬이 무서운 사람인 이유가, 
13:23절에 보면, 2년 동안 복수를 준비합니다. 2년 동안 칼을 갑니다. 

그리고 2년 후에 드디어 계획대로 암논에게 복수합니다. 
양털 깎는 날에 암논을 초대해 가지고 죽여버린 거지요. 

압살롬은 외모가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암논 사건을 보면, 2년 동안 준비하는 것을 보면 
아주 치밀한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그 후에 압살롬의 반란 때,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보다, 압살롬을 따랐던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그 이야기는, 그가 카리스마도 있고, 지도력도 있었다는 거예요. 
이런저런 조건들을 볼 때, 어쩌면 압살롬은 왕이 되었어야 될 사람이었죠.
왕이 가져야 될 자질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그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분노를 어떻게 다룰 줄 몰랐다"는 거예요. 
이것이 오늘 살펴볼 주제입니다. 

압살롬은 분노를 잘못 다루었다는 거예요. 
이것이 압살롬의 인생을 망가지게 합니다. 

(*또한 반란사건에서 드러난 압살롬의 문제는, 
압살롬은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개척해 나가려고 했다는 건데.. 이건 다음 번에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압살롬은 "분노를 다루는 방법"을 몰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압살롬의 이야기가 우리가 주는 교훈은 
분노를 잘못 다루었을 때,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파괴되는가? 
그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제가 정말 그렇게 분노한 적이 있었어요. 
얼마 전에 요르단에 갔는데 AVIS 렌트카 회사의 자동차를 렌트 했습니다. 
아주 세계적 규모의 큰 회사잖아요.

그래서 렌트카를 타고 가는데, 광야의 출애굽 경로를 따라가면서 
이제 기도하며 성지순례 하는 계획으로 출발했는데 
이게 광야 한가운데서 차가 고장나 버린 거예요. 

그래서 렌트카 회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다른 차를 보내주겠데요.
그런데 거기가 광야 한가운데니까.. 벌써 차가 도착하는데 몇 시간이나 걸려서
우리가 기다려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날이 다 저물어 버리고 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계획한 게 있었는데, 못하고, 그냥 시간 다 보내고 말았죠.
어찌 어찌 해서, 다른 차를 보내줘서, 그 차로 다시 이동을 했죠.
차를 받기까지 서너 시간 기다렸어요.

그래서 그날 밤에 원래 자동차를 돌려줘야 되는 건데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까, 그날 밤 아주 늦게 돌아왔어요.

그래서 그 다음 날 아침에, 차를 반납하러 갔더니
이틀을 썼으니까 렌트카 비용을 하루 치를 더 내라는 거에요.

고장 난 렌트카로 인해, 우리가 망친 계획에 대한 보상을 받아도 모자랄 판인데,
우리 보고 이틀치 렌트카 값을 내라고 하기에... 정말 분노가 일더라고요.

이런 거부터 시작해서, 우리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주는 
그런 그런 분노까지, 다양한 분노를 일으키는 사건들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사건 앞에서 우리가 분노를 느끼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얘기 하지 않아요.
분노 라는 감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창조하신 감정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분노 하시잖아요. 
구약의 내용이 종종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내용이에요. 

예수님도 성전에서 장사하고, 돈 바꿔주는 사람들한테 진노하셨죠. 
분노라는 감정은,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였던 감정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음 받은 우리도, 분노하는 감정이 있죠.

분노 자체는 정상적입니다. 
왜냐면 분노라는 것은, 우리가 의로운 게 뭔지, 불의한 게 뭔지를 
구분할 수 있다는 거예요. 

만약에 분노라는 감정을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의가 뭐고, 불의가 뭔지.. 이거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분노가 없으면.. 아무리 불의한 일을 봐도, 내 마음이 평안한 거죠!
이거는 잘못된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가 뭐고, 불의가 뭔지를 구분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신 기능이 분노라는 거에요. 

그래서 분노를 느끼는 것 자체는 정상적인 겁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되게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도 있어요. 타락했기 때문에
그렇지만 정당하게 분노를 느끼는 것, 
즉 내가 부당한 대우를 당하거나, 억울한 일이 벌어지거나 
우리 우리 가족 가운데 정말 원치 않았던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거나 그랬을 때 
분노를 느끼는 것 자체는 정당한 것이고, 옳은 것입니다. 
만약 이걸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정상적 기능 중에 뭔가 고장 난 거죠.

그래서 분노는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문한 음식보다 더 비싼 게 나온다면, 화가 나죠.
이건 정당한 거예요. 죄가 아니에요.

그러나 분노를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그 분노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은 참 중요해요. 

분노를 잘못 따르면 죄가 될 수 있다는 거죠.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분노를 잘못 다루면 죄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분노를 잘못 다루게 되면, 그건 죄가 될 수 있고요.  *압살롬
죄는 우리의 데스티니를 파괴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데스티니를 파괴하는 것은
항상 죄입니다. 
죄가 우리의 데스티니 (하나님이 내게 정하신 계획) 를 파괴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를 그렇게 미워하시는 거예요. 

마치 사랑하는 자녀의 인생이 망가졌을 때, 부모가 느끼는 고통과 같죠.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것은, 
죄가 하나님을 해코지 하는 게 아니라,
죄가 우리의 인생을 해코지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는 거지요. 

어쨌든지 간에 죄는 우리의 데스티니를 파괴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자 그래서 압살롬의 데스티니가 파괴된 것은, 암논 사건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암논 사건 자체가 압살롬의 데스티니를 파괴한 게 아니고요. 

암논 사건 때문에 분노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압살롬이 분노한 것도 정당한 거예요. 

아니 그러면 자기 여동생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분노 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이상한 사람이죠. 

그렇다면 무엇이 압살롬의 데스티니를 파괴했는가요?
그 분노를 올바른 방법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거예요. 
올바른 방법으로 해소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것이 압살롬의 인생을 파괴한 진짜 이유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야 될까요? 
성경에서 어떻게 분노를 다루라고 얘기할까요?

이걸 살펴 보기 전에, 압살롬이 저질렀던 실수를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압살롬이, 분노에 대해서 저질렀던 실수가 
사실은 분노를 다루는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분노를 다룰 때 이렇게 다루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날 거예요. 그래서 이 실수를 살펴보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먼저 보고, 
그리고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얘기하는지도 살펴보겠습니다. 

▲1. 첫 번째 단계, 압살롬이 분노를 다루는데 있어서 잘못했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은,
이것이 결국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는데 
그것은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그냥 속으로 묻어뒀다>는 거에요.

13:22~23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만 이 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이거는 잘잘못을 얘기해야 되는 일이죠.
암논이 그렇게 잘못했으면, 이제 찾아가서 항의를 하든지 
아니면 다윗한테 가서 이르든지

하여간 잘잘못을 말을 해야 되는데, 말을 안 했다는 거예요. 
아무 얘기도 안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2년이란 시간이 지나가는데
2년 동안 아무 분노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암논이 아무 생각 없이 초대에 응해서, 술 마시고 놀잖아요. 
그 얘기는, 압살롬이 한 번도 암논한테 분노를 표현한 적이 없다는 증거죠.

주변사람도 거의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압살롬이 암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완전 포커페이스로 지냈던 거죠)

만약 압살롬이 암논을 원수처럼 여기는 줄 알았다면 
당연히 다윗이나 주변 사람들이, 압살롬을 말렸을 텐데... 

다윗도 별 생각없이 암논을, 압살롬의 양털깎는 잔치에 보내는 것을 보면, 
그 2년 동안 압살롬이 한 번도 누구에게라도, 다말 사건 때문에
분노를 표현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압살롬은 그냥 분노를 속으로 꾹꾹 묻어두었습니다. 
압살롬은 어떤 스타일이냐면, 분노나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즉시 말하는 스타일이 아닌 거예요. 
반대로 안으로 꼭 꾹꾹 묻어두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반란 사건 때도 동일합니다. 
그 반란 사건은 어떻게 벌어지냐면,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나서 도망가죠. 
특별히 왕세자를 죽인 거 아니에요. 왕위계승 1순위자를 죽인 거죠.

그 나라에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외가인 그술 왕에게로 도망가서
3년간 거기서 도피 생활을 하다가, 요압의 도움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근데 돌아왔는데, 문제는 뭐냐면 
다윗이 압살롬을 만나 주지 않는 거에요. 

다윗도 마음이 복잡한 거지요. 
그래서 압살롬이 떠나 있을 때는 '내 아들 압살롬아' 하면서 그리워하다가 
막상 그가 돌아와서 보니까, 암논 생각도 나면서.. 심경이 복잡한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2년 동안 압살롬의 얼굴을 안 봐요. 삼하14:28 

이 사건을 통해서 압살롬이 두 번째로 분노하는 사건이 이제 시작됩니다. 
이 분노의 대상은 아버지 다윗이죠.

'아니, 그술 땅에서 도망 가 있는 나를 부를 때는 언제고 
지금은 또 뭐냐? 두 달도 아니고, 2년동안이나 얼굴 안 본다면 이게 아버지냐?' 
'이제 부자의 연은 끝났다!'
'잘못했으면 암논이 잘못한 거지, 내가 잘못한 거냐?' 
이러면서 이제 분노가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압살롬 안에 분노가 올라오죠. 
그리고 이때도 압살롬은, 암논 때처럼, 즉각 분노를 표출 하지 않아요. 
그래서 아무도 몰라요. 압살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몰라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뭔가 일을 시작해요.

15:6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압살롬이 뭘 하냐면,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시작하는 거예요. 
그 분노를 2년 동안 딱 마음에 묻어두고서는,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씩 하나씩 훔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걸 보면 다윗을 향한 압살롬의 분노가 어느 정도 인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를 향해서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건 흔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자기 위의 형들이 다 죽었기 때문에, 지금 자기가 맏아들이거든요. 

근데 장자라서 가만히 있어도 왕위를 물려받을 것인데,
장자가 쿠데타 일으키는 것 보셨나요? 
이건 정말 흔한 일이 아니에요. 
이것은 사실은 쿠데타가 아니라 복수에요.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킨 후에,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에게 하는 거 보세요. 
이거는 그냥 단순한 구데타 차원이 아니고, 다윗을 향한 복수였다는 거지요. 

압살롬이 쿠데타를 몇 년을 준비하는지 아세요?
사무엘하 13, 14, 15장을 잘 읽어 보면 4년을 계획을 해요. 
그래서 4년 동안 차근차근 쿠데타를 기획하며 준비했다가,
4년 됐을 때 결정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거죠. 15:7

암논 때 2년 준비했고요. 
다윗 때 4년 준비해서 거사를 일으킵니다.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게 자기 안에 있는 분노를, 그냥 확 표출시키는 게 아니고 
암논 때 2년 준비하고, 다윗 때 4년 준비하고 
그래서 압살롬의 스타일은 
이 분노나 원한이 있으면, 확 분출시키는 스타일이 아니라 
철저히 보복을 준비해서, 결국 원수를 갚는 스타일 이었죠. 

아무튼 자기 분노를 다루는 데 있어서 
압살롬의 첫 번째 실수는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 마음 속에 묻어 뒀다는 거예요. 
이렇게 묻어둘 때 이제 분노가 잘못되면, 두 번째 스테이지로 넘어가게 됩니다. 

 

▣13. 내적 치유

▣ 내적 치유 2023.04.27.업데이트 60. 다윗의 아들 2 압살롬 (tistory.com) 59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에 의해서 형성된다 http://blog.daum.net/rfcdrfcd/15975127 58 당신의 열등의식 http://blog.daum.net/rfcdrfcd/159784

rfcdrfcd.tistory.com

 

▲2. 두 번째 스테이지는 뭐냐면 
분노를 해결하지 않고 마음 속에 담아두면 
그러면 마치 겨울에 김치 땅속에 묻어두면 발효되듯이 
분노가 발효됩니다. 발효가 되서, 분노가 원한으로 변해요.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면 분노는 의로움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 때문에 
불의함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에 분노 자체는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음 속에 묻어져서 원한으로 변질 되잖아요. 
그럼 여기서부터는 죄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원한, 원망, 미움
이렇게 분노가 발효되면, 변질되면 
이제 죄가 되요. 

그리고 죄는 마귀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원한을 계속 우리 마음속에 계속 발효, 숙성시키잖아요. 
그럼 결국 죄의 열매(보복)를 맺게 돼 있어요. 

이렇게 분노가 원한으로 바뀌게 되면 일어나는 현상이 있는데,
원한이 그냥 원한으로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니라 
점점 커가는 거에요. 점점 증폭되는 거예요. 

압살롬의 두 번째 실수는, 분노를 마음속에서 점점 키운 거예요. 
여전히 분노는 표현하지 않고 묻어둔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아요.

그거 아세요? 분노를 묻어둬서 원한이 되잖아요. 
그러면 원한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지 않아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어요.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돼요. 슬픔은 시간이 약이에요.
슬픈 사건은 아무리 위로하려고 해도, 위로가 안 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점점점 희석이 되면서 
슬픔의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사람의 뇌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대요. 

뇌구조가, 슬픈 사건들은 잊어버리려고 하는 기저가 있대요. 
그래서 계속 우리의 메모리로부터 뇌가 스스로 지운다는 거예요. 
그래서 슬픔은 시간이 약입니다. 

그런데 원한은 시간이 약이 아니에요. 시간이 독이에요. 
원한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절대로 약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점 커지는 게 원한이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원한이 있을 때 
우리 마음 가운데 어떤 프로세스가 일어나는지 잘 생각해 보세요. 

대부분의 경우에, 원한이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뭘 하냐면 
그 원한을 묵상합니다. 곱씹는다 그러죠.
'그때 그 놈이 그랬지..'

그래서 처음에는 분노나 원한이 한 10 정도 됐다면 
이것을 계속 묵상하고 되새김질 하면
20, 30으로 점점 더 커지는 거예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래서 원망스러운 일 있으면 
그 자리에서 화 나는 것보다, 
집에 가서 자려고 누우면 이게 두 배 이상 더 커지잖아요. 
잠이 안 오고 '이 죽일 놈이!' 막 이렇게 나오는 거죠.

이게 참 원한이나 분노를 묵상하면서 점점점 확대되죠.
또 그러다가 시간이 몰랐던 비밀들을 또 발견하게 돼요. 
'아니 그것까지 그랬단 말이야?' 오해까지 총동원해서, 그 원한을 키워나갑니다.
'아니 그 놈까지 가세했단 말이야?'

또 어떤 때는 거기에다가 자기 상상을 약간 추가 하기도합니다. 
'이놈이 이런 걸 봤을 때, 분명히 뒤에서 이것도 했을 거야, 이 나쁜 놈!' 
그러고서는 그 상상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믿어버려요. 
우리들이 과거에 일상적 겪었던 일들이에요.

그래서 분노가 증폭되기 시작하면 
반드시 하는 게 뭐냐면 
'이것도 이랬을 거야, 이놈아!' 이렇게 막 추측과 상상을 보태는 거죠.
그리고 추측을 사실로 믿어버리죠.

이렇게 원망을 마음 속에 심어놓고 물주고 비료주면서, 계속 키우는 거예요. 
이것이 압살롬이 했던 일입니다.
압살롬이 분노를 키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형과 아버지를 죽이려 들겠어요?
 

이렇게 암논에게 복수하기 전에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2년 동안 열심히 마음 속에서 분노를 발효시켜 원한으로 키웠던 거지요. 

암논에 대해, 온갖 상상을 다했겠죠.
'내가 먼저 안 죽이면, 암논이 나를 죽일거야' 이런 생각이 숙성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2년이 찼을 때, 
더 이상 원한을 키울 수 없는 상태가 된 거에요.

나무도 조그만 화분에서 키우다가
더 커지면 화분에 담아둘 수 없게 되잖아요.

마치 그와 같이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분노가
더 이상 자기 안에 담아 줄 수 없는 상태까지 커 버렸어요. 
그때 뭐가 일어나지요? 빵 하고 폭발이 일어나는 거죠.
결국 사고를 치는 겁니다. 암논을 죽이게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우리 가운데 작용하는 프로세스입니다.
분노의 사이즈의 차이는 있겠지만, 프로세스는 똑같이 작용하는 거예요.

더 이상 분노와 원한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없게 되면, 그것이 밖으로 폭발하죠.
그것이 사람에게 화를 폭발시키는 거로 나올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잔인한 복수로 나타나기도 하죠.
이것이 분노의 잘못된 프로세스입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있으신가요? 
잘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우리 안에 폭탄 않고 사는 거하고 똑같아요. 
폭탄인데, 점점점 자라는 폭탄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이 점점점 자라서 
결국 우리 인생이 그것을 홀드할 수 없게 될 때, 결국 터져버린다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 삶 가운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있다면 
그것을 물주고 비료주면서 키우시면 안됩니다. 

그것을 빛 가운데 일단 가지고 나오셔야돼요. 
가지고 나와서 정당한 방법을 통해서 처리하셔야 됩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분노자체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분노를 여러분들이 계속 안에서 키우고 있다면 
그것은 아주 위험한 일을 하고 계신겁니다. 

그것은 그 분노의 대상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파괴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 폭탄이 터졌을 때, 암논만 죽고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결국 압살롬도 죽고 끝났어요. 

이 폭탄이 터지면, 그 폭탄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같이 죽는 거지 
내가 원망했던 그 사람만 죽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 아직 해결 안 된 폭탄이 있으신 분들은 
오늘 그 폭탄의 뇌관을 제거할 수 있기를 도전하고 축복합니다. 

압살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암논으로부터 잉태된 이 분노는, 암논을 죽임으로써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이 폭발은 끝이 아니고요. 
또 다른 분노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새로운 분노의 시작! 

바로 다윗에 대한 분노가 나오는 거에요. 왜요? 
암논 사건 때문에 이제 아버지 다윗과의 관계가 좀 어려워지는 거죠. 

암논 사건 때문에, 다윗이 압살롬을 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압살롬안에, 새로운 분노가 자리잡기 시작하는 거죠. 

'아니 암논이 잘못한 건데 왜 나한테 이렇게 화를 내?'
이렇게 아버지 다윗에 대해 새로운 분노가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도 압살롬은, 분노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지 않아요. 
암논 때와 똑같이, 그 분노를 마음 속에 묻어둡니다. 

14:28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래서 압살롬의 새로운 복수가 시작됩니다. 
2년 동안 압살롬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암논 때와 똑같은 프로세스가 일어났을 거예요.

화를 묻어둬서, 원한으로 발효되고
그 원한이 계속 자라가는 거죠.
거기에 온갖 상상과 피해의식이 더해지면서.. 그걸(피해의식을) 자기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거죠.

그래서 2년이 흘렀습니다. 
아마 이게 이에 압살롬이 라고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타임테이블 인거 같아요. 
원망이 들어와서 폭발할 때까지 
한 2년 정도 걸리는 사람이라는 거죠. 

아마 제 3의 사건이 있었다면 
그때 또 2년 동안 숙성되었다가 폭발했을 거예요.

사람들마다 비슷한 거 같아요. 
자기가 이걸 이렇게 폭발할 때까지 가지고 있는 시간이 있는 거 같아요. 

어떤 성질이 급한 사람은 30분 이내에 폭발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한 1년 숙성했다가 폭발시키는 사람도 있고... 

2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이번에는 대상이 형이 아니라, 친아버지를 향해서 복수의 칼을 빼는 거지요. 
결국 이 반란 때문에 압살롬은 죽습니다. 

여러분 분노는.. 복수를 통해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분노는.. 복수로 통해서 확대재생산 됩니다. 

분노를.. 복수라는 것을 통해서 해소 하잖아요. 
그러면 분노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새로운 분노를 또 낳아요. 

새로운 분노를 낳는데 
이 두 번째 분노는, 처음 거보다 더 커집니다. 
사이즈도 크고, 결과도 더 커요. 

그래서 암놈 때 보면, 이 분노가 한 사람(암논)을 죽이잖아요. 
그리고 3년 동안 유배당한 결과를 낳죠.

이 복수가 행해지고 나서, 두 번째로 확대 재생산될 때는 
한 명이 아니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는 거죠. 전쟁 통해서! 

그리고 유배당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이 죽음으로 끝났어요. 

처음엔 조그만 회오리바람으로 시작하지만 
이것이 계속 사이클을 돌면서 점점 커지는 거에요. 
점점 커져서 마지막에는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노→원한→폭발→복수가 가지는 사이클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절대로 복수 하지 말라!'
모든 복수는 하나님께 있다는 거예요.

'복수는 내가 해줄테니까, 절대로 너희는 복수하지 말라' 하시죠.
너희가 복수하면, 그것이 결국 계속 싸이클을 돌면서 
더 큰 분노→원한→폭발→복수의 싸이클을 만들어 낸다는 거죠.

분노는 복수로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를 복수로 풀게되면, 확대재생산 된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분노의 성경적 처방

그렇다면 이 분노의 파괴적 결과를 막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될까요?
성경은 분노를 어떻게 다루라고 하나요? 

이것은 이미 우리가 압살롬의 예에서 거의 다 살펴봤습니다. 
압살롬이 한 거에 반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1. 첫째, 분노를 <인정>하라
분노가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이건 죄가 아니라 그랬어요. 
이것은 의와 불의에 대한 감각이기 때문에, 자연히 일어날 수 있어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 분노가 일어날 때 첫 번째 해야 될 거는 뭐냐면 
분노를 인정하는 거예요. 묻어 두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분노가 일어났을 때, 이것을 그냥 없는 척하고 묻어 두는 게 
가장 위험합니다. 

왜냐면 사람은 성인군자가 없어요. 
그냥 화나는 일이 있으면, 화가 나는 겁니다. 
이것을 표현 하든지/ 아니면 없는 듯이 묻어 두든지 
둘 중 하나를 하는 건데 

'없는 듯이 묻어두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분노할만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는지 인정을 하고, 표출을 해야 돼요. 

여러분이 진짜 화가 나면, 혼자서 소리라도 질러야 돼요.
누구한테 가서 하소연이라도 해야 되요.

분노가 없는 듯이 이렇게 속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죠.
압살롬이 그런 스타일이었거든요. 

겉으로는 아주 쿨하게.. 아무 얘기도 안 하고 있었지만 
실제 속에서는 계속 부글부글 끓고 있었죠.
이 과정을 닮으면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분노는 반드시 인정해야 돼요. 반드시 인정해야 돼요. 
그래서 진짜 화가 나면, 어디 가서 혼자 소리를 지르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불 뒤집어쓰고 울든지.. 뭔가 표출해야 된다는 거죠. 

하나님께도 분노의 감정이 있으셨어요. 
구약의 예언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분노하사' 계속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분노 또는 진노를 표현하셨어요. 
선지자를 통해서 계속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희 때문에 화났다. 내가 너희 때문에 지금 분노했다'
계속 말씀하셨지, 그것을 감추고 있지 않으셨어요.

예수님도 분노가 당연히 있으셨죠.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이런 표현을 쓰실 때는
벌써 그 바탕에 분노를 깔고 있으셨다는 거죠. 그걸 감추지 않으셨어요.

그에 반해서 압살롬 어떻게 했어요?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13:22

여러분 굉장히 대조적입니다. 
하나님도 분노하시고, 예수님도 표현하시는데 
압살롬은 아무 얘기를 안 했다는 거에요. 이게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분노에 대한 해결책은, 
첫째 감추치 말아야 되고, 무시하지 말아야 되고, 인정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막 쏟아내란 얘기는 아니에요. 
그 얘기는 두 번째로 살펴볼 거예요. *하나님 앞에 쏟아내세요!

내가 분노를 느낀 사람한테 가서 
막 퍼부으라는 얘기도 하니고,
직접 한 대 때리라..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내 안에 분노가 있다'고 하는 거를 스스로가 인정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분노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게 정상적이라는 거예요. 

▲2. 두 번째는, 분노를 <쏟아놓는> 것입니다.
분노를 해결할 수 있는 대상에게 가져가서 말해야 돼요. 
압살롬이 암논한테 분노가 생겼어요.

그럼 먼저 다윗에게 들고 나가야 했어요.
다윗은 왕이었고, 아버지였고, 또 공의롭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당연히 압살롬은 다윗을 찾아가서, 이 사건을 하소연 했어야 돼요. 
'아버지, 안 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암논이 이런 저런 나쁜 짓을 했습니다. 벌 하십시오' 
이렇게 다윗한테 하소연을 했어야 했습니다. 

근데 시비간에 (잘/잘못 간에) 아무 얘기도 안 했다는 거에요.
만약 이렇게 했다면, 다윗은 충분히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충분히 공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일을 더 키우지 않고, 어떻게든지 해결을 했을 거예요. 

성경이 우리에게 권하는 것이 있어요. 
우리에게 그런 분노의 감정이 있을 때 
왕이신 우리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눅18장에 보면 정확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아시잖아요. 

눅18:2~7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의 핵심은 뭔지 아세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따지라는 거예요. 하소연하라는 거예요. 

이 과부가 원한이 있어요. 원수한테 뭔가 지금 억울한 게 있어요.
그랬더니 밤낮으로 나와서 재판관 한테 '제가 억울한 일 당했습니다. 
내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계속 와서 하소연하고 쏟아놓았는 거에요. 

예수님은 '사람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하물며 밤낮 부르짖는 자들에게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래서 분노에 대한 두 번째 가르침은
인정했으면, 그것을 아무데나 쏟아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와서 자기 분노를 쏟아내라는 거예요. 

우리도 분노가 생겼을 때, 절대 그 대상에게 가서 쏟아놓는 게 아닙니다. 
대상에게 쏟아놓으면 문제가 더 악화될 거예요.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쏟아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제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십시오. 
저놈이 지금 나쁜 짓을 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원수를 사랑하는 건 나중에 하시고 
일단은 쏟아 내셔야 돼요. 

'원수를 사랑하라' 는 말에, 사람들이 좀 오해하는게 있어요.
이게 그저 감정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저 놈 나쁜 놈이라고' 고소하라는 거예요.
쏟아내라는 거에요.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롬12:19 ' 로마서 12: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한이 생기는 원수가 있으면, 원수를 직접 찾아가서 쏟아놓고 
자기 스스로 원수 갚지 말라는 거예요.
이게 압살롬의 결정적인 두번째 실수였어요. 

첫째는 분노를 표현하지 않았고 
둘째는 원수를 직접 갚았다는 말이에요. 이게 압살롬의 문제였죠.

압살롬은 전혀 하나님께 맡기지도 않았고, 쏟아놓지도 않았고 
자기가 친히 가서 원수를 갚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자기 데스티니가 깨진 거죠.


그런데 다윗은 어땠어요? 다윗은 압살롬 못지않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사람입니다. 
압살롬은 누이 때문에 고생했다면, 
다윗은 아내도 빼앗긴 사람입니다. 
10년 동안 도망다녔죠. 
억울 하려면 얼마든지 억울할 수 있죠. 
이를 갈려면 얼마든지 이를 갈 수 있었습니다. 

근데 다윗은 압살롬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어요. 
그 원수에게 직접 가서 분노를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서 분노를 쏟아놓은 거예요.

그래서 다윗의 시편들을 보면, 솔직한 표현들이 많습니다. 
'내 원수를 멸하여 주옵소서'
'원수가 스올에 내려가게 하옵소서' 이런 저주가 막 나옵니다. 

이런 저주의 시편들이 있어요. 
원수에 대해서 저주하는 것들이죠. 

이게 신학적으로 설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도대체 성경에 왜 저주의 메시지가 있는가? 

근데 이것은 '저주의 메시지'라기 보다는, 다윗의 한탄과 하소연입니다. 

대표적으로 시54편인데,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이게 뭐냐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소연하는 거에요. 
이것은 어떤 신학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분노를 표출하는 거예요. 

눅18장에, 이렇게 하소연 하라고 말씀했잖아요.
쏟아놓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의 저주시는 정당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다윗 안에 있었던 분노를 다루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원수를 멸하소서!' 그랬지만 
자기가 직접 멸하거나 원수 갚은 적은 없어요.
하나님께만 맡긴 거죠.

그래서 우리가 분노에 대해서 두 번째 해야 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다 쏟아놓으셔야 돼요. 
이 과정이 없으면 절대 분노가 해소 되지 않아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정답만 찾으려고 그래요.
'그래,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셨구나!'

그러다가 어떤 분노가 생기냐면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분노가 새롭게 생겨요... 

'저 원수를 용서해 주소서!' 이거는 나중에 하는 거에요. 
원수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기도는, 나중에 분노가 가라앉고 난 다음에 하는 기도죠.  
먼저 쏟아놓는 과정 없이, 원수를 용서할 수가 없어요. 

▲3. 마지막 세 번째는 <용서>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다루는 과정은 일단 인정 하고요. 
하나님께 쏟아놓고 
그 다음에 용서하는 겁니다. 
그래야 이 분노가 처리가 되는 겁니다. 

쏟아내는 과정이 없으면, 용서할 수가 없어요. 
일단 쏟아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실 거예요. 내 분노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 용서가 되는 거죠.

그래서 분노를 처리하는 과정은 
심리학으로 다 설명할 수 없어요. 
그 가운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있어야 돼요.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터치하시는 역사가 일어나야 돼요. 

그 터치를 받았을 때,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용서는, 감정적으로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아니 내 형제를 죽이고, 자매를 죽인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원수를 감정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이거는 정상적 반응이 아닙니다. 
용서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용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내 분노의 감정은 스톱 하는 거예요. 그게 용서에요. 
더 이상 분노를 키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갚아주신다고 했으니까 오케이 끝! 이거예요. 
이걸 하라는 거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쏟아 놓고 
하나님께서 어쨌거나 처리해 주실 것을 믿고, 거기서 스톱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용서하지 않으면, 결국 누가 손해 보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손해 보는 거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암논을 죽일 때까지 2년 동안 
압살롬이 하루라도 편하게 잤을까요? 
잠자리에 들 때마다 암논을 칼로 찌르는 거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요.
또 죽이고나서 3년 동안 망명생활, 이건 또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리고 돌아와서 2년 동안 아버지 다윗의 얼굴도 못 보고.. 
2년만에 다윗의 얼굴 한번 보고, 다시 4년 동안 반란을 준비하는 기간.. 

여러분 도합 11년입니다. 
압살롬은 11년동안 하루도 편하게 잔 날이 없었다는 거예요. 
불쌍하지 않으세요? 이 기간은 압살롬의 청춘기이었어요. 황금기였어요.

이 기간은, 압살롬의 데스티니가 준비되어지고, 막 펼쳐져야 될 시간인데 
11년 동안을 그냥 날려 버린 거예요. 그 11년 후에는 죽음으로 결론 지어졌죠.
그 파괴는 11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거죠. 차곡차곡 쌓아져 왔던 것이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감정적으로 원수를 좋아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럼 그건 정신병자죠. 원수를 어떻게 감정적으로 막 좋아하겠어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은 감정의 차원이 아닙니다. 의지의 차원의 얘기예요. 
그리고 믿음의 차원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고 우리를 회복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