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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를 살리려면

LNCK 2023. 4. 30. 08:31

주일2부예배 230115 “다음 세대를 살리려면“ (창9:18-29) - YouTube

◈다음 세대를 살리려면           창9:18~29          ▣49. 행복한 가정 (설교모음)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9:18~20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전 지구적인 홍수 심판으로, 땅에 있는 호흡이 있는 모든 생명체와
모든 사람을 땅에서 제거하셨어요.
이 두려운 심판에서 생존한 사람은 몇 명이었나요? 
노아와 세 아들, 그리고 4명의 아내들, 그래서 총 여덟 명이었죠.    주1) 

셈, 함, 야벳은 홍수 전에 결혼했는데 자녀들이 없었다는 거에요. 
왜 그랬는가요? 산아제한이 있던 시대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거대한 심판이 올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자녀를 낳지 않았던 것이죠. 

창10: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홍수 심판이 끝나고 나서 비로소 자녀들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9:1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창세기 1장에서 주셨던 축복의 말씀을 
하나님은 홍수가 물러가고 난 후에, 다시 해 주셨어요. 

이제 심판도 끝났고, 하나님의 축복 명령도 받았으니까 
'이제 더 이상 아무 문제가 없겠지..'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방심한 사이에 오늘 사건(노아의 일탈)이 터지게 됩니다. 

9:20~21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0절에 '농사를 시작했다'고 했는데, 
원어적으로는 '땅의 사람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땅의 사람:이쉬-아다마 (1농부, 2흙의 사람,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란 뜻)

그런데 그가 포도주를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취해서 쓰러질 정도로 마셨다  
라는 거에요. 성경에서 '술을 마셨다'라는 첫 번째 기록입니다. 

원어 상으로 '그 포도주' 라고 되어 있어요. 정관사를 붙였습니다. 
몰라서 우연히 마셨다가 취한 게 아니었어요. 

하나님은 이 포도나무를 축복의 열매로 주셨는데 
노아는 이것을 시험거리로 만든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질문은, 도대체 노아는 희망의 아이콘이었는데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요?   *문제 제기

세상이 온통 절망스러울 때, 유일하게 세상에 희망의 반전을 이룬 사람이잖아요.
정말 긍정적인 인생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노아가,
왜 이렇게 무너졌는가요? 

하나님의 심판 때, 왜 노아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홍수 전에는 성경에 '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없고,
'그때는 지면에 안개만 있었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창2:6

비가 온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방주를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유일하게 대 홍수에서 건짐을 받았던 노아, 
인류의 맥이 끊어질 것을 다시 건져낸 사람, 
그런 노아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잖아요? 그가 왜 그랬는가요? 

노아를 처음 소개하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창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노아는 '위로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라는 거죠.
당시 세상에 위로 할 만한 게 없었다는 거예요. 

온통 사람들은 죄악으로 치닫고, 하나님의 심판은 코앞에 닥쳐 있는 상태에서 
'위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태어날 것인데 
그 사람이 세상을 유일하게 안위(위로)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절망으로 치닫는 그 세상을 
절망의 늪에서 건져낸 소망의 인물이 바로 노아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노아가 무너지는 이 사건을 보면서 
뭐를 느끼게 돼냐면 
우리가 아무리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일지라도 
'이너 힐링 inner healing 우리의 내적인 내면의 치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요!  *노아가 내면의 치유가 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설교가 전개됩니다

◑노아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무너졌던 이유

▲1. 노아는 방주 안에 들어가서 '나는 편하니까 나는 살았으니까..' 
그랬을까요? 물론 그런 안도감도 있겠지만 
내 옆에 있던, 나와 함께 수백년 오랫동안 살았던 이웃, 친척들이 
하나님의 홍수 심판으로 죽어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거잖아요. 

그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노아의 마음 가운데 
'생존자의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겠는가요. 

최근에 이태원 참사 이후에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가 살아난 생존자 중에도 
자살한 친구가 있었죠. '생존자의 트라우마'가 반드시 있었을 겁니다. 

▲2. 홍수 이후에 세상은 폐허가 된 세상이었어요. 
엄청나게 폐허가 된 이 세상을 재건해야 됐던 노아의 그 부담감과 책임감
그 시름이 얼마나 깊었겠는가? 라는 것이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첫 번째 사람 아담도 범죄하고 저주를 받았는데, 
땅이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됐어요. 

그러니까 에덴동산 안에서의 세상과 
그밖의 세상은 차원이 다른 거에요. 

내가 아무리 경작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땀을 흘려야만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척박한 땅이 되어 버린 거죠. 

거기서 느껴지는 절망감, 그러나 아담이 아무리 범죄했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그 아들 가인이 하나님께 대듭니다. 
'내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하나님!' 

자 그런데 노아에게 계속 똑같은 패턴이 드러납니다. 
노아가 대하고 있는 홍수 이후의 세상은 
두번째 심판과 저주를 받은 세상인 셈이죠. 

아담과 가인이 경험했던 땅이나 세상보다 더 척박하고 
더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인 거예요. 

그런 세상에서 시름하면서.. 노아는 하나님을 대적, 원망하지 않았지만 
그 아들(함)이 사고를 치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기는 하지만 
노아의 인생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라고 보입니다. 

본인은 평생 하나님께 순종했어요. 그리고 자기 가족도 지켜냈습니다. 
세상을 건져낸 위로의 사람이 되기도 했어요. 

그러나 정작 '위로'(노아)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남자는 
누가 위로해 주나요?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 주나?' 

제가 친한 목사님 중에서 정말 항상 스마일링 페이스, 웃는 분이 있어요. 
그 분을 보면 늘 즐겁고, 지쳐있다가도 그 웃는 얼굴을 보면,
활기를 얻고 힘을 얻게 되는 분인데 
제가 최근에 이 분을 만나서 교제하다가 깜짝 놀랬어요. 
자기가 우울증 진단을 받고,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거에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이거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어요.
'나는 늘 다른 사람들을 웃게 해주고, 밝게 해 주고 
분위기를 살려내고, 축 쳐져 있는 분위기를 끌어올려야 된다'  
그런 역할을 해야 된다라는 일종의 강박감, 책임감, 부담감을 
어렸을 때부터 가지는, 그런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늘 나는 웃고 있어야 했다' 라는 것이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케어 해 주긴 했는데 
정작 자기 자신을 위로하지 못 하면서 
내면의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는 것을 방치해 온 것이죠.
 
그러면서 우울증이 오고 무너진 거죠. 
노아처럼 이타적인 사람들, 
이 목사님처럼 이타적이고, 다른 사람을 케어 하는데 
자기 자신을 케어 하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마음이 병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노아도 그렇고, 이 목사님도 그렇고 
이 시대의 아버지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내면이 병들어도 치유받지 못한 사람들

늘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하나님도 잘 믿어요. (그렇게 보여요)  
-가족도 지켜요.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요.

근데 자기 내면에 쌓여가는 
-상처와 
-눈물과 
-한숨과  (중압감과 책임감 때문에)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냥 '전부 다' 라고 얘기를 해도 맞을 거에요. 

노아가 성경에 등장하는데 창세기 5장 ~ 10장까지 입니다. 
그런데 5장에서부터 노아는 말이 없어요.
첫 번째로 노아가 입을 열어서 말을 한 게 9장입니다. 9:25

노아는 말이 없는 과묵한 남자였어요.
모세도 그랬죠. 다윗도 그랬어요. 
대부분의 남성 캐릭터들이 그렇습니다. 과묵합니다.

근데 오늘 본문의 첫 대사가, 노아의 첫 말이 
안타깝게도 자식 함을 저주하는 내용이었어요. 

자 노아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심판의 날이 코앞인데 
인류를 구원해 내야 되는 엄청난 사명을 
자신의 작은 두 어깨에 지고 있는 거잖아요. 
어깻죽지가 찢어질 만큼 얼마나 부담감이 컸겠습니까. 

그러나 자기를 믿고 있는 아내와 자녀들,
이 가족을 어떻게든 지켜 내야 되는데 
'내가 힘들다..'고 이야기 하면 
이들이 얼마나 불안해 하겠어요? 

그러니까 자기도 두렵고 불안해서 날밤을 샐지라도 
가족에게는 티를 내지 못하는 것... 이게 남자의 인생 입니다. *마음이 병들죠

그런데 집에서는 아내들한테 혼나죠. '리액션이 부족하다..' 
'왜 사람이 다정다감 하지 못 하냐?' 그런 걸로 집에서 혼납니다. 

그래도 언제나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아 주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힘든 시즌을, 그 어려운 시간들을 
어렵지 않게 지나 올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비록 무심해도, 든든했던 그 남편이 
어느 날 오늘이 노아처럼 갑자기 무너지는 때가 옵니다. 

그때 아내들은 남편을, 혼내시면 안 돼요.
긍휼히 여기셔야 되고, 존중해 주셔야 됩니다. 

'그동안 정말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힘들 만큼 혼자 버텨 온 거구나' 
'외풍이 우리 가정에 들어오지 않도록 온몸으로 막아내 주고 있었구나' 
아내는 그런 거를 받아주실 필요가 있어요. 

남편도 연약한 인간인데, 온몸으로 엄청난 삶의 무게를 감당해 온 거잖아요. 

△저희 큰 형이 정신과 의사인데요. 
여자와 남자는 완전히 다르다는 거에요. 

여성은 자신의 인생에 어떤 고통을 느끼면 
1의 고통을 느껴도 10 이라고 표현할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나 죽을 거 같아!' 이렇게 10 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10의 고통을 느끼는데, 1 이라고 표현 할 줄도 잘 모릅니다. 
심지어 그 10의 고통을 1 이라고 인지조차 못합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갑자기 무너지는 거예요. 갑자기 쓰러지는 거에요. 

여러분, 노아가 왜 무너졌을까요?
제가 지금 심리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일종의 풍선효과 라고 할 수도 있고, 보상심리 에서 나오는 일탈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풍선효과 라는 것은, 부풀려진 풍선을 한쪽에서 누르면 
반대쪽에서 반드시 부풀어지게 돼 있다는 거죠.
여러분, 참는 걸로 되지 않아요. 참고 또 참지만.. 다른 데서 부풀어 오르죠.

또 '보상심리에서 나오는 일탈'이란 뭐냐면 
예전에 '열심히 일 한 당신 떠나라!' 라는 광고 카피가 있었죠.

근데 그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이게 보상을 해 주겠다는 거잖아요. 
그 얘기를 듣는데 막 복음처럼 들리고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그런데 '돈 쓰라'는 거잖아요. 

'세상의 즐거움, 엔터테인먼트, 쾌략이 당신을 보상해 줄 것이다?'
여러분, 건강한 해결 방법이 아니라, 잘못된 해결 방법을 취하면 
보상을 받는 게 아니라 재앙이 오는 거잖아요. 
그런 사고를 경험하는 남편들, 가정들이 많습니다. 

저희 교회는 아빠들, 남편들이 회복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삽니다!' 이게 <아버지학교> 구호죠.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문제, 빙산의 본체와 같은 그 문제 
그게 터지면 가정의 근간이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자녀들에게 엄청난 충격파가 전해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거 해결하지 못하면, 노아처럼 알코올 프라블럼, 
다윗처럼 성적인 문제 같은 대형 사고가 터진다고요. 

그리고는 그 사고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서 
다음 세대에게 엄청난 화가 미치게 되어 있어요. 

노아처럼 '외로운 섬'이 되어가는 아버지들께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내면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셔도 돼요. 
그래서 자유해 지셔야 돼요. 해방되셔야 돼요. 

술자리에서, 친구들 앞에서 쏟아놓는다고 그거 해결되지 않아요. 
다시 다음날 지끈거리는 머리와 함께, 그대로 남아 있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을 때, 진정한 영적 자유와 해방과 치유를 경험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가족이 걱정할까 봐.. '내가 흔들리면 내 가족이 흔들릴 텐데' 
그렇게 홀로 버티다가, 홀로 밤을 새다가 그렇게 쓰러지지 마시고 
꼭 하나님 앞에 나오셔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 형제님들에게 권면드리기는 
새벽 예배를 모두 다 하시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현장에 못 오시는 분이라도, 
출근길에, 차에서 들으실 수 있으니까 
새벽 예배를 그렇게 참여하시면 좋겠고 

토요일에는 가족과 함께 새벽 예배에 나오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셔야 됩니다. 

노아처럼 늘 조용히 버티는 남자들도 
'내 영혼의 대나무 숲'이 필요한 거예요.
즉 내 영혼의 모든 것을 다 얘기할 수 있는 분, 
그분이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아버지의 책임감, 중압감을 몰라주고, 도리어 가십한 함.. 저주를 받다

9:22~23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본문에, 함이 아버지 하체를 보고 형제들에게 알렸죠. 
그런데 이 한 번의 잘못이 얼마나 대단한 잘못이길래 
아버지에게 저주까지 받았나 싶죠. 

22절에 '함이 보았다' 라는 이 단어가 
그냥 한 번 이렇게 스쳐 쳐다보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오랜 시간을 쳐다보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 형제들에게 이것을 우스갯거리로, 조롱거리로 만들어서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런데 셈과 야벳은 가십을 시작한 함에게 동참하지 않고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었다.. 라는 거예요. 

이 세 사람 인생을 생각해 보면
'함'의 이름의 뜻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유태인들의 해석에 의하면 '함'은 '시끄럽다, Noise' 이런 뜻이에요. 
아버지의 슬픔과 고난을 우스갯거리, 조롱거리로 만든 아들이었어요. 

함은.. 생각해보면, 심판이 오기 때문에 자녀도 낳지 않고 
아버지가 방주를 건조할 때 함께 방주를 만들었던 아들이잖아요.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그 인류가 심판을 받는 엄청난 심판의 과정도 
함께 겪었잖아요. 또 홍수 후 세상을 재건하는 일에도 이 아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경험했을 한숨과 눈물과 슬픔을 
이해해주기 보다는, 조롱하고 비난하고 원망했다는 거예요.

어떻게 자식이 그럴 수 있는가요? 
노아의 자녀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시대잖아요. 

아버지의 눈물과 한숨을, 곁에서 다 보면서도 
왜 이해를 못 하냐고요? 

근데 그걸 어떻게 그렇게 조롱거리로 만들 수 있는가요? 
근데 그런 일이 집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어떤 성도님이, 정말 자식들 끔찍이 사랑하시는 분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아들들을 저렇게 사랑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막 아들들을 보면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그런 분이었어요. 

아들들이 20대 30대 됐는데도 
정말 아들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하는 분이었어요. 

그리고 워낙 성품이 온화하신 분이기 때문에 
아내에게나 아들들에게 화를 한 번도 내지 않는 그런 분이었어요. 

근데 아들 20대 중반에 자기 인생이 막 힘들어지니까 
그 아들을 보면서 너무너무 안타까운데 
뭐라고 얘기하면 또 힘들어 할까봐 가만히 있다가 

어느 날 참지 못하고, 아들에게 위로의 말을 한 마디 해 줬대요.  
'너무 힘들어 하지 마! 다시 도전 하면 돼!' 이렇게 한마디 해 줬는데 
그 아들이 막 성질을 내면서 '도대체 아빠가 내 인생에 해 준 게 뭐야? 
아빠가 내 인생에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나한테 잔소리를 해?'

와! 그 말을 듣고 이 분이 무너진 거예요.
'내가 아들들을 위해서 정말 내 인생을 다 쏟아부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이 분이 완전히 충격을 받으셔서, 몇 달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더라고요. 

'도대체 아빠는 왜 저래? 도대체 내 아버지는 왜 저러는 거야?' 
'자기 혼자 직장에서 충성 한다고 날밤 샜던 거잖아 
직장에 충성 한다고 그렇게 출장 갔던 거잖아?'
 
함이 그랬다는 거죠. '왜 술 마시고 취한 모습을 보이는 거야?' 

세상에서 홀로 버텨내고 있는 아버지들! 
근데 그 자녀들과 관계에서도 
점점 멀어지고 외로워지는 아버지들... 

그런 아버지들이 계시면, 토요남성 모임에 오시기를 바랍니다. 
거기는 '아빠들의 안전지대, 세이프티 존' 이렇게 별명을 붙이고 싶어요. 
오셔서 무슨 얘기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여성 주도 문화이다 보니까 
주일에 늦잠 안 자고 교회에 나갔다가 
여성들의 나긋나긋한 얘기, 정답 얘기... 이런 것만 들어야 되는데 
남자들은 그것도 못 견디거든요. 좀 쏟아놓는 게 있어야 되거든요. 

본인의 속마음도 털어놓고,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그게 뭐 돈, 성, 가족 관계, 친구 관계, 자기 일하는 직장 문제.. 
뭐가 됐든 간에.. 
다 그냥 무한토론 하고, 속마음을 털어 놓고 
마지막에는 성경적으로 마무리하고...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도 스트레스를 다 한 번에 날릴 수 있는 그런 모임! 

토요일 남성모임에서, 내면이 건강해지는 그런 아빠들이 모임을 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부모 세대로부터 자녀세대 에게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기를 원하세요. 

이게 그냥 우리가 자꾸 
'나중에 돈 벌어서 자녀들 키우고 먹이고 공부 시키는 거지' 
'신앙교육은 교회 맡기고, 세상 교육은 학교에 맡는 거지..' 

근데 여러분 가장 가장 중요한 교육을 누가 하고 있는 건가요? 
부모가 하는 거죠. 

하나님은 가문을 통해서 건강한 신앙이 유전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거룩한 가문을 세우기를 축복합니다. 

아버지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인생의 30대 40대에 자녀가 태어나서 
가장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아야 되고, 애정을 많이 받아야 되는 그 시기에 
아빠의 인생이 가장 많이 방황하고, 가장 많이 바쁘고, 
가장 많이 슬럼프에 빠져있어요. 

그러면서 내 문제를 '나는 가족에게 티를 내지 않겠다'고 
혼자 끌어안고 가는 동안 
아이들이 나중에야 깨닫게 되는데 
'그 아버지의 그늘진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 정말 자녀들을 살리기를 원하신다면 
아빠 엄마가 먼저 살아나야 합니다. 

◑노아가 축복과 저주를 한 내용입니다. 

24~25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노아가 술이 깨고 나서 상황 파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함을 저주 했어요. 

그런데 어찌 보면, 자기가 문제 제공을 먼저 해 놓고서 
문제를 일으킨 아들을 일방적으로 저주를 했는가요? 
왜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을까요? 

제가 이것도 뭐 성경적인 답을 드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보통 이런 상황에서 아빠가 왜 자녀들 한테 그렇게 화를 내는지.. 
아내들이 이해를 못 하거든요. 

그래서 심리적으로 여러분이 이해를 좀 하시기를, 설명을 드리고 싶은 거에요. 
여기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라' 이건 뭐냐면 
'종의 밑에 종이 되라'는 아주 낮은 종이 되라는  :25
상당히 감정적인 이야기를 한 거에요. 왜 이렇게까지 저주를 했는가요? 

▲1. 남자들은 위계질서를 어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요.
아빠의 이런 면을, 아내들은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위계질서의 선이 있는데, 그 선을 어기는 거를, 남자들은 용납을 못합니다. 
특별히 이거는 방송으로도 나갔던 건데 

캠프에 남자들 그냥 무작위로 모아놓으니까,
모이자마자 나이, 사회경력 등을 따져서 금방 서열정리를 해 버리더라는 거죠.

그런데 여자들은 서로 처음 보는 사람들 몇 십명을 모아놨는데 
서열(hierarchy, 하이어아러키)을 세우지 않았어요.
'그냥 내가 누구하고 친밀하게 지낼 건가?' 그 관계형성을 시작했어요. 
남자들과 접근법이 다른 겁니다. 

▲2. 두 번째, '자녀의 잘못이 부모 잘못이라'고 
사람들이 확대해석 하게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녀의 일탈이 부모 때문이다' 라고 얘기하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더 화가 나고 역정이 나는 거에요. 

그래서 이걸 참지 못하고 자녀를 때리기까지 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아내는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미친 사람 아니야?' 이해를 못 하는 거죠. 

▲3. 함이 한번 잘못했는데 저주를 받았잖아요. 
근데 함의 잘못이, 이 날 한 번의 잘못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성경은 (요약적으로 쓰다보니) 한 가지 에피소드로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거든요. 
함은 계속해서 삐딱하게 살아왔다는 거죠.

▲4. 그런데 함이 저주를 받는 게 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어요. 
도대체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나요? 

그래서 가나안이 최초의 목격자, 제보자가 아니었는가, 
내지는 아버지가 이런 일을 할 때, 가나안이 같이 동조자가 아니었는가 
이렇게 추정을 합니다. 

가장 함의 아들 가나안을 노아가 저주했어요.

그렇다면 충격적인 것은 
함만 빗나간 것이 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도 똑같이 빗나가고 있었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 역사를 쭉 보면, 가나안 족속이 등장하는데 
가장 우상숭배를 심각하게 하고, 도덕적 타락이 심각해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잖아요.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함이 아니라, 다른 두 아들 어떻게 되었는가요? 
26~27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 드렸던 셈은 축복을 받았어요. 
셈의 이름의 뜻이 '이름, 명성'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주요 인물들을 보면 
다 하나님께 새로운 이름을 받잖아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래서 셈의 후손에서 아브라함이 나오고, 12지파 이스라엘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거예요. 

창세기 49장 까지 역사를 훑어 보면 
야곱이 자신의 12 아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하는 한 아들 유다에게, 영적인 축복을 줍니다. 

마치 노아가 세 아들 중에, 셈에게 영적인 축복을 선언해 준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야벳은 '야벳은 창대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벳 같은 경우에는 
그대로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시기를' 
그의 이름 그대로 축복을 해주었어요. 
땅의 축복을 받은 거죠. 

마치 야곱의 12아들 중에서, 요셉에게 땅의 축복을 선언해 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저도 그렇고, 
성도들이 성경통독을 하시면서 질문을 가장 많이 하는 게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저주할 수 있느냐?' 

부모가 자식을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지,
저주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거든요. 

근데 도대체 노아는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 노아가 평생 하나님께 순종했어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 했어요. 

그런데 결국에 노아가 걸렸던 문제는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그냥 혼자 끌어안고 간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게 노아의 연약함이었어요. 

그러는 사이에, 나의 자녀들이,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세요. 
'내 자녀들이 나의 신앙만 본받았으면.. 
내가 가족을 위해서 헌신했던 것만 본받았으면..' 

그런데 아버지에 그 그늘진 모습을 따라가는 아들이 나오더라는 거죠. 
아담의 그늘진 부분은, 아담은 다 표현하지 못했지만 
욱 하고 표현했던 가인이 나왔던 것처럼 

노아의 그늘진 부분을, 노아는 그냥 꾹 참고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그냥 고개를 숙이고 살았지만 
그거를 삐딱하게 표현했던 함이 나온 것처럼 

여러분 그리고 그 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자손 가나안까지 
2세대, 3세대 까지 노아의 악영향이 흘러 간 거잖아요. 

▲오늘날 우리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뭘 하나요? 
내가 열심히 돈 벌어서, 내가 모은 거 전부를 다 
자식들을 위해서 투자하고.. 그래서 아이도 일부러 많이 낳지 않는 거 잖아요. 
'얘 하나 제대로 공부 시키려면, 얘가 가진 꿈을 날개 꺾이지 않고 
날개를 펴고 날아갈 수 있도록 내가 다 도와주려면..' 

얘가 원하는 거 다 도와주고 
시간이 없는데도 시간 내서 같이 여행 가고, 놀아 주고, 맛있는 거 사 주고 
애가 원하는 선물 다 사주고.. 끔찍이 사랑을 할지라도 

오늘 노아처럼 그 내면에.. 
내가 혼자 부둥켜 않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하고 가는 그 어둠의 문제!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반드시 아이들에게 역기능이 생긴다는 거에요. 

그리고 어느날부터 아이들이 '머리가 컸다고, 사춘기가 됐다'고 반응하는 게 아닙니다. 
'얘가 나를 존경하는 줄 알았더니, 
왜 갑자기 부모를 비난하고 조롱하기 까지 하는..' 
그런 자녀들을 보면서 왜 부모들이 감당이 안 되는가요? 

여러분, 부모가 자신의 어두운 그늘을 해결하지 못한 거예요. 
그리고는 그냥 그 문제를 가린채, '아이들이 모르겠지..' 
아이들이 몰랐던 게 아니라, 어려서 표현을 못 했었던 것 뿐이에요. 

그리고 어느 날 터지는데 함 처럼 터지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때가 되면 돌이키기가 어려워져요. 

우리 자녀 세대의 신앙교육, 
여러분이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맡기는 걸로 해결되지 않아요.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거 자체가 무리예요. 

저는 '차세대 교육'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우리가 정말 가정을 끌어안고, 건강한 아빠, 행복한 엄마, 거룩한 자녀들을 
만들어 내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자녀 있는 부모님들은, 내가 부모 일뿐만 아니라 
자녀의 영적인 스승이라는 것, 
삶으로 보여주는 교육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거, 

내가 (치유받지 못해서) 뒤돌아 서서 축 처진 어깨,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의 어두운 부분들이 
아이한테 비쳐지지 않을 것 같은 것 같지만 
비춰지고 있었다는 거죠.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삶으로 
끊임없이 아이에게 나는 메시지를 주고 가르치고 있었던 거에요. 

자녀가 있는 부모님들은 전부 교사가 되셔야 돼요. 
교사를 하면서 다른 자녀를 돌보다 보면, 약간 객관화가 되는 게 있어요.

'내 자녀에게 이렇게 했어야 되는데..' 깨닫는 게 있어요. 

저는 여러분이 교사를 하면서, 여러분이 살아나라고 교사를 하라는 거지 
교회 유지하려고 교사 하라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먼저 살아나야 돼요. 그래야 자녀들이 살아납니다. 
노아의 세 아들을 보면, 
그들의 인생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런 거죠.

셈은 아버지의 영성을, 신앙을 이어받은 아들이었어요. 
야벳은 아버지의 넓은 마음, 오래도록 그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그 견고한 성품을 이어받은 아들이었어요. 

그런데 함은.. 아버지의 그늘진 인생을 이어받은 아들이었어요. 

'내가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내가 너를 그렇게 교육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너는 왜 그러는 거냐?' 

그렇게 따지고 애를 다그친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내 그늘로 아이를 그렇게 만든 건데 말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이렇게 빗나갈 때 
오롯이 자녀의 문제라고 얘기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입니다. 
부모도 살아나야 되고 자녀도 살아나야 됩니다. 

우리가 사실은 생명 공동체로 다 연결되어 있는 거에요.
근데 내가 어디 학원만 보내 놓으면 얘가 성적이 오르고 
교회학교에만 보내 놓으면 아이가 신앙이 갑자기 좋아지고.. 
이런 걸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 부모가 먼저 주님 앞에 치유되고 변화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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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C. H. Kang 의 <한자에 담긴 창세기의 발견> 이라는 책이 있어요. 
읽으시면 정말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배 선船 자를 아시죠. 
배 주舟 자에 여덟 명 타고 있는 거죠.   *八口 8명의 입 

배에 사람이 한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있기도 하고, 
뭐 수십 명이 탈 수도 있잖아요. 

근데 굳이 배 선 자에 왜 여덟 명이 타고 있느냐 하는 것이죠. 
고대 중국 사람들도, 노아의 후손에서 전 세계로 퍼진 그 중의 한 자손이기 
때문에, 고대 중국의 사람들이 
여러 신을 믿는 다신론, 범신론 아니었다는 거예요. 

은나라 시대에는 하늘의 황제, 하늘의 신 
한 분만을 섬기는 절대자를 믿는 신앙이었어요. 

그리고 그 하늘의 상제에게 바치는 제사문, 축문이 있는데 
그 기록이 남아 있는데, 창세기 1장의 내용과 거의 똑같아요. 

그런 고백으로 하늘의 유일한 신에게 예배를 드렸던 
중국 사람들이 한자로 만들면서 
그 한자에 성경의 내용들이 엄청나게 담겨 있다는 거죠. 
그래서 더 알고 싶고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사서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유튜브에도 이와 관련된 영상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