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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압이 말아먹은 자기 데스티니

LNCK 2023. 5. 3. 16:05

[데스티니] 28. 요압 (왕상 2:5-6) - YouTube

◈요압이 말아먹은 자기 데스티니    왕상2:5~6, 삼하19:5~7    지난 글 보기

◑서론 / 내 인생에는 데스티니(하나님의 작정)가 있습니다. 

'데스티니 Destiny' 에 대한 설교를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데스티니' 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부터 가지고 계셨던 계획 
이라는 뜻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말하죠)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 만드실 때, 섬세한 계획 가운데 만드셨지 
아무 계획 없이 지으신 것이 아니라는 거죠.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저희를 디자인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어떤 얼굴을 가지고,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게 하고 
어떻게 살게 하고... 그런 걸 하나님께서 다 계획을 가지고 미리 디자인 하셨다
는 것이죠. 그 디자인을 우리가 데스티니 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목적은, 내 데스티니를 발견하고 이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 가운데 우연히 떨어져서 우연히 살아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내 인생을 디자인 하신 분이 계신다는 거에요.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신 분이 계시고,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디자인 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막막한 미래 가운데 우리가 개척해서 헤매며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대한 명확한 설계도가 있어요.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설계도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이 있어서 
이 계획을 발견하고 찾아서 이루어가는 과정이지
뭐 앞에 아무 계획 없이 열려있는데 
내가 랜덤하게 개척해서 내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그래서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고 
인생은 찾아 나가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들을 찾아나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고, 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destiny 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우리를 향한 이 계획을 발견하고 이루어 갈 때마다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창조하셨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destiny 의 길에 들어설 때마다
우리 안에 기쁨과 즐거움들이 계속 솟아 나도록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창조하셨어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가장 충만하고 완전한 
또 행복한 인생을 살기 원하신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뛴다고, 나도 거기로 뛰어가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윗의 아들이었던 아도니야를 살펴보면,
아도니야 인생의 목적은 다윗을 흉내내는 거였죠. 
다윗의 카피가 되는 것이 아도니야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도니야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다윗의 카피가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다윗의 카피가 돼서, 다윗처럼 왕의 돼서, 다윗이랑 똑같이 
다윗이 데리고 살았던 여인 아비삭을 데리고 사는 이것이 
아도니야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아도니야는 자기만의 독특한 인생 계획 destiny 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셨고,
아도니야는 그것을 발견하고 이루어갔어야 
자기 인생이 사실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도냐의 불행은 뭐냐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그 계획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그냥 좋다고 하는 것, 내 눈에 보기에 성공적으로 보이는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려고 했을 때 
어떤 불행이 우리 인생가운데 주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였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아주 독특한 오리지널한 계획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내가 그것을 이루어갈 때 
우리는 행복하고 충만하도록 그렇게 지음을 받았다는 거죠. 

그래서 사람은, 자기 데스티니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한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항상 공허함을 느끼도록 돼 있어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성공을 해도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해도, 
우리 안에 '이게 다가 아닌데.. 뭐가 부족한데..' 
이런 생각이 항상 들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그렇게 심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래요. 

반대로 자기 데스티니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뭐가 좀 부족한 것 같아도,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조금 덜한 것 같아도 
자기 마음가운데 만족함이 있고 행복함이 있어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방식입니다. 

◑자기 데스티니를 말아먹은 요압 (반면교사)

요즘 "말아먹은 데스티니 3부작"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아도니야, 압살롬, 요압입니다. 

아도니야, 요압, 압살롬 세 사람은, 다윗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죠. 
그리고 아도니야 와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이었고 
요압은 다윗의 오른팔, 최측근이었습니다. 

근데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자기 데스티니가 다 파괴됐다는 거예요. 
원래 이 사람들을 향해 가지고 계셨던 계획은 
성경에 나타난 그런 인생, 그런 계획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훨씬 더 충만한 계획들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아도니야도, 압살롬도, 또 요압도 
이 하나님의 계획 destiny 에 이르지 못하는.. 
자기 인생이 망가져 버리는 그런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에게 긍정적 본이 되든지,
아니면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반면교사가 되든지.. 둘 중 하나를 보여줍니다.

근데 이 세 명은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bad example 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우리 인생도 이 사람들처럼 망가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도니야도 그렇고, 요압도 그렇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복음의 핵심은 사랑이에요. 하나님을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가시는 방식대로 살아갈 때 
결국 우리의 데스티니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사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이 사랑의 관계에 대한 얘기들을, 조금 더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룻기>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도 "관계"에 대한 거였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의 데스티니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방법 중에 하나가 
"사람들을 통해서" 라는 거에요. 즉 관계를 통해서, 사랑을 통해서!

부모, 배우자, 이웃, 형제자매들.. 이런 만남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데스티니의 방향들을 트시고,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시죠.

그런데 이 만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은 
우연히 누구를 만나고. 안 만나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신 사람들과 관계 맺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사람도, 
우리가 잘못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데스티니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고요. 

우리에게 보내주신 사람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관계를 맺고..
그것이 사랑이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었을 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놀랍게 축복하신다는 거에요. 

다윗은 그렇게 사랑하는 관계를 맺었고, 
요압은 반대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거죠!

▲오늘의 주인공 요압은 
구약에 등장한 여러 명의 사람들,
신구약을 합쳐서 여러 등장인물들 중에 아주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 이유는, 요압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사람들이 헷갈려요. 
'도대체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이게 아주 헷갈립니다. 

아마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신 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셨을 거예요. 
'요압은 도대체 good example 로 제시된 거냐, bad example 로 주신 거냐?'
아주 헷갈리게 합니다. 

어떤 대목에서 보면, 분명히 요압은 하나님의 사람처럼 보여요. 
어떤 땐 다윗보다 더 신령해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사람처럼 보이는데 

또 어떤 장에 가 보면, 악인도 이런 악인이 없어요. 
그래서 요압이란 캐릭터는, 수시로 가면을 바꿔 쓰는... 
'이 사람이 도대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서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인지..' 헷갈립니다.

물론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어떨 때는 주연이었다가 악역으로 바뀌고...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뭐 솔로몬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죠. 

그런데 이 요압의 독특한 점은 뭐냐면 
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주연에서 악역으로 바뀌는 게 아니고 
수시로 바뀐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느 장면에서는 굉장히 탁월한 영적인 사람처럼 보였다가 
또 어느 장면에 가보면, 정말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요압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면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훨씬 더 쉽게 동일시 할 수 있는 사람이 요압입니다.

사실 여러분 성경에서 사무엘, 다니엘.. 이런 사람들이랑 
쉽게 여러분은 동일시가 되세요? 힘드실 거예요. 
이런 사람들은 너무 절대 선 이잖아요.
이 사람들하고 나는, 좀 거리감이 있어요. 

또 반대로 너무 심한 악인들도 성경에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 
이런 사람은.. 난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이 사람들도 쉽게 나와 동일시가 안 되는데 

요압같은 사람은, 성경을 잘 읽어보면, 참 우리랑 비슷한 사람이에요.
어떤 때는 굉장히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인 것 같다가 
또 어떤 순간에 가서 보면 진짜 엉뚱한 짓을 하고 있고 
이런 게 요압의 인생이죠. 

그런 면에서 요압은, 성경에 나오는 많은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오늘날 우리와 비슷한..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요압이 주는 메시지는 사실은 굉장히 많아요. 
왜냐면 우리하고 비슷하기 때문에! 
요압의 문제들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압은 늘 다윗의 주위에 있었어요. 
그 얘기는 뭐냐면,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다는 거죠. 
늘 하나님 편에 있는.. 그러니까 모태신앙과 좀 비슷한 거죠. 

또 다윗을 위해 많은 공도 세웁니다. 
그 얘긴 뭐냐면, 교회 안에서 일도 잘하고요. 인정도 많이 받았다는 거에요. 
사역도 누구보다 잘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다윗의 오른팔이죠.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모든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한 번도, 요압으로 인해서 기뻐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요압은 항상 다윗의 마음의 짐이었어요. 
다윗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요압은 아주 헷갈리는 사람이죠. 
요압에 대한 메시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요압이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살펴봅시다. 

자 성경에 등장하는 요압은 
성경의 웬만한 왕들 보다도, 훨씬 더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요압'이라고 쳐서 성경검색을 해보면 
거의 2백번 가까이 등장해요. 
웬만한 왕들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요압의 특징

▲1. 능력이 아주 많았던 사람이에요. 
용사였고요. 다윗의 군대의 총사령관이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사령관이 되고'  삼하8:16

요압은 다윗만큼이나 전쟁에 능했던 사람이고 
전쟁에서 패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다윗이 왕국을 세우고 난 이후에, 요압이 전쟁에 나서서 졌다는 기록이 없어요. 
군인으로서의 요압은, 적어도 능력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 같아요. 
아주 전쟁을 잘 했던 능한 장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요압을 적어도 장수로서는 신뢰했습니다. 
자기 대신 요압을 전쟁을 내보내잖아요. 

삼하11:1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쌓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다윗이 요압을 얼마나 신뢰했느냐 하면 
왕이 나가야 되는 전쟁에, 자기가 안 나가고 요압을 대신 보낼 정도로.. 

그리고 온 이스라엘 군대를 요압에게 맡길 정도로 
아주 '전쟁에 관해서는' 신뢰했던 인물입니다. 

▲2. 요압은 하나님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어요.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악역들의 특징은, 항상 바알이나 아세라를 섬기죠.
항상 우상을 섬긴다는 거에요. 

근데 이 요압의 특징은 뭐냐면, 한번도 바알, 아세라를 섬겼던 기록이 없어요. 
그래서 구약에 등장한 악역 중에 
유일하게 바알과 관계없는 악역이 아닐까.. 싶을 정도 입니다.
그만큼 여호와 신앙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에 열심히 다니시는 저와 여러분 하고 
아주 비슷한 캐릭터의 사람이에요. 

이를 테면, 한번도 주일성수를 빼먹은 적이 없다는 거예요. 
모태신앙 DNA를 그대로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스루야(다윗의 누이)의 아들'

▲3. 요압은 지혜가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었어요. 
삼하16장에 보면, 압살롬의 반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 다윗이 크게 위험했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서 도망가다가 
결과적으로 요압을 보내서 반란군을 진압하고 승리를 하는데 

근데 전쟁하러 나가는 요압한테 부탁을 하죠.
'압살롬을 죽이지는 말아 달라!'

근데 요압은 압살롬은 죽이죠.
왜냐면 살려두면 안 된다는 걸 안 거예요. 

그러고 났더니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매우 슬퍼합니다. 
아들 압살롬이 죽은 것 때문에 매우 슬퍼하고 비통해가지고 있어요. 

그랬을 때 요압이 와서 다윗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삼하19:5~7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요압은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지금 빨리 민심을 다잡지 않으면, 지금 군심을 다잡지 않으면... 
지금 왕이 압살롬 죽은 거만 놓고, 아주 슬퍼할 때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다윗의 리더십이 굉장히 약해져 있을 때고 
그러니까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죠. 
다윗을 좇는 사람보다. 압살롬을 좇는 사람이 더 많았어요. 
그 얘기는 뭐냐면, 다윗으로부터 민심이 많이 떠났다는 거예요. 

그런 때인데, 이때 압살롬의 죽음을 가지고 
왕이 슬퍼하고 있을 때냐는 거예요. 
'지금 빨리 민심을 다잡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이것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요압이었어요. 
그래서 요압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요압의 이야기를 쭉 한번 읽어보세요. 
요압이 다윗에게 권면했던 이야기는 거의 다 맞는 말이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다윗보다 훨씬 더 분별력이 있었어요. 
다윗은 굉장히 감정에 충실했던 사람이에요. 보면은 시편을 쓰잖아요. 
시인들의 특징이 있잖아요.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죠.

그런데 요압은, 현실을 아주 날카롭게 분별하는 사람이었던 거죠.

그 외에도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는 것을 간파하고, 
암논의 살해 사건으로 그술에 피해 있던 압살롬을 예루살렘에 데려오기 위해
드고아의 여인에게 할 말을 가르쳐 주었어요. 아주 지혜로운 장수였죠.

▲4. 요압에게는 결단력도 있었고, 충성심도 있었어요. 
압살롬의 반란 때 보면, 다윗의 신하들 중에 많은 이들이 압살롬을 좇았습니다. 
근데 요압은 다윗을 좇았어요.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여러분, 압살롬이 다윗보다 훨씬 더 세력이 컸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을 좇아가기 위해서는 굉장한 결단력이 있어야 되고요. 
또 한편으로는 충성심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마지막에 한번 솔로몬 대신 아도니야를 택했던 것은 실수였지만 
하여튼 다윗을 직접 배반한 적은 없어요. (솔로몬을 배반한 거라고 볼 수 있죠)
이렇게 충성심이 있는 사람이에요. 또 결단력도 있는 사람이었어요. 

▲5. 요압은 수완도 아주 뛰어났습니다. 문제 처리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다윗의 인생의 가장 큰 오점, 밧세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보세요.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그 남편 우리아를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서 
막 당황하고 있을 때, 
그 사건을 아주 깨끗하게 처리해준 사람이 누구에요? 요압이죠. 

요압은 다윗의 '어둠의 친구'예요.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다윗이 막 당황하고 있을 때 
자기가 알아서 다 처리해 주잖아요. 
우리아를 죽이는 일에, 아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아주 유능한 '어둠의 친구'였지요!

근데 밧세바 사건에 대해서 정면으로 다윗을 질책했던 나단 선지자하고 
대조가 되죠. 
정말 누가 다윗의 진정한 친구였을까요? 

어쨌든지 간에, 눈치나 수완이 구단이었어요. 
이쯤되면 여러분 요압은 장수로서 특A급입니다. 
실제로 다윗이 가장 아꼈던 장수이기도 하고요. 다윗의 특A급 장수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다윗을 따랐던 야심가 요압        *사랑과 반대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은 한번도 요압 때문에 
마음이 흡족하고 기쁘고.. 그러지 않았다는 거에요. 
요압은 늘 다윗의 마음에 짐이었습니다. 

삼하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요압, 아비새)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이게 저주잖아요. 
요압이 아브넬을 임의로 죽였기 때문에, 다윗이 한 말입니다. *이스보셋 측 군대장관

나중에 요압은, 아마사도 죽여버립니다.  *아도니야 측 군대장관  삼하28:12 
자기와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버리고 마는.. 
출세 수완이 뛰어났던 사람이에요. 

요압같은 사람이 여러분의 부하로 있다면 굉장히 좋지 않겠어요?
능력도 많고, 눈치도 있고, 분별력, 충성심, 지혜까지 있는 요압! 
왕으로서 이만한 부하를 가지고 있으면 이거는 정말 천운이겠지요..

그리고 실제로 다윗이 왕국을 세워 갔을 때 
요압의 역할이 굉장했습니다. 요압이 없었으면 아마 어려웠을 거에요. 

그런데 요압에 대한 다윗의 평가가 왜 이 모양인가요? 

▲이뿐 아니라 요압에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은
다윗의 인구조사때 나타납니다. 

삼하24장에, 다윗이 말년에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될 실수를 하나 저지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구조사하는 거였어요. 
 
인구조사가 뭐냐 하면, 군대가 얼마인지를 자랑하기 위해서,

군대를 의지하기 위해서.. 인구조사 하는 거거든요. 

근데 하나님께서 '아니 너의 군대는 나다. 내가 너를 지금까지 보호했지, 
네가 언제 군대 숫자 많은 거 가지고서 전쟁했느냐?
너는 초심을 시키고 나를 그냥 의지해라!' 

그런데 다윗이 이제 범죄하죠. 자기 자랑과 만족을 위해 인구조사를 합니다. 
근데 이때 요압이 뭐라 그러는지 보세요. 

삼하24:2~3 '이에 왕이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 때 보면, 다윗은 영적 분별력을 잃었어요. 
분명히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그러시는 걸 알면서도 
분별력 없이 인구조사를 하는데 
요압은 다윗보다 훨씬 나아요. 영적 분별력 까지 있었어요.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까, 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24:3

여러분 이 정도면요, 다윗보다 요압이 더 훌륭한 거 아니에요?
요압을 왕으로 세워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사람은, 
이런 요압이 아니고, 다윗을 세우셨다는 거에요. 

능력도 있어, 지혜도 있어, 분별력, 충성심, 영적인 분별력까지 
전부 다 갖춘 사람처럼 보이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요압을 왕으로 안 세우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냐 말이에요?

왕으로 안세우신 것 뿐만이 아니고 
왜 요압의 인생은 그렇게 비참하게 끝나냐는 거에요. 

◑왜 요압이 아니라 다윗일까요?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요압의 말아먹은 데스티니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요압이 자기 데스티니를 말아먹었나요? 

이런 기막힌 능력, 또 장수로서 최고의 은사, 특A급 장수,
그런데 왜 요압은 자기 데스티니를 완성하지 못했을까요? 

자 여기에 대한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의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결론은 앞서도 말씀드렸어요. '사랑'이 없었던 거죠.

▲그렇다면 특A급 장수였던 <요압에 대한 상관의 평가>는 어땠을까요?

왕상2:5~6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위 구절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한 유언이에요. 그래서 요압을 죽이라는 거예요. 
요압은 중용하지 말라는 거에요. 

'나 David는 어쩔 수 없어서 요압을 썼지만' 
다윗이 아마 좋아서 요압을 쓴 건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앞에 보면 다윗이 뭐라고 한탄하냐면 
'내가 이 사람을 제어할 힘이 없으니, 하나님 알아서 좀 해주십시오' 이러잖아요. 
그 얘기는 다윗이, 요압을 제어할 만한 힘이 없었다는 거죠.

근데 솔로몬 때가 되면 이제 힘이 생기는 거죠.
나라가 안정되어 솔로몬이 힘이 생기고 나면,
'너는 요압을 절대로 중용하지 마라!' 
'요압을 죽여라' 이런 유언을 남긴 단 말이에요. 

이것이 요압의 인생에 대한 상관의 평가였다면 
여러분, 이렇게 살벌한 평가가 어딨겠어요? 

일평생 충성을 다한 부하에게 
자기 평생을 다윗과 함께 전쟁터를 누비고 충성했고 
뭐 똑똑하고, 전쟁 잘 하고... 
그런데 왜 거기에 대한 다윗의 평가는, 최악의 평가를 주느냐는 거죠. 

▲그러면 <다윗에 대한 상관의 평가>는 뭐였을까요?

다윗도 왕이 되기 전에, 사울 왕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 얘기는 요압하고 비슷한 포지션이 있었다는 거에요. 

근데 더군다나 다윗은, 사울이 굉장히 경계를 했습니다. 
그가 너무 인기가 많으니까, 자기 왕위를 위협할 거라고 생각을 해서 
굉장히 미워하고 죽이려고까지 했던... 

그러니까 상관의 평가가 절대로 곱게 나올 수 없는 사람이 다윗인데, 
의외로 다윗에 대한 사울의 평가를 한번 볼게요. 

삼상24:17~20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여러분, 이 사울의 평가가 놀랍지 않나요? 
이게 다윗이 그냥 사울의 군대장관으로 잘 있을 때 한 평가가 아니잖아요. 
이미 다윗은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예요. 
근데 그 중간에 사울이 다윗에게 한 평가가, 
'네가 나보다 의롭다'는 거에요. 

'네가 나보다 의롭고, 네가 나에게 원수 갚지 않은 것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네게 복을 주시기를 원한다'

여러분, 원수에게 이 정도 평판을 들을 정도면, 정말 인격자죠. 
저와 여러분은, 우리 경쟁자로부터 어떤 평판을 들으세요?

△또 한 명, 요나단의 평가가 있습니다.
그는 사울의 세자였어요. 장차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나단도 세상적인 눈으로 다윗을 보면, 자기에게 부담스러운 사람이죠.
근데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평가는 뭡니까?

삼상20:17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18:3~4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러하였더라'

삼상 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요나단이 뭐라 그랬냐면 '네가 나대신 왕이 되라' 라는 거예요. 
이게 왕세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죠. 

요나단이 다윗한테 '네가 나보다 낫다'는 거에요. 

이렇게 다윗은, 자기 상관(사울, 요나단)들로부터 
놀라운 평판을 받았던 사람이에요. 

여러분, 다윗에 대한 평가가, 요압과 대조되지 않습니까? 
요압은.. 자기 상관(다윗)으로부터 그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죠.

△그렇다면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뭐였을까요? 

행13:22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마음에 합하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근데 요압은 한 번도 다윗의 마음에 합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적도 없고요.

◑다윗과 요압을 구분 지었던 "사랑"

여러분, 다윗에게는 있었는데, 요압에게는 없었던 한 가지가 있었어요.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요압과 다윗의 데스티니를 갈라놓은 진짜 근본 이유인데요. 
그것은 바로 <사랑>이에요!  

<사랑>이 있고/ 없음이 
다윗과 요압의 데스티니를 갈랐다는 거예요. 

▲아마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아니 요압은 그가 군인인데, 군인에게 무슨 사랑이 요구되나?
군인의 그저 싸움만 잘하면 되는거지!'

예를 들면, 음악하는 사람은, 음악만 잘 하면 데스티니가 이루어지는 거지,
웬 사랑?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많은 경우 우리가 우리의 데스티니를 이해할 때 착각하는 게 그겁니다. 

우리에게 주신 어떤 사역, 사명, 
우리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이루어야 될 어떤 일들.. 
그것에 나의 데스티니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저는 목사라면, 제가 목회를 잘 해야죠. 
그러면 데스티니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업가로 부르심을 받았으면 
사업을 잘해야 그의 데스티니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군인으로 부름 받았으면 
전쟁에 나가서 이겨야 그 사람의 데스티니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게 정말 그게 데스티니가 이루어지는 거라면
요압은 전쟁에 나가서 다 이겼는데 
왜 그의 데스티니가 망가졌냐는 거에요. 

장수로서 요압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왜 그의 데스티니가 파괴됐냐는 거에요. 
그게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데스티니를 여시고/ 닫으시는 것은, 
열쇠가 있는데, 그 열쇠는 
우리에게 주신 어떤 일, 능력, 은사, 업적이 얼마나 많고 잘하느냐.. 에 달려있지 않고
그것은 사랑에 달려있다는 거예요. 

▲고전13:4~7절에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요압에게 없었고 다윗에게만 있었던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위 구절(사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감정적인 차원에서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얘기하는 아가페(헤세드)의 사랑! 

'사랑은 투기하지 않으며' .. 그런데 요압은 투기하는 사람이었어요. 

요압은 자기 출세를 위해서, 자기 경쟁자 두 사람을 죽였어요.
아브넬과 아마사! 둘 다 상대 진영 군대장관이었죠.

압살롬의 난이 끝나고 난 다음에 
다윗은 아마사를 군대 장관으로 세우려고 했어요. 
그랬을 때 요압은, 아마사을 질투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죽이지요. 

같은 이유로, 아브넬을 죽입니다. 암살한 거죠.

요압은 '오래 참거나'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요압은 '투기하는' 사람이었어요. 경쟁자를 죽이고야 마는 캐릭터죠.

또 우리아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것을 볼 때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에요. 
불의인 줄 알지만,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면 그냥 행한 사람이었어요. 

또 다윗에게 했던 많은 행동들을 보면 
'교만하고 무례하게' 행한 적도 있었어요. 

또 아도니야 때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면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도 요압에게 있었죠.

요압은 이렇게, 고전13장에 나오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다윗에게 있었고, 요압에게 없었던 결정적인 차이는.. 사랑이었어요!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능력이 많아서 알아서 하나님의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 No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이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세상에서 살면서 
어렸을 때부터 배우는 아주 아주 중요한 패러다임 중의 하나가 뭐냐면 

"내가 무언가 청취해서 사랑을 얻어내려 한다"는 거에요. 

특별히 딸 셋 있는 집에 둘째 딸로 태어난 사람은요, 
반드시 뭔가를 해내야만 됩니다. 안 그러면 자기 존재감이 없게 되요. 

첫째는 첫째라서 부모가 사랑하고, 
막내는 막내니까 사랑하는데 
가운데 낀 사람은 (둘째는) 부모의 주목을 받기가 참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본능적으로 배우는 게 뭐냐면 
'내가 뭔가를 잘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공부를 잘하던, 청소를 잘하던, 노래하고 춤추는 걸 잘하던..
자기가 뭔가를 잘해야 돼요. 그래서 자기를 증명해야 돼요.

그 '자기의 잘하는 것을 통해서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된다'고 하는 
이 패러다임이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세상이 갖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그리고 가장 강력한 패러다임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왜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발버둥 칩니까?

성공해야 내가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 거죠. 
이 패러다임이 어려서부터 우리를 계속 끌고 가는 거에요. 

▲복음의 핵심이 여러분 뭔지 아세요? 
이 패러다임을 깨는 게 복음의 핵심이에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뭘 해서 얻어내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내가 뭘 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 조건이 없는 사랑이라는 거에요. 

우리에게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는 거고, 아무 조건 없이 은혜와 구원을 주시는 거고 

이건 뭐 give and take 식으로 거래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네가 이만큼 했으니까 내가 그만큼 갚아줄게!' 
'네가 나를 위해서 이만큼 헌신하고, 나를 위해서 목회를 이만큼 했으니까 
너는 복 받아!' 이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목회자들 가운데도, 이게 쉽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목회를 잘하고 크게 해야 된다'고 하는 이게 뭐냐하면 
'이렇게 해서 목회성공 해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인정받고 사랑받는다'
라고 하는 이 세속적 패러다임이 그대로 우리 속에 견고한 진으로 자리잡고 있죠.

▲이것을 깨는 것이 여러분,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무 조건 없이, 아무 대가 없이 
당신의 목숨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는 것이 복음이잖아요. 

원래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방식과 계획은 
give and take 가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가 뭔가 잘 해가지고서, 상공해가지고서... 

요압처럼 '나는 원래 장수로 지음 받았고, 나의 데스티니가 장수이고'
여기까지는 맞아요.

그런데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면 나는 특A급 장수가 돼야 돼! 
나는 장군으로서 승리하고 성공해야 돼!
그래야 그래야 내가 다윗으로부터 인정받고, 하나님으로 사랑받을 수 있어!' 

이 패러다임이 요압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거죠.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나는 모든 인간들을 
가장 강력하게 붙잡고 있는 것이 뭐냐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잘하고, 성공하고, 이루어야 
나는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어!' 

그러나 복음의 핵심은 이것을 부수는 거에요. 그게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가 사랑받고, 우리가 존중받아야 되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이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이지, 

우리가 이룬 일(공로)에 기초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요압의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습니다.
요압은 뭔가를 통해서, 장수로서 자기 능력을 입증함으로 
또 다윗의 군대에서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성취함으로써, 거기서부터 뭔가 만족을, 인정을 얻으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이것이 요압의 인생을 망가뜨렸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요압의 인생은 
뭐 어쨌거나 성공한 사람처럼 보여요. 

-군대장관까지 올라갔고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외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된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를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는 거죠. 
다윗의 평가가 뭐였어요? '이 사람은 곱게 죽지 못하게 해라!'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평가가 이 정도면.. 그는 진정 성공하고 존경받는 인생이
아닌 거죠. 실패한 인생인 거죠. 

그에 반해서 다윗에 대한 평가는 뭐였냐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단 말이에요. 

근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다'는 건 뭐냐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에 맞는 사람이었다'는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은 뭐예요?
마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요구사항이었다는 거에요.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에요?
-능력이 많은 사람?
-지혜로운 사람?
-일 잘하는 사람?
-성공한 사람? 

아니잖아요. 한번도 하나님께서 
'너는 일을 잘해라. 너는 네 분야에서 성공해라!'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성경에는 한 번도 안 나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이 요구 조건에 맞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지요.

이 요구조건과 아무 상관없이, 요압처럼, 
전쟁을 잘하고.. 나는 지혜가 있고.. 나는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나고.. 
여러분,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 젊은이들이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취업을 하잖아요. 
그럼 취업을 할 때 면접을 하죠. 

그러면 면접을 할 때, 그 회사에서 요구하는 요구 조건에 맞게 대답을 해야
취직이 되는 거에요. 엉뚱한 대답 아무리 많이 해도 취직이 안 돼요.

제가 얼마 전에 전주대학교 총장님을 잠깐 만나서 얘기한 적이 있는데 
졸업생 취업 때문에 내가 힘드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는 과외공부를 한대요. 
'삼성 취업반' 'LG 취업반' '현대 취업반' 그런게 있대요. 

그래가지고 삼성반에는 삼성 전직 임원들을 초청해서
거기서 어떤 걸 면접하는지를 다 가르치는 거에요.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대답을 해야 점수를 받는지를 다 가르쳐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디자인 하신분이 있다니까요. 
창조주가 있으시다고요. 
그 창조주의 기준에 내가 맞아야 되는 거잖아요. 

아무리 내가 '이거 잘했어요. 저거 잘했어요.' 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생이에요.

요압의 가장 큰 실수, 요압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들이 저지르고 있는 실수는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 줄 모른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마22:37~39절이죠!

'네가 성공하고, 전문 분야에서 전문가고..'
오케이, 이게 다 좋은데 
그건 내가 요구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그건 그냥 결과로 나타나면 오케이, 좋아요. 

근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뭐냐하면 
일을 좀 못해도... 

다윗은 보면, 요압보다 현격하게 능력이 떨어집니다. 
특별히 정조 관념같은 거는 요압에 비해 형편없어요. 
남의 아내를 취하는 것 보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압이 아니라 
다윗을 '내 마음에 합했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다윗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기준에 합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사랑이 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원수까지도 용납할 줄 알고 
사울을 사랑했잖아요. 

다윗과 요나단이 나눴던 사랑을 보세요. 
오죽했으면 요나단이 자기 왕위를 가지라 그랬을까요. 

▲정리하면
여러분, 우리의 데스티니의 성취는,
사실은 능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또 어떤 지혜나, 분별력이나, 뭐 종교적인 열심이나.. 이런 것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아요. 

이 '종교적인 열심'도 교회에서 크게 한 몫하죠. 
종교적인 열심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아닙니다. 

이게 아니에요. 
우리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마음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거에요.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거죠.

자 이것이 여러분, 다윗에게는 있었지만 
요압에게는 없었던 한 가지입니다. 

-다윗이 원수 사울을 끝까지 사랑해서, 그가 죽고 난 다음에도 애가 
 '활의 노래'를 지어 부르잖아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사랑해서, 반역한 아들일지라도 '선대하라'고 부탁하죠.
-다윗은, 자기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시므이도 '내버려 두라'고 하잖아요...

*동영상의 1~45분까지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