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은,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예고하는 책인데, 구약의 여러 인물들 가운데, 오실 예수님을 가장 잘 예표한 인물로 사람들은 다윗을 꼽습니다. 다윗이 보여준 ‘사랑’이야말로, 목자이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회화처럼 가장 잘 보여줬다는 거죠.
본문 삼하18장에서도 아들 압살롬을 향한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한 가정의, 방탕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기 보다, 다윗을 통해 보여지는 그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의 예표이며, 신약에 오실 그리스도의 ‘탕자를 용납하는 부성적 父性的 사랑’의 예시입니다.
우리 각자는 본문의 압살롬과 같습니다. 그러나 반역하고, 방탕하고, 거역하는 아들을 끝까지 용납하고, 용서하고, 받아주는 아버지 다윗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언약적 사랑’의 그림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윗은 지금 자기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타락하고 방탕한 아들 압살롬을 사랑하고, 애틋하게 각별히 여기고 있습니다.
◑아들의 소식을 안타깝게 기다리는 다윗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맞붙었고, 압살롬은 결국 죽임을 당했죠. 이제 요압은 전령을 통해서, 마하나임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다윗 왕에게 승전보를 전하게 합니다.
18:24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보니 어떤 사람(전령)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때에 다윗 왕이 두 문 사이에 앉았더라' 여기서 ‘두 문 사이'란 성의 외문(The outer gate)과 내문(The inner gate) 사이를 의미한다. 이곳은 파숫꾼의 성문루(城門樓)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죠.
따라서 다윗 왕은 하루 종일 이곳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전쟁터에서 기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25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저가 만일 혼자면 그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전쟁에서 아군이 패배할 경우에는 여러 명의 패잔병들이 도망쳐 올 것이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승리하였을 경우에는 한 사람이 승리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려올 것임은 기정 사실이죠. 그런데 한 사람이 성으로 달려오고 있었으므로 다윗 왕은 이제 승리의 소식 알리는 연락병이 오고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27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앞서 아히마아스는, 예루살렘 바깥에서 제사장들이 전해주는 소식을 받아서 다윗 왕에게 전해주는 전령의 사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달리기에도 아주 능했나 봅니다. 17:17~20
'저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여기서 ‘좋은 사람'이란 말은 물론 ‘다윗 왕과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책무(責務)를 소흘히 하지 않는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즉 다윗은 아히마아스가 전장(戰場)에서 혼자만 도망쳐 올 정도로 비겁하거나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였기에 아히마아스의 입에는 자신들이 기대하던 ‘좋은 소식', 곧 승전보가 담겨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예상대로 아히마아스는 달려와서 승전보를 이렇게 전합니다. :28 그런데 다윗 왕의 반응이 좀 의외입니다. 그다지 썩 기뻐하거나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듣기 원하던 소식이 아니었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전령 아히마아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지금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으로서, 반란군의 진압 성공 여부부터 먼저 물었어야 했는데도, 아버지로서의 강한 부성애 父性愛 를 먼저 나타냈던 것입니다.
30 ‘왕이 이르되 물러다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이는 두 번째 전령인 구스 사람이, 다윗에게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소년 압살롬은 잘 있느냐' 29절에 이어 다윗은 도다시 압살롬의 신변부터 염려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는 분명 지금껏 다윗을 위하여 목숨의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반란군을 무찔렀던 다윗의 군사들을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죠(19:5, 6).
훗날 요압이 아도니야와 손을 잡고서 솔로몬에게 반역한 것(왕상 1:7)도 이러한 다윗의 태도에 실망한 때문일 것입니다.
'왕의 원수...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압살롬의 죽음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 구스 사람의 보고입니다.
(*지금 아 글의 흐름과는 좀 어긋나지만 잠시 압살롬의 죽음을 생각해 볼 때, 그는 형 암논을 살해할 때, 자기 종들을 동원해서 죽였거든요. 13:28 마찬가지로 자기가 죽을 때, 그는 요압의 부하들 10명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칼로 쳐죽임을 당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 것이지요. 18:15)
◑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33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이러한 다윗 왕의 절규에는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슬픔이 내재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본능적 비탄이죠. -또 하나는 자신의 범죄(11장 밧세바)가 가져온 뿌리깊고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12:10-12)에 대한 아픔입니다.
즉 다윗 왕은 여기서 압살롬의 죽음이 자기의 죄의 결과임을 절감하면서 흐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역자요, 살인자요, 아버지를 죽이려는 패륜적 죄인인 압살롬을 끝까지 사랑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성적 父性的 사랑을 그림자로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 이 부분을 읽을 때 가슴이 조금 저려야 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덤덤하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아들에 대한 다윗의 애절한 사랑에... 조금이라도 감정이입이 되어야 하죠. 그래야 반역하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비교가 조금 부자연스럽기는 합니다만 (자기가 교사해서 죽인)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다윗의 반응은 뭐였냐면 ‘칼이라는 것은 이 사람도 죽이고 저 사람도 죽이는 법이다’ 11:25 쉽게 얘기하면 ‘전쟁 하다 보면 죽을 수도 있는 거지..’ 이랬어요.
이렇게 말했던 다윗이, 이제 자기 아들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는 더 이상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거예요.
사실 제삼자의 입장, 또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압살롬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할 이유는 하등 하나도 없어요. 그러기에는 너무나 큰 죄인이요, 반역자이기 때문이죠. 세속 역사에 반역자는, 그 주변 사람들까지 다 죽이는.. 엄벌에 처했어요.
그런 중죄인에 대해서.. 다윗은 지금 슬퍼하고 있습니다. 성루 윗층으로 올라가서 울고 있습니다. :33
▲다윗은 5분 울고 그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울었던 것 같아요.↙
19:2~4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이런 다윗에 대해, 압살롬 등 부하들은.. 반감을 표시합니다. 19:5~6 그걸 뻔히 알면서도, 다윗이 아들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인이요, 반역자들인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을 느끼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윗은 지금 자기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타락하고 방탕한 아들 압살롬을 사랑하고, 애틋하게 각별히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18:33 실제로 그리스도는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런 아버지 다윗의 모습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아들 예수를 높은 곳에서 높은 하늘에서 바라보며 우셨을 우리 하나님을 생각하게 해요.
사실 우리가 누구를 진실로 사랑할 때는 ‘대신 죽고 싶어’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부모들이, 자녀가 병들어 죽어갈 때는, 그런 마음을 가지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자기에게 반역하고 자기를 왕으로 섬기지도 않고 오히려 왕의 자리에서 쫓아낸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어떻게든 용서하고,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윗 왕을 통해서,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사람이 저지른 모든 죄 때문인데도,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를 대신 죽게 하셔서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한없이 용서하고 한없이 사랑하는 마음,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마음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신약 복음의 하나님을.. 그림자로 보게 됩니다.
▲전투에 나갈 때 지휘관들에게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18:5
‘젊은 압살롬’ 이때 압살롬이 아마 20대 후반~30대 초반이 되었을 겁니다. 그는 이미 딸 하나, 아들 셋을 두고 있었어요. 14:27
그렇지만 그의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은 다윗이 헤브론에 가서 취한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로 여겨집니다. 대상3:5 지금 시점이 다윗의 재위 후반기로 볼 때... 20대 후반~30대 초반이죠.
압살롬이 적지 않은 나이인데, 아버지 눈에는 ‘젊은 압살롬’, 다시 말해 ‘어린 압살롬’으로 보이는 겁니다.
과거 개역에는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라고 번역했죠. 다윗은 압살롬을 '소년'이라고 부름으로써 아직도 압살롬을 정치적 반란자 라기 보다는 자신의 철없는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죠.
여기서 ‘소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 는 미성숙한 청소년/청년를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창14:24, 21:12, 17, 삼상1:22)
이같은 다윗의 말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미 자기의 군대가 승리하리라는 확신(15:16, 25)과 압살롬을 용서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봅니다.
이와 같이 다윗의 강열한 부성에(父性愛)는 아버지의 생명만을 노렸던 압살롬(17:1-4)의 경우와 극명한 대조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말(내 아들을 너그럽게 대하라)은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우고, 이겨야되는 장군들에게는 사기를 꺾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로 들렸을 거예요.
그런 것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다윗이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아들을 사랑하는 부성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인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모습이 그렇다는 거죠.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직접 죽으셨죠.
구약으로 올라가보면 다윗이라고 하는 아버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아버지로 대표적인 분으로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압살롬은 셋째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형 둘이 죽었습니다. 실질상 지금 첫째아들입니다. 맏아들이요. 그 인물도 잘났답니다. 출중해서, 머릿결이 좋아서 아주 축 늘어졌는데 모두가 칭찬하고, 똑똑하고, 잘난 아들이었답니다.
온 백성이 추앙하는 그런 아들이었어요. 인기가 있는 아들이요. (다윗은 자기 모습을 투영해 보는 거죠) 가만히 기다리면 아버지 죽으면서 왕이 될텐데 무엇이 바쁘고 초조해서 아버지를 배반하는 겁니까?
악당들과 작당을 해서 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아버지는 그대로 왕의 보좌를 내놓고 광야로 피난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정처 없이 방황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두 대열에서 전쟁이 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계속 물어봅니다. ‘내 아들 압살롬이 평안하냐? 내 아들 압살롬이 무사하냐?’
불효는 고사하고 이런 패륜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 어느 역사에 이런 아들이 있단 말입니까?
용서할 수 없는 이런 나쁜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어요.
다윗 편의 모든 사람이 압살롬을 다 대적으로 생각했고, 원수로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저가 내 아들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이 평안하냐?
그가 죽었습니다. 그가 자랑하던 머리채가 나뭇가지에 달려서 매달려 있는 것을 압살롬 장군과 군인들이 찔러서 죽였습니다. 통쾌하게 죽었습니다마는 이 죽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못합니다. 이거 얘기했다가는 자기도 살아남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만큼 그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침내 구스사람이 기어이 "당신 아들이 죽었소"라는 비보를 가지고 옵니다.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대신하여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계속 통곡을 하는 아버지의 통곡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버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천하에 죽일 놈이요. 못된 사람이요. 패륜아라고 했겠지만, 원수라고 했겠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아들 압살롬을 사랑해서, 아들과 정면충돌을 피하려고 다윗은 피난을 갔습니다. 일단 져주는 것입니다.
(*지금 압살롬이 반란군을 규합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진군해 오고 있어요. 그런데 다윗이 너무 쉽게 예루살렘을 압살롬에게 내어줍니다. 그야말로 압살롬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혈입성을 하게 됩니다.
다윗이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자기 친위대를 중심으로 한번 수성전 守城戰 을 펼쳐 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수성전을 장기적으로 끌면서, 자기 세를 다시 규합해도 되잖아요.
아마 다른 반란군이었다면, 다윗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이었기 때문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내어주었다.. 는 관점의 설교입니다.
그런데 결국 압살롬이 죽지 않았나요? 물론 그렇지만 다윗은 시간을 버는 겁니다.
압살롬이 돌이키고 돌아올 시간을 주는 거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일단 피해주는 겁니다)
왜 그는 피난의 길을 가야했습니까? 왕의 보좌를 내놓고 피난을 가는 이유가 뭡니까?
1) 모든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이 사건을 받아들인 겁니다.
왜냐하면 그가 밧세바라는 여자에게 취해서,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인 일이 있거든요. 자기 밑에 있는 충성된 장군을 그 아내를 뺏기 위하여 죽였습니다.
이 사건을 나단 선지자가 책망하시면서 "너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아니하리라"하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가슴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형제들간에 다투면서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이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심판이라고요.
아들이 아버지의 첩을 강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심판이라고요.
그가 피난의 길을 나설 때에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합니다. 옆에 있던 장군이 그대로 칼을 들어서 목을 내려치려고 합니다. "아서라. 그러지 말라. 하나님이 저를 저주하라. 하기 때문에 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받는 채찍이요. 심판이니까 나무라지 말라."고
그리고 훌쩍 떠나서 정처 없는 피난의 길을 광야로 들어갑니다. 이대로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는 말 좀 보세요. "자, 일어나 도망가자." 그래 도망갑니다.
2) 다윗 편에 장군이 많습니다. 얼마든지 압살롬과 그 일당을 전멸할 수 있습니다만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좌를 놓고 그는 도망갑니다. 왜요?
중요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아들에 이와 같은 패륜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죄 때문에 저 아들이 이러한 아들이 되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들이 어렸을 때 잘못된 것을 보았고, 내가 좋지 못한 본을 보여 주어서 그 결과로 이 같은 일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는 아들을 나무라지 않았어요. '너도 피해자다.' 이런 생각을 하고 그는 집을 나서게 된 겁니다.
▲어떤 집의 아들 아이가 속을 어지간히 썩여요. 말썽도 많이 부리지만 공부도 안하고 집을 나가고 걸핏하면 가출이에요. 그의 어머니는 속이 상해가지고 심지어 제게까지 찾아오면서 너무 답답해 가지고 "또 가출했습니다. 또 말썽입니다. 이 자식이 언제 사람될까요?"
그저 괴로워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자 "젊었을 때 이 중요한 나이에 공부 안하고 저러고 다니면 어떻합니까?" 그러고 발발 떱니다마는 아버지는 태연합니다.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 부인의 말에 의하면 남편이 말없는 것이 속상하대요. "책임은 나 혼자 지는 거냐? 어째서 당신은 말이 없느냐?"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아들이 나갔어요!" 그러면 " 그래? 그랬구먼." "돌아왔어요" "오..그랬구먼.“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어요.
왜요? 그 아버지는 그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젊었을 때 아버지 속을 어지간히 썩였거든요.
그 정도가 아니었거든요. 너무 속을 썩인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식을 보면서 자기 모습을 보는 거예요. 그런고로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이것이 다윗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자녀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얼굴을 보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참고 있는 것입니다.
가슴이 쓰리고 괴롭지마는 할 말이 없습니다. 말 없는 아버지라고 나무라지 마세요. 저 속은 더 썩고 있는 겁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돼요.
그래서 "일어나 도망가자." 그랬어요. "일어나 도망가자."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 아들을 죽여서 해결하겠습니까? 내가 죽어서 해결하겠습니까? 다윗의 입장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저 아들을 죽이면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됩니다.
그냥 앉아 있다가 아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면 아들을, 아버지 죽인 아들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용히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왜 떠났느냐고요? 내가 여기에 있다가 아들을 죽이겠습니까? 아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여기서 내가 죽으면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아들로 짓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를 죽인, 죽이는 아들을 만드는 거예요.
내가 안 죽으면 못 죽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는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들은 악합니다마는 그러나 더 악한 아들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처 없이 어디 가서 죽더라도 이 길을 떠나야 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불효자 자식을 만드는 것도 때로는 부모라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삼하18:5절에 보면 이 전란속에서 계속 다윗은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하라." 이 불효자식, 이 패륜 자식을 놓고도 "나를 위해서 내 아들을 너그럽게 대하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아들이 죽었을 때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하면서 울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다린 겁니다. 이런 와중에서 돌아오기를 믿고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참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참 아들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죽은 아들 압살롬을 무한 슬퍼하여 우는 아버지 다윗, 이게 정말 복음이 되는가요? 어떻게 보면 황당한 얘기 아닌가요? 압살롬은 형을 살인하고, 계모와 근친상간 하며, 나라를 전복시킨 수괴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만약 "압살롬의 입장"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죄인을 무한 사랑해주시는 아버지 다윗은.. 복음의 복된 소식이 되는 거죠. 그리고 주변 사람을 바라볼 때, "압살롬을, 혹은 탕자를" 아버지 다윗의 눈으로 바라보는 거죠. 그러나 내가 '탕자의 형(눅15장)'과 같은 입장에 서서 '매의 눈'으로 압살롬을 바라본다면.. 그건 복음적 시각이 아닌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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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과 부모님의 사랑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그 속에 감춰진 사랑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 어머니는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감추어진 사랑을 자녀들은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비를 죽이려고 했던 아들을 위해 우는 다윗의 마음처럼 부모의 사랑은 참으로 극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형 암논을 죽였을 때 진노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던 아들 압살롬은 자기가 죽을 때 아버지가 저렇게 대성통곡할 것이라는 상상키나 했겠습니까?
자식도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고, 부모도 자식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한 가지 사실은 자식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아주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으나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지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식의 상처는 부모님을 깊이 사랑하고 섬기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자식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고통과 아픔이 마음속에 남아있어도 자식들의 작은 사랑과 섬김을 보면 그 모든 상처가 봄 눈 녹듯이 풀어지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인 우리들이 부모님의 마음을 그렇게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 자신도 우리 자식들에게 완전한 부모가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 부모님을 원망하며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작은 섬김과 효도에도 감화를 받고 태산처럼 큰 상처를 잊어버리고 사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부모님의 피와 살을 받아 태어났고 또 그분들의 극진한 보살핌 때문에 오늘과 같은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에게 상처를 준 것보다 부모님에게 상처를 준 죄가 더 크고 아픈 것임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마음에 그렇게 한이 되고 슬픔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의 할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시다가 이제야 손자에게 효도를 받으실만한 때가 되었는데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11월에 돌아가시고 저는 1월에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한 삼 년만 더 사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자식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물은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입니다.
이제 효도할 시간과 물질이 생겼는데 돌아다보니까 우리를 그렇게 길러주셨던 부모님이 그 자리에 안 계십니다. 살아계실 적에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을 그분들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어리석은 자가 우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