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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내래 죽어도 순종합네다> P10

LNCK 2023. 5. 4. 13:54

[Ep10.오디오북] 최광 선교사의 탈북자 선교 실화 | - YouTube

◈도서 <내래 죽어도 순종합네다> P10                <지난 글 보기>

◑2부 10장. 하나님이 주신 상급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배고픔에 눈이 뒤집힐 북한주민들은 
너도나도 국가 공공 재산을 훔쳐서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곧 들불처럼 번졌다. 

가장 훔치고 싶어 하는 물건은, 구리가 나오는 전기선, 변압기, 전동기들이었다. 
북한에서 구리는 중국으로 밀수에서 팔게 되면 큰 돈을 얻는 희귀한 금속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멀쩡하게 돌아가던 공장이 여기저기 뜯기기 시작하다가 
몇 달 만에 형체도 없이 해체되어 사라지기도 했다. 

북한정부는 다급해졌다. 
굶주려 독오른 무수한 쥐떼에 몰린 이리처럼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후려갈겼다. 피바람이 불어왔다. 

공공재를 훔치다가 잡힌 사람들에게 무서운 형벌들을 내렸고 
일벌백계의 차원에서 총살형까지 서슴지 않았다. 

요한이도 배가 고파 전기선을 잘라 팔아 먹다가 들켰다. 
도망가야 했다. 
잡히면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된다. 

요한이는 집으로 오지도 못하고, 그 길로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엄마에게는 어디 간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인사도 못 하고 집을 떠났다. 

그렇게 요한이는 15살부터 집을 나와 방랑생활을 하다가 중국으로 탈북 했고 
한국으로 왔다. 

요한이의 마음 속에는 늘 엄마에 대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젊어서 아버지를 잃고, 홀로 자기와 누나 둘을  힘들게 키우면서 사시던 엄마였는데 
자기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 얼마나 힘들어 하실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워낙 슬픈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다른 학생들은 북한에 부모님들을 위한 기도 시간이면 
하나님께 떼를 부리듯 서럽게 울면서 기도했지만 
요한이는 고개만 푹 떨어뜨리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요한이의 소원은 단순했다. 
아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어 늘 하늘만 쳐다보면서 
얼빠진 사람처럼 살고 있을 어머니에게 
'나 여기 한국에 와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까 
이제는 내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사시라'고 소식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나는 북한 선교 중에 발생하는 일들을 처리해주는 
채널(인적 라인)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있는 탈북출신 선교사들을 추적하고 
혹시라도 형기가 끝나고 석방이 되면,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준비해 놓은 채널이었다. 

그 채널을 통해 정용철 선생이, 온성 정치범 수용소에서 탈진으로 
소천하셨다는 소식도 알게 되었고, 
그 외에 다른 선교사 상태도 파악해 가고 있었다. 

또한 이 채널을 통해, 북한 내부의 지하교회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채널이었다. *꼭 요긴할 때만 사용

하지만 요한의 사연을 알고, 나는 채널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북한에는 중국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는 중국인 화교들이 있다. 

그들에게 돈을 주고, 중국 휴대전화로, 북한에서 한국에 전화하는 방식으로 
나는 요한이 엄마와, 요한이를 만나게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채널을 보내, 요한의 엄마를 찾아 국경으로 데리고 나오도록 했다. 
채널이 요한이 엄마를 찾아가, 요한이 소식을 전해 주고 
자기와 함께 중국 국경으로 가서, 요한이와 통화하자고 말하자 
요한이 엄마는 믿지 못했다. 

'내 아들이 살아 있다고? 내 아들이 사람을 보냈다고? 
당신이 누군데? 어떻게 내가 들을 알아?' 

채널은 자신의 신분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요한이 엄마의 선택을 기다려야만 했다. 

요한이 엄마가 신고하면 채널도 위험해 진다. 그래도 기다려야만 했다. 
다행히 요한이 엄마는, 믿을 수 없는 처음 보는 사람의 요구였지만 
믿지도 않고 그냥 돌려보내면 일생에 한을 남길 것 같아 길을 나섰다. 

북한 국경은, 군인들에 의해, 길과 열차, 자동차 등 모든 통로가 겹겹이 통제되고 막혀 있다. 
국경에 연고가 없는 사람은, 아예 통행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채널의 안내에 따라, 두더지가 땅을 파면서 전진 하듯 
두 사람은 힘겹게 겹겹이 둘러싸인 감시선들을 뚫고 
국경으로 나와 전화를 걸어왔다.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요한이 엄마는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주저앉아 목놓아 울기만 했다. 

요한이 엄마는 하나님을 모른다. 
그저 자신들의 여정에 임한, 형체없는 힘을 이렇게 표현했다. 

'글쎄 이상하게도 길이 잘 열리더라. 
마치 내가 너를 만나러 오는 길이라는 것을 누가 아는 것처럼 말이다.' 

요한이는 그 말을 듣고 울었다. 
자기 힘으로 엄마를 만나겠다고, 계획하고, 돈을 모으고 
그렇게 노력했을 때는 안 되던 일이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기도하고 성경 공부만 했더니 
하나님이 이루어주셨다. 

요한이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맡기면, 하나님이 다 이루어 주신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엄마와 처음 통화한 기쁨도 정말 컸지만 
그거 못지않게,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요한이는, 엄마가 오면 준다고, 오랫동안 힘들게 모은 돈과 
선교회에서 보태준 돈을 북한의 엄마에게 보내줬다. 

요한이 엄마는 전화를 끊고 계속 울었다.  *중국 통신 기지국 사용
산에서 전화하면서 울고, 내려가서도 울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돌아갔다고 했다. 

채널로부터 그 소식을 들은 나도 행복했다. 
'북한선교를 하니, 이런 행복도 덤으로 맛보는구나' 

다음 날부터 요한이의 얼굴이 달라졌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녀석이, 내일 장가가는 새신랑처럼 웃으면서 다녔다. 
그러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다 들으라고 자랑을 해 버렸다. 
'오늘은 우리 누나 결혼식 날이다.' 

다들 '뭔 말이야?' 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요한이는 배가 잔뜩 부른 사람처럼, 뒤로 허리를 젓히면서 설명했다. 

"내가 북한에 있는 엄마와 통화하고, 돈을 보냈거든. 
그 돈으로 엄마가 누나 결혼식 시켜 준다고 했어! 
오늘이 바로 그 결혼식 날이야!' 

▲다음 날 민혜가 나를 찾아 와서 명령하듯이 말했다. 
'목사님, 저 이제부터 주말 알바 할 거예요. 
그러니 금요일 저녁 기도 시간만 좀 빼 주세요.'  *주말은 자유시간

집도 없는 녀석이라, 교회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혼자서 생활하기에 
생계 문제는 충분히 해결될 것 같은데 갑자기 알바 라니... 

내가 따지자, 민혜는 화가 난 사람처럼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에 있는 엄마에게 돈을 보내고 싶은데, 아무리 해도 돈이 모여지지 않아요.' 

민혜도 16살 때 가난에 허덕이는 엄마를 돕고, 
감옥에 들어간 오빠를 살려보겠다고 중국으로 탈북했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도와주지 못하고, 돈도 못 벌고, 공부만 하고 있으니 
마음에 걸린 것이다. 

다른 학생들도 대부분 북한의 부모가 있고, 동생이 있다. 
알바를 해서 돈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다들 크다. 

그런데 민혜만, 통독학교 일과 시간을 빼서 알바를 하게 하면 
형평성 문제가 생기기에, 나는 허락할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보내는 돈은 선교회에서 보내 줄 테니 
알바를 하지 말고, 공부하고 훈련하는 데만 집중 하거라!' 

내가 계속 타일렀지만 민혜는 막무가내였다. 
못하게하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엄마에게 보내는 돈은 내 손으로 벌어서 보내고 싶어요.' 
나는 계속 말릴 수 없었다. 

민혜는 통독 시간 내내 졸기 시작했다. 
통독학교 일과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만 해도 
매일 6시간 이상 잘 수 없는데 
주말마다 밤을 세워서 일을 하니..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일과 외에 짬짬이 시간을 내서 
설교 준비와 말씀 암송을 해야 하기에 
아무리 강한 의지를 가지고 한다고 해도 졸 수밖에 없다. 

저 대로 내버려 두면, 공부도 못 하고, 돈도 벌고.. 몸만 망가질 것 같았다. 
빨리 알바 문제를 끝내 버려야 할 것 같아 
다시 채널을 시켜, 민혜 엄마를 데려와 전화 연결을 해 주고 
민혜에게 물었다. 

'엄마에게 보낼 돈 얼마나 벌었어?'
민혜가 힘들게 대답했다. 
'여태까지 열심히 적금을 부었는데 아직 50만 원밖에 모으지 못 했어요.' 
내가 50만 원을 보태서, 100만 원을 보내 주었다. 

▲유정이에게 혈육이라곤 북한에 있는 여동생이 유일했다. 
그가 북한에서 이집 저집 떠돌아 다니면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유정이는 마음이 찢어졌다. 

그는 여자의 몸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살아 보았기에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동생을 데려오려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통독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동생 데려오는 돈을 마련해 보려고 
TV 프로그램에 까지 나가서 울면서 호소했다. 

여러 지인들이 도와주었지만, 동생을 찾는 일은 어려웠다. 
기도 시간에 동생을 찾아 달라고, 하나님께 참 많이도 울면서 기도했다. 

그러다 요한이와 민혜가 엄마와 통화하는 것을 본 유정이는 
그 큰 눈을 뜨고 나를 간절히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힘들었다. 
북한에 있는 채널은 이런 일에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채널은 이미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정용철 선생의 생사여부를 알아보다가
일이 잘못되어 감옥에 한 번 들어갔다가 
힘들게 나온 경험이 있었기에 
한국에서 오는 부탁들을 쉽게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요한이 사정이 하도 딱 해서 시작했다가 
이 사람, 저 사람을 여러 번 부탁했기에  더 이상은 난감했다. 

주소지라도 분명한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북한땅에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여자애를 찾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정이는 간절했다. 구글지도를 검색해서 
동생이 가 있을 만한 곳은 모조리 찾아, 그림까지 상세히 그려주면서 부탁했다. 

힘들지만 채널이 한번 해 보겠다고 했다.
북한의 여기저기를 힘들게 돌아다녔지만 매번 헛수고였다. 

어떤 곳에 가면 '아직 살아 있다'고 했고 
또 어떤 곳에 가면 '이미 죽었다'고도 했다. 
동생은 생사조차 묘연했다. 

채널은 1년 동안 북한 여기저기 수소문하면서 다니다가 
드디어 동생의 행방을 찾아냈다. 

동생은 감옥에 들어가 강제노역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유정이의 마음은 달아올랐다. 

그 어리고 연약한 것이 감옥에 가 있다고 하니, 마음이 더 찢어졌다. 
동생을 꺼내려면 돈이 필요했다. 

유정이는 필사적으로 여기저기 손을 벌여, 그 돈을 만들어 채널을 불렀다. 
그러나 일이 또 터졌다. 

채널이 돈을 받으러 국경으로 나와, 한국과 전화를 하던 중 
탐지기를 들고 다니던 북한 보위부 요원들에게 현장에서 체포된 것이다. 

나(최광 목사)는 힘들었다. 
유정이의 동생을 찾으려고 하다가 
정말 소중한 채널의 생명이 위태로워졌다. 

그를 감옥에서 꺼낼 수 있는 백방의 방법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중국에 있는 화교 라인을 총동원 했고 
많은 돈을 써서 가까스로 건져냈다. 

채널은 감옥에서 나왔지만 
북한에 옷과 약을 들여 보내던 일들은 몽땅 엉망이 되고 말았고 
지하교회를 후원하던 계획도 틀어졌다. 

선교회는 한동안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감내해야 했다. 
채널은 더 이상 유정이 동생 문제에 손을 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감옥안에서 몸도 마음도 많이 상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일은, 노력하면 그런대로 풀려 나가는데 
유정이 동생은 왜 이렇게 풀리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동생이 감옥에서 나온 정처 없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그러면 또 다시 행방을 알 수 없게 된다. 

유정이 동생 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유정이는 힘들어했다. 잔뜩 희망을 가졌다가 
눈앞에서 동생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더 힘들어 했다. 

사모가 유정이를 위로했다. 
'유정아, 이렇게 생각해 보자. 네가 만약 동생이 한국으로 왔다면, 
너는 아마 이 공부를 못 했을 거야. 

정숙이를 봐라. 중국에 있는 언니가 한국에 오게 해 달라고 생떼를 써서 
목사님이 데려왔더니, 결국 언니 때문에 통독을 그만두게 되지 않았니?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이 훈련을 이해하지 못 한단다. 
네 동생도 한국에 오면, 네가 이런 훈련을 받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응답을 뒤로 미루실 때도 있단다. 

때로는 없는 것이 더 큰 은혜이고, 
그것 때문에 더욱 더 강해진단다. 

지금 너는 집이 없기에, 한 번도 뛰쳐나가지 않고 잘 버티지 않았니? 
다른 애들 봐라. (나라에서 임대주택) 집이 나오니까 조금만 힘들어도 흔들리고 
쉽게 뛰쳐나가고 하지 않니?' 

유정이는 아픔을 은혜로 바꿨다. 
혼자서 길거리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도하는 것을, 황금종교회 탈북 청소년들과 통독반 학생들이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유정이는 지하철에 다니면서도 전도 했고 
노숙자들에게도 서슴없이 다가가 돈을 나누어 주면서 전도했다. 
나는 유정이의 마음 속에 강한 힘으로 임재해 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정말 그랬다. 
처음부터 통독반 학생들은, 힘들게 이 훈련을 하기로 결단 했다. 

그러나 세상의 시간표는, 이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대학교를 가야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도달하는 스펙을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을 두드리는 세상의 이 음성을 

한순간의 감동이나 흥분으로 결단하고 거부할 수는 있지만 
1년 내내 지속적으로 거부하기란 
참으로 길고, 긴 참음의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었다. 

많은 탈북청소년들이, 세상이 들이미는 이 요구 앞에서 탈락하고 
통독 학교를 떠났다. 

거기에다. 세상의 악한 영이 수시로 학생들의 마음 속에 불어넣는 
분노, 미움, 질투 들과 싸우면서 성경공부를 이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지막 끝까지 견디어내고, 이 훈련을 끝낸 일곱 명의 학생들에게 
하나님은 약속대로 상을 주셨다. 

그렇게 꿈에라도 보고 싶었던 어머니를 만나게 했고, 
해결할 수 없어서 늘 울어야 했던 돈도 (북한에) 보내주었다. 

이것뿐만 아니었다. 이들 전원이 필리핀으로 다년간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만 상급을 주신 것이 아니었다. 
1년 동안 정말 헌신적으로 이 사역에 동참해 오신 분들에게도 
영적, 물질적인 많은 상급을 허락하셨다. 

영지 집사님은 이 사역에, 정말 많은 수고와 헌신을 하신 분이었다.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이다 보니 
유명한 강사들이 자주 와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김광신 목사님도 두 번씩이나 오셔서 
율법과 복음, 성령론을 강의 하셨다. 

만나기 쉽지 않은 기회였기에 
그때마다 학생들은 식사 당번에서 제외시키고, 강의만 듣게 하였다. 

대신 사모와 영지 집사님과 전도사님들이 식사 봉사를 해야 했다. 
특별히 유명한 강사들이 올 때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와 
그런 날에는 수십명의 식사를, 한 주 내내 교대도 없이 해야만 했다. 

이 분들이 보이지 않게 감당하는 일도 많은데 
이 때는 아예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학생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학교이고 
늘 자금 사정이 열악하기에, 따로 일하는 분을 둘 수 없었다. 

나와 사모는 사명이니 어쩔 수 없었고 
다른 전도사님들은, 직분이니 감내해야 했지만
영지 집사는 평신도 라서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그 힘든 식당 일을 1년 동안 맡아 주셨다. 

학생들이 암송 하러 나간다고.. 식당 당번 일을 못 한다고 하면 달려오고.. 
운동하러 나간다고 하면.. 또 달려 와 밥을 해주었다. 

영지 집사는 늘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나한테서 무엇을 예쁘게 보시고, 여기에 나를 데려다 놓으셨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이 자리에 함께 있게 해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요.' 

영지 집사님은 소문이 자자한 약골이었다. 
누가 봐도 여린 몸은, 힘든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란 걸 쉽게 짐작하게 했다. 
영지 집사의 대학교 다니는 딸이, 도무지 믿지 못한다고 했다. 

딸이 푸념 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엄마, 친구들이 요즘도 나를 만나면 인사가 어떤 줄 아세요? 
'엄마 건강은 어떠시니? 몸은 좀 나아지셨니?' 이렇게 물어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해요. 
"집에서는 누워 계셔. 그런데 선교회에서 전화만 오면 벌떡 일어나 나가셔!
나갔다 들어오셔서는 '오늘은 30명 분 식사를 만들었다
다음날은 50명분 식사를 만들었다'고 자랑하는데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선교회에서는 오히려 영지 집사가, 병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못 했다. 
항상 보면, 선교회의 구석구석을, 전문 청소업체 사람처럼 쓸고 닦고 정리하고, 
식당에서는 큰 가마솥도 번쩍 들어 옮기면서 
힘센 남자들처럼 일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영지 집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그 무거운 솥을 어떻게 번쩍들고 
그 많은 양의 밥이랑 반찬이랑 어떻게 해내는지.. 내가 봐도 내가 신기해요. 

그런데 여기 오기만 하면, 하게 되고 
하고 나면, 주변에서 또 잘한다고 그러네요.

저는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쓰시네..' 
정말 놀랍고 신기해요. 

이게 내 힘이 아닌 것이, 어쩌다가 다른 곳에 가서 이런 식으로 한 번 일을 하면 
나는 몇 달을 앓아누워야 해요. 
내 몸 갖고는 절대로 이렇게 일을 할 수 없어요. 
이건 정말 내 힘이 아닌 것이 분명해요!" 

영지 집사는 행복해 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그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은, 어느새 깊이 사귀어 있었다. 

◑2부 13장. 벅찬 열매 

2013년 7월 1일부터 시작한 <GMI 탈북민 성경통독 100독 학교>는 
2014년 9월 7일 1기생들을 졸업시켰다. 

김광신 목사님이 졸업 예배를 인도하셨고 
많은 지인이 와서 첫 열매들을 축하해 주었다. 

7명의 1기 졸업생들은, 졸업예배 뒤에 그동안 이 학교를 섬겨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의 답사를 했다. 

답사에서 에스더는 이렇게 고백했다. 
「김광신 목사님과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건강도 안 좋으신데, 항상 기도로 우리를 섬겨 주시고 
모든 일 가운데 먼저 우리를 생각해 주신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1년 동안 통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목사님과 사모님이 있었기에, 
그리고 기도가 있었기에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최광 목사님과 사모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연약한 우리를 강한 용사로 키워 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한 말씀 한 말씀 하실 때 마다 우리는 성장했고, 
우리가 무너질 때마다, 우리가 약해질 때마다 기도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함께 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모님, 어떤 날은 힘들기도 하고, 아픔도 있었고, 
정말 쉬고 싶은 날도 있으셨지만 
항상 그 모든 것을 내려 놓으시고 우리를 섬겨주셨습니다. 
말로 다 할 수는 없지만, 정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우리에게 항상 밝은 웃음으로 섬겨주신 
집사님들, 권사님들꼐도 정말 감사합니다. 

통독반 선생님이셨던 최순교 선생님과 김성근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속도 많이 태우고, 많이 마음 아프게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두 분은, 그 모든 것을 항상 사랑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이 모든 분의 사랑 속에서, 저는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제 상처가 너무 싫었고, 늘 불편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상처가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상처를 준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고, 그를 품을 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저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것을 통해서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난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유정이는 이렇게 답사 했다. 
「지금까지 함께 해 주시는 김광심 목사님과 사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을 통하여, 어떻게 섬겨야 하고,
세계선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항상 우리의 옆에서 큰 힘이 되어 주신 목사님과 사모님, 감사드립니다. 

우리 최광 목사님과 사모님, 정말 존경합니다. 
가끔은 팍팍 쏘는 말씀으로 내몰기도 하시고 
또 끝이 없을 것 같은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누구도 저를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목사님만은 막무가내로 항상 인정해 주시고 세워 주신 덕분에 
조금이나마 제가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영적으로 충만한 지 못하고 지쳐 있을 때에는 
부담스럽지 않은 마음과 눈빛으로도 응원해 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계단이 되어주셨습니다. 

처음엔 바퀴벌레와 잠을 자야 하고 
거의 매일 술 먹고 난동부리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밤중에도 칼 들고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잠을 자다가도 새벽에 일어나 마음 조렸고, 

통독시간에는 잠과의 전쟁, 서로 부딪치는 영적전쟁까지 
하루에도열두번 짐 싸고 싶었던 날들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이 붙들어 주신 은혜 덕분이지만 
우리 목사님이 없었다면 이미 포기하고 나갔을 것입니다. 

제가 목사님께 미안한 마음에 '목사님 죄송했습니다' 하고 사과 드리면 
'내가 너희에게 더 미안하다'고 도리어 사과하시던 목사님의 모습은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저도, 저를 죽이는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목사님의 뒤를 이어 
쓰러져가는 한 영혼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거의 매일 우리를 위해 영적 싸움을 하시면서, 중보기도를 해 주신 
우리 사모님께 정말 감사합니다. 

불평불만 하는 모습 하나 없이,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 감동을 주셨던 사모님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교회 사모님이시지만, 자신의 부끄러운 것들을 스스럼없이 나누며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모습들을 보여 주시는 것을 보면서.. 도전받았습니다. 

컨퍼런스나 교회 큰 일이 있기 전에는
먼저 영적 전쟁을 한 번씩 치르시는 우리 사모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통독반 선생님으로 함께 해 주신 김성근 목사님, 최순교 전도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성근 목사님은 어쩌면 제 삶에 여러가지로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준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덕분에, 좀더 넓은 시야로, 세상과 사람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최순교 전도사님, 그동안 죄송한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통독반에서 잠이 제일 많고, 준비도 항상 늦게 하며, 느릿느릿한 저에게 
가시처럼 다가와 찔러 주셨습니다. 찌르는 역할을 하실 때마다 전도사님은 
'사람 마음 상하게 하는 은사 라도 받으셨나?' 싶을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야 깨달았습니다. 
통독반의 학생들과 부딪치고 미운까지 사면서 사역을 진행하시는 
방패 같은 전도사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전도사님 덕분에, 저희는 조금씩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향한 전도사님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들을 보면서 
따라 배우게 되었습니다. 

1년간 함께 해 주신 두 분 선생님,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함께 울고 웃으며, 1년이라는 전쟁 같은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신 전도사님, 집사님들과 
함께 섬겨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요한이는 답사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가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를 안을 수 없었고 
저도 누군가에게 안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분들은 
이런 저를 품어주셨습니다. 기도로 눈물로 섬겨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상처만 주고, 못난 모습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고, 항상 응원해 주었고 
조금이라도 아파는 것 같으면 약을 챙겨 주었고 
병원에 같이 가 주었고, 기도 해주었고, 밥도 사 주시면서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동안 받은 것들을 일일이 표현할 수 없고 
또한 고마운 마음도 일일이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저는 변화되었습니다. 

뒤돌아보니 저는 참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기억을 가지고, 저도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이 감사한 마음,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허리 굽혀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학생이 답사를 하면서 울었다. 
답사를 듣는 나도 울었고, 전도사들, 집사님들도 울면서 들었다. 

나는 행복했다. 1년 전 처음 통독 학교를 시작할 때는 
27명의 탈북청소년들이 모여 와 이 힘든 훈련을 끝까지 마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대부분 도중에 탈락했다. 
고된 훈련은 오랫동안 채를 치듯이 한 사람씩 걸러내 
7명의 졸업생들을 남겨 놓았다. 

정말 하나같이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처음 통독 학교를 시작할 때 30명을 보내 달라고 나는 기도했다. 
그 중에서 세 명이 북한선교의 비전을 잡고 헌신자가 된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다섯 명 남으면 대박이고, 7명 남으면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일곱 명의 청년들이, 신약 백독, 구약 20독을 했고 
수백 절의 말씀을 줄줄 외우고 있다. 

매일 5시간씩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친밀감을 경험했다.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감사하는 자들이 되었다. 

나 살기에 급급하던 이들은, 자기 손을 펴서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 교회를 섬기기 시작했고 
사람들을 섬기는 기쁨 을 아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제 이들은 어디에 내놔도 현역 사역자들 못지않게 설교하고 
기도 인도하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 

▲2013년 11월에 <GMI 탈북민 성경통독 100독 학교> 학생들이 
필리핀 마닐라 지구촌교회에서 집회를 한 것이 소문이 났다.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하나님의 벗 교회> 초청으로 
2차 필리핀 컨퍼런스를 떠났다. 이번 집회에는 특별히 1기생 졸업생들을 강사로 세웠다. 

여태까지는 교회 안에서 설교 했기에 
좀 실수해도 관대하게 봐 주었고 대견해 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아니다. 

이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고 
은혜를 끼쳐야 만했다. 

거기에다 집회 오시는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필리핀에서 일생을 선교사로 헌신하면서 살고 계시는 분들이었다. 
전문 설교자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은혜를 끼쳐야만 했다. 

1기 졸업생들은 다들 떨고 두려워했다. 요한이부터 설교를 시작했다. 
요한이는 근심이 많았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요한이는 마1:31~33절 말씀으로 설교를 했다. 

침착하게 말씀을 봉독하고 풀어나갔다. 
이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목사님이 와서 설교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한이는 설교를 통해서 이렇게 말했다. 
「주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고 복음을 전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에 
주님의 말씀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고 따라 간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에 온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았던 2년과, 통독 훈련하면서 지낸 1년은 분명하게 다른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지낸 처음 2년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온 세상에 제가 홀로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돈을 벌어 가족들을 데려와,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다시 돈을 벌기 위해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몸으로 하는 일은 어떤 일이든 다 자신이 있었거든요. 

열심히 성실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살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메말랐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기계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노가다 판으로 들어갔습니다.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일을 하면, 외롭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일을 했지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돈을 받기 위해서 또 일을 해야 했고, 그렇게 점점 얽매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돈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좌절하고 교회로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3개월 후부터 말씀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내게는 이렇게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처만 주셨는가?' 

제 고통에,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불렀다. 지금 북한에는 나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에게 나를 알게 하려고 너를 불렀다.' 

하나님은 이어서 제게 비전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비전을 받고나자, 처음에 가지고 있던 부자가 되고 싶었던 꿈을 
저는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는 하나님이 보여준 길을 따라, 힘들어도 인내하면서 걸어나갔다. 
그러자 그가 원하던 일들이, 하나씩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다. 
결국 '사람이 계획을 하더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한이의 설교는 화려하지 않았다. 특별한 사건을 전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에서 나타났던 사실을, 꾸밈없이 그대로 전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자기와 함께 살아 왔던 하나님을 담담이 전했기에 
요한이를 인도하시던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도 만지셨다. 

▲뒤이어 유정이, 에스더, 민혜가 설교했다. 
이들의 설교를 듣고 30~40년 동안 필리핀 현지에서 선교사역을 하시던 
선교사님들이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는지, 나에게 와서 질문들을 퍼부어댔다. 
'저들이 도대체 19살, 21살, 22살 짜리들이 맞나요? 
정말 1년 동안 훈련받은 사람들이 맞나요? 
저 청년들이 정말 탈북자 인가요? 
어떻게 탈북자들이 말씀을 저렇게 깊이 있게 깨달을 수 있고, 또 전할 수 있나요?'

집회가 3일째 되는 날 김인효 선교사님이 찾아왔다. 
김인효 선교사님은 필리핀 군선교를 하시는 분이었다.

필리핀 사람들 대부분이 천주교인들이다. 
이 때문에 필리핀의 군부대 안에는 개신교회가 없었다. 

김인효 선교사님은 필리핀 참모총장의 도움으로 
필리핀 군대 내에 2개의 개신교회를 개척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군선교를 하셨던 분이고 
현재도 <한국 군선교회> 와 연합으로 필리핀 군선교를 개척 하시는 
큰 사역을 하시는 분이었다. 

이 분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 김인효 선교사님이 나에게 제안을 했다. 
'선교사님, 우리 마닐라에 1,500명 한인 선교사가 있는데 
지금까지 십수년을 연합으로 같이 부흥집회를 하자고 했지만 한 번도 못 했습니다. 

모든 분이 하자고 하고, 또 하는 것이 당연한데 
아직 구심점이 없어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열방빛선교회>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좋다고 했다. 김선교사님 마닐라 지역 선교사 협회 부회장 이었으며 
12월에 회장이 되신다고 하셨다. 

12월에 회장으로 취임하신 후, 김인효 선교사님은 이 문제를 
협의회 정식 안건으로 제출하여 합의를 보고, 다시 나에게 알려 왔다. 

연중 행사에 우리팀과 <마닐라 한인선교사 연합회>와 공동 주최로 
집회를 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했다. 

4명의 탈북자들의 설교가, 십수 년 동안 굳어져 있던 
<필리핀 마닐라 지역 한인선교사 협회>를 움직였다. 

정광은 목사님이 섬기시는 <하나님의 벗 교회> 권사님은 
자기 집에 이들을 모두 데려다 대접까지 하면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와서 말씀과 찬양을 통해 은혜를 나누어 달라고 초청했다. 
그 권사님의 동생분은, 어려서는 교회를 다녔지만 그동안 멀리하다가
이번 집회를 통해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첫사랑이 회복된 기쁨에,
자주 1기생들을 찾아와 음식도 대접 하고, 여러 가지로 후원하기 시작했다. 

'안티폴로 지역 선교사 사모회 회장'은 
자기들에게도 와서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없냐고 했다. 
여기저기서 초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기생들의 설교에, 2기생 탈북청소년들도 은혜를 받았다. 
그들은 여태까지, 탈북자가 당당하게 많은 목사님 앞에서 
설교도 하고, 초청도 받을 수 있는 신분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다가 
현장에서 모든 것을 목격했다. 충격이었다. 

거기에다 한국 목사님들의 설교를 그렇게 많이 들어도 감동하지 않던 이들이,
1기생들이 하는 설교는, 처음부터 마음을 열고 들었고, 은혜를 받았다. 

북한사람들은 북한사람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2기생들은 자기들이랑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의 설교라..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오히려 요한이가 설교할 때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의 설교라, 더 잘 들었고 
에스더, 민혜, 유정이가 설교하는 것을 보고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역시 '북한선교는 북한 사람이 해야만 했다!'

집회가 끝나고 원준형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올 때와 갈 때가 완전히 다릅니다. 
올 때는 여행 가는 기분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엄희원 형제의 설교를 듣다가, 지금 내가 방황하는 것과 
똑같은 갈등을 형제도 했지만, 
말씀통독을 하면서 받은 은혜로, 그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나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체험은 처음입니다. 

나는 이제 막 통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한국 가서도 이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영미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필리핀 컨퍼런스에서 받은 은혜는,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기도하고 찬양 팀으로 섬기면서 찬양할 때, 큰 목소리로 하고 싶었는데 
그 정도밖에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통독반 1기생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황금종교회 많은 청년들이 성경통독을 결단하고 들어왔다. 

또한 1기생들이 졸업하기 전, 얼마 함께 생활했기에
2기생들의 모든 일과가 순조롭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집회가 끝나고 <GMI 성경통독 100독 학교> 1기생들과 2기생은 
필리핀에서 서로 헤어졌다. 

1기생들은 영어연수를 하기 위해 필리핀에 남았고 
2기생들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헤어지면서 서로 울었다. 
짧은 시간 동안 함께 훈련 받았지만, 참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기에 
어느 새 깊이 정들었던 것이다. 

에스더는 2기생들이 돌아간 후, 한 달 생활비를 모아 
필리핀 특산물인 꿀과 깔라만시(방울 레몬) 몇 박스를 사서 그들에게 보냈다. 

하나님은 필리핀에 남겨진 1기생들에게 특별한 지혜를 주셨다. 
처음 영어연수를 시작할 때에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영어 단어는 
오케이가 전부였다. 선생님이 어떤 질문을 해도 OK 라고만 대답했다. 

답답해하던 영어선생이 오케이 말고 다른 말도 좀 해 보라고 해도 
OK 라고만 대답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이들은 영어로 서로 대화를 시작했고 
선생들과 영어로 장난을 치고 농담을 하면서 놀았다. 

영어로 대화하다가 막히면, 영어가 안 된다고 막 스스로 화를 냈다. 
에스더는 김해석 선교사님이 다른 사람들과 말할 때는 영어로 말하고 
자기와는 한국어로 말한다고 마음 상해 했다. 

김해석 선교사님은 1기생들의 필리핀 영어연수를 책임지고 인도하시는 분이었다. 
그 후부터는 에스더가 밤 잠을 자지 않고 영어공부만 했다. 

내가 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다듬어지려고 영어를 배우는 것이지 
영어공부가 최종 목적이 아니라고' 달랬다. 

그제야 에스더는 영어공부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 후 기적이 일어났다. 

죽으라고 영어공부만 할 때는, 잘 안 되던 영어가 
다시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면서 공부하니.. 더 쉽게 잘 되었다. 

곧 에스더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처음 필리핀에 왔을 때, 1기생들은 김해석 선교사님이 
영어로 설교 하기도 하고, 즉석에서 통역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했고 감탄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자, 1기생들도 교회 주변에 있는 필리핀 청년들과 함께 
영어로 대화하면서 편안하게 어울려 교제했다. 

선교사님도, 필리핀 영어선생들도 놀라워했다. 
'도대체 이런 학생들을 처음 보았다고.. 이해할 수 없다' 고 했다. 

이들에게는 이런 힘이 있었다. 
이들은 중국으로 탈북 했을 때에도, 중국어를 사생결단 하고 배웠다. 

또한 보통 사람들은 영어를 배우고, 상대방과 말을 할 때 
문법적으로 옳은지/ 틀린지 재보고, 자신 없으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틀리든지 말든지, 중국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중국어를 배울 때처럼, 냅다 떠들어 버리고, 틀리면 그때마다 수정하면서 
영어를 배웠다. 

거기에다 영어가 안 된다고.. 저녁 기도 시간마다 하나님께 떼를 쓰듯 
매달리면 기도 했기에, 실력들이 빨리 늘었다. 

한국에서도 좋은 일이 생겼다. 2기생 통독 학교 학생들은 
더이상 습하고 공기가 탁한 영등포 지하방에서가 아니라 
경기도 포천에 있는 기도원에서 통독훈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도원을 1년 동안 사용하기로 계약이 된 것이다. 

▲필리핀에서 공부하는 1기 통독반 학생들은 
주말이면 유정이가 보낸 헌금으로 지은 
땅바칼 교회를 찾아가 봉사했다. 

1차 필리핀 컨퍼런스 때,  땅바칼 교회는 지붕만 간신히 가린 
뼈만 앙상하게 남은 교회였지만 
유정이가 보낸 헌금으로, 벽도 막고 방도 만들어, 정식 교회건물을 갖추었다. 

그곳에서 주말이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했다. 

1기생들이 온 후 땅바칼 교회에서도 
13살 이상 아이들이 하루 3시간씩 성경통독을 하기로하고 
'GMI 필리핀 Youth 영어성경 통독반'을 만들었다. 

1기생들은 성경통독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기에 
성경통독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필리핀에 와서도, 한국에 있을 때 통독 시간에 졸면서 보낸 시간이 
제일 아깝다고 후회했다. 

에스더는 필리핀으로 오면서, 자기의 전재산인 400만 원 전부를 헌금 했다. 
그 돈으로 필리핀 현지 교회에서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던 건물을 리모델링 하기로 했다. 

그곳은 <GMI 필리핀 청년 성경 통독반> 학생들의 통독학교로 사용된다. 
에스더의 헌금으로, 필리핀 청년들로 이루어진 
영어성경통독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이들은 금방 영어와 성경에 능통해질 것이다. 
그러면 이들이 다시 필리핀 청년들에게 성경통독을 인도하고 
성경을 가르칠 것이다. 

▲성경 통독반 1기생 들에 대한 소문은 필리핀에서 한국까지 날아왔다. 
CBS 기독교방송 <새롭게 하소서>의 프로그램 담당자가 
통독반 학생들과, 방송을 통해 은혜 나누고 싶다고 요.청이 왔다. 

마침 요한이가 아파트 문제로 한국에 들어왔기에 
2기생 은정이 함께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은정이와 요한이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한 간증과 
통독을 통해서 받은 은혜를 나누었다.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지만 
특히 CGN TV 에 <통일의 북소리>를 담당하고 있는 
박성현 작가님이 많은 은혜를 받고 나에게 말했다. 

「여태까지 많은 북한선교사들을 만나봤고 그들의 간증들을 들었습니다. 
모든 분이 하나같이 북한 사람들이 
무슬림과 이스라엘과 세계복음화를 감당해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듣긴 많이 들어도, 어디에서도 그런 기미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한 요한이의 간증을 듣고 
'바로 저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성경에 능통하고, 영어에 능통하게 되면 
그런 일이 시작될 것이 보입니다.」 

박성현 작가는 통독반 1기생들이 <은혜동안>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도착하는 날로 촬영 일정을 잡고 <통일의 북소리>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했다. 

촬영이 끝나고 그곧 스태프들도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20대 초반밖에 안된 아이들이 
화장품이나, 명품 옷이나 탐할 나이의 아이들이 
'오직 주만 바라 보겠다'고 하고 
'세계 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하니 놀랐습니다. 

웬만한 목사님들도 하기 힘든 말을 
저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선포하네요. 참 놀랍습니다!」 

▲1기 통독반 탈북청소년들의 모습에 
도전받고 충격받은 많은 필리핀 선교사님들이 
필리핀에도 <성경통독학교>를 세우기로 마음 먹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성경통독 1년을 마치기 바쁘게 
이들을 통해서 사방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이제 이들이 영어까지 배우게 되면 
필리핀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성경통독 학교의 지도자들로 활동을 것이고 
말씀과 통독을 가르칠 것이다. 

그러면 사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읽고 깨달아 
삶이 변화되는 일들이 들불처럼 번져 나갈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6개월 동안 영어연수를 시키고 
2년제 정식 전문대학교 에 보내려고 한다. 

그러면 미국이나 영국의 어느 대학이든 정식 편입이 된다. 
이들이 앞으로 신학과정까지 마치고, 완전한 사역자로 서게 되면 
하나님이 이들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소중하다. 1년 동안 성경 통독 100 과, 오랜 기도와 훈련을 통해 
변화되고 다듬어진 이들은 
하나님의 절절한 심정과 뜻을 분명하게 아는
금처럼 소중한 씨앗들이다. 

나는 이들을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북한선교의 일꾼들'로 키우려고 한다. 
앞으로 이들의 뒤를 따라 수많은 탈북민 청년들이 거듭나서
북한선교의 일꾼들로 세워져 갈 것이다. 

북한 선교는 바로 우리 옆에 있었다. 
우리가 손을 내밀자, 그 문은 천천히 크게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