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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재해석

LNCK 2023. 5. 5. 19:34

165-14 기독교 신앙의 재해석- : 네이버 블로그

◈기독교 신앙의 재해석      요16:5~14      2018.08.05

◑기독교 신앙은 지난 2000년을 지내는 동안에 여러 번 
재해석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무도 재해석이란 말을 사용하려 하지 않고, 
또 지금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제대로 생각을 해보면 
재해석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그런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1. 그 첫번째 사례는 사도행전 2장 사건입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기독교가 공식으로 탄생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기독교라고 부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이 기독교를 창시하셨다고 말하기보다는 
제자들이 기독교를 창시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하고 떠나가셨고 
베드로가 성령을 받은 후에 교회가 태동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수많은 가르침을 생략하고 
그 대신 말하기를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얻는다.. 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해석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2. 또한 사례는 바울이 기독교를 이방인에게 전하면서 
다시 한 번 기독교를 재해석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유대교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유대교 율법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먼저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되느냐?’ 라는 문제가 
대두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분명하게 규정하기를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여기에서 바울의 유명한 신학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라는 신학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방인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는 아직 대두되지 않았던 문제가 
세월이 변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필요하게 되었고, 
기독교가 재해석됨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3. 중세와 근세를 건너뛰고 20세기로 건너왔을 때에도 
기독교 신앙은 여러번 재해석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와중에 한 예가 <20세기 복음주의 Evangelical>의 등장입니다. 
20세기 복음주의는 이전에 소위 주류 개신교 신앙과는 다른 
더 대중적이고, 이해하기 쉽고, 구원을 실감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거듭남’을 강조했어요.

(복음주의 운동의 4가지 특징은 
1) 믿음과 실천의 유일하고 최고의 규범으로서 성경이 가지는 완전한 권위, 
2) 성령으로 거듭남의 필요성, 
3)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한 하나님과 화해, 
4)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할 책임)

그러나 이전에는 달랐어요. 이전에는 ‘영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고, 
‘회심’을 강조하지 않았고, 기독교 집에서 태어나면 기독교인이요. 
기독교 문명에서 살면 기독교인이라고 여겼는데, 

복음주의가 등장하면서 
설사 부모가 목사라도 당사자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다
라고 가르치면서 기독교를 더 쉽게 널리 전파하는데 기여한 것입니다. 

▲4. 그리고 20세기 성령운동, 은사주의도 기독교의 재해석이라 볼 수 있죠.
그 이전에는 기독교 신앙이 교리에 매달리고, 예식에 매달리고, 
이성에 의존했는데 

성령운동, 은사운동을 통하여 
강력한 성령체험, 영적인 경험에 의존하는 체험적인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현대 물질주의로 가슴이 차가워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뜨겁게 경험하게 하고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기초한 믿음을 심어주는데 기여한 것입니다.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령운동, 은사운동이 
기복신앙이나 번영신학과도 쉽게 접목되어 나타났는데,
이게 신학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이것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크게 어필했다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재해석 작업이 먹혀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관심사는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앞으로도 재해석을 거치게 될 것냐 하는 것이고 
어떤 재해석을 거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질 위험이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인류의 현실은 엄청나게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기독교가 세상의 변화와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사람들과 상관이 없는 박물관에 갇혀져 있는 것 같은 
과거의 유물로 변신할 수 있어요. 

인류의 변화에는 맘에 드는 변화가 있고, 맘에 들지 않는 변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시한다고 
그 변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인류의 변화에 대하여 
기독교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아무 상관이 없는 분이 되버릴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책임 될 것입니다.

몇일 전에 워싱턴포스트지를 보니까 인터넷 게이머들을 위한 
온라인 교회를 하는 목사님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2018년에는 이게 미미했지만, COVID-19 이후로는 확산되고 있죠)

예수님은 양의 목자시기 때문에 
양들이 있는 곳이라면 목자가 찾아가야죠. 

◑신앙을 재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성령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놀라운 것입니다. 
본문 요16:7절에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보혜사란, ‘곁에서 도우시는 성령’을 일컫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떠나가신 (승천하신) 것입니다. 

떠나가시고 대신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어떤일을 하시겠다고 했느냐면 
12절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유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 라고 했습니다. 
장래 일을 누가 알린다고 했습니까? 성령이 알리신다고 했습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다시말하면 성령이 장래 일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나가 
임의로 성령 당신의 생각을 전하는게 아니고, 
예수님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래서 ‘내가 아직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으나 너희가 당당치 못하리라’ 
이 구절은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에만 있는 구절이에요.

신약성경에 다른 저자들이 이 구절을 읽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합니다. 이건 놀라운 일이에요.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이땅에 계실 때, 
미처 말씀하지 못했던 것을 이후에 성령을 통하여 알리실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딱딱한 화석이 되지 않고, 박물관에 쳐박혀 있지 않고 
살아서 역사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성령 때문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과거에 이성주의가 팽배하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백년만 지나면 기독교는 박물관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어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줄 것이 없으리라고 말했어요. 

그건 기독교를 알지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딱딱한 돌에 새겨진 게 아니에요. 

기독교신앙은 살아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심이 지난 2000년동안 기독교 신앙은 성장했고, 부흥했고, 
더 많은 민족에게 전파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리고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더 좋은 면이 드러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성령의 역사로, 계속 재해석되어 갈 것입니다.

마치 찬송가에서 OH HAPPY DAY를 뽑아내었던 것처럼 ‘재해석’될 것입니다.
OH HAPPY DAY 라는 찬양곡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영화 SISTER ACT에도 소개가 되었고, 국내에도 인기가 있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원래 찬송가 209장을 편곡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찬송가 209장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기쁜날 기쁜날! 
원래 찬송가는 그렇게 인기 있는 곡이 아니었고,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곡이 아니었는데, 
이 곡에서 OH HAPPY DAY를 뽑아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목자이시기 때문에 양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찾아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양이 어떤 사람이든, 양이기 때문에 
목자되신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가시길 원하시고 부르길 원하시고 
그들의 상황이 있는곳으로 들어가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과거에도 그리하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앞으로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수 없지만 
종말의 때까지,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 하는도다!” 

그 말은 종말의 때까지 땅에는 성령과 교회가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성령과 교회는 예수님 오실 때까지 
이 땅에 존재할 것이고, 예수님의 나라는 무궁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하십시다.


◑종교의 미래
https://blog.naver.com/karamos/222102366455
 
예수께서는 장차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일어날 것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핍박에 대해서는 경고하지 않으셨습니다. 
핍박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더 강건하게 할지언정 무너뜨리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핍박을 받으셨고, 베드로든, 바울이든 핍박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핍박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문제는 그것은 별개고, 
이것은 우리가 깨어서 경계해야 될 부분이고, 
기독교가 올바로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되는 부분입니다. 

이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종교의 옷을 입고 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성이라던가, 과학이라던가, 인류발전 이라던가 
이런 명분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이미 우리는 여러 번 이런 위협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19C의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기독교 신앙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존재가 아니고, 
유인원의 진화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논리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신앙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한번은 인류가 겪어야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교회는 더 깊이 생각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었고, 그 과제는 이제 어느 정도 완료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진화론>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줄어들었습니다.

또 20C 초에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도 
많은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흔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이 정말 계시기 때문이 아니고 
인간 내면의 심리적인 현상 때문이다. 내 심리적인 필요에 의해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를 믿게 된 것이다.”라는 논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흔들리게 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기독교가 홍역처럼 앓고 이겨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프로이드의 이론 역시 이것 때문에 못 믿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제 적어졌습니다. 

또한 칼 막스의 <공산주의 이론>도 기독교 신앙을 흔들었죠. 
천국을 가르치는 것은 노동자들을 기만하는 것이고, 
하늘나라가 아닌 이 세상에 노동자의 낙원을 만들어야 된다는 논리는 
이상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을 떠나가게 만들었어요. 
스탈린이 젊었을 때 신학교육을 받았지만, 공산주의자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인류의 미래가 하늘나라에 있느냐? 땅에 세울 것이냐?”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토론하는 주제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뿔이 달린 얼굴로 삼지창을 들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귀의 유혹은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으로 접근합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생각으로 접근했습니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죠. 철학은 철학일 뿐이죠. 
어떻게 그것이 신앙에 위험이 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렇게 생각하는 분은 유혹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살의 충동을 받아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하나님은 없으니 저 사람을 죽이고 너도 죽어라.“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출해서 폭력조직에 가입하는 애들에게 두목이 뭐라고 말하냐면, 
“너의 아버지는 너를 버렸으니 내가 이제 너의 아버지다.”
아주 그럴듯한 철학입니다.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범죄자들이 스스로 변명하기를, 
“사회는 나를 버렸으니 나도 사회를 버리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철학적인 논리가 깔려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시험도 그렇게 옵니다. 

이 시대의 거짓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은 아마 ‘댄 브라운’입니다. 
‘댄 브라운‘은 <다빈치 코드>라던가 <천사와 악마>같은 소설을 쓴 사람이에요. 
거짓 선지자의 특징 중의 하나는 굉장히 영리하고, 아는 게 많고, 
특별히 기독교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고, 
기독교인들보다도 더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고, 
기독교인들의 맹점을 잘 간파하고 있습니다. 

‘댄 브라운’은 종교를 대놓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현재 종교들은 다 사라지고 미래의 종교는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댄 브라운’이 종교의 미래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런지는 
그 책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종교의 변질, 앞으로 종교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하게 될지는 
이미 조짐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종교는 어떤 식으로 변할 것이냐?

1) 첫째는, 자기 계발의 노하우 식으로 변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강사가 누군지 아십니까? 
자기 계발에 대해서 강의하는 사람입니다. 
수 천, 수 만 명의 관중을 쥐었다 놨다 합니다. 

그 내용이 뭐냐?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잠재력을 계발시킬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자신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느냐? 

그런데 과거에 많은 교회들이 그런 식의 메시지를 전한 데가 많다는 사실이에요. 
번영 신학이라던가, 소위 Healthy Wealthy Gospel 이라던가, 
긍정적인 사고, 노먼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 그들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사고를 가르침으로 어필했는데, 그것이 첫 번째고.

2) 두 번째 종교가 어떤 식으로 변질할 것인가는, 
힐링(Healing) 위주로 변질할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힐링(치유사역)을 하셨어요. 병자들을 고치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목적은 힐링 자체가 아니었어요. 
예수님의 힐링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나라였죠.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어필하는 힐링은 구원과 상관이 없는, 
회개를 수반하지 않는, 회심이 없는, 힐링만을 위한 힐링이에요. 
회개 없는 위로, 회심이 없는 평안, 하나님이 없는 치유... 

미국 TV에 힐링프로가 이미 많이 등장하고 있고, 
이것은 내가 편안함을 얻기를 추구하는 시대의 요구와 맞물려서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3) 세 번째 종교가 변질되는 모습은 “정체불명의 영성” 
영성은 영성인데 이게 누구로 말미암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이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이것이 기독교적인 것인지... 출처가 묘연합니다. 

21세기 인류는 종교는 거부하려고 하는데 영성 spirituality 은 환영합니다. 
인간이 지성도 갖추고, 감성도 갖추고, 영성도 갖춰야지..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영성의 정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바다는 바다인데 어느 바다인지 알 수가 없는, 잡탕의 바다에요. 
뉴에이지, 요가, 점성술, 묵상, UFO, 별의별 것을 혼합한 잡탕, 
이것이 정체불명의 영성이에요.

4) 그리고 네 번째 종교가 변질되는 모습은 
“We are the one(우리는 하나)”라는 식의 인류애에 호소하는 감정몰이! 

“We are the one”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콘서트에서 
유명 가수들이 무대에 올라가서 함께 부른 노래입니다. 

“우리는 하나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하고 아주 비슷한, 
뭔가 이상적인 사회를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 같은 감정몰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콘서트에서 청중은 두 손을 들고 좌우로 흔들면서 
마치 찬양 집회를 연상시킵니다. 
그 순간만큼은 사람들이 뭔가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도래한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이 없고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감성에 도취하는 것 뿐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내용이 없고, 실체가 없고, 변화가 없고, 
일시적인 감정만이 있는데, 그것이 사람들에게 아주 강력하게 어필합니다.

아마 댄 브라운이 말하는 종교의 변화도 그런 것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런 식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서 경성해야 되는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계5:6절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이 어린 양이 예수님인 줄 어떻게 안다는 얘깁니까? 
죽임을 당한 흔적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흔적을 통해서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하나님 보좌 옆에 계신 어린 양을 말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당하신 그 십자가에 고난의 흔적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얘기에요. 
영원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고난의 흔적이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 세상에 어떤 철학이든, 어떤 영성이든, 
어떤 사상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흉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래의 종교가 어떻게 변하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유사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신앙은 가짜 신앙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나가는 교회는 
거짓에 빠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