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22장 절별 해석 및 주석
1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여호와께서 다윗을... 구원하신 그 날에' 혹자는 다윗 왕이 이 시(時)를 쓴 때를 다윗왕의 말기로 보고 있다. 즉, 모든 주변의 이방 국가들을 물리치고 또한 압살롬과 세방의 난(15:7-12, 20:1, 2)등 모든 반란을 진압한 후에 본 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시의 내적 증거로 볼 때, 본 시는 다윗의 통치 초기 즉 다윗 왕이 주변의 대적들을 정복한 이후에 곧 바로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먼저 본 시 44-46절의 내용을 들 수 있다. 이 구절은 다윗 왕이 아람의 동맹군을 물리쳤을 때, 하맛 왕 도이가 그 아들 요람을 보내어 조공을 바친 역사적인 사실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8:9, 10).
(2) 또한 본시에는 다윗 왕의 말년을 어둡게 하였던 강간, 살인, 반란 등 수치와 슬픔의 어두운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21-25절에는 다윗이 자신의 삶에 대한 넘치는 열정과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 시가 수치와 슬픔으로 점철되었던 다윗 왕의 말기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등극 후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승승장구하던 초기에 쓰여진 것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 시가 다윗 왕의 통치 초기에 쓰여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본 시는 '감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제의하고(7:1, 2) 하나님께서 다윗과 '다윗 언약'(7:4-16)을 체결할 당시 곧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전달한 직후(7:17)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기쁨, 감사, 감격이 넘치는 본시의 흐름으로 보아 이 시는 다윗의 신앙이 가장 고조되었던 떼에 지어졌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본 구절은 본시의 역사성과 그 배경 및 취지를 소개한 표제에 해당된다. 이 표제는 사울 왕의 핍박과 이방인들의 세력에서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찬송과 감사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제어는 출 15:1, 민 21:17, 신 31:30마의 표제와 유사하다.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여기서 '모든 대적'이란 말은 즉위 직후 다윗이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기하기 위해 간단없이 전쟁을 치렀던 이스라엘 주변의 많은 이방 국가들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블레셋을 비롯하여 아람, 모압, 암몬, 아말렉, 소바, 에돕등을 가리킨다(8:1-14).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본 구절은 이 시가 다윗 자신의 저작임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시는 시편 18편에서도 소개되고 있는데, 시 18편과 내용면에서는 완전히 일치하며, 문체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마도 본 시는 다윗 왕의 원시(原詩)요, 시 18편은 그의 말년에 교정을 본 시이기 때문에 두 시(詩) 간에 문체의 차이가 생겨났을 것이다.
2 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시요' 본 시의 전체적인 내용을 총괄적으로 집약하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서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등의 말들은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들이다. 특히 '반석'과 '요새'는 팔레스틴의 지형적 여건에서 따온 용어들이다.
우선 '반석'(rock)은 가파르고 접근하기 매우 까다로운 바위를 의미한다. 위기에 처한 용사들은 곧잘 이곳에 피하여 몸을 숨기곤 하였다(삼상 13:6). 다윗도 사울의 추격을 받았을 당시에 이곳에 몸을 숨김으로써 위기를 넘기곤 하였다(삼상 22:5, 24:23). 또한 '요새'(fortress)는 가파른 바위에 둘러싸인 산 꼭대기를 의미하며, 팔레스틴 지역에는 이러한 요새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삿 6:2, 욥 39:27, 28, 사 33:16).
3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이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나의 피할 반석' 여기서 '반석'은 2절의 '반석'(셀라)과는 다른 용어로써,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추르' 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견고성(堅固性)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용어가 최초로 하나님께 비유된 유래는 모세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반석'이라고 묘사한 데서 찾을 수 있다(신 32:4).
여기서 '반석'의 의미는 쉽게 흩날리는 사막 지대의 모래 산과는 대조적으로, 항상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산의 견고성과 불변성을 의미하며, 또한 광야의 여행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은혜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즉, 본 구절의 바위는 2절의 반석과는 달리 아주 거대한 바위 덩어리(산 자체)를 의미하며, 따라서 웅대하고 움직이지 않는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신 32:15, 31, 사 30:29). 다윗은 이러한 바위와 같으신 하나님께 피할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그의 절대적인 신뢰를 표현하였다.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방패'(shield)는 수비용 무기이며, '뿔'(horn)은 공격용 무기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 때로는 적의 공격을 방어해 주기도 하시며(창 15:1, 신 33:29, 시 3:4, 59:12), 때로는 적의 세력을 파(破)하는 공격도 감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자삼상 2:1). 그러므로 '뿔'은 그러한 세찬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힘', '능력', '권세'를 상징하기도 하며(삼상 2:1, 10, 시 89:17, 24, 겔 29:21, 신 33:17, 미 4:13), 그러한 공격의 결과 얻어지는 '승리', '구원'을 상징하기도 한다(눅 1:69, 신 33:17, 합 3:4).
'나의 높은 망대시요' 여기서 '높은 망대'(high tower, KJV, stronghold, NIV)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스갑' 는 '높은', '안전한'이란 의미의 형요사 '사가브' 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이는 적의 공격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높은 산성, 다시 말해서 안전한 장소를 뜻하는 말이다(시 33:5, 잠 18:11, 시 9:9, 18:2, 46:7, 11, 사 33:16).
'나의 피난처시요' '피난처'(refuge)는 사막 지대의 기후상 갑자기 몰아닥치는 모래 바람과 폭풍우 등을 만났을 때, 그러한 것들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하고도 큰 바위 밑이나 동굴 안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나 인생의 폭풍우를 만났을 때 우리가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되심을 고백한 것이다.
'나의 구원자시라... 구원하셨도다' 본 시에서는 '구원'(salvation)이라는 용어가 처음부터 마지막에 걸쳐 여러번 언급되어 있다(1, 4, 20, 47, 51절). 이같은 사실로 볼 때, 본 시는 다윗이 자기에게 구체적으로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는 시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4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여호와께 아뢰리니... 구원을 얻으리로다' 여기서 '아뢴다'는 말은 여호와의 도움을 위해 '간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아뢰리니'와 '구원을 얻으리로다'는 미완료형(未完了形, imperfect tense)으로서 계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지금까지 내가 여호와께 기도할 때마다 구원을 얻었고, 또한 앞으로 계속해서 기도할 때마다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로다'란 의미를 지닌다.
5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사망의 물결... 불의의 창수' 이러한 표현들은 자신을 삼키고자 마치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왔던 사울의 무서운 핍박과 다윗 초기에 있었던 숱한 전쟁의 위험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망의 물결'이란 표현은 시 18편에서는 '사망의 줄'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불의의 창수'에서 '불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벧리야알' 은 불의(不義)란 뜻 외에도 '무익한 것', '파괴', '파멸'이란 뜻을 가진다. 따라서 이 말은 파괴를 일삼는 사악하고 가치없는 자에 의한 재난의 위기와 죽음의 위협을 의미하는 말이다.
6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음부의 줄... 사망의 올무' 다윗은 5절에서 자신에게 닥치는 위험을 성난 파동의 해일(海溢)로 묘사했다. 이어 본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자 설치는 악인의 계교를 사냥꾼의 사냥(hunting)에 비유하고 있다. 즉 여기서 '줄'(헤벧, trap, cord)이나 '올무'모케쉬, snares, trap, noose)는 사냥할때 사냥꾼이 사용하는 도구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들은 마치 사냥꾼이 밧줄과 덫으로서 짐승을 사냥하듯 적의 갑작스런 공격과 간교한 속임수를 나타내는 말들이다. 여기서 다윗은 아마도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의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다윗은 실제로 사울 왕의 추격을 사냥 행위에 비유하기도 했었다(삼상 24:14, 26:20). 한편, '음부'(쉐올, sheol-창 37:35 주석 참조)는 죽은 자의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음부의 줄'이란 곧 사망의 줄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7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아뢰며... 아뢰었더니'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카라' 는 '부르짖다'는 뜻이다(시 34:6, 55:17, 118:5, 119:145, 146, 120:1, 렘 29:12, 31:6). 이는 곧 간절한 기도로서 하나님께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아뢴 후 주의 도움심을 간구했다는 의미이다. 즉 여기서 다윗은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구원자와의 긴밀한 교제를 묘사하고 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엄하시고 권위적이시며 공의를 따라 철저히 다스리시는 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간에는 결코 좁힐 수 없는 커다란 간격이 놓여 있다고 대체로 믿어졌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구체적 삶에 찾아 오셔서 그 형편과 처지에 따라 도움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임을 체험을 통해 간증했다(시 50:15, 59:10). 다윗이 이처럼 구약적인 한계를 떨쳐버리고 하나님과 갚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1)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2) 그분과의 개인적인 만남으로 인해 가능했다. 즉 기록된 율법서나 타인의 가르침에만 의존해서 하나님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기초하여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윗은 이처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여기서 '전'(헤칼)이란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를 의미한다(Smith, k Keil). 고대인들은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하늘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며, 따라서 인간의 참된 간구가 이 보좌에 상달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와 당신의 도움을 베푸는 것으로 이해하였다(시 11:4). 그러므로 여기 다윗의 노래도 이러한 개념하에서 수사학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8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 기초가... 흔들렸으니' 이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셔서 시내 산 언약을 선포하셨을 때의 자연 현상과 비슷하다(출 19:16, 18).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윗의 대적을 멸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 분연히 일어나사 이 따으로 강림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대적들의 위협과 올무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현현(現顯)을 시적(詩的)으로 생생하게 묘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강림하셨을 때, 실제로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적인 표현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구원의 손길을 박진감 있게 묘사한 시적 표현일 뿐이다. 한편 '지진'은 하나님의 진노의 강림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징조였다(욜 2:10, 11).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강림의 목적이 다윗의 대적을 진멸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 또한 여기서 '하늘 기초'('산의 터', 시 18:7)가 요동하고 흔들렸다고 하는 말은 전 우주의 떨림을 묘사한 말로서, 곧 대적을 멸하기 위해 하늘 보좌에서 분연히 일어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운 실상을 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9 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연기가 하나님의 코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묘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난 사람이 숨을 거칠게 쉬고 코를 씰룩거리며 콧김을 연발하듯이,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들에 대하여 분을 내심을 회화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신 32:22). 또한 연기에 이어 불이 솟아오른다. 이 불은 모든 사악한 원수들을 일거에 소멸시키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를 상징한다(신 32:22, 출 19:18).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본 구절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불이 어찌나 뜨겁든지 그것은 마치 불타오르는 난로나 가열된 용광로에서 꺼낸 숯불과도 같아서 모든 것을 순식간에 태워버리는 무서운 효력을 지녔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불이 모든 사악한 것을 태워버리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창 15:17).
한편, 혹자는 여기에서의 숯불을 빛을 번쩍이는 '번개'로 이해하였으나(R. Payne Smith), 연기와 숯의 상관 관계에서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할. 그리고 진노의 불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표현한 까닭은 아마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말씀이 그의 입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10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였도다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이는 낮게 깔린 빽빽한 비구름을 묘사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임박성(臨迫性)을 나타낸다(시 144:5, 사 64:1).
여기서 '드리우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타' 는 '기울이다', '숙이다'는 뜻으로서(삿 9:3, 16:30, 시 40:1, 잠 4:27, 시 102:11), 마치 하늘이 땅에 허리를 굽히고 접근하는 듯한 상태를 묘사함으로써, 시시각각 다가오는 심판의 임박성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_ 이는 빽빽한 비구름으로 인해 땅 위에 깔리워지는 짙은 흑암의 상탤마 묘사하는 말이다. 이와같은 흑암의 상태는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으로서,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가린다는 의미가 들어있다(출 19:16, 20:21, 신 4:11, 시 104:29, 나 1:3).
결국 이러한 흑암과 더불어 땅위에 강림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악인들에게 있어서 곧 무서운 심판을 의미하므로, 큰 두려움에 휩싸일 수 밖에 없다. "실로 악인들은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볼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와 심판의 무시무시한 징조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11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그룹'(cherub)은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수종드는 천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본 구절에서의 그룹은 특별히 언약궤의 덮개 위에 있는 두 그룹을 의미한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 두 그룹 사이에 좌정하사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다(출 25:20-22, 삼상 4:4, 시 80:2).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날으신다고 하는 표현은 하나님의 보좌가 지상으로 이동하사 강림하셨다는 의미이며,
이렇게 볼 때 여기서의 그룹은 하나님의 보좌를 실어 나른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날으신다는 표현은 그룹의 날개짓을 연상케 한다. 출 25:20에 보면, 언약궤를 덮었던 그룹들의 날개는 항상 나를 준비가 된, 높이 편 상태로 있었다.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이 역시 하나님의 강림을 묘사한 시적인 표현이다(시 104:3). 즉 바람의 재빠름성을 이용하여 그것을 날개 삼아 지상으로 강림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한편 여기서 '나타나셨도다'란 말은 시 18:10에서는 '뜨셨도다'로 표현되었는데, 이 표현 역시 재빠르게 이동하여 강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12 그가 흑암 곧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이 구절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의 모습을 악인들에게서 감추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인들에 대해 분노하사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강림하실 때, 짙고 어두운 비구름이 마치 둘린 장막처럼 하나님을 에워싸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악인들은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은 볼 수 없게 되고, 대신 캄캄한 흑암만이 무서운 심판의 전조로서 그들에게 보여질 뿐인 것이다.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 '흑암' 과 '모인 물'과 '빽빼한 구름'은 모두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들로서, 곧 '짙은 비구름'을 가리킨다. 즉 '짙은 비구름'은 '흑암'을 동반하며, 또한 그것은 '모인 물덩어리'와 같으며, 그것은 '빽빽한 구름'인 것이다. 한편 시 18:11에서는 '모인 물' 대신에 '물의 흑암'이란 말로 표현했다. 역시 동일한 의미의 시적 표현이다.
13 그 앞에 있는 광채로 말미암아 숯불이 피었도다
'그 앞에 있는 광채로 인하여 숯불이 피었도다' 여기서 '광채'(brightnes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노가흐' 는 '불꽃', 또는 '섬광'(閃光)을 의미하는 말로서, 여기서는 빽빽한 구름 사이에서 번쩍이는 번개를 뜻한다. 따라서 이 말은 9절의 '불'과는 다른 의미의 말이다. 또한 '숯불이 피었다'는 말은 그 번개의 화염에서 불꽃이 튀어 나왔다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장면을 시적으로 생생히 묘사한 표현이다.
14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 소리를 내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15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시며 번개로 무찌르셨도다
'우렛 소리를 내시며... 음성을 내심이여' 전형적인 시적(詩的) 병행 구절로서, '뇌성'(雷聲)과 '음성'은 동일한 의미의 표현이다. 즉 히브리인들은 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여기서는 악인에 대한 분노의 음성이기 때문에, 그 뇌성은 더욱 무시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욥 37:3, 출 9:23, 시 29:3, 46:7, 68:34, 77:18).
'화살을 날려... 번개로' 여기서 '살'(arrow)은 '번개'(lightning)와 동의어이다. 고대인들은 번개를 하나님의 화살로 생각했다. 즉 하나님은 악인을 징벌할 때 번개한 화살을 사용하여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시 7:13, 14, 38:3, 욥 6:4, 신 32:23, 애 3:12, 13).
16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기초가 나타났도다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 여기서 '꾸지람'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우뢰 소리를(시 114:7), '콧김'은 하나님의 분노(9절)를 각각 상징한다.
'물 밑이 드러나고 땅의 기초가 나타났도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역사로 말미암아 다윗이 창수(漲水)와 같은 대적들의 위협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내용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여기에서 '물'은 다윗을 핍박한 대적의 세력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리고 '물 밑'이나 '땅의 기초'는 바닷물이 무겁게 내리 누르는 바다 밑바닥을 지시하며, 이는 상징적으로 다윗이 대적으로부터 받아온 압박감(壓迫感)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물의 세력, 곧 대적의 세력이 완전히 파멸되고, 다윗이 그 모든 환란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혹자는 '땅의 기초'를 '스올'(sheol, 음부)이라고 보았으나, 본 구절의 문맥상 이는 이미 언급한 대로 다윗의 환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17 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손을 펼치신 것을 의미한다(시 144:7). 여기서 '위에서'라 함은 하나님의 초월성, 또는 지존성(至尊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 위로부터 강림하셨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지엄하신 강림으로 인해 자연계가 요동하고 악인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순간에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바라본 것이다. 곧 주위 사방에서 사나운 파도와 같이 대적의 세력이 밀려올 때에도 다윗은 그 신앙의 눈으로 위로부터 임하는 구원의 은총을 노래한 것이다.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여기서 '건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솨' 는 모세가 나일 강물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 사용된 용어이다(출 2:10). 그러므로 이 말에서 '모세'('건짐을 받은 자'란 뜻)라는 이름이 파생되었다. 다윗은 여기서 '많은 물'로부터 건지움 받은 자신의 구원을 나일 강물로부터 건지움 받은 모세의 경우에다 비유하여 여호와의 크신 구원의 은총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리고 여기서 '많은 물'(마임라빔)은 '사망의 물결' 또는 '불의의 창수'(5절)와 같은 죽음의 위험과 재앙을 가리킨다(시 32:6, 46:12, 69:2, 3, 사 43:2).
18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강했기 때문이로다
'강한 원수' 여기서 '원수'는 단수형이다. 그러나 이 말이 오직 다윗의 하나의 원수, 곧 사울을 지칭한다고 말할 수 없고 오히려 다윗을 대적한 모든 원수들을 다 포함시킨 집합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곧 이어 나오는 동의어(미워하는 자들, 원문에는 복수 형태의 분사임)나 지시대명사(저희는)가 모두 복수 형태로 나와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다윗은 사울 뿐만 아니라 그의 집권 초기에 그를 위협했던 주변 이방 국가의 강력한 정복자들로부터 자신을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이 구절은 본시에서 다윗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감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다윗은 철저하게 왕으로서의 자신의 탁월성과 위대성을 감추고, 오직 자신의 인간적인 연약성과 무능력만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원수들에 대한 승리와 성공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이 은혜의 법을 잘 깨닫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Hertzberg).
19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의 재앙의 날' 이 날은 어느 특정한 한 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다윗이 대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큰 곤궁에 빠지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을 때를 말한다. 특히 사울의 추격을 받아 더 이상 피할 곳도, 그리고 도움을 바랄 수도 없게 되었을 때를 가리킨다.
20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여기서 '넓은 곳'이란 환란과 압박의 좁고 협착한 상태와는 반대적인 개념으로, 자유가 넘치는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를 상징하는 말이다. 즉 이 말은 어린 양이 넓은 들에서 마음대로 걱정없이 풀을 뜯고 있는 자유와 평화의 상태를 나타내 준다(호 4:16, 시 31:8, 118:5, 합 1:6).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베푼 모든 선한 일의 이유와 결론을 보여 주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와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하신 이유는 다윗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변치않고 어떠한 위경 가운데서도 다윗을 구원하셨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고 있었던 다윗은 자신을 대적하는 모든 악인들의 심판을 통해 얻게될 자신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자이신 동시에 자신의 구원자로서 확신하였다(롬 11:36, 고전 8:6). 이처럼 전우주를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 미미한 존재인 자신을 기뻐하시고 구원하셨다는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당신을 의뢰하는 한 생명을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생생히 증명해 준다(마 6:25, 10:31, 16:26).
21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여기서 '상 주시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말' 은 '보상하다'는 뜻으로(신 32:6, 대하 20:11, 시 103:10), 이는 악인 또는 의인에게 그 행한 대로 갚는 공정한 보응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다윗은 이 구절에서 자신의 구원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義)라 함은 전혀 죄가 없는 상태, 곧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한 절대적 의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의 '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 또는 사악함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나님과 지속적인 친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내 손의 깨끗함' 여기서 '손'은 인간의 행위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말은 죄와 불의로부터 떠난 다윗의 깨끗한 행위를 의미한다(시 7:5, 24:4, 26:6, 욥 9:30, 22:30).
22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3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다윗이 자신의 의(義)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상을 받은 이유와 또한 자신의 손(행위)이 깨끗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21절) 근거가 제시되어 있다. 즉 그것은 의의 길이요 정결의 길인 '여호와의 도'를 지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도'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제시하신 '규례'와 '율례'를 가리킨다(23절). 즉 그 규례와 율례의 길에서 좌우로 벗어나지 아니하고, 온전히 붙들고 좇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규례'(미쉬파트)와 '율례'(후카)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교훈을 강조하는 중언법(重言法)적 표현이다(신 4:1 주석 참조). 결국 구약적인 의미에서 '의'(義)런 윤리적이고 도덕적 측면보다는 법적인 뉘앙스가 더 짙은 용어로서,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과 규범에 일치한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도에 순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의와 불의가 판가름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절대 의를 소유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제시한 모든 법도는 당신의 성품을 대변한 것으로서 의롭다. 이런 점에서 다윗이 자신의 의와 정결과 완전함을 하나님께 보임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본문의 말은 스스로 구원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교만의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다윗이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좇아 살아간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상급)을 은혜로 받았음을 가리킨다(창 7:9, 15:6, 22:12-18).
24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내가 또 그 앞에 완전하여' 여기서 '완전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밈' 은 21절의 '내 손(행위)의 깨끗함'과 대조적으로 마음의 고결함 또는 순결함을 가리키는 말이다(창 20:5, 시 26:1, 잠 10:9). 특히 이 말은 욥의 '순전(純全)한' 마음에 적용된 용어로서 그 마음에 사악한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욥 1:1). 그러나 이 말이 결코 도덕적으로 전혀 무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서 그 신실함과 의로움을 인정하실 만한 순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Hertzberg). 성경은 이러한 내적인 완전(순수)의 상태에서 정결한 행위가 나온다고 증거하고 있다(마 23:26). 한편, 이런 맥락에서 이 말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칠만한 '흠(欠) 없는'정결한 동물을 가리킬 때 적용되었다(레 1:3, 10, 3:1, 6등). 그리고 후일 사도 바울은 이 '타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모모스' 를 사용하여 신자들의 성화(聖化)를 강조하고 있다(엡 1:4, 5:27, 골 1:22).
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공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내 의대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본절은 21절의 고백에 대한 또 한번의 확증적 증언이다. 이러한 다윗의 이중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성도의 의로운 행위를 결단코 잊지 아니하고, 때가 이르면 반드시 갚아 주시는 상급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 상급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베푸시는 구원의 원리와 더불어 성도들에게 주어진 귀한 은총과 은혜의 원리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구원의 원리'가 무조건적인 은총의 원리라면, '상급의 원리'는 행한대로 갚아주시는 보응적 은혜의 원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상급의 원리는 구원 받은 자로 하여금 더욱 신실히 하나님의 뜻을 좇게 하고, 의롭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26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27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21-25절에서 자신의 상급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순전한 마음과 깨끗하고 의로운 결과임을 밝힌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의 보편적 진리(the general truth)를 도출해 낸다. 곧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행위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진리를 그동안의 생의 경험을 통하여 확시하고, 여기서 이 진리를 자신있게 선포하고 있다.
'자비한 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시드' 는 '인애', '사랑'이란 의미의 단어 '헤세드' 의 변형이며, 따라서 이 말은 '사랑을 품은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사랑은 인간 사이의 일반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사랑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견한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신 33:8, 시 4:3, 12:1, 50:5).
'완전한 자' 24절의 '완전하여'와 동의어이다. 24절 주석 참조.
'깨끗한 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바르' 는 본래 '분리시키다', '쪼개다', '선택하다'는 뜻의 동사 '바라르' 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자신을 온갖 세속의 더러움과 죄로부터 분리시켜, 날마다 의로움과 순수함을 추구하는 '거룩한 자'를 의미하는 말이다(사 52:11, 시 18:27, 단 11:35).
'사특한 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익케쉬' 는 '굽다', '뒤틀리다'란 뜻의 '아카쉬' 에서 파생된 말로, 곧 생각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나 왜곡되고 삐뚤어진 자를 의미한다(욥 9:20, 잠 28:18).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이에 해당하는 '티타팔' 의 기본 동사 '파탈' 은 '역겨움을 느끼다', '붙들고 싸우다', '심술궂음을 보이다', '거칠게 대하다'란 뜻이다. 곧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대해 비뚤어지고 왜곡된 행동을 하는 사특한 자에게 역시 하나님께서도 거칠고 심술궂게 대하사 그를 낭패와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말이다.
28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리이다' 26, 27절에서 언급된 보편적 진리를 재확인하는 구절이다. 즉 다윗은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를 대조시켜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보상을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잠 6:17, 21:4, 30:13, 시 101:5). 여기서 '곤고한 백성'은 억압받는 경건하고 겸손한 무리들을 의미하며 '교만한 자'는 부와 권세를 자랑하는 경건치 못한 무리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교만한 자'는 시 18:27에는 '교만한 눈'이란 말로 표현되었다. 한편, 다윗은 이 시에서 자신을 '곤고한 백성'의 범주에 포함시켜 곤고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자신의 과거 경험을 통해 확신있게 진술하고 있다.
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모든 구원과 존귀와 형통이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주는 나의 등불'이라는 한 단어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등불'은 (1)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서 밤중에 길을 인도하는 필수적인 도구로 이해할 수 있다(시 119:105). 이렇게 볼 때, '등불'은 다윗을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사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 등불은 집안에 켜있는 등불을 의미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이것은 그 집 안에서 누군가가 그 등불에 의존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이때에 이 '등불'은 다윗을 형통케 한 힘과 생명력의 근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3) 또한 이 '등불'은 영광과 존귀 그리고 행복과 번영의 원천을 상징한다(욥 18:5, 6, 21:17, 29:3, 시 132:17, 사 42:3, 43:17). 이런 의미에서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불렀고(21:17), 또한 다윗은 여호와를 가리켜 '나의 등불'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시 27:1).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여기서 '흑암'은 등불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16절의 '물 밑', '땅의 기초'등과 같이 재난과 곤고와 고통을 상징한다(용 29:3). 그리고 '밝히시리이다'(야기아흐)는 미완료형으로 미래성과 계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즉 다윗은 과거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미래에도 등불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적으로 자신과 함께 할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안에서'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적군에 달리며' 적군은 다윗군이 맞서 싸우는 적의 부대를 가리키는데, 원문에는 대격(對格, accusative)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이 적군을 향해 달리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Keil, Lange). 한편, 고대 역사에서 빨리 달리는 것은 힘 못지 않게 용사의 중요한 요건으로 간주되었다(2:18). 다윗은 이같은 요건을 '하나님 안에서' 갖추게 되었다고 본 구절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 성벽은 적의 요새지의 최후 방어선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을 뛰어 넘었다고 하는 말은 다윗의 통쾌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3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여기서 '피하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사' 는 '도피하다'는 뜻 외에도 '신뢰하다', '맡기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시 2:12, 잠 30:5, 사 57:13, 나 1:7). 따라서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란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고 정미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문제를 전적 맡기고 신뢰하는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게 확실한 보호자가 되심을 다윗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방패'는 적의 화살을 막아내는 수비용 무기로서 하나님의 보호의 상징이다(시 33:20, 신 33:29).
32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33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여기서 '나의 견고한 요새'란 문자적으로 볼 때 '나의 강한 거처(居處)'란 뜻이다. 즉 '요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온' 은 '거처' 또는 '처소'를 가리킨다(신 26:15, 삼상 2:29, 대하 30:27, 습 3:7). 이렇게 볼 때 다윗의 고백은, 자신의 거처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떠한 요새 보다도 강하고 견고하다는 그의 확신을 나타낸 것이다. 사실 다윗의 이러한 확신을 나타낸 것이다. 사실 다윗의 이러한 확신있는 고백은 과거 자신의 생의 체험으로부터 거듭 확인된 진솔한 간증이었다.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이 구절은 시 18:32절의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와 같은 의미의 말씀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신뢰하는 자를 선한 길 또는 의로운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이다. 즉, 여기서 '온전한'은 24절의 '완전하여'와 같은 히브리어 '타밈' 으로서 순결하고 고결한 영적인 상태를 수식하는 말이다.
34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여기서 '암사슴 발'은 원문상으로는 '암사슴'인데, 이는 '암사슴의 발'을 압축한 형태로서, 히브리어의 용법상 종종 사용되는 어법이다. 아무튼 여기서 '암사슴의 발'은 민첩성(敏捷性)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민첩성은 패주할 때의 민첩성이 아니라 적을 추격할 때의 민첩성을 의미한다(2:18, 대상 12:8). 따라서 이 말은 용사가 빠른 발로 패주하는 적을 물리치듯이,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의 대적자들을 속히 물리칠 수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여기서 '높은 곳'이란 대적의 요새나 고지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다윗의 '형통' 또는 '존귀'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구절은 하나님을 신뢰한 결과로 다윗이 그 땅에서 존귀해지고 칭송받는 형통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내용이다(신 32:13).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존귀와 형통의 조건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35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여기서 '가르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마드' 는 '단련시키다', '익숙케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미 4:3, 렘 31:18, 대상 25:7).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전쟁에 익숙하도록 단련시키셨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 '놋활'은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활을 의미한다. 당시 애굽인들은 대부분의 무기를 놋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놋활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금속 무기로서, 이것을 당길 수 었었다는 것은 그에게 영웅적인 큰 힘이 있음을 증거함과 동시에 전쟁에서의 대승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이방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그 힘과 기술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36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활과 창이 공격용 무기라면 방패는 수비용 무기이다. 전쟁에서는 공격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비도 공격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수비할 때에도 다윗의 힘이 되어 주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 방패는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의 상징이다(시 33:20, 신 33:29).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여기서 '온유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 는 (1) 응답(창 23:14, 욥 1:7), (2) 수고, 노고(전 1:13, 3:10, 시 119:107, 사 53:7), (3) 낮은 마음, 관대함(잠 15:33, 습 2:3, 잠 18:36)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1)의 경우를 채택하면, 다윗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다윗이 크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며, (2)의 경우를 채택하면, 하나님의 수고로, (3)의 경우를 채택하면 하나님의 관대하신 은혜로 다윗이 크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는 어느 경우를 채택하든 내용상의 큰 문제는 없으나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3)번의 경우를 지지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막연히 하나님의 관대하신 은혜만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문맥적으로 다윗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일일히 응답하시는 구체적인 관대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37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20절의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와 동일한 의미로서, 곧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활동 할 수 있도록 모든 방해물들을 다 제거해 주셨다는 의미이다(Keil). 따라서 다윗은 실족치 않고 승리의 삶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런데 전쟁의 문맥인 본 구절에서 이 말은 특히 다윗이 적군을 추적하여 승리를 확보하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나를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나의 발목이 흔들리지 않았나이다'이다. 이는 곧 다윗이 적군을 향하여 달려갈 때에 전혀 힘이 달리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와같이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실족지 않고 이방의 대군을 능히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의 걸음을 넓게 해주셨기 때문이다(잠 4:12).
38 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 멸하였사오며 그들을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37절에서 다윗이 증거한 내용, 곧 다윗은 자신의 힘이 조금도 달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즉, 다윗은 적을 끝까지 추격하여 완전히 섬멸할 수 있었을 정도로 충분한 힘을 위로부터 부여받았던 것이다.
39 내가 그들을 무찔러 전멸시켰더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내 발 아래 엎드러지고' 이는 적을 거침없이 무찔러 파한 결과, 마치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가는 적의 완전한 파멸의 상태를 묘사한 말이다(시 45:5, 47:3). 사실 다윗은 그의 생전에 군사 행동에서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다윗에게 철저히 격파된 대적들이 이제 더 이상 다윗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묘사하는 말이다.
40 이는 주께서 내게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를 내게 굴복하게 하셨사오며
'전쟁케 하려고... 띠 띠우사' 처음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쳐부순 이래(삼상 17:50) 다윗은 그의 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聖戰)을 위해 특별히 예비된 여호와의 용사였다. 그 숱한 군사 행동에서 다윗이 한 번도 패배치 않고 수많은 대적들을 연속 격파하고 굴복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여호와의 능력으로 띠 띠움 받았기 때문이다.
41 주께서 또 내 원수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내게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내 원수들의 목덜미를 내게 주셨다'이다. 여기서 '목덜미를 주셨다'라는 말은 '도망하게 하셨다'는 뜻으로, 곧 주께서 다윗의 원수들을 도망치게 하사 그들의 목숨을 다윗의 손에 붙이셨다는 의미의 말이다(대하 29:6, 렘 2:27). 여기서 다윗은 원수들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했던 것은 자신의 힘 때문이 아니라, 전쟁의 신이신 여호와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42 그들이 도움을 구해도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당시 여호와의 명성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 세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삼상 5:7, 6:5). 따라서 다윗의 대적들도 극한 상황에서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였으나, 저들은 엘리야 앞의 바알 선지자들처럼 응답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었다(잠 1:28-30).
43 내가 그들을 땅의 티끌 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밟아 헤쳤나이다
'땅의 티끌같이... 거리의 진흙같이' 여기서 바람에 날리우는 땅의 티끌이나 뭇 사람들의 발에 밟히우는 거리의 진흙은 허무하고 비참한 존재를 상징하는 말이다(창 3:19, 욥 7:21, 16:15, 20:11, 30:9, 사 41:15). 따라서 이 말은 사방에다 도움을 호소하고, 하늘에다 부르짖어도 도울 자 없는 대적들을 다윗이 철저히 진멸시키는 행위, 곧 다윗 대적들의 허무하고 비참한 최후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사 10:6, 29:5, 41:2, 슥 10:5).
44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전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여기서 '내 백성의 다툼'이란 구체적으로 다윗이 통일 국가의 왕이 되기 이전까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의 대치 상황을 의미한다. 즉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된 이후 7년 동안 북쪽 이스라엘과 대치하였으며, 그 동안에 양 진영의 전쟁과 아브넬의 피살 등 중요한 고비를 넘겼던 것이다(2:12-29, 3:37). 한편, 혹자는 이 구절을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구원으로 이해하였다. 즉, 이스라엘과 이방 족속들과의 전투에서 승리케 하셨다는 의미로 본 구절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건지신 그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아니라, 다윗('나를')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이 견해는 옳지 않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이스라엘을 통일한 후 다윗 왕이 이방 국가들을 정복한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통일 왕국의 왕위에 오른 다윗은 그때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던 주변 국가들을 모조리 정복하고, 그 나라들과 종주권(宗主權) 계약을 맺었다. 그 결과 정복된 나라들과 항복을 선언한 나라들은 다윗 왕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다윗왕은 가나안 일대의 실권자로 떠올랐다(8:6, 10, 12, 14, 10:19). 한편 여기서 '섬기리이다'는 미완료형으로서, 현재 이방족속들이 다윗왕을 섬기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세계 열방들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다윗 왕 앞에 굴복한다는 사상은 장차 다윗의 혈통을 타고 이 땅에 오실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야) 그리스도 앞에 세계 모든 열방이 굴복케 되리라는 메시야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사 55:4, 5, 빌 2:9-11).
45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그들이 내 소문을 귀로 듣고 곧 내게 순복하리로다
'저희가 내 풍성을 듣고 곧 순복하리로다' 이는 다윗이 이방 나라를 쳐들어가 직접 굴복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다윗의 명성만을 전해 듣고 미리 항복한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즉, 다윗 왕이 아람 동맹군인 하닷에셀의 온 군대를 파하였을 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하맛 왕 도이는 자기의 아들 요람을 다윗 왕에게 파견하여 화친을 도모하였던 것이다(8:10). 그밖에 하닷에셀을 도와 동맹군에 가담했던 아람 소국들도 다윗 왕의 승리의 소식을 전해 듣고 앞을 다투어 다윗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등 화친을 제의하고 나섰던 것이다(10:19). 이와같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풍성한 승리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다윗은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46 이방인들이 쇠약하여 그들의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이방인들이 쇠약하여' 여기서 '쇠약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벧' 은 (1) '힘을 잃다'(출 18:18)는 뜻 이외에도 (2) '어리석다', '바보짓을 하다'(잠 30:32, 17:7, 21, 렘 17:11)란 뜻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이방인들이 다윗 왕 앞에서 기력을 잃었다는 사실과 함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똑똑한 그들이 다윗 왕 앞에서 우둔하고 미련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이방인들의 힘과 지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여기서 '떨며'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가르' 는 '띠를 매다', '두르다'란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본 구절의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떨다', '두려워하다'는 뜻의 히브리 동사 '하라그' 의 착오로 밖에는 볼 수 없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우리는 같은 내용을 읊고 있는 시편 18:45에서 '하라그' 가 사용된 사실을 들 수 있다. 한편 '견고한 곳'은 이방인들의 요새지를 말한다. 이 구절은 다윗왕에게 포위된 이방인들이 그들의 요새지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다윗 왕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47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이 구절로부터 마지막 절(51절)까지는 이 시의 종결 부분으로,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승리의 영광을 모두 살아계셔서 자신에게 힘과 용기와 도움을 주셨던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그 중 일부분인 이 구절은 하나님의 속성인 자존성(自存性)을 찬양하는 말이다. 즉,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진리를 생생히 깨닫고, 여기서 '여호와는 살아계시도다!'라고 확신있게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딤전 6:16). 이처럼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자는 그 마지막에 '하나님은 살아계시도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혹자들은 이 말을 일종의 기원 형식으로 보고, 곧 '여호와는 길이 사시옵소서'란 뜻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만세수'(16:16, 삼상 10:24, 왕상 1:25, 39, 왕하 11:12)는 유한성(有限性)을 지닌 인간에게나 필요한 것일 뿐, 영원토록 스스로 살아계시는(출 3:14)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 말이 죽은 우상들과 비교해서 사용된 말이라고 볼 수도 없다. 다만 여기서 다윗은 역사의 현장에서, 특히 생과 사(死)가 교차되는 전쟁터에서 친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섭리의 역사를 장중한 감탄조로 '여호와는 살아 계시도다!'라고 찬양했던 것이다.
'나의 바위... 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 여기서 '바위'(추르)는 3절, 32절의 바위와 같은 단어이다. 3절 주석을 참조하라.
48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하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하시며
49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진리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들이다. 그 증거란 바로 하나님께서 미천한 다윗을 들어 온 민족들의 머리로 삼으신 것과 다윗을 대적으로부터 보호하신 사실이었다. 그러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서 거듭되는 다섯 개의 동사(보수하시고, 복종케 하시며, 나오게 하시며, 드시고, 건지시는도다)로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높이시고 그들이 위급할 때 강림하셔서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다윗은 여기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들' 여기서 민족들은 복수형이므로,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모든 이방 족속들을 의미한다.
'나를 원수들에게서... 건지시는도다' 다윗은 48절에서 모든 이방민족 가운데 자신을 높이 드사 으뜸이 되게하신 하나님을 찬송했다면, 49절에서 다윗은 모든 대적의 위협과 핍박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여기서 다윗은 대적의 핍박을 연상할 때 사울의 끈질긴 추격과 박해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본 구절은 다윗이 사울의 핍박에서 간신히 벗어나는 상황과 일치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요, 또한 본 시의 표제어에서 '모든 대적'에 이어 '사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1절). 그러나 여기서 원수와 대적하는 자와 강포한 자가 모두 복수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은 '사울'을 비롯한 '모든 대적들'을 가리키고 있음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50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이러므로' 이는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찬양과 감사가 결코 근거없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앞에서 다윗이 생생하게 증거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마음의 보답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성도의 찬양과 감사는 맹목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마땅한 응답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다윗이 그의 찬양의 무대를 밝히고 있다. 그 무대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의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방 민족들 가운데도 생생히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즉, 다윗에게 정복된 이방 민족들은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이방 민족들에게도 하나님의 행사가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제 찬양이 이스라엘의 전유물일 수 없었고 온 민족가운데 선포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은 온 민족 세계 열방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이런 맥락에서 후일 사도 바울은 구원의 보편성(민족과 혈통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본 구절을 인용하였다(롭 15:9).
'감사하며... 찬양하리이다' 다윗은 이미 자신의 찬양의 근거가 '생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밝혔다(47절). 사실 그분의 살아계심은 생명력 넘치는 그분의 속성을 반영한 것으로서, 아무런 희망이 없던 존재들에게 새 힘과 삶의 의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딤전 6:16). 그러므로 '생존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하는 자에게는 결코 낙심이나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마 28:5, 6, 행 17:31). 즉 그분의 살아계심은 곧 성도의 안전과 생명과 기쁨을 의미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존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입에서는 영원토록 감사와 찬양이 끊어질 수 없다(롬 11:13-24, 계 1:4, 8, 18).
51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주시며' 여기서 '큰 구원을 주시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믹딜 예슈오트' 를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큰 구원들'이다. 즉, 이 말은 여호와께서 다윗 왕에게 '큰 구원들'이 되셨다는 말이다. 여기서 '구원'의 복수 형태는 (1) 여호와께서 다윗 왕에게 베푸신 여러 번의 구원의 역사와 (2)그 구원의 풍성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여기서 '인자'(헤세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당신과 맺으신 언약에 근거하여 각종 호의와 친절과 선과 자비등을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은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이러한 '은혜'가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 곧 신정(神政) 국가의 왕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마쉬아흐) 다윗에게 1차적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언약의 본질이자 핵(核)인 '메시야'(Messiah)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고 완성된 모든 인장의 전조(前兆)였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다윗의 찬양의 지향점은 오실 메시야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롬 1:3, 15:12). 이것은 (1) 모든 구원과 인자의 완성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번 뿐이시며(행 4:12, 15:11), (2) 우리의 찬양의 대상 역시 구원자 예수와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이어야 함을 시사해 준다(고후 1:3).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다윗왕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 자 역사는 다윗 상대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밝히 알았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자식을 세워 다윗의 나라를 견코케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다윗 언약'(7:12-16)을 약속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후손'(제라-'씨'란 뜻)은 (1)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을 가리키나 (2) 궁극적으로는 다윗 언약의 모든 것을 최종 이루시게 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결국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이와 같은 구원과 감사의 찬송을 힘차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 찬송의 노래 중 '영원토록'이란 말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들인 우리들에게도 지금 구원의 역사를 베풀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실로 당신의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분이시다(히 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