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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20장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LNCK 2023. 5. 6. 21:55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삼하20장        22.10.23.설교, 정리

◑본문 삼하20장의 줄거리​

다윗 왕때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난 후 
요압이 군대들을 이끌고 압살롬을 죽이고 역모를 마무리하자 
다윗은 군신들과 함께 다윗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 때 세바의 난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죠.

그는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는데 
아마도 다윗 왕 때문에 사울 왕가가 몰락했다고 여기고
다윗을 왕좌에서 몰아내고 사울의 영광을 되찾자고 외치면서 
혼란스런 시기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죠.

유다 지파를 제외한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바의 반란을 따르며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윗왕은 세바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임명하고 
유다 군대를 모아 3일 안에 징집하라고 명했죠. 20:4

그러나 아마사는 3일이 지나도록 군대를 모으지 못하자
(아마사의 지도력이 부족하거나 압살롬이 방해했을 수도 있음) 
다윗왕은 이번에는 아비새에게 세바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리죠. :6 주1)

그리하여 아비새는 형 요압과 함께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까지 다 모아서  *이들은 다윗의 경호부대
세바를 진압하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자 
그제야 아마사는 군대를 소집하여 뒤늦게 예루살렘을 향해 오면서 
요압과 아비새의 군대들과 만나게 됩니다. :8

아비새와 요압은, 예루살렘을 떠나 세바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었고 
아마사는 모집한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상황이었죠.

이 때 요압은 자기 경쟁자인 아마사를 암살합니다.
요압은 비겁하게 페이크 fake 동작을 씁니다.

8 ‘그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칼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맸는데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요압의 칼이 허리춤에서 빠져서 땅에 떨어지니까, 아마사는 안심했던 거죠.
요압이 비무장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압의 인사(입맞춤)에 응했을 것입니다.
이때 요압은 감추어두었던 다른 칼로 아마사를 찌릅니다. 

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아마사)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다른)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창자가 땅에 쏟아졌다’는 말은, 아주 심하고 무자비하게 도륙했다는 뜻) 

전에 아마사는 압살롬 반란군의 군대장관이었죠.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된 후, 다윗은 아마사를 중용합니다.
(다윗은 이스보셋 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중용하려 했던 적이 있었죠)

이렇게 상대편 장수를 중용하는 것은.. 다윗의 나름 ‘인사관리법’이었죠.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과의 화합을 시도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다윗의 시도에, 요압은 자기가 피해당사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브넬도, 이번에 아마사도.. 자기 손으로 암살해 버립니다. 

곧 요압은 아마사가 모아온 군대까지 접수하여 
세바를 진압하려고 전열을 정비합니다.
한 마디로, 왕이 제어 불가능한 군대장관이었죠. 

요압이 이렇게 통제불능이 된 것은,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일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교활한 요압이었지만 
다윗은 그의 평생에 요압을 제거하지 못하고, 솔로몬의 손에 맡깁니다.

​▲삼하20:15 "이에 그들이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한 지역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 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요압은 벧마아가 아벨 성 안에 진치고 있는 세바를 포위하고 
흙을 상대 진영의 성 높이만큼 높이 쌓아서, 아벨 성에 진입하고자 했어요.  

‘벧마아가 아벨’은 단 지파에 위치했고, ‘벧마아가의 평원’이라는 뜻이죠.
*여기서 아벨은 ‘평원’이란 뜻, 가인의 동생 아벨(헤벨)과는 다른 단어
위치는 갈릴리 호수 북쪽, 그러니 이스라엘의 최북단 지역입니다.

그 때 그 성안에 있는 지혜로운 여인이 외쳐 요압을 부르며 이렇게 말했죠.
18 ‘여인이 말하여 이르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게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아벨 성은 예로부터 지혜로운 사람들이 살았던 유서깊은 성읍이라는 거죠.

19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니’

‘나’는 아벨성 사람들 모두를 대표하는, 여인 자신을 가리킵니다.
즉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전쟁을 싫어하는 주민들이라는 거죠.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
이스라엘의 대도시는 일반적으로 ‘어머니, 또는 딸’이라고 불렸죠. 
그 성읍을 사랑하는 애칭입니다. 

‘어찌하여 네가 주의 기업을 삼키려 하느냐?’
그러니 요압이, ‘어머니 같은 성’과 같고, 
‘하나님의 기업’과 같은.. 즉 아주 아주 소중한 아벨 성을
무너뜨리고, 훼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죠.

지혜로운 여인은, 요압이 반란자 세바를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고,
요압과 협상합니다. 요압은 세바의 머리만 내어주면
전쟁 없이 물러가겠다고 말합니다. :20~21

신20:10에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고 
만일 화친하고자 하면 그 성읍에서 조공을 받고 섬기게 할 것이지만 
만일 전쟁하고자 하면 여자와 아이들과 가축들을 빼고 남자들을 다 죽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이런 협상은 양측 모두 지혜로운 처사였습니다.

이 지혜로운 여인이 ‘아벨에게 물을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녀는 반란의 두목인 세바가 알지 못하도록 몰래 
아벨의 남자들에게, 지금 요압의 군대가 세바를 치기 위해 밖에서 포위하고 
있는데, 항복할 것인가 아니면 싸울 것인가를 물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벨의 남자들은 다윗의 군대와 싸울 마음이 없었고 
그래서 반란주동자인 세바를 죽여서 
그 목을 베어 성밖에 포위한 요압에게 던져줌으로써 
세바의 난은 평정되었고 아벨 성도 역시 평안을 되찾았죠.

이로써 세바가 다윗에 일으켰던 반란은 허무하게 종결되었으며 
요압이 나팔을 불자 군사들을 성읍을 나와 흩어져 제 집으로 돌아가고 
요압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설교 시작


우리는 지금 역사 가운데 확연히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기름을 부으셔서 세우신 왕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이스라엘)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들을 쭉 살펴보면,
당황스럽기도 하고, 매우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세상에 있는 여느 보통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있는데, 

그런데 이 나라가, 그 완전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하는 이 나라가 
완전하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평화롭지도 않고, 
전혀 아름답지가 않다 라는 것을 보면서  (오늘날 '교회'를 연상하셔도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이게 당황스럽고 혹은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때 고려해야 되는.. 
감안해야 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나라는 
분명히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맞지만 

그러나 지금 이 땅에, 특별히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왕(다윗)에 의하여 세워진 
그 왕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이 나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실 그 나라의 그림자요, 예표..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래서 과정 속에 있는 나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는 '현실적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지상의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죠)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지상의 하나님의 나라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라는 것을 우리가 감안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 그리고 그분의 부활하심,
그리고 그분이 왕으로서 등극하시는 승천하심,
그리고 그가 왕으로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한 몸으로 이끌어주시는 
성령이 임하심으로 인하여 시작된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는, 
성경과, 성령과, 사랑으로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고 계시는 나라가 맞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교회를 바라볼 때에도 
이미 초림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시작되었지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성될 그날을 바라보고 있기에 
이 교회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과정 속에 있으므로 
'현실적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때, 우리가 반드시 견지해야 될 두 관점, 
하나님의 나라가 가지고 있는 두 속성을 한번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1.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성>입니다. 

1) 다윗이 자기 집에서,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죠. 
2) 두 번째 기름부음은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이 될 때 였어요. 
3) 세 번째 기름부음은 온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될 때 였어요.  5:3

그랬다가 아들의 반란에 의하여서 왕좌에서 쫓겨 나갔다가 
지금 압살롬의 죽음을 통하여 승리를 얻고서 
다시 다윗을 통해서 통치되는 나라, 
승리한 왕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그 나라는 
진정한 왕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현실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 나라엔 현실적 문제들이 있고, 심지어는 가라지도 섞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1. 하나님 나라에 반항하는 열 지파 (장로들)

압살롬이 죽어서 그의 반란이 사그라지나 싶었더니
그 자리 위에 지파간 세력 다툼, 기 싸움이 일어납니다.

19:41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 왕께 아뢰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둑하여 왕과 왕의 집안과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가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였나이까 하매'

지금 왕한테 와서 따집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압살롬을 따라서 반역했다가, 

그 열 지파 장로들이 와서, 이제 환궁하고 있는 다윗 왕한테 와가지고 
'왜 유다 족속들이 왕의 귀환을 주도합니까? 왜 우리들을 배재시킵니까?' 하고
항의하고 따지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고, 이제 승리한 다윗이 환궁하려고 할 때에 
유다 지파들이 앞장 서서 나섰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랬더니 열 지파사람들이 와가지고 왕한테 막 삿대질을 하고 화를 내면서 
'왜 우리하고 의논도 안 하고 일을 추진합니까?' 라고 따지는 거예요.

그러자 유다지파 대표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19:42 '모든 유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종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 내느냐 
우리가 왕의 것을 조금이라도 얻어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있느냐'

우리는 다윗 왕과 같은 유다지파 라서, 앞장 서서 왕을 모셔왔다는 거죠.
그렇게 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어떤 이득을 취한 것은 없다고 항변합니다.

전체적으로 지금 10지파가 잘못 하고 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지금 10지파는, 압살롬을 지지한 죄가 있기 때문인지   19:10
오히려 큰 소리를 치면서, 유다 지파를 나무랍니다. 

지금 다윗 왕을 환궁시키는 문제를 놓고, 
요단 강가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거예요. 

지상의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지요.

19:43 '이스라엘 사람이 (열 지파 장로들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지금 열 지파 장로들은, 숫적 우위에 있으니까.. 큰 소리 치는 겁니다.
그들은 환궁하는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재추대 하기는 하지만,
그 일이 쉽고 녹록하지는 않습니다. 다윗 왕을 재추대 하지만, 텃세를 부리면서 왕을 인정하고 있는 거죠.

19:10절에, 이스라엘 장로들은 압살롬을 왕으로 기름부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임의로 행한 명백한 잘못이죠.
어쨌든 악법도 법이니까, 이제 압살롬은 죽었고, 그래서 다윗을 재추대 해야되죠.

-이에 가장 먼저 유다지파가 다윗 왕을 다시 왕으로 지지합니다. 19:14~15
-다음엔 시므이와 베냐민 지파 1천명이 다윗을 왕으로 지지합니다. :16~17
-나머지 10지파의 다윗 왕 지지는, 43절에서 지지하는 것입니다.
 아주 큰 소리 치면서 (싸우면서)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윗의 범죄와 연관이 없을 수는 없겠죠.

▲2. 세바의 반란     20:1~22

압살롬의 반란이 겨우 진정되는가 싶었더니
이스라엘 장로들이 고함을 지르고 큰 소리 치면서 
'다윗을 왕으로 재추대' 하고 있습니다.  19:43

이런 혼란을 틈타서, 베냐민 사람 비그리가 이제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러니 사울의 종 시바가, 므비보셋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고소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므비보셋이 원치 않더라도, 베냐민 지파가 그의 아들 미가를 옹립하면서
반란을 일으킬 기미는 얼마든지 있었죠.
다윗이 그의 재산을 시바와 절반 나누라고 한 것은, 
어쩌면 그런 시바의 말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본 것일 수 있죠)   주2)

세바가 나팔을 불었어요.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20:1~2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 다윗에 의하여 통치되기로,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그 나라 안에 있으면서도 
한번도 다윗을 왕으로 인정해 본 적이 없는 자들이
세바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 속에 있는 '가라지'들이죠.
신약 교회에도 그런 일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3. 다윗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후궁들
먹을 것만 주고,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게 합니다.  20:3

이 여자들에게도 좀 억울한 점이 있겠죠. 
그렇지만 다윗이 그들하고는 더 이상 관계는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압살롬 때문에 근친상간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상징적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 안에 있기는 한데 
왕하고는 전혀 관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

▲4. 20:8절부터 <요압>이 등장하는데, 세바의 반란의 진압대장으로 나서죠.
위의 "줄거리"에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요압이 아마사를 찔러 죽이면 안 됩니다. 자기 편끼리 싸우면 안 되죠.
아마사는, 다윗 왕이 지금 군대장관으로 임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요압은 좀 빠져 있게 했어요.

그런데 요압은 다윗의 명을 따르지 않습니다. 
아마사는 자기 맘대로 죽여버리고 (그가 fake로 죽인 것은 위 줄거리를 보세요)

원래 다윗은 아마사를 진압대장으로 임명했다가, 
그가 모병 기한인 사흘을 넘기며 지체하자  :4
다급해진 다윗은, 아비새를 일단 먼저 출병시킵니다.  :6
요압은 철저히 배제시키죠.

그런데 요압은, 아비새를 따라 같이 가다가
길에서 만난 아마사를 암살해 버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진압대장'이 되어서, 아벨 성에 가서 반란군을 진압합니다.

결국 세바의 난이 진압되기는 했지만, 
지금 요압은 제멋대로 입니다. 
왕이 세운 군대장관은 죽여버리고, 자기 스스로 군대장관이 되어서
버젓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반란군을 진압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멋대로 행하는 사람들도 있더라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죠.
자기 경쟁자는 철저히 몰락시키는 사람, 요압같은 사람도 있더라는 겁니다.

요압은, 그 순간 순간마다 왕에게 늘 순종하는 것 같은데 
왕하고 자기 뜻이 안 맞을 때면 언제나 불순종하는... 
그러니 순종을 가장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 뜻에 순종하는 자예요. 

오늘날 신약의 하나님 나라에서도, 이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죠.

신약의 하나님의 나라에도 이런 자들이 있고요, 
10지파 (장로들), 세바, 요압... 이런 자들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시기, 분쟁, 배교, 
거기에다 왕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 
방관, 반목, 무관심 불순종하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이 있고 

이런 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위태롭기도 하고, 
문제가 되기도 하고, 보기에 흉하기도 하다.. 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죠.

▲신약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빌1:15~17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전도하는데.. 어떤 사람은 착한 뜻으로 하지만, 
어떤 사람은 투쟁과 분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도 교회 안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세바처럼 반역하고 배교하는 사람도, 교회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살후2: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요일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니' 
그들이 교회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인 줄 알았어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줄 알았어요. 

그랬는데 어느 순간인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세바처럼, 그가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냥 교회 속에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타이밍이 되자, 세바처럼 배교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신구약의 하나님 나라에, 그런 사람들도 있더라.. 는 것을 보여주고 있죠. 

교회 안에는, 이렇게 반목하고, 왕과 관계하지 않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왕궁 안에서, 왕실에서 주는 거 먹고 
거기서 그냥 편안하게 일반적인 은총을 누리고 있는데
다윗 왕하고는 관계를 맺지 않아요. 다윗 왕하고는 대화하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일반적인 은총은 다 누려요. 

그런데 말씀(하나님)과는 관계 맺지 않아요. 말씀과는 교제하지 않아요. 
예수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냥 교회 안에 그냥 함께 있으면서, 교회생활 다 해요. 그런데 말씀과는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습니다. *요압에 비유

신약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게 말씀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통치하시거든요. 

그런데 마치 거기에 다윗의 말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
그냥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요압처럼 교회에서 겉으로 참 순종적인 것 같고, 열심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자기 뜻하고 딱 안 맞으면 어떻게 하죠? 
반드시 자기 뜻대로 해버려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터를 잡고 있으면 
그런 교회는 진짜 힘들어요. 

자기 의가 너무 강하거든요. 열심도 있어요.
그런데 자기 뜻대로 안 되면, 그 순간에 반드시 뒤집어 엎어요. 
그래서 자기 뜻을 반드시 이루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자기는 열심히 믿는 줄 알아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시기, 분쟁, 반목, 불순종, 배교가 일어나고
교회는 현실 속에서 위태위태해 보이는 이런 현실성이 있다는 거죠.

◑2. 하나님 나라의 안정성

자 그런데 본문 삼하20장은 '그게 현실이다' 라고 끝나지 않고 
또 하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되는 또 한 가지는 
'하나님 나라는 안전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나라는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다. 안전성을 가지고 있다!' 
이걸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어요.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을 지금 보고 있죠. 
다윗이 통치하고 있는 나라든 
이 땅에는 교회든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곳이든
그분의 말씀이 성령이 통치하는 곳이든.. 현실성이 있다는 걸 봐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성을 주목하게 해요. 그 성은 
14절 보면, 반란 주모자 세바가 숨어든 성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 벧마아가 아벨 성(이하 아벨 성)을 주목하게 되는데 
자 이 성은 어떤 성인가요?   *아벨 : 목초지 meadow 라는 뜻, 벧마아가 : 지명

18절에, 이 성은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뭐 문제가 생겼냐 어려움이 있냐
그러면 아벨 성에 가서 물어봐라. 그러면 그 일을 해결받을 것이다.' 

그래서 아벨성은 지혜가 있는 성, 진리가 있는 성, 길을 가르쳐 주는 성, 
진리와 지혜를 가진 성이에요.

19절에, 아벨 성은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 같은 성'
'여호와의 기업 같은 성' 이라고, 말씀합니다.  *거기 지혜로운 여인의 말이죠.

그런데 15절에, 세바가 그 아벨 성으로 들어갔어요.
그래서 그 성은, 지혜롭고 여호와의 기업인 사람들과
악한 반역자가 섞여 있는 성이 되어버렸습니다.

거기에다 문제는, 요압과 군대가 그 성을 에워싸고
그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바깥에 토성을 쌓았어요.

그래서 이 성을 보면, 결국 이 성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성이에요. 
'이 땅에 있는 교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성이에요.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가 있고 지혜가 있는 유일한 성입니다. 
인생이 어디로 가야 될지를 알게 해주는, 
인생이 어떻게 하면 구원 받는지를 알게 해주는 
진리와 지혜가 있는 성이에요. 

아벨 성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 또는 교회는 바로 그러한 성이죠. 
그리고 '어머니 같은 성'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우리 어머니에게서 나지만 
영적인 아들로 태어나는 곳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요. 
그분의 진리로서, 복음으로서,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서만 새로운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래서 교회는 '어머니 같은' 성이요. 

그리고 또 거듭난 자들이 거기서 
즉 예루살렘이나 하나님 나라에서 자라가는 거에요.
하나님 백성으로 자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아벨 성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 이것을 예표해주고 있어요. 
어머니 같은 성, 곧 태어나고, 자라가는 곳이죠.

그리고 이성은 여호와의 특별히 하나님께서 
고르고, 뽑으시고, 일하시고, 역사하는 곳이다..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말해주고 있죠.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 세바 같은 사람이 섞여 있는 것처럼 
이렇게 섞여 있어서 
결국 그 때문에 지금 무너질 위기, 
문제를 만나서 지금 위험한 순간에 있는 거예요.

이 아벨성은, 현실에 있는 현실성(=현실의 문제)을 가진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고 그 나라의 위대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그러한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이 아벨성이 
위험에 처해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데 

16절 '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이름도 누군지 모르겠어요. 한 여인이 지혜를 가지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지금 이 위태한 상황 가운데서 무너질 것 같은 이 성읍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데 

이 여인이 지혜롭게 말함으로써 
이 성이 지켜지고, 이 성이 다시 든든하게 세워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에서는 언제나 '지혜'는 누구를 상징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지금 여러 문제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무너질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이 지혜로운 여인의 지혜로운 말씀, 그것을 통해 이 성이 지켜진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서 매우 위험하고 위태로울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통해, 지혜를 통해,  *여인의 지혜로운 말
하나님이 지키신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아벨 성을 설명하는 것이 
교회를 설명하는 것과 똑같아요.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지혜가 있고, 진리가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걸어갈 길을 가르쳐 주고 
천국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곳은 
그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은 교회 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교회는 '진리의 성'이에요. 

그리고 '교회는 어머니 같은 성'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영혼들을 거듭나게(태어나게) 하고 
거듭난 영혼들을 교회가 (어머니처럼) 품고서 양육함으로써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곳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단체들과 좋은 곳이 있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19

그렇지만 이 교회는 어떻습니까? 
여러 부류의 사람들, 세바와 같은 사람, 요압과 같은 사람,
10지파의 대표들 같은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문제도 일어나고, 보기 싫은 부분도 보게 되고 
그래서 위태위태해서, 지금 마치 아벨 성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교회는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진리를 통해서' 
교회를 지키시기 때문에 

아벨 성이 무너지지 않은 것처럼 
교회는 반드시 안전하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 삼하20장의 마지막 23~26절은
다윗을 왕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의 각 부처의 대표들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세바의 난이 평정되고, 나라가 다시 안정을 되찾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신약의 하나님의 나라도, 결코 쇠하지 않으며, 무너지지 않으며
영원히 계속될 것을 예표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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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믿음으로 그를 믿노라

주님께서 바요나 시몬을 그렇게 믿어도 되나요?
주님께서는 무슨 근거로, 시몬을 반석으로 삼으시는가요?

주님께서는 무엇을 보고
바요나 시몬이, 교회의 반석이 될 만하다고 판단하셨을까요?
그가 예수님의 정체성(그리스도)을 잘 알고 고백했기 때문에? 

성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악마가 오히려 더 하늘과 세상일을 꿰뚫어 알고
복음서를 보면, 악마도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하고
바요나 시몬과 똑같은 고백을 하는데..

주님의 정체성을 잘 알고 고백했다는 것만으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을 수 있는가요?

실제로 바요나 시몬은 주님을 버리고 떠났던 위인이 아닌가요?
그럴 ‘위인’이라는 것을 모르시고, 그를 반석으로 삼으셨는가요?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믿을 만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기에 믿는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배반을 받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능력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훌륭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만큼 훌륭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형편없는 위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할까요?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은,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일까요?

그러나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믿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믿을 때는, 나의 기대를 배반할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우선은 높은 기대에 부응하는 존재가 없다는
기대의 낮춤, 기대의 비움, 기대의 가난으로 믿는 것입니다.

"바랄 것을 바라야지!"
내 주제가 형편없을 뿐 아니라, 그 주제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님을 아는 만큼
그도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합을 하면
그를 그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믿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그를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성인은 아니지만, 적어도 살인자는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요지는, 주님처럼, 하나님 때문에, 그를 믿는 것입니다.
바요나 시몬은 믿을 사람이 못되지만
그를 뽑으신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시기에 믿는 것이고

바요나 시몬은 믿지 못하지만
그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바요나 시몬은 믿지 못하지만
그를 도구 삼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들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래서 믿을 수 없지만, 그 아버지를 믿기에
아버지를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은 시몬이 주님의 정체성을 알게 된 것은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시몬은
도저히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인데,
예수님의 정체성을 아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요나 시몬을 반석으로 뽑으시고 그의 뒷배를 봐주시니
이제 그는 더 이상 바요나 시몬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새 이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서 새 이름을 받았는데, 그 이름은 반석, 베드로입니다.

그의 믿음과 신앙고백은
이제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그의 존재와 위치는 반석처럼 굳건하고 오롯하게
하나님을 향하고 사람들을 받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그를 뽑으신 하나님께서,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 왕국>을 만드는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참 불행하게도, 목회를 하면서도 
목사님들이 '자기 왕국'을 만드는 분들이 있어요. 

친구 목사님들 사이에서 목회성공담을 이야기할 때, 평가를 할 때 
기준이 뭔지 아세요? '저 목사는 교회에서 제 마음대로 다 한다'
이게 성공한 사람의 한 가지 (잘못된) 척도가 될 때가 있어요. 

'장로님들 무슨 말해도 안 듣는다. 목사가 제 마음대로 다 한다. 
대접 잘 받는다.' 이게 목회성공한 사람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보면, 이건 망한 사람이에요. 저주받은 사람이에요. 
목회를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해요? 하나님 뜻대로 해야지요. 

방해가 있고, 고통이 있고, 문제가 있고, 
엎드려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가야지... 
어떻게 그렇게 내 마음 먹은대로 그냥 술술 풀리는 게 성공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이후에 우리는 해방이 됐고 
또 우리는 625 전쟁을 통해서 모든 걸 다 잃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부산까지 밀려가고 난 다음에 
여러분들 모든 목사님들, 장로님, 권사님들이 부산 초량교회에 모였습니다. 

모여서 다같이 하는 말이 '북한에는 돌아서면 다 교회인데 
남한에 와서 주일날 예배드리려고 하니까, 교회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회개하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가 전도를 안 했다. 우리가 선교를 안 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셨다.' 

거기에서 회개해가지고, 부산에 신학교를 세우고 
대구으로 와서 대구신학교를 세웠어요. 

우리 어릴 때 큰 교회는 거의 다 이북출신 목사님들이 셨어요. 
장로님들도 거의 다 이북 분들이었어요. 

고난은 축복이에요. 고난이 있어야 회개해요. 
승승장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못된 자기 왕국이나 세우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못한다고요! 


▲유럽에서 오랜 세월 교민 목회를 하신 목사님께서 
한국의 큰 교회에서 온 교인들에게 크게 실망하였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크고 유명한 교회에서 얼마나 훈련을 잘 받았을까? 기대하였는데, 
시어머니 노릇만 하더랍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하는데’ 하면서 목사를 가르치려고 하고, 
교회 안에서 분열만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힘들었답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교회를 은퇴하신 홍목사님께서 최근에 탄식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이 땅에 천국이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민족복음화에 매달렸다.
천만 성도를 달라 했고, 이 나라 5만9천 마을에 교회를 세워 달라고 간구했다. 
보이지도 않았던 서쪽 대륙, 중국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런데 마침내 이것이 이뤄졌다. 
천만 성도가 넘고 마음마다 교회가 섰고 중국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됐다.

그래도 교인들의 삶과 목회자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예수 믿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겠다’고. 
그래서 제자훈련을 참 열심히도 했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성도들의 삶에 엄청난 지식들이 쌓여갔지만 삶은 그대로였다...”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회중이 모두 정장을 차려 입고, 자세도 흐트러짐 없고, 
성가대도 고상한 그런 교회일까?
그렇다. 그런 교회는 격조가 높아서 좋다.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예배가 약간 어수선한 교회도 '좋은 교회'다.
사람들은 대충 편하게 입고, 지각하는 사람도 꽤 있다. 심하면 핸드폰도 울린다.

이렇게 약간 어수선한 이유는, 회중 속에 새신자가 많다는 뜻이다. 
아직 교회 출석 경력이 짧다는 것이다.

이렇게 새신자들이 편하게 들락날락 거리는 교회가 
더 좋은 교회인 것 같다. 

......................

주1) 참고로, 요압은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이니, 조카뻘입니다.
아마사도 요압의 누이 나하스의 딸 아비가일의 아들이다.
과거에 요직은 종종 이렇게 친인척 중심으로 이루어졌죠.

 

주2) 시바와 므비보셋에 관한 다윗의 판결

25~27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므비보셋은 시바가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이 피난갈 때, 자기도 함께 다윗을 찾아가려고 했는데
자기 종인 시바가 거동하지 못하는 자기를 속이고 혼자만 나갔고, 
다윗 왕에게 자기를 모험하기까지 했다는 것이지요.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요?

먼저 시바의 말을 검증해 봅시다
시바가 다윗을 찾아왔을 때, 다윗은모든 권력을 잃고
쫓겨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가 모두
압살롬의 반란군에 가담해 있었고 
다윗이 왕권을 회복할 가능성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음식을 가지고
다윗을 찾아와 도운 시바의 행위는
진심에서 나온 가능 나온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일 시바가 거짓말을 했다면 
그것은 난세를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기 위한 음모였을 텐데요.

지금 다윗은 권력을 잃고 쫓겨가는 상황인데, 
그런 '지는 해'와 같은 다윗을 찾아가
시바가 어떤 이익을 얻으려 했다는 것은 잘 납득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다 주었습니다'만, 
지금 그 말은 아무 보장이 없죠.. 몰락하는 권력자의 말에는 힘이 없죠..

그것은 시바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윗의 은혜를 갚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에게 찾아온 것에    *다윗을 도우면 위험해지죠..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바가 단순히 거짓말을
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시바는, '므비보셋이 압살롬의 반란을 
사울의 왕권을 회복할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물론 므비보셋 자신은 중증 장애인이기 때문에 왕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미가, 삼하9:12
므비보셋이 반란을 직접 주도하지 않더라도

사울 왕가의 회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므비보셋을 찾아와서 그의 아들,
그러니까 사울의 증손자 미가를
왕으로 세우자고 부추겼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므비보셋의 말을 검증해 봅시다.
24절에 의하면
므비보셋은 다윗왕이 예루살렘을 떠난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발도 씻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므비보셋이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기를 저술한 역사가가, 사실로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실각에 대한 애도의 표시이고
므비보셋의 진심을 보여주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므비보셋이 정말 자기 아들 미가를 왕으로 내세우고자 했다면
그 사실은 곧 만천하에 드러났겠지요.
그런 사실을 감추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들은
므비보셋이 반란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므비보셋의 말과 시바의 말, 
두 사람의 말 모두를 신뢰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쪽도 거짓말이라는 분명한 근거가 없습니다.
그럼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걸까요?

그런데 이렇게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다윗은
누구의 말이 옳은지 가려내지 않은 채
사건을 덮어버립니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29

이 다윗의 판결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느 쪽에 말이 맞고, 어느 쪽에 말이 틀린지 알기 어려운 상황에서 
너무 성급하게 판결을 내린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쌍방의 의견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판결하기 전에 먼저 자세히 조사를 해보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킬 때 중심이 되었던 이슈가 
‘공정한 판결’이었습니다. *공정한 판결을 못 해서 민심이 이반되었음.

그런데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시바-므비보셋 건 
다시 공정하지 못한 판결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윗의 판단이 내려진 맥락과
문제의 성격을 주의 깊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시바-므비보셋) 양측이 불일치하는 점의 핵심은
'므비보셋이 사울 왕가를 재건하려는 반란의 시도에 참여했느냐..'
하는 여부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다윗이 진상을 정확히 가려나기 가려내기 위한 조사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므비보셋의 반란 가담’ 혐의에 대한
수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주도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가의 재건을 꿈꾸는 세력이 
므비보셋을 찾아와, 반란에 참여를
종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므비보셋에 대한 조사는
므비보셋 개인뿐만 아니라 
‘사울 왕가의 반란 음모’에 대한 대규모 수사로 확대되겠죠.

(*지금 반란의 주체는 압살롬이지만, 혼란을 틈타 사울 왕가로 번질 수 있는 거죠)

자칫하다가는 선을 넘어 
사울가, 베냐민 지파에 대한 정치보복 수사가 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 선에서 선을 그은 것입니다. 일단락 지어버린 것이죠. 지금 시점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 통합'으로 본 것입니다.

본문 삼하19장은, 압살롬의 반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사울 왕가의 지지자들’과
화해하고자 하는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고 
또 그렇게 노력했음을 보여줍니다.

(므비보셋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지 않고 매듭지으며,
사울의 재산을 시바에게 절반 나눠줌으로써, 아마 시바가 동원한
1천 명도 얼마씩 나눠 받았을 것으로 예상함)
즉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시바와 재산 절반을 나누라'고 한 것은, 사울 왕가와 나아가 베냐민 지파를 두루 생각해서 안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바가 1천명의 베냐민 지파를 이끌고 왔잖아요. 다윗은 그 1천명, 즉 베냐민 지파의 대표들을 흡수하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므비보셋의 희생을 요구한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베냐민 지파를 흡수하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화합” 차원에서 말이죠.

그런 다윗의 노력과 성의는, 열매가 있었는데
나중에 솔로몬 때,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데,
베냐민 지파는 유다지파와 운명을 같이 합니다. 

말하자면, 다윗 왕가와 사울 왕가가 합쳐진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인데, 
그건 다윗의 이런 국민 화합, 12지파 화해의 노력이,
소기의 결실을 맺은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