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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부르시는 주님

LNCK 2023. 5. 9. 10:55

2021년 송구영신예배 설교 - YouTube

◈두 번째 부르시는 주님          요21:15~17         2022.01.01.

송구영신 예배 때, 새삼스럽게 무슨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구절을 
설교본문 말씀으로 인용을 할까... 생각하시겠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도로 부르실 때 
한 번 부르고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고 
두 번째 부를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부르시는 그 주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베드로가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눅5장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첫 번째 부르심을 받았고, 
베드로는 그 부르심을 믿었고 순종을 했는데... 실패했어요. 

여러분 만일 사람이, 한 번 순종할 기회를 얻는 것으로 끝이라면 
이 세상에 주님을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는 소원을 가졌어요.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어느 왕도 갖지 못했던 
다윗만이 가질 수 있었던.. 참으로 갸륵하고 기특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좋은 소원이었어요.

다윗에게 그런 소원이 있었어요. 그만큼 다윗은 믿음의 인물이었어요. 
그래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했어요. 

아마 다윗은, 마음속에 많은 번민이 오갔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걸 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주님을 잘 섬기려고 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일을 했는데, 
왜 이 일이 성공하지 못했을까?' 이것처럼 큰 번민은 없었을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았나? 내가 믿음이 부족했나? 
내가 경건하지 못했나?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자칫하면, 다윗은 주님께 삐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알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고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섬김, 봉사)을, 
우리의 기대대로 이루어지게 해줘야 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죠.

주님을 섬기는 것은, 주님이 허락하시는 만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겠으니 
'지금 내가 추진하고 있는 이 일이 
반드시 내 양(마음)에 차게 해 달라'고 우리가 기대할 수 없어요

그런데 다윗의 위대함은, 첫 번째 시도에 실패했는데 
두 번 다시 그것을 시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첫 번째 실패했는데, 두 번째 이룬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아브라함도 첫 번째 자기 몸으로 아들이 이스마엘이었죠.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어요. 
두 번째 방법으로 이삭을 얻었죠.

요나가, 하나님이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명령을 거절했어요. 
그래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요나가 회개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요나에게 두 번째로 순종할 길을 열어 주셨어요.
두 번째 시도에 성공했어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눅5장에서, 예수께서 베드로를 처음 부르셨을 때 일어난 사건과 
요21장 본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자신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가서 일어난 일과 거의 똑같아요.

눅5장에,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잡은 것이 없었어요. 
근데 예수님이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라' 해서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엎드렸더니 
예수께서 '네가 앞으로는 사람을 취하리라' 
그것이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첫 번째 '사도로서의 부르심'이었어요.
'네가 앞으로는 사람을 취하리라!'  눅5:10

그래서 베드로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21장을 보면, 거의 똑같은 일이 반복됐어요.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베드로도 들었어요.
이미 예수님을 만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호숫가에서, 눅5장과 거의 똑같은 일이 반복이 되지요. 
밤이 맞도록 베드로와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려고 했는데, 못 잡았어요. 

예수님이 바닷가에서 서서 '너희에게 잡은 것이 있느냐?' 물어보셨죠.
어떻게 보면, 어부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질문입니다. 
'실적이 있느냐?'
실적이 없는 사람에게 그 질문을 하,면 사람이 짜증부터 냅니다. 

'(속으로) 왜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요?'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속상한 일이겠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없다고 그랬더니 
그러자 예수님은 눅5장에서는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는데 
요21장에서는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 

그래서 순종했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를 가득 잡았는데 
본문에 보면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참 신기하죠. 누5장과 어쩌면 이렇게 매치가 될까요.
눅5장에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고
요21장에서는 그물이 찢어빌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지만, 찢어지진 않았죠.

한 번의 부르심으로, 베드로가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21장에서 주님이 다시 한 번 부르십니다. 

요나도 다시 한 번 부르시고,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욘3:1

다윗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 것처럼   삼하12:24~25?
베드로에게도 다시 한 번 사도로 부르십니다. 요21장 

▲여러분 우리가 새해를 이제 맞이하죠.  *2022.01.01. 
우리가 이제 막 푸른잔디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일은, 전혀 없었던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게 아니고 
이미 오래전에 시작했던 일이지만, 최근 새롭게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어요.

개인적으로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었고, 주님께 헌신했고, 
이미 주님이 오래전부터 우리를 사용해 오셨어요. 우리를 키우셨어요. 

저도 마찬가지죠. 수십년 전에 주님이 저를 종으로 부르셨고 
여러 교회를 섬기게 하셨고, 말씀을 가르치게 하셨어요.

제가 지금 하는 일(개척)은, 새로운 일이 아니에요.
마치 이전에 해보지 못 했던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하시는 일이 이와 같아요.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하신 거예요.
이미 오래전에, 우리가 알기 전에 이미 시작하셨어요. 

다만 우리가 그것을, 개발하고, 깨닫고, 그것이 성장하고, 열매를 맺고 하는거죠.
주님이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일이에요. 

▲베드로가 요21장에서 처음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게 아니잖아요. 
이미 3년 반 전에 받았지요. 눅5장

그러나 그것(사도로서의 부르심)을 주님께서, 
다시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것처럼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이와 같습니다. (두 번째 부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주님이 나의 삶에 어떤 일을 하시느냐를 알려면,
이미 이전에 주님이, 나를 통해 어떤 일을 시작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지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이미 이전에 하나님이 내게 보여 주셨던 그 뜻을 기억하고, 
그리로 돌아가면 됩니다. 거기에 실마리가 있어요. 

만일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면, 
이전에 보여 주셨던 그 일을 불순종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지금 주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이 안 들린다면,
이전에 이미 하신 말씀을 내가 잊어버렸거나, 무시했거나, 불신했기 때문이에요.
 
주님이 하시는 일은, 별안간 없었던 일이 갑자기 생기는 방법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천국은 이와 같으니 
농부가 나가서 씨를 뿌림과 같다'고 하셨지요. 막4:3

주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이미 주님이 씨를 뿌리셨어죠. 
그렇지만 그게 이제 
지금 자라나고 있는 양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주님은 없었던 일을 하시는 게 아니에요. 

▲푸른잔디 교회에 주신 사명이 본문 말씀에 있습니다. 
'양을 치고, 양을 먹이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사람을 취하는'일과 일맥상통하지요. 눅5:10
사람을 취해서, 사람을 먹이는 것입니다.
사람을 먹이다보면 feeding, 또 사람이 취해 catch up 지겠지요. 

사실 굉장히 평범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이미 행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분명한 믿음과 목적을 가지고 하는 일과, 
-그냥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일은 천지 차이예요. 

-부산에 가기 위해서 부산으로 향해 가는 것과, 
-어디를 가야 되는지 모르지만 경부고속도로에 들어가서 가다 보니까 
부산이 나오는 것은 천지차이 입니다.

어디를 가야 되는지 모르고 가는 사람은 
도중에 차에 타이어 펑크가 난다든가, 휘발유가 떨어진다든가, 몸이 피곤하면 
금방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부산을 가야 되기 때문에, 사명과 목적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도중에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가게 될 것입니다. 

푸른잔디교회가 여러분에게도 새로운 시작이고, 저에게도 새로운 시작이고 
이 시작은 과거의 시작과 어떻게 다릅니까? 

교회에 주시는 목적, 저에게 주시는 주님의 (두번째 부르심의) 목적이 
이전보다도 더 분명하고, 
주님이 베드로에게 다시 '양을 먹이라' (두번째로) 명하신 것처럼 

이전에는 해야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이제는 해야 됨을 알고, 뭘 해야 되는지를 알고, 
거기에 대한 더 분명한 목적의식과 믿음을 가지고 한다는 사실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게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이것을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사명으로서 
이 목적의식을 우리가 결여하게 되면 어떻게 되냐? 

우리를 위한 교회를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내가 다니기 편한 교회 
-내가 가서 은혜 받을 수 있는 교회 
-우리를 위한 교회
를 만들고, 그것으로 흡족하게 생각할 거예요.

'이것도 성공한 거 아니냐? 나는 교회가 좋다. 교회 가서 은혜 받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를 위한 교회'가 아니고 
'사람을 취하기 위한 교회, 사람을 먹이는 교회' 
'이 세대를 주님께 인도하기 위한 베드로의 고기잡이 배와 같은 교회'가 되면 

이건 천지 차이예요. 
그렇게 되면, 내가 은혜를 받더라도 
그냥 '내가 은혜를 받기 위한 교회'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이후에 우리에게 분명한 목적이 생깁니다. 

'내가 은혜를 받아야 되는 이유' 
'내가 은혜 받은 후에 뭘 할 거냐?' 

'가서 제자 삼으라!' 
'세상 많은 사람들, 세상 모든 영혼이 너에게 달렸나니..'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위한 교회가 되면 됩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했어요? 
실패했어요. 넘어졌어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이 없는 이유는 
자칫하면 베드로처럼 실패한 사람을 거부 reject 해 버립니다. 

'저 사람은 사도라고 하더니..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더니..' 
하면서 그 사람을 버려 버려요.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에 베드로를 버려버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