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삼하24장, 인구조사와 징계를 통한 교훈

LNCK 2023. 5. 12. 17:54

◈삼하24장, 인구조사와 징계를 통한 교훈              <사무엘하> 장별 설교모음

삼하24장은 크게 2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   24:1~10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제사를 드림   24:11~25

◑'다윗의 인구조사' 범죄 사건이 기록된 이유

이런 거 좀 성경에 누락시키면 좋을 터인데,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 사건이 그것도 사무엘서의 피날레로 배치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다윗을 감동시키사...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분문은 다윗의 인구조사를, 다윗의 불순한 의도의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데,
1절에는 '하나님이 인구조사를 시키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병행구절 대상21:1에서는 '사단이 다윗을 격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 두 기록은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단을 이용하실 때도 있기 때문이죠. 욥1:12, 삼상26:19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결과적으로 인구7만이 사망한 이 사건은
다윗 한 사람의 인구조사로 촉발되기 이전에,
1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해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 진노하셨나요? 추측컨데
압살롬 또는 세바의 반란에 가담한 백성들을 징계하시려고, 
그래서 벌어진 사건이.. 다윗이 인구조사 하도록 하나님은 방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허용, 방치) 하에서 
사단의 격동으로 일시 다윗이 교만한 마음을 품도록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편, 본장의 인구 조사는 다윗 통치의 말기에 이루어졌음이 분명합니다. 
그 근거로, 인구 조사가 약 10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죠. 

이같은 사실은 군대 장관 요압이 수도를 오랫동안 떠나 있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당시가 태평성대 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때는 대내외적으로 모든 정벌과 반란이 완료되고 진압됨으로써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던 다윗 통치의 말기라고 볼 수 있죠.

약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위 구절은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 않으신다는 뜻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된 이유는 뭐죠? 
욕심이 잉태했기 때문이죠. 

정리하면, 하나님이 다윗을 감동해서 범죄하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하심 안에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다윗은 자기 마음에 욕심이 잉태해서, 인구조사를 명한 것이고요.
자기 업적과,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교만과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군대를 의지함)의 죄성을 가지고 있었던 
다윗이.. 그 자기의 죄성과 욕심때문에 인구를 조사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두 번의 반란사건에 가담했던 백성들의 죄가 있었고요!

※민수기 '인구 계수'의 의미       주1)

그래서 우리는 이 다윗의 이야기의 마무리 지점에서 
'다윗이 또 범죄했다' 라는 이 인구조사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요?

▲사무엘下의 안 좋은 결말      ☞이단락 출처 사무엘下의 비극적 결말     
구약의 대표적 성군인 다윗의 성공적인 마무리로 이야기를 마치고 있지 않죠.

만약 우리가 역사를 기록한다면,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이야기로 ‘멋있게’ 끝맺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무엘서를 끝내기로는 너무 안 좋은 결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서는 다윗을 이상적인 인물로 만들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실패와 죄를 적나라하게 공개하면서, 다윗의 실패를 말합니다.
인간 다윗의 성공이 이스라엘 나라를 이룬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긍휼이, 이 모든 구속역사를 인도하고 이끌어 감을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통해서였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후에 성전이 건축됩니다.
그 성전이 건축되는 역사는, 
다윗의 업적의 기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다윗이 받은 죄사함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이룬 것(공로)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에게 행하신 것(은혜)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능력의 원천이 어디에서 흘러나오겠나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부흥, 교회의 회복이 어디서 나오겠는가요?
내 성공, 잘남, 내 업적(공로)에서 힘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자리(타작마당의 회개의 번제),
거기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은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서두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왕 제도를 요구했죠.
그러나 초대 사울 왕은 이스라엘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윗 왕을 사용하셨죠.
그러나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 왕의 실력과 능력과 잘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존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무엘하의 비극적 결말이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범죄와 회개하는 모습으로.. 사무엘서를 결론 짓는 것입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의 영적 의미      ☞출처 삼하24장 1~25 죄와 은혜 

신자의 영원한 고백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인구조사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7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하나님의 진노는 
여부스 사람인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멈추었습니다. 

9절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 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합이 130만명이죠. 그럼 당시 전체 인구 수는 4를 곱하면 5백만 가량입니다.
15절에 온역으로 죽은 자가 7만이라 했는데,
이것도 '성인 남자만' 계수한 수치일 것입니다. 

어쨌든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벌어진 이 사건이야말로 
구약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가, 당시로부터 1천여 년 전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산이기 때문입니다. 창22장

그 때 하나님은 수양을 준비하셨고, 수양으로 독자를 대신하셨습니다. 

대하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솔로몬은 바로 그 자리에 성전을 건축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온역, 전염병)는, 
바로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이 드려지는 자리에서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 세워진 성전은 
사실상 오직 성전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셔서 성전을 헐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성전 자체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로 향합니다. 
다윗은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피흘림의 번제가 드려지자, 거기서 온역이 멈추었습니다.

(본문에 단에서 제사를 드리기 전에, 벌써 온역이 멈추어졌죠. 16~18
그런데 25절에는, 제사를 드린 후에 온역이 멈췄다고 말씀합니다.
순서가 꼭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밥이나 국이나 아무 거나 먼저 먹죠)

본문의 이 마지막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복음의 진수를 확신케 합니다. 
다윗의 성전 건축의 열망과 헌신이.. 다윗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의 독자를 바치는 열심과 헌신으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수양을 준비해 주신 것으로 되었습니다.

죄인인 다윗, 그리고 그 백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식으로 계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다윗)의 열심, 인간(다윗)의 성실이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죄인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는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을 증명하고 사는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증명하고 살 자들입니다. 
여러분의 자존심으로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삶의 고백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사무엘서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서를 마치면서, 이 장면을 꼭 넣었던 것이죠! 할렐루야!

 

첨언하면, 우리는 철저히 '나 중심'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 쉬우나
성경은 지루하리만큼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오실 그리스도'만 줄곧 증거하고 있으면, 
우리 생활의 교훈, 삶의 적용.. 이런 것은 너무 약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늘 똑같은 주제라서, 설교가 지루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 한 분만 우리가 올곧게 바라보고, 
응시하고 있으면 삶의 나머지 문제들은 자동해결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애써서 '삶의 적용'을 하지 않더라도, 
성도가 '그리스도 한 분만 집중해서 바라볼 때' 
우리가 원하던 다른 삶의 문제들은 자동 해결되고 풀려버리는.. 
그런 신비한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66권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설교하는 것이 맞습니다. 
.....................................................

주1) 민수기 "계수"의 의미

민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민수기에 제일 먼저 나오는 말씀은
진군을 위한 일꾼들, 군사들, 리더들은 세는 count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저 사람들을 카운트 했다'는 것으로 보는데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그냥 점프해서 넘겨버리는 부분들이 있어요.
민수기같이 숫자가 너무 많이 나오면 넘겨 버리고,  
누가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고 
또 어느 지파가 몇 명이고, 몇 명이고 ... 그러면 읽지 않고 넘기죠. 

근데 것은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읽는 것입니다. 
사실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숫자는 
오늘날 우리가 물리적, 정량적으로 숫자의 개념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민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여기서 '계수할지니' 라는 말을 원어적으로 번역하면,
'머리를 세우다'는 뜻입니다. 

'계수한다 count'의 히브리어가 '나싸 로쉬'인데    *로쉬는 머리
그 원래 의미는 '머리를 세우다, 머리를 들게 하다' 입니다. lift up, rise up
그 외 '감당하게 한다 bear' 라는 뜻도 있죠.

당연히 그렇죠. 계수하려면 머리를 쳐들어야 쉽게 계수가 되겠죠.
그런데 이 말은 '그저 숫자를 세는' 목적이나 의미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민수기에서 '계수할지니'의 뜻은 
-'지도자로 세운다'는 뜻입니다.
-또는 '사람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의 가치나 능력을 인정해주고, 지지해준다..는 뜻을 담고 있죠.

'어떤 직무, 임무를 맡긴다'는 의미도 그 속에 내포되어 있겠죠.
'인정해준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겠습니다.

즉 '글레디에이터' 나 '브레이브 하트' 같은 영화를 보면,
군대가 쭈욱 늘어 서 있고
장군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사열 같은 것을 하면서
그 군인들을 한 명, 한 명 격려해 줍니다. 아론이 그런 식으로 '계수' 한 거죠.
'계수(머리를 세다, 머리를 들게 하다)'에 그런 뜻이 들어있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