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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을 어디까지 인도해 갈 것인가?

LNCK 2023. 5. 15. 16:33

성도들을 어디까지 데리고 갈 것인가?  23.05.07 - YouTube

36:55~ 녹취, 정리                ◈오중 사역, 오중 직임                ▣ 헌신, 봉사 

◈성도들을 어디까지 인도해 갈 것인가?       엡4:7~12        23.05.07.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 세우신 5종류의 일꾼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성도들을 어디까지 데리고 가야 되는지'를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자, 목사, 교사까지 데리고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교회에 쟁쟁한 일꾼들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지금에 사도가 사라졌고, 선지자도 온데간데없고, 
복음전하는 자도 사라졌고 
남은 것은 오로지 목사와 교사만 남았습니다. 

마치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다섯 개의 물맷돌을 가지고 간 것처럼 
예수님은 교회에 적어도 5개의 물맷돌을 주셨는데 
2천년이 지나가면서 세 개를 까먹었어요. 두 개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골리앗이라는 '후기 기독교 시대'에 복음을 전해야 되는 
골리앗과 같은 적수와 맞서야 되는데 
어찌 5개의 물맷돌 중에 3개를 까먹고 
두 개만 남아서, 이 두 개로 승부를 해야한다는 말입니까. 

복음이 세상에 처음 전해질 때 
주님은 교회에 5개의 직임을 주셨고, 다섯 개의 은사로 그 일을 하게 하셨는데 
후기기독교시대에, 다시 복음을 전해야 되는 시점에
주님이 주신 은사와 직분을 회복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잘못된 예

제가 비교적 일찍 젊은 시절에, 20대 초반에
주의 종으로 헌신할 때, 제게는 불같은 성령의 열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부목사로 일하는 도중에, 그 열정에 
제가 섬기던 분들이 물타기를 시도했어요. 
'물타기를 시도했다'는 말은 희석시켰다는 말입니다. 

'자네에게 그런 뜨거움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야, 내가 인정해. 
그러면 그것만 가지고는 목회를 할 수 없으니 
문화적인 동질성이 있어야 되고, 가능한 범위 안에 목회를 국한시키는 법을 배워야 된다.' 

그 논리는 쉽게 말하면 '성도들을 어디까지 데리고 갈 것이냐?'를 
재정립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멀리 데리고 가지 말아라. 
그들이 가고 싶어 하는 범위 바깥으로 데리고 가지 말아라. 
그들이 갈 수 있는 데까지만 데리고 가고, (그 너머는) 맛보기를 해 주는 것으로 족하다'

그래서 성도들이 어디까지 가야 되느냐?
'교회를 열심히 나오고, 설교를 잘 듣고, 헌금생활을 하고 
기독교인으로 살고, 교회에서 잡음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거기까지 데리고 가면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내 설교를 계속 듣기 원하는 위치에 
머물게 해야 된다' 
'어디에 있든지, 그들이 나를 의존하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성공한 것이다'
'네 설교와 네 은사를, 성도들이 필요로 하게 하면 성공한 것이다'

매우 영특한 목회철학입니다. 

그리고 그건 성도들이 내 청중이 되어서  *'제자'가 아니라
내 청중의 한계에 머물도록 하려는 아주... 
그래야 교회가 성장하고, 교회가 부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성도들을 어디까지 데리고 가고 싶어도 
능력이 안 되면 도리가 없지만 

그것도 못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데 
성도들이 따라와 주는 것만 해도 어디입니까.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성도들을 더 데리고 갈 수 있고, 
더 멀리 가야 되는 데도 불구하고 

'아니야, 나는 여기까지만 할 거야!' 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입장에서는 큰 손해가 되고 
그것은 예수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니고 
그것은 이 땅에 교회의 역할을 과소평가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올바른 예

종교개혁의 기본적인 원리 중에 하나가 
마르틴 루터가 95가지 조항을 써서 붙였다고 한 것처럼 
많은 기본적인 원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담을 허물게 했다'는 것이었어요. 

그 이전에는 성직자는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성역과 같아서 
모든 것을 성직자들이 독점 했습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티즘은 그 담을 허물어버렸어요.
그리고 500년이 지나갔어요.  *1517~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 담을 허무는 것이 현실적이냐, 가능할 것이냐, 
성직자들이 그것을 원할 것이냐, 평신도들이 그걸 원할 것이냐? 

그건 지속되는 질문이지만, 그건 장차 우리가 해결하면 되는 문제이고 
일단 이 담을 허물 수 있고, 허물어야 된다.. 라고 뜻을 정리했더니 
D. L. 무디와 같은 사람이 등장한 것입니다. 

D. L. 무디는 19세기말 미국의 최고의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 출신이고, 성직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래서 'D. L. 무디 선생' 이라고 부르지요)
 
그는 비록 목사님은 아니었지만, 당시 최고의 설교자, 부흥사가 됐어요.

한 번은 D. L. 무디가, 영국의 최고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 초청을 받아 가서 
그 전통 명문대학의 잘난 귀족집 아들들 앞에서 설교를 했는데 

시카고 출신의 평신도 설교자가, 미국 액센트로 설교를 하는 것을
옥스포드 대학생들이 듣고 흉을 봤습니다. (무디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 수학)

D. L. 무디가 다니엘에 대해서 설교를 할 때 
다니엘이란 이름은 미국 엑센트로 '대니얼, 대니얼' 이렇게 말했더니 
옥스포드 대학생들이 그대로 따라하며 흉을 보았어요.

그런데 무디 목사님이 설교 끝나는 시점에서 
'예수 믿을 사람은 앞으로 나와서 주님을 영접하고 기도를 받으세요' 했는데 
회중이 침묵 했습니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침묵하고 
모두가 긴장했습니다. 

'이 자존심이 센 학생들이, 과연 이 초청을 받고 앞으로 나올까?' 
그러나 무디는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계속 기다렸어요. 

성령이 계속 감동하시는 가운데 '예수 믿을 사람 앞으로 나오라' 그랬더니 
어떤 학생이 자켓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나가긴 나가야 되는데, 친구들 앞에서 자기 얼굴은 노출시킬 수가 없으니까 
자켓(양복상의)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일부 학생들도, 얼굴을 가리고 강단 앞으로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방식이었거든요. 
과거의 어느 영국의 목사님도 그런 식으로 사람들 보는 앞에서 
예수 믿으라고 한 적이 없는데   *올터 콜링, 강단 초청

믿기는 믿어야 되겠는데.. 창피하고 해서
그렇게 옷으로 얼굴을 가리면서라도 해서 앞으로 나왔다는 것이 아닙니까. 
놀라운 일이죠. 

과연 성도들을 어디까지 데리고 갈 것이냐? 
만일 그 옥스포드 학생들의 자존심과, 문화적인 수준과 
또 그들의 전통 차원에 국한시켜서 데리고 가겠다.. 라고 했다면 
결코 그들에게, 사람들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건 그들의 문화가 아니야, 그건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야, 
그건 당황스러운 일이야, 민망스러운 일이야, 
영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아!' 그렇게 했을 수도 있었는데 
D. L. 무디는 그 벽을 깨뜨린 것입니다. 

'무슨 상관이야?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지금 믿을 사람이 있다고 하셨어!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결코 기회가 없을 수 있어!

그러므로 과거의 전통이 어떻하든.. 
친구들이 보든 말든
체면이 상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구원 받을 날입니다!
예수 믿고 헌신할 사람 앞으로 나오시오!' 

그랬더니 그들이 순종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것이 '성도들을 어디까지 데리고 갈 것이냐?' 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을 어디까지 데리고 갈 것인가요?' 

평신도와 성직자 간의 담을 허물었더니
캐서린 쿨만 같은, 20세기 최고의 신유의 은사를 가진 부흥사가
여자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시골뜨기 캐서린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극장을 빌려서 부흥집회를 할 때 
사람들의 병이 낫는데 
은혜 받으러 온 청중 뿐만이 아니고 
안전을 지키기 위해 배치됐던 경찰관들 중에서도 병이 낫는 사람들이 있었죠.

그들은 예배 드리려 온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치안을 유지하라고 보냄 받은 경찰관들이 서 있는데 
성령이 운행하실 때 
그들도 병이 나았어요. 

성직자 와 평신도의 담을 허물었더니
이런 일이 생기더라.. 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물론 다른 장소,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부작용도 있었을 것입니다)

행2:17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모든 all' 이란 말을 썼죠. 

그 말씀을 적용하면, 
'성도들을 어디까지 데리고 갈 것이냐?' 할 때,
리미트, 한계점이 없어요. 

내 자신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좇아가는데 한계를 둘 수 없는 것처럼 
'성도들을 신앙안에서 어디까지 데리고 갈 것이냐' 하는 것도 
주님이 정하시는 대로, 인도하시는 대로 가는 거지요.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에녹 같이 주님 인도하는 대로 동행하는 것,
그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행2:17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성령이 임하시면, 예언을 하게 되어 있어요.
저는 방언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강요한다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예언은,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권장 한 것입니다. 
'나는 너희 모두가 예언하기를 바란다' 
고전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이건 문서형식의 점잖은 표현이지만, 
실제 말할 때는 '예언하라!'고 강조적으로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을 하려면 방언을 해야 돼요.
왜냐하면 방언이든, 예언이든
내가 의도하지 않은 말이 중심에서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의도하지 않은 말이 
성령의 감동으로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언이 막바로 나올 수도 있지만
방언이 먼저 나오고, 통역하는 그것이 또 예언이 될 수도 있죠.

(*혹자는 신약성경의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즉 설교나 말씀을 통한 권면이 '예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러나 꼭 거기에만 제한 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 66권에는 미래에 대한 일을 예언한 예도 아주 많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이게 꼭 점쟁이처럼 개인사의 길흉을 맞추는 차원은 당연히 아니죠)
 
여러분 '어디까지 갈 것이냐?' 
일단 시작을 해 봐야,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그저 교회 열심히 다니고, 헌금 생활 열심히 해 
그리고 내 설교를 항상 들으세요! 
여기까지 가면 되고, 그 이상은 생각 안 해도 돼요' 
여러분, 그건 누가 정한 목적지 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엡4:12절이 핵심구절입니다.
왜 주님이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자, 목사, 교사의 5직임을 주셨느냐?

그 목적이 12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도를 온전하게 한다' .. 성도를 성숙하게 한다.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죠.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 .. 여기서 봉사는 사역을 의미합니다. 
사역을 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사역이 있습니다.
그게 사역 ministry 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할 수 있는 사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봉사 하면 '주차장 봉사, 예배 안내 봉사, 주방 봉사, 청소 봉사'
이렇게 생각하기 쉬우나
본문에서 말하는 '봉사'는 '사역'입니다.

누가 나에게 배당을 해서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내가 어디서든, 언제든, 누구에게든 할 수 있는 
봉사, 즉 미니스트리 입니다. 

하나님이 주의 종들을 세우신 목적은 
성도들이 사역을 할 수 있는 범위까지 데리고 가기 위한 것입니다*설교 주제

그냥 청중의 차원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설교자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열심히 교회 나오면 된다.. 가 아니고 
이들이 '봉사(사역)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세우려 하기 위함입니다. 엡4:12

(*그러므로 본문의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자, 목사, 교사의 5직임은
오늘날 교회 안에, 목사, 전도사 세우듯이 직분을 임명함이 아니고
그 교회에 성도가 10명이든, 백 명이든.. 마치 은사처럼
성도 각각이 받은 직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에게만 국한되는 구절이 아니죠)

여러분, 이것은 21세기에 변하는 현실이
훨씬 더 실천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평균수명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100세까지 살게 되었는데 
인생 2막에, 인생 1막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성도들 모두에게 그런 마음을 주실 줄을 믿습니다.
마치 양초에다 불을 붙여 주면 
빛을 발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거듭나는 순간에 
주님이 우리의 영혼에 불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내 영혼의 촛불이 이미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이미 우리 속에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뜻,
하나님 나라에 대한 헌신, 
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그 때부터 알게되었습니다.

심지어 젊음의 방황, 젊음의 정욕으로 인해서 
'내가 예수님의 종이다' 라는 믿음은 있지만,
젊음의 현실 때문에,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에요.

그런데 주님이 그래도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외면하시거나, 내가 잊혀진 것이 아니고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은사 gifts 와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롬11:29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주님이 다시 문을 두드리실 것입니다. 

'두 유 리멤버 미, 나를 기억하느냐? 
나는 너를 기억한다. 내가 너를 잊지 않았다. 
그때 네가 수련회 가서 예수님을 영접 했을 때 
그때 내가 너를 나의 종으로 점 찍었다. 
그때 내가 너에게 이미 '너의 부르심'에 대해서 정한 바가 있다. 

너는 여러 가지 일로 인해서, 그동안 잊어버리고 
지나간 줄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그 부르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여전히 나는 기다리고 있다...' 

성도들을 어디까지 데리고 갈 것입니까? 
주님이 데리고 가라고 하시는데 까지 데리고 가야 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