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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길

LNCK 2023. 5. 17. 16:41

https://blog.naver.com/karamos/80194667250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길      마6:14~15, 요13:34  2010.11.28.

김명혁 목사  

저는 요사이 가는 곳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에 대한 설교를 자주 합니다. 
특히 금년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성자인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6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1950년 순교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고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분이시고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우리들도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18:33).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제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을 때, 어느 날 아침 남대문 네거리에 있던 
기독교 서점에서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을 사 들고 
제가 자주 가던 남산의 어느 숲 속에 가서 하루 종일 저녁이 될 때까지 
울고 또 울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그 책을 읽은 때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은 손양원 목사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전도사님 때부터 여수에 있는 애양원에 가서 
나환자들을 돌아보는 사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손양원 목사님은 나병 환자들과 함께 산으로 소풍을 갔습니다. 

도시락을 먹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환자들은 자기들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손양원 목사님께서 
혹시라도 자기들 때문에 나병에 걸릴까 봐 걱정을 하면서 
손양원 목사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아서 
자기들끼리 도시락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그것을 눈치채고 그들에게 가까이 와서 
그들의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려고 했습니다. 
나환자들은 안 된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그들의 도시락을 빼앗아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나병에 걸리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도 나병에 걸리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느끼고 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은 마지막 부분에서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가 사랑하던 두 아들을 총으로 쏘아서 죽인 
마귀 새끼 같은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하는 대신 
그를 용서하고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원수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하는데 
어떻게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미워하지도 않고 
죽이려고도 하지 않고 그를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고 사랑했을까?’ 

‘말로만 용서하고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자기의 양 아들로 삼았을까?’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세상에 있다는 말인가!’ 
그 후부터 손양원 목사님은 제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길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보배롭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가 귀하지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없는 진리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귀하지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없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것도 귀하지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없는 천사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1, 2).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죄악이 가득한 니느웨 성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며 사랑하셨고, 
악독이 가득한 애굽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며 사랑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며 사랑하셨고, 
이방 아람 사람 문둥병자 나아만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며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모든 죄인들과 모든 세리들과 모든 창기들과 
모든 병자들과 모든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최고로 나타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제일 먼저 그 당시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간주하고 멸시하던 
나환자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폈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마8:2). 

우리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의학적으로 저주 받았다고 생각하는 
병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용서하고 사랑하기는커녕 
멀리하고 멸시하고 정죄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문둥병 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마8:3). 

손을 내밀어 대시는 것은 그 사람을 친밀하게 접촉하시는 
사랑의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환자들이나 신종 바이러스를 지닌 병자들을 만나면 
병균이 전염될까 봐 가까이 가서 손을 대기는커녕 
멀리 피하며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문둥병 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치유와 축복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둘째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두 번째로 
이방인 백부장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폈습니다.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마8:6). 

로마인 백부장은 그 당시 유대인들을 정복하고 착취하던 
반 민족주의자의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의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일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반 민족주의적이고 반국가주의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일본 주둔군 사령관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 민족주의자인 로마인 백부장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폈습니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마8:7). 

그리고 칭찬과 축복의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8:13).

▲셋째로, 예수님께서 얼마 후에 또 한 사람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창녀였습니다. 

분노와 증오에 찬 군중들에게 둘려 쌓여 돌에 맞아 죽게 된 창녀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사실 간음 현장에서 잡힌 사람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돌에 맞아서 죽게 된 창녀를 바라보시면서 
긍휼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아마 그녀가 길거리의 창녀가 된 배경에는 가정적인 불행이 있었을 수도 있고 
정서적인 장애가 있었을 수도 있고 
악한 사람들에 의해 창녀로 팔려 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예수님은 돌에 맞아서 죽게 된 불쌍한 여인에게 
긍휼의 마음을 품으시면서 성난 군중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리고 벌벌 떨고 있는 그 여자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8:10). 

그 여자는 너무 놀라고 너무 고마워하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요8:11). 
그 간단한 대답에는 그녀의 신앙고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아마 통곡을 하면서 그렇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과 축복과 권면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8:11). 

그 여자의 운명은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도저히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축복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넷째로, 예수님께서 또 한 사람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야말로 인간 쓰레기였습니다. 
눅8:2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나간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문자적으로 일곱 귀신 들려서 
미쳤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도덕한 길거리의 창녀였다는 것입니다. 
셋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가지 죄악에 사로 잡혔던 
죄인 중의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 쓰레기였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폈습니다. 
그와 같은 행동은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판단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드릴 수도 없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귀신의 쇠사슬에서 건져내셨고, 윤락의 늪에서 건져내셨고, 
죄악의 덫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일 먼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고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부탁하신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넘치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다섯째로, 예수님께서 그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또 한 사람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행악자 강도였습니다. 

행악자와 강도는 윤리 도덕적 관점에서는 물론 국법의 관점에서 볼 때 
도저히 용서를 받을 수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국법 집행 정신에 위배되는 듯한 행동을 취하셨습니다. 
사형에 처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 강도를 향해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말씀을 하셨고 
축복을 선언하시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2). 

사실 그 강도는 구원 받을 자격이 전혀 없었고 
축복 받을 자격이 전혀 없었던 행악자요 강도였습니다. 
정식으로 회개한 일도 없었고,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일도 없었고, 
정식으로 착한 일을 행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날강도에게 예수님께서 낙원에 들어가는 
즉 천국에 들어가는 축복을 주셨는지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날강도가 한 일은 죽어가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1, 42). 

물론 일종의 회개와 일종의 믿음을 고백하는 말이기는 했지만 
너무나 부족하게 보이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보잘것없는 회개와 믿음의 고백을 보시고 
그 강도에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2). 

이것은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넘치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여섯째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또 한 사람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또 배신하고 또 배신했던 베드로였습니다. 

사실 배신자는 하나님 나라에는 있을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저버린 사람,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사람은 
천국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요12:48).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배신하고 저주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세 번씩이나 만나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주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즉 물고기 잡으러 디베랴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허탈감과 좌절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들 같았다면 베드로가 그 꼴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면서 
베드로를 비난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배신자 베드로를 향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태도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디베랴 바다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허탈감과 좌절에 빠져있던 배신자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괘씸한 배신자’라고 야단을 치는 책망의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불쌍하게 보시는 눈빛으로 "예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엄마 말 듣지 않고 나가서 놀다가 넘어져서 상처를 입고 우는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말과 같은 부드러운 말씀을 했습니다. 

"예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가득한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부활하신 주님께서 배신자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므로 
저들의 믿음과 저들의 사랑과 저들의 사명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넘치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일곱째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또 한 사람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악독한 사람이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가둔 악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이유중의 하나는 사울과 같은 
악독한 무리들을 잡아 넣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하늘로부터 저주와 심판의 불을 내리시는 대신 
다음과 같은 호소가 섞인 부드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사울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지정의에 호소하시는 듯한 황송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우리들 같으면 그런 악독한 독종 죄인은 
사람으로 인격으로 취급도 안 했을 것입니다. 
대화를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호소하는 말은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마귀새끼로 취급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울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면서, 사울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회개할 수 있는 생명의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사울이 너무 놀라서 "주여 뉘시오니까" 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어떻게 하여야 할 것까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가득하신 분이었고 
너무너무 친절하신 분이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5, 6). 

결국 사울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사울의 삶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가장 위대한 기독교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넘치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설교도 하셨고 이적도 행하셨고 놀라운 일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중에 가장 귀하고 가장 보배롭고 
가장 아름다운 일은 우리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용서와 사랑의 길로 걸어가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기독교는 진리만의 종교도 아니고 비판만의 종교도 아니고 
심판만의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비극적인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타난 곳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아래서 하늘과 땅이 만났고 동과 서가 만났습니다. 

십자가에는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용서가 나타났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유창한 설교보다 멋진 행사나 프로그램보다 
예수님께서 친히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셨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길로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들이 이런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지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저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때 
그리고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실천한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 등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때 
우리들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조금씩, 조금씩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가장 분명하고 진하게 나타내 보인 믿음의 선배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인 사람이 성 프랜시스였다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1182년 이태리 앗시시에서 태어났는데 
한 평생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풀면서 살았습니다. 

프랜시스는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동정하고 품으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는 나병환자 수용소를 찾아가서 그들의 손에 일일이 입을 맞추며 그들을 품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산적 같은 흉악한 자들에게도,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아니 이단들에게도 미쳤고, 
사나운 이리에게도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에게도 
아니 해와 달과 별들에게도 미쳤습니다. 

어느 날 나병환자 수용소에 성질이 사납고 포악한 환자 한 사람이 
자기를 간호해주는 형제들에게 대들면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이 더러운 위선자들아, 나는 저주 받은 문둥이다. 
예수의 사랑도 너희들의 사랑도 다 거짓되고 헛된 것이다.” 
몸에 흐르고 있는 고름을 손바닥으로 훑어서 형제들에게 뿌리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을 본 프랜시스는 그에게 다가가서 욕을 퍼 붓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계속해서 욕을 퍼 붓는 그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가 원하는 대로 다 해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고름투성이의 몸뚱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어라.” 
프랜시스는 아무 말하지 않고 깨끗한 물에다 허브를 넣어 
불에 따듯하게 데운 다음, 그 물로 나병환자의 몸을 
머리에서부터 차근차근 씻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프랜시스의 손이 닿는 데마다 
그의 피부에서 더러운 고름이 걷히고 상처들이 깨끗하게 아물어졌고 
동시에 그의 영혼도 깨끗하게 씻어지면서 
그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슴을 치고 울면서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프랜시스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삶을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은 모든 포악함과 더러움과 미움을 녹여버리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생애와 사역에는 많은 치유와 이적이 나타났지만 
그는 한번도 이적을 그의 전도의 방편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이적을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만이 그의 삶의 방식이었고 전도의 방식이었습니다. 
프랜시스는 사람과 피조물 모두를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고 사랑하고 품는 화해와 평화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둘째로,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인 또 한 사람이 손양원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믿음은 나환자 사랑과 원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던 믿음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공산 폭도들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순천 경찰서 뒷 마당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예수를 증거하다가 총살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10월 25일 반란군에 의해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양원 목사님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10월 26일 두 아들의 시체를 담은 관이 애양원 뜰에 도착했을 때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관 위에 엎어져 울부짖으며 비통해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비통함이 그렇게 컸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총살한 그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양원 목사님은 계엄 사령관에게 딸을 보내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안 가겠다고 반항하며 대드는 딸 동희를 설득하여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듣지 않으려는 딸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딸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국군 심문자에게 그대로 전하므로 처형되기 10여분 전에 원수를 살려냈습니다. 

동희양은 취조 군인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동희양의 말이 끝나고, 동희양이 울음을 터뜨리자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취조를 하던 군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하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 냈습니다. 

안재선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후에 손동희 권사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이 광경이야말로 오늘까지 내 눈 앞에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의 한 토막이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안재선은 살아났습니다. 
안재선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를 자기의 양 아들로 삼아 부산고려성경 고등학교에 보냈습니다. 

1950년 10월 13일 애양원에서 손양원 목사님의 영결식이 거행되었을 때 
옷을 찢으며 통곡하는 1천 여명 애양원 식구들 중 더욱 더 슬피 
통곡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안재선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정신과 삶을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인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원자탄이었습니다.

▲셋째로,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인 또 한 사람이 한경직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는 1936년경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1939년에는 고아들과 노인들이 함께 기거할 수 있는 공동체적 복지 시설인 
'보린원'을 만들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1945년 10월 월남 후 12월 2일 서울 저동에 
베다니 전도교회를 설립하고 월남하는 피난민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동시에 양식과 거처할 숙소를 마련하는 일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1950년 6월 서울을 떠나 피난 길을 가면서도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밥 피얼스 목사와 함께 기도회를 개최하고 
피난민들을 돕는 일을 하다가 피얼스 박사로 하여금 미국에 돌아가서 
월드 비젼을 창시하여 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의 피난민들을 돕게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락 보린원을 비롯해서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90년 1월 17일부터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폭 넓게 펴나갔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사랑했습니다. 
그는 긍휼의 사람, 용서의 사람, 사랑의 사람, 봉사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래오래 남아 있습니다.

마치는 말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복음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에 우리들에게 해를 끼치는 
소위 원수들에 대한 분노나 증오나 저주는 자리 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이나 모슬렘이나 탈레반에 대한 분노나 증오나 저주도 
자리 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본래부터 원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에는 본래부터 원수에 대한 미움도 증오도 저주도 없었습니다. 
데모도 시위도 없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해 보이고 
약해 보이는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장 생생하게 나타난 시대는 처음 300여 년 동안이었습니다. 
결국 초대교회 성도들이 나타낸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그리고 순수한 순교의 죽음으로 로마 제국이 무너져서 기독교 제국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복음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아무도 우리를 의심하거나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천사의 말도 아니고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도 아니고 
시청 앞에 모이는 몇만 명의 집회도 아니고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부스러기를 
우리 몸과 마음에 담고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까지 부탁하시고 또 부탁하신 것은 
스승 되시는 예수님 자신처럼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권면하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또 권면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4:32).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3:13,14).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2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10).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가장 보배롭고 
가장 아름다운 길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길입니다. 
사실 우리 죄인들이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가슴과 삶에 지니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길로 걸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를 계속해서 바라볼 때 십자가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조금씩 받아서 
몸과 마음에 지닐 때 우리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흔적을 조금씩, 조금씩 
지닐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마음에 부어주셨을 때 
비로소 사랑의 노예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에도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과 
십자가에 달려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조금씩, 조금씩 
부어주셔서 우리들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흔적을 지니고 나타내며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길로 걸어갈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분노와 증오와 저주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이 조금씩 녹아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