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보컴 이라는 아주 유명한 신약 학자가 주장한 이야기입니다. 이 주장은 <예수와 목격자들>이란 책에 나오는 이론인데요.
리처드 보컴에 따르면 마가복음이 ‘고대의 전기문학’ 형식 이거든요.
그런데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어떤 전기문학을 편찬할 때 이 전기문학을 누가 썼는가? .. 하고 저자를 표기하는 방식이 따로 있답니다.
오늘날 우리는 책의 표지 앞에 저자 이름부터 밝혀 놓는데 고대의 책들은 저자를 일부러 밝히질 않아요. 누가 썼는지 몰라요.
그런데 본문 안에 이거 누가 썼는지 알게끔 그런 장치를 해놓습니다. 그 장치가 뭐냐?
책의 맨 처음에 이름이 나오는 사람하고 책의 맨 마지막에 이름이 나오는 사람.. 그 사람이 그 책을 쓴 실질적인 저자다.. 라는 보컴의 주장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죠. 이게 고대의 하나의 관습이었어요.
그래서 이 이론을 마가복음에 딱 적용을 해보니까 마가복음의 제일 먼저 이름이 나오는 사람이 누구냐면 막3:16절에 시몬(베드로)입니다. (*세례요한은 제외, 당연히 저자 아니라서) 그 앞에 나오는 인물들도 여럿 있지만, 이름이 안 나오고, 최초로 나오는 이름은 시몬(베드로)입니다.
그럼 마가복음의 제일 마지막에 이름이 나오는 사람은 누구냐? 16:7절에 보면 역시 ‘베드로’가 맨 마지막에 이름이 나옵니다.
참고로, 원래 마가복음은 16:8절에서 끝나요.
이런 점을 봤을 때 마가복음의 실질적인 저자는 베드로라고 할 수가 있죠.
△만일 이 이론이 옳다고 한다면 마가복음은 따지고 보면, 베드로의 ‘목격자적인 진술’을 마가가 자기 나름의 문학적인 방식, 신학적인 방식으로 풀어쓴 것입니다.
베드로가 실제로 현장에서 보고 듣고 배웠던 이야기를 마가에게 이야기해줬고 마가는 그 자료를 가지고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복음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마가복음은 ‘목격자의 진술’입니다.
예수님이 주후 30년 경에 돌아가시고 마가복음이 주후 60년대에 쓰여졌다고 한다면 30년의 간격인데, 이 30년이나 지난 역사 기록물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 .. 라고 하는 비평학계의 반박 앞에서
우리가 성경의 영감성과 역사성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그것은 마가복음이 ‘목격자 베드로의 진술’이기 때문이죠.
예수님하고 삼 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베드로가 목격했던 것을 진술한 것을 마가가 기록한 거예요. ‘목격자적 진술’이죠. 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는 거죠.
▲아마 <마가복음>은 이렇게 해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하루는, 로마교회의 교인들이 마가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마가여,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해 주실 수 있는가요?’
마가가 ‘무슨 도움이 필요한가요?’ 그들은 말하기를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의 설교를 영구히 보관하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에 관한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해 주세요. 왜냐면 베드로가, 앞으로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베드로는 정말 당국자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지금은 폭군 네로 황제 때니까요.” 실제로 베드로는 순교했죠.
때문에 그들은 말하기를 “베드로의 설교를 문서로 기록해 주세요. 왜냐면 그는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던 사도들 중의 한 분이고, 우리는 그의 설교를, 문서로 남기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생각지 못한 결과로 변화되어, 마가나 베드로도, 이 책이 이천 년이나 연구되어지고, 또 한 전 세계에서 읽혀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 복음서는 처음에 사람들에 의해 ‘베드로의 복음서’로 불렸는데, 왜냐하면 사실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사복음서가 4권인 것이, 오히려 복음서의 진실성을 증명한다
복음서가 4권이 있다고 하는 것도, 그런 면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있죠. 네 가지 복음이 있는데 똑같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데 저자에 따라서 조금씩 조금씩 다르게 기록하죠.
그래서 무슬림들은 이거 가지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우리 꾸란은 한 권 밖에 없는데, 너희는 네 개씩이나 있냐? 사람이 지어낸 거 아니냐? 신이 계시했다면 한 가지 버전만 있어야지, 왜 4가지 버전이 있냐?'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했는데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했거든요. 그럼 뭐가 진짜냐는 거에요.
'예수께서 실제로 하신 말은 뭐냐?' 이러고 이제 공격을 해옵니다. 꾸란은 그런 거 없다는 거에요. only one version 이니까!
여러분, 여기 진짜 중요한 맹점이 뭔 줄 아십니까? <로미오와 줄리엣> 소설도 한 가지 버전 밖에 없다는 거예요.
△역사와 소설을 가르는 기준이 뭔지 아세요? 역사는 여러 기록들이 존재하는데, 소설은 한 가지 버전 밖에 없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다른 버전들을 보신 적 있으세요? 셰익스피어가 한 버전 밖에 쓰지 않았죠. 이게 소설이에요.
그런데 역사는 그렇지 않아요. 역사는 일어났던 일을 여러 명이 목격한 거기 때문에 다양한 기록이 존재합니다. 존재해야만 해요.
자 예를 들어서 중국에 <삼국지> 라는 소설이 있죠. 나관중이 쓴 <삼국지> 소설은 이렇게 각색을 많이 한거지만 그래도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 유비, 조조 등은 실존 인물이라고 그 역사성을 인정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기록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관중의 <삼국지>라는 책은 소설이지만 그것 말고도 <역사삼국지>도 있고, 비슷한 역사책이 많아요. 여러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아~ 이 사람은 실존인물이야!'
물론 소설에서 많이 이렇게 그렇게 픽션을 덧붙이긴 했지만 거기 등장인물들은 실존인물 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이 동의하는 거에요. 이것이 역사와 소설의 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꾸란>이 한 가지 버전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진리의 증거가 아니라 역사학적 입장에서 보면, 소설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거죠.
<로미오와 줄리엣> 또한 한 가지 버전 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4가지 버전이 있다고 하는 것은, 역사의 기록이라고 하는 반증입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실제로 행하신 거에요. 하나님께서 하늘을 뚫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사셨어요. 죽으시고 부활하셨어요. 그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했어요.
그 중에 몇 명이 그 목격한 것들을 기록한 거에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그래서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할렐루야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역사의 기록' 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아멘!
어쨌거나 성경을 보면, 뭐 구약도 그렇잖아요. 구약도 보면 <열왕기서> 와 <역대기>을 보면, 같은 내용들을 기록하죠. 그런데 표현들이 조금 달라요. 왜요? 역사니까! 여러 사람들이 보고, 각자 조금씩 다르게 기록한 거죠.
그래서 오히려 복음서가 한 권이 아니고, 네 권인 것이 성경의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해 주는 놀라운 섭리가 되는 것입니다.
◈마가가 제시하는 복음의 개요 outline 막1:9~15 (중요해서 재발행)
◑1. 예수님의 세례 受洗
▲마가복음의 서두 마가가, 마가복음을 쓸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게 아주 독특해요.
마태는 구약과의 연관성, 누가는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을, 이 세상의 역사적 지평 위에서 보고 있고, 요한은 영원과의 연관성에서 복음을 보고 있다면, 마가는 어떤 연관성에서.. 복음을 보고 있는 겁니까?
마가는, 직접적으로! 지금 현재 실존하고 있는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복음이 무엇이냐, 어떤 의미이냐?’를 보고 있는 거예요.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마가복음의 서두부터 곧바로 제시하는 겁니다.
마가복음은 Setting을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마태, 누가, 요한은 세팅을 고려한다는 뜻 곧바로 ‘복음이 나 자신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이냐?’를 제시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직접적 제시가.. ‘예수님의 세례 받음’ 사건을 통해서 마가복음의 최초 사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날 일들을, 즉 복음을 받아들일 때 일어날 내용들을 그 윤곽을 분명하게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마가복음은, ‘지금 현재 나를 문제 삼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현재 내가 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아예 마가복음의 서두에서, 윤곽을 뚜렷하게 제시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내가복음을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①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것은 장차 복음을 받을 사람들이, 세례 받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세례는, 자아의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예수님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얘깁니다.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는 겁니다.
②이때 ‘하늘이 갈라졌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도, 하늘이 갈라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에게는, 신비한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신비한 역사란.. 그 하늘 안에 머물고 계시던 성령께서, 예수님에게로 비둘기같이 성령이 임하십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성령이 임하십니다.)
③이렇게 성령이 주어지면서, 곧바로 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는 거예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1:11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이 음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인데, 여러분들은, 이 복음의 은총 ①②③을, 제대로 찾아 누리고 계십니까?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게.. 성령의 감동으로.. 내게 확실히 믿어지면, 내 허전하던 빈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꽉 채워지게 됩니다.
채워질 때는 언제나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뭐 새삼스러운 얘기냐고요? 아주 새삼스러운 얘깁니다. 현재 기독교의 상황을 볼 때, 너무나 새삼스러운 얘기에요.
왜냐하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 지나칠 정도로, 칭의!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여김을 얻었다라고 하는 칭의’에만 복음의 무게중심을 두고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칭의는, 복음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일어나는 일에 시작에 불과한 것이에요. 그게 복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주변에 보면, ‘칭의’ 받은 것은 믿고, 자기가 또한 알겠다는데.. 속이 허하고, 빈속인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칭의’만 강조해서 그렇습니다.
▲마가가 제시하는 복음은, 칭의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칭의는 복음을 설명하는 한 측면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음을 제시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은 이런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삶에 참 만족, 배부름이 있게 됩니다. 물론 ‘믿음으로 의롭게 칭함 받았다는 칭의’도 필요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 되었다’는 그 자부심..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찬송도 있잖아요.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세상 사람들 부럽지 않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영국 왕인 루이스가 날 부러워하네!’
◑칭의 말고, 연합도 있습니다.
죄 사함 이후에, 하늘이 갈라지면서 성령이 임하시면서 성령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로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내 영혼의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허전함을 채워주는 것, 이게 <마가의 복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칭의’에만 초점을 두는 겁니다. 저는 이게 사도 바울이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도바울이 칭의에 관한 얘기를 엄청 많이 합니다마는, 바울의 전체 서신의 사상이, 오직 복음을, 칭의에만 무게 중심을 둬서 이해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루터가 ‘칭의’를 발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후대의 우리가 너무 거기에만 집착하는 것은.. 오류일 수 있습니다. ‘칭의’와 함께, 복음의 여러 측면들을, 다양하게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거에 비해서 칼빈은, 칼빈의 신학사상 전체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축약할 수 있도록 사상을 전개한 것은, 루터의 사상에 비해서 너무나 발전적이고 더 균형 잡힌 사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칭의에만 머물지 않고,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 사상이 넘어가요.
그래서 여러분, 마가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였느냐?’ 그러면 당신도,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축복이 당신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지식이 아니라, 성령으로 깨닫게 되지만요! 그래서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내리셨잖아요.
▲그래요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들이 ‘나 구원 얻었네, 너 구원 얻었네, 우리 구원 얻었네!’ 좋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삶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 구원의 감격도.. 처음에는 놀랍지만.. 지나면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삶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것들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돈 좀 많이 벌어봐야지, 건강하게 오래 살아봐야지, 하는 일마다 형통해야지..’ 합니다.
이런 현상들이 생기는 것은,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이 음성을 듣지 못해서, 자기 삶에 만족과 배부름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한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너무 ‘칭의’ 하나만 강조하기 때문이고요..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고, 복음의 과정 중에 하나에 속하는 것이라는 얘기에요.
마가는 지금 현재 복음이 내게 주는 의미를 들이대고 있고, 마가복음 전체의 의미가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에,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일어날 일들의 내용을 우리들에게 제시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신 예수님의 예를 통해서요!
그 복음의 첫째 의미는, 세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둘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2.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의미
▲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과의 교통의 관계에서, 하나님으로 가득차신 상태, 하나님으로 만족하신 상태에서.. 광야로 나가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겁니까? 예수님의 광야 40일 시험은, 출애굽기 광야 40년과 연관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인간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일을 위하여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먹고 살고 입고 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겨집니다.
사람들이 내 일이라고 생각했던 Job이, 하나님의 Job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이제 나의 Job은, 광야에서 무엇이 됩니까? 오직 하나님에게만 신경을 집중시키는 겁니다. 아무것도 다른 일이 없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복음을 받아들인 자에게서 일어나는 일인 것을, 주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하며, 시험 받으시는 동안에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마귀의 시험이 뭐였습니까? 세 가지 모두 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세상에서 인기 얻고, 세상에서 높은 사람으로 존귀함을 얻고, 명예 얻고 인기 얻고, 잘 먹고 잘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겁니다.
이 세상의 경계 안에서 잘살 수 있는 길을.. 마귀가 시험할 때.. 예수님께서 그 모든, 세상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것은 내 Job이 아니다’ 하고 뿌리치시면서 시험을 이겨내십니다.
이게 바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일어날 일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들은 세상에서 뭐하고 사느냐?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하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당신이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땅에서 이루고 싶은 일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로 만족하니까. 광야 시험을 통과하면서.. 내 모든 job을, 주님께 다 맡겨버렸습니다.
(그 후에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처럼) 이제 하나님아버지께서 이루고 싶은 것만 내 삶에서 일어나게끔 되어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