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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LNCK 2023. 5. 21. 08:53

(S) 사도 바울을 버리고 예수 믿는 자 - YouTube

◈사도바울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딤후1:15~18    23.04.23.

◑서론

'사도바울을 버리고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잘못된 일이죠)
그 일은 지금 우리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지금 튀르키예 서쪽 끝입니다. 

이 '아시아'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모두 이 아시아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무려 3년이나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 에베소 주변 아시아 지역으로 복음이 많이 전파됐었죠. 

그래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본문 편지(딤후)를 쓰실 당시에 
사도바울은 지금 이탈리아 로마에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요.
그러니 '아시아에 있던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도바울을 버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버렸다'는 말씀은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두 번째 갇혀 있는 상태, 
이제 순교가 확실시되고 있는 그런 상태에서 
로마를 방문한 아시아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바울을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바울은 감옥에서 외부 사정을 어떻게 아느냐?
사도바울의 감옥살이를 시중 들고 있었던 여러 사람, 
누가 라든지 또 오늘 본문에 보면은 오네시보로 라는 사람도 있었죠.

그들이 사도바울이 갇힌 감옥을 들락거리며 
외부 사정을 이야기해 주겠죠.  
'아시아 출신 성도들이 누가 누가 로마에 왔었다' 라는 
얘기를 사도바울이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로마를 찾아온 아시아 사람들 중에 
아무도 감옥으로 사도바울을 방문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없었지만 
당신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아시아 출신으로서는 오네시보로 만
유독 부지런히 감옥을 들락거리며 사도바울을 도왔던 모양이에요. 
근데 지금은 그가 다시 에베소로 돌아간 그런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한 이유가 뭡니까? 
감옥에 갇히고 이제 순교가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이렇게 자기 자신이 감옥에 갇히고 순교하게 될 경우 
이것이 디모데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디모데 후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래서 1:7~8절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세상을 향한 두려움이 아니다. 
세상을 향해서 능히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이다.'  

박해를 당하면서도, 우리는 박해하는 사람조차도 사랑할 수 있고 
박해를 당하는 입장에서도 나 자신을 위한 이익을 추구하는 일에서는 
절제, 아주 극도로 절제된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이지 
이 세상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피하거나 도망치거나 회피하거나 등돌리라고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지 않는다.' 
이런 내용의 말씀을 쓰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제자 디모데나, 디모데후서를 읽는 후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박해나 순교의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원하시면서 
쓰고 있다는 것이예요. 

▲근데 이런 의도로 본서를 쓰시는 가운데 
사도바울을 버린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거명합니다. 

그러니까 이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디모데도 잘 알고 있었던 에베소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 되죠. 

그리고 굉장히 디모데와 사도바울 모두에게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사도바울을 버린 것이 충격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와는 다른 모습을 띄고 있는 오네시보로 라는 사람의 예를 듭니다. 
아마 오네시보로는 디모데후서 4:19절에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는
말씀을 보니까, 에베소에서 오네시보로가 자기의 집을 형제들이 모이는 
장소로 제공을 한, 가정교회를 뒷받침한 사람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오네시보로가 그렇게 잘 사도를 섬기고 도와서 
사도바울이 주의 긍휼이 임할 것을 바랍니다. 딤후1:16

더군다나 주의 재림을 이 당시 사람들은 가깝게 느끼고 있었죠.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실 때 
'오네시보로에게 큰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원한다' 라는 
그런 간구를 하게 되는데요. 딤후1:16

◑본론 / 신자들이 바울을 버리는 이유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아시아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을 버린 것에 대해서 
이렇게 섭섭함을 느끼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라는 것이에요. 

감옥에 갇힌 자기 자신을 관심가지지 않았다고 드러내는 이 불편한 심기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거짓 믿음과 사도바울을 버리는 일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요? 
사도바울을 버렸다는 것이 '믿음을 버렸다'는 얘기와 같은 것일까요?  

'사도바울은 버렸지만, 그로부터 들은 십자가 복음은 잘 간직하고 있으면서 
십자가를 생활화한다...' 이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이런 질문들을 우리가 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답을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죠. 
정말 사도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을 잘 받아들여서 
내가 놓여있는 생활 현장이 어디든지 

에베소 사람이라도, 아시아 출신 사람이라도, 
그 아시아에 있다가 로마에 왔다면 
로마라는 생활 현장에서 나는 또 십자가를 붙잡아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게 뭐예요? 
로마에 있을 때, 로마라는 생활 현장에서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내 마음이 그 현장에서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겁니다.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그래서 로마 현장에, 로마라는 도시 안에 내 몸이 있을 때 
내 마음은 하늘에 가서 머무르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이 짐작하시겠지만, 그 당시 로마는 이제 
그리스도인 박해의 진원지가 됩니다. *AD64년 로마화재 후

가장 혹독하게 박해가 노골화되고 있었던 현장이 당시 로마였다는 거예요. 
근데 그 로마에 왔을 때, 그 그리스도인 박해 때문에 
사도바울이 우두머리격으로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죠. 

근데 '내가 십자가복음을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면 
부겔로와 허모게네 같은 사람들이, 십자가복음을 생활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박해가 심한 현장에서도,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근데 이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바울을 한번 찾아서 인사조차 하지 않고 
그 멀리 아시아에서 그리스 반도를 지나, 마케도니아 지방을 지나서 
이탈리아 로마까지 왔으면서.. 그냥 아시아로 돌아가 버렸다는 거예요. 

영적인 불모지에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십자가 복음을 전해듣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에게 그 복음을 전해준 사도바울이 갇혀있는 로마까지 와서 
그냥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이 사실을 통해, 
'이 사람들 모두가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지 않는다'라고 본 거예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본문에 보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고 
그런데 이 상황을 사도바울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디모데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고 
오네시보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근데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감옥에 갇혀서 순교하는 게,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근데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대표적으로 허모게네와 부겔로,
이 사람들이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의 상황을 
'그럴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질 못한다는 거예요. 

디모데후서를 쓸 당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바울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귀절이, 딤후4:10절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이게 여러분 기가 막힌 말입니다. 

데마는, 골4:14절이나 빌레몬서 같은 데 보면, 그게 다 옥중서신이에요. 
바울이 로마감옥에 1차투옥 되었을 때 쓴 서신들입니다. 

그런데 1차투옥은 61~63년까지 이루어졌고, 지금은 67년이에요. 
로마감옥에 2차로 갇힌 상황이죠. 

그 3~4년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1차투옥 때 쓴 옥중서신인 골로새서나 빌레몬서에 보면

데마는 그냥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사도바울의 동역자로 소개되어 
문안인사에 끼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동역자로 여겼던 사람(데마)이, 63년도까지 1차 투옥 당시까지, 
그 후 3~4년 사이에, 2차 투옥 당시에,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거죠. 고향으로 간 거죠.

바울은 그 상황을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를 버렸다'고 얘기해요. 
그래서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가 
사도바울을 다 버리고 떠나가게 됩니다. 

여러분 왜 부겔로와 허모게네처럼 되고, 데마처럼 될까요? 
'세상을 사랑한다'는 이유가 먼저 첫 번째로 꼽을 수 있을 것이에요. 

'세상을 사랑한다'는 게 뭡니까? 
십자가에서 죽기를 중단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를 중단했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이유가 뭡니까?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은 다음에는, 부활승천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 됩니다. 
자기 마음이! 

그런데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이에요.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대신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에요. 

제가 며칠 전에 어느 목사님 부부를 맞이해서 집사람과 함께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생활화'가 인생의 답이고, 영적 모든 문제의 답이라고 믿으시고 
제 설교방송을 들으시며, 어떻게든지 십자가 생활화에 매진하려고 애를 쓰시는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그 분과 말씀을 나누는 중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어요. 
'이분은 왜 십자가 생활화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직접적으로 여쭤봤어요. 
'목사님에게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궁극적 목적이 뭡니까?' 
한참 얘기가 되는 중에, 그걸 확인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런데 표정이 당황합니다. 결국 그분은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용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결국 십자가 생활화의 궁극적 목적이 
이 세상을 떠나 우리의 마음이 하늘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만을 기쁨과 만족으로 여겨야 된다..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그렇게 그 내용대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합니까. 

그런데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렸어요.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목사면, 
십자가 생활화의 궁극적인 목적이 뭐냐는 질문 앞에서 답이 나오는데 
1초도 걸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느냐? 
많은 십자가 생활화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음으로써, 
이 세상을 하나님이 (죽은 나를 통해서) 살아가시도록 하기 위해서죠.

그런데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십자가를 붙잡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제가 아는 어떤 사이비 교단도 그렇게 십자가를 믿습니다. 
그 이단 사이비에 속한 사람들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것은 
아마 누구도 못 당할 정도에요.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하늘이 끊겨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간다'는 그 생각이 없는 거예요. 

내가 세상에 대해 죽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십자가 생활화를 중단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십자가를 붙잡는 방식도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붙잡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에요. 

'내가 십자가로 내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았다. 이제 의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내 마음대로 세상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도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런 식으로 살고 있는 거에요.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도 
내 능력이 죽은 대신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해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멋지게 살고 싶어서! 
(기복주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십자가에서 죽으려는 사람이 있죠)

결국 부겔로와 허모게네 처럼 되는 이유가 뭐예요?
데마를 통해 힌트를 얻는 것처럼, 
결국 사도바울을 버린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한다는 거죠.
십자가 생활을 안 하겠다는 거에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 되고 
그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저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바울을 버리는 거죠. 

사도바울이 영향력 있는 선생으로서 전도자로서 사역을 할 때 
동역자까지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생활화, 그거 한 가지만을 붙잡고 말씀을 전하는 저 같은 경우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어요. 

저를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저를 버리는 이유는 
십자가 생활화를 버리는 것이에요. 왜요? 
세상을 사랑하니까, 세상을 떠나고 싶지가 않아요. 

-사도바울이 전하는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있고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도바울을 받아들인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전하는 십자가 복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게 요즘 우리 기독교 종교인들의 병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아요. 예수님을 찾지 않아요.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 잘하는 목사를 찾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그래서 그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날마다 자기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떠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그 사람들은 
절대로 사도바울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서 
십자가를 통하여 가야 된다고 말하는 사도바울(사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반드시 때가 되면, 사도바울을 버립니다. 

그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히거나 이런 일이 벌어졌거나 
아니면 다른 선생들이 나타나서 이상한 얘기를 하거나 하면 
그 사도바울을 버립니다. 

지금 제가 볼 때 과거에 우리의 동료였던 기독교 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누가 누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잘하는가(사람)에 관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거죠. '누가 말을 잘하느냐?'

십자가 복음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아요. 
'누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잘 하느냐?' 그 사람을 따라 몰려다닙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거나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다 떠나게 됩니다. 무리요, 군중들이라서 그렇지요.

여러분들은, 이렇게 여쭤보기도 민망하지만 
-제가 전하는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제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까?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절대로 저를 버리지 않습니다. 
제가 십자가 생활화를 버리지 않는 한, 
저를 통해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있는 분들은, 저를 버리지 않습니다.

근데 제가 십자가 생활화를 전하는데,
시중에 못 들어 본 것 같은 설교를 하거든요. 
'야 이 목사 누구야?' 하면서, 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또한 저를 쉽게 버릴 수도 있습니다. 

1차 투옥 때는, 그 감옥에 갇힌 이유가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문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데마가 옆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가택연금' 이었죠. 행28장

그러니 사람들이 막 찾아오고 그랬으니까 
눈에 보이는 현상적으로 사도바울의 영향력이 여전히 있다고 보였으니까 
데마 같은 사람이 여전히 바울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2차 투옥 때는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건 이제 꼼짝없이 죽는 겁니다. 
이제 로마 네로 황제의 박해가 눈에 보이게 극심해 지자 
데마도 사역자로 까지 생각했는데 
대마도 사도바울을 떠나버려요. 
바울서신은
내가 실제 생활 속에서 십자가로 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서신 드립니다. 

그런데 십자가 생활화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바울서신들을 해석하고 주해, 주석합니다. 어불성설입니다. 
십자가로 살아야 됩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해 들었습니까?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은, 십자가 복음 자체를 전함과 동시에 
십자가 복음으로 사는 삶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는 거에요. '사는' 얘기를 하는 거에요.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서 
세상을 떠나 부활 승천해서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려는 삶을 
날마다 반복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지금 실제로 이 허모게네처럼, 데마처럼.. 사도바울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도바울을 버리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것이에요. 
사도 바울이 전화 십자가 생활화가 너무 진리이기에,
그 십자가 생활화를 받아들여서 지금 우리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는 사람,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목적을 모르는 사람, 
궁극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살아있는 동안에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로만 기쁘고 만족한다는, 이 목적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 십자가 복음 방송을 버립니다. 

여러분이 십자가 생활화를 합니다. 
주변에 직장 동료나 가정식구들이 다 알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여러분을 버립니다. 결국은 여러분을 버림으로써 
그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가까이 전해지고 있는 십자가 복음을 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예수님 없이 믿으려고 했던 게 유대 종교예요. 
근데 예수님을 사도바울 없이 믿으려고 하는 게 현재 개신교의 상태에요.

사도바울을 제거한 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를 제거하는 것이에요. 
십자가 생활을 안 하면서, 사도 바울을 얘기하는 모든 로마서 이하
바울서신에 관한 얘기는 다 거짓말입니다.

자기가 실제로 십자가로 살지 않으면서
로마서를 얘기하고, 고린도전후서, 디모데전후서를 얘기하는 모든 말은 
핵심을 비껴나간 논의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고 있는 목사들 중에서도 
전혀 자기 자신이 십자가 생활화를 안 하면서 
오직 십자가 생활화에 관한 말씀만, 필요한 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