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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세상에서 완전하게 살기

LNCK 2023. 5. 21. 19:05

불완전한 세상에서 완전하게 살기 [마가복음4]  YouTube

◈불완전한 세상에서 완전하게 살기      막1:29~34, 행12:1~9    마가1~10장
 
*17:30초 부터 녹취, 정리

진짜 예수를 만나면, 진짜 복음을 대면하면 
우리 안에는 진짜 회복이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다섯 가지 회복 중 첫번째 회복은 
더러운 귀신이 떠나가는 사건이었습니다.  1:23~28
이 더러운 귀신은 '종교의 영'이라 그랬죠. 아주 종교적인 귀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회복의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29~34
두번째 회복의 이야기는 <질병으로부터 회복>입니다. *   신유 관련글   

본문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의 장모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에 걸려 있는 장모를 고치시고 일으키십니다. 
그랬더니 소문을 듣고 많은 병자와, 또 많은 귀신들린 자들이 몰려와서 
예수께 치유를 구합니다. :32

그래서 예수님께서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어요. 

사실 질병을 필두로 해서 우리 삶 가운데는, 끊임없이 고통이 연속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시는데, 
질병 또는 질병이 대표하고 있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회복시키세요.

우리 삶 가운데 삶의 고통으로부터 회복되어지는 역사가 있는 한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비록 우리가 거듭나고 또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가 사는 땅은 불완전한 세상이라는 거에요. 

우리는 아직 하늘 천국에 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거에요. 
우린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불완전한 세상, 이 땅, 
고통이 있고, 모순이 있는 세상 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이 불완전한 상이 주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완전함을 추구하고, 회복을 구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죠. 

▲자 '불완전함'이라는 건 뭐냐면,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것들이에요. 
하나님은 불완전한 걸 창조하신 분은 아니죠. 
불완전함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에 거스르는 거에요. 

원래 하나님의 뜻에서 거슬러 있는 것이 불완전함이라면 
완전함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가르치셨냐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어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가르치셨냐 하면 
'너희는 불완전한 세상 속에 있는데, 땅에서 살고 있는데.. 

하늘은 완전한 곳이죠. 하늘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곳, 
그래서 그곳에는 고통도 없고, 모순도 없고, 질병도 없고, 슬픔 절망, 낙망이 없어요. 
완전한 곳이에요. 

그런데 땅은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땅은 타락한 순간부터 많은 불완전함들을 내포하게 됐죠. 

질병이 들어오고, 고통이 들어오고, 죽음이 들어오고 
많은 모순과, 절망과 어둠들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뭐라 그러셨냐 하면 
'너희는 그 땅에 살 동안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무슨 말이나면, 하늘이 완전한 것처럼 
비록 땅이 불완전하지만, 완전해지도록 기도하려는 거에요.  

(*이 설교의 주제, 우리가 신유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
기도해서 병이 나으면 좋지만, 혹시 낫지 않더라도 '완전'을 추구하며 기도해야)

성도도 살다보면, 병에 걸릴 때가 있죠.
그러면 그 불완전함(질병)을 보고서 
'이거는 뭐 어쩔 수 없는 거다. 타락한 땅에 살다 보면 다 그런 거지 뭐!' 
이러고 가만 두고보지 말라는 거에요. 

이게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라는 거에요. 
질병을 포함해서, 그 불완전함을 향해서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것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기도하려는 거에요. 

그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주기도문

그래서 이 불안정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예수님의 명령은 뭐냐하면 
불완전함을 그냥 무비판적, 숙명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거예요. 

병들면.. '병들 수도 있는 거지 뭐' 
암에 걸리면..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거지 뭐'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거예요. 

그거는 그냥 이 땅의 생각이고 
하늘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뜻들이 이루어지고 있단 말이에요.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무비판적이고, 무기력하게 수용하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거에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 같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여 주십시오'
기도해야 된다는 거죠.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비록 거듭났지만,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살아요.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뭐냐면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완전하게 살기"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완전하게 살 수 있는가요? 
첫째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그래서 믿음으로, 비록 이 땅은 불완전하지만 
'하늘에 있는 완전함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간구할 때 
우리가 비록 몸은 불완전한 세상 속에 살아도 
완전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거에요. 

자 그런데,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분명히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이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이 믿음(의 기도)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함을 
다 완전히 고치는 것은 아니라는 거에요

만약 그렇다면, 만약 우리의 믿음으로 간구한 것들이 
간구했던 대로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더 이상 이 땅은 불완전한 곳일 수가 없겠죠.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은 되죠. 
그런데 기대했던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죠.
물론 기대에 넘치게 이루어질 때도 있지만요.

만약 우리가 기대한 대로, 우리 기도가 다 이루어진다면,
그렇다면 이 땅은 벌써 하늘이 되어 있을 거에요. 

근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직 여기가 완전한 천국은 아니에요.
기도가 응답되지만, 모든 기도가 다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치병 환자를 위해 기도하면, 다 낫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실망하지 말고, 병고침에 대한 믿음을 불신하지 말고,
'완전함을 추구'해 나가는 거죠. 
'완전함'을 바라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올바른 자세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까지는!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도가 기도한 대로,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포기해 버리고,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건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예를 아래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자 초대교회 때를 생각해 봅시다. 
초대교회 때는 지금보다 훨씬 성령의 역사가 강력했던 때였죠.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흥의 때가 초대교의 때였을 거예요.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그래서 3천명, 5천명씩 회개하고 돌아오고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흥이 있었던 때였죠. 

그래서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는데 
행12장에 보면,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죽이려고 옥에 가두입니다. 
그 다음 날 그를 죽이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데, 온 교회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했어요.
천사가 옥문을 열고 베드로를 구원합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어요.

이 놀라운 기적의 사건을 행12장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각자 찾아 읽어보세요.

천사가 나타나서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 다음 날 죽이기로 되어 있는 사람을, 얼마나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겠어요. 
군사 넷씩 네 패에게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어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베드로의 쇠사슬이 풀어지게 하시고 
옥문이 열리게 하시고, 지키는 자들의 눈을 가리시고, 
그래서 베드로를 끄집어내셔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교회가 크게 놀라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얼마나 흥분했을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야~ 우리가 기도하니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기도가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바꿨어요. 
믿음의 기도가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바꿨어요. 

하나님의 뜻이 결핍되어 있던 곳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완전함이 임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굉장히 흠모하고,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맞아요. 복음에는 분명히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같이 동시에 봐야 될 사건이 있습니다. 
행12:1~3절에 보면,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베드로가 왜 잡혀갔는가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야고보가 누굽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 빅쓰리 중에 한 명이에요. 
지금 우리가 마가복음을 계속 살펴보는 중인데, 예수님의 측근 중의 측근이죠.
그 빅쓰리 중의 한 명입니다. 그 야고보를 순교시켰던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가 먼저 잡혀갔어요. 헤롯이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교회가 그의 석방을 위해 기도를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당연히 기도했겠지요! 교회가 기도 안했을리가 없습니다. 

열심히 믿음으로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순교한, 죽은 거예요. 그때 교회의 분위기가 어땠을까요? 

여러분, 혼란스럽지 않았겠어요? 분명히 믿음으로 기도 했는데.. 
분명히 믿음으로 기도 했는데 뭐지?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양육한 사람인데 
이렇게 금방 데려가실 거면, 예수님이 실수하신 건가?' 
굉장히 혼란스럽지 않았겠어요? 

이 당시는 '순교'가 뭔지 이런 것도 미처 이해하기도 전인데.. 
'아니 이건 뭐지, 예수님이 모르셨나? 
이 세 명한테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셔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면, 이 세 명을 통해서 
그 다음에 무슨 일을 하시려고 준비시킨 것이 분명한데...' 

그럼 야고보를 구원해 내셔야 되잖아요. 
'이렇게 금방 들어가실 거면, 예수이 실수하신 건가?' 
교회가 굉장히 혼란스럽지 않았겠어요? 

단순히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것까지도 흔들리지 않았겠어요... 

'야고보가 왜 죽었지? 이 사람은 죽으면 안 되는데...' 
'다른 사람은 다 모르겠는데, 야고보가 왜 죽지?' 

이유가 뭐죠? 아무도 이유를 몰라요! 아무도 이유를 모릅니다!
2천년 전 그때만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니고, 지금도 이유를 몰라요. 

그저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라고 밖에는 말 못하죠.
하나님의 지혜는 더 깊고 넓은데.. 그게 뭔지는 분명하게 모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를.. 우리는 그저 믿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불완전한 세상 속에 산다는 거죠. 
완전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기도가, 모두 기도한대로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물론 승리의 소식들도 있습니다. 기쁜 승리의 소식들도 있어요. 

그래서 죽은 나사로가 부활하기도 하고, 베드로가 감옥에서 구원받기도 하고, 
또 청년 유두고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승리의 소식들도 많아요. 

그러나 항상 승리의 소식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대부흥의 때였던 초대교회에는, 승리의 소식과 함께 
이해할 수 없는 낙심되고 실망 되는 소식들이 함께 섞여있었다는 거예요. 

세례요한의 죽음, 스데반의 죽음, 야고보의 죽음...
또 뒤에 가면 바울의 순교, 베드로의 순교... 

교회가 기도 안 했겠어요? 금식하며 기도했겠지요. 
그런데 이런 소식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 때조차 응답 되지 않는 기도의 제목들이 
늘 있었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 뿐만이 아니라, 그 강력했던 초대교회 때조차
응답되지 않은 기도의 소식들이 종종 있었다는 거예요.

그걸 늘 접하면서 신앙생활 했다는 거죠.

초대교회 때는 여러분 아시듯이 대순교의 시대였잖아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콜로세움에서 사자 밥으로 죽어갔는데 
승리의 소식보다, 슬프고 낙심되는 소식이 더 많았을 거예요. 

초반에 잠깐의 승리가 많았었지 몰라도 
꽤 긴 시간 동안(거의 3세기)을 계속 기도가 응답되는 거 같지 않은 
소식들을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지냈다는 거예요. 

우리가 기억해 둘게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라고 하는 게 뭔가? 이걸 좀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완전한 세상 속에 살아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아직 그 때가 온 게 아니라는 거에요.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간구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지진 않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기도 할 필요가 없겠네요. 
어차피 하나님께서 이루실 거면 이루실 거고, 
아니면 안 이루어질 건데.. 
믿음으로 기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게 사도 야고보가 죽는 사건을 경험 하고 나면 
가장 많이 빠지는 함정이네요. 

'아니 기도해봐야 뭐 해? 어차피 기도해도 응답 안 될건, 안 될 텐데...'
대부분은 그런 좌절감 들어옵니다. 열심히 기도 했는데도 응답 안 됐어요. 

저희 교회가 이번에도 정원 자매(환우)를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데려가셔서 데려가셨어요.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요. 우리가 그 전에 이 모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할 때도 
생명 내걸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어요. 

이렇게 목숨 걸고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될 때는
저는 꽤 큰 영적 데미지가 옵니다. 

가장 큰 데미지가 뭐냐면, 
앞으로 별로 기도하고 싶은 열정이 잘 안 생기는 거죠.

열심히 기도했으면, 하나님께서 뭔가 승리를 주셔야 
그다음에 기도하고 싶은 생각도 나는데...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기도 한 대로 안 이루어졌어요.
그럼 그 다음에 무슨 현상이 일어나냐면 
기도를 해야 된다는 건 알지만, 별로 기도의 열정이 올라오지는 않죠.
'이거 또 기도해 봐야.. 우리 뜻대로 안 될 수도 있고...' 
'에이 씨, 알아서 하시겠지 뭐...' 

이 함정에 여러분, 우리는 굉장히 쉽게 빠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될 게 있어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경은 한 번도 '이 불완전함을 그냥 인정하라!' 그런 적은 없다는 거예요. 

야고보를 하나님께서 죽도록 허락하셨다고 해서 
'베드로도 그냥 내버려둬도 돼!' 이런 적은 한번도 없다는 거죠.

비록 기도해도 야고보가 죽었지만,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서' 계속 간절히 기도해야 된다는 거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지, 
'불의한 세상을 그대로 인정하라!' 그러신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이 불안전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전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믿음뿐만 아니라, 두 가지가 더 필요하다고 얘기를 합니다. 

고전13:13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만 있어야 된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항상 패키지로 같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랬을 때 비로소, 이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완전함에 이룰 수 있다는 거예요. 

(본문에 적용하는 병고침의 믿음) 그 믿음 하나만 가지고 
완전함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믿음 하나만 가지고, 이 불완전한 세상을 
완전하게 바꿀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알았단 말이에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같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믿음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소망이 더해졌을 때이고 

그 믿음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 더해졌을 때라는 거예요. 
그랬을 때 비로소 완전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완전한 세상속에서 고통을 겪을 때 
즉 질병, 고난, 환경의 재앙 등 이런 걸 대할 때 
물론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현실의 불완전함을 그냥 무비판적으로, 무기력하게 수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질병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질병 가운데 고통 하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해 주십시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항상 그렇게 기도해야 돼요. 항상 그렇게 기도하라는 거예요. 

(물론 사도바울이 세 번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이고, 일반적인 경우는 치유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의 올바른 자세는 뭐냐면 
불의가 분명하면, 그것이 잘 되든지 안 되든지 
(의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라는 거예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소간 이시고
우리의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하나님께서 야고보는 죽이시고, 베드로 살려 줬어요.
'왜 야고보는 죽이시고 베드로는 살리십니까?' 
이런 것 자세히 묻지 말라는 거에요. 우리 소관이 아니니까요.

그거는 그냥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거에요. 그건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야고보를 죽일지 살릴지, 베드로를 죽일지 살릴지.. 그건 하나님의 소관이고요, 

우리가 해야 되는 건 뭐냐면 
이 세상의 불의함에 대해서 계속 하나님의 완전함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어쨌거나 살려 주십시오. 어쨌거나 야고보를 살려주십시요. 
야고보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게 올바른 자세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무슨 머리 써가지고 
'순교가 필요할 수도 있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때에 순교를 예비하셨을 수도 있어!'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소관은 하나님께 맡기고
성도가 해야 될 일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믿음으로 완전함을 구하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인 질병에 적용하면, 당연히 치료해 달라고 기도해야 된다는 거죠.
'반드시 고쳐 주실 줄 믿습니다' 믿고 기도하라는 거예요. 
물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요.

▲그런데 문제는, 열심히 기도했는데 야고보가 죽었어요. 
초대교회의 위대함이 여러분 여기서 드러납니다. 

베드로가 잡혀간 것이, 야고보가 죽고 나서 바로 직후였단 말이에요. 
1년 뒤 이런 게 아니라, 며칠 뒤였어요.

'야고보 죽이는 거 보니까 백성들이 좋아해? 그래?' 
그러자 베드로를 바로 잡아들인 거예요.

교회가 여러분 아직 충격이 해소되지 않았을 때란 말이에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리더 중 한 명이 죽은 거예요.
그런데 똑같이 잡혀가는 사건이 또 일어났어요. 

교회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지난 번에 야고보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아니 지난 주간에 그렇게 야고보 사도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뭐가 될까? 
기대해도 어차피 결과는 똑같이 되는 거 아냐?'

또는 '우리한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왜 열심히 기도했는데 기도가 안 이루어졌지?
기도가 부족했나, 금식이라도 했어야 했나? 
아니면, 우리들 가운데 무슨 죄가 있었나?' 

이런 (불신의) 생각들이 분명히 들었을 거예요. 

우리들도, 말기암 같은 성도의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그 기도가 응답 안 되고, 성도가 소천하는 결과가 나오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무슨 문제가 있었나? 죄가 있었나, 아니면 기도의 양이 부족했나?'
'금식 했어야 했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낙심도 되고, '남은 되어도 우리는 안 되나?'
'앞으로 신유기도는 해서는 안 되는가?'
'우리 교회는 암은 응답 안 되나?'
'다른 기적들은 많이 일어나는데, 왜 암은 안 되지?' (암이 낫는 때도 있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뭐냐면 초대교회의 반응입니다. 
행12:9 '이에 베드로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이게 바로 며칠 전에 야고보가 죽었는데.. 
온 교회가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죽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 하더라... 할렐루야! 

이게 여러분, 믿음이라는 거예요.
이게 완전한 믿음이라는 거예요.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여전히 간절히 기도하는 거에요. 

기도한 것이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여전히 간절히 기도하는 거예요. 여전히 똑같이 기도하는 거예요. 
여전히 믿음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야보고 죽었습니다. '우리 기도가 응답 되지 않았어..' 
그럼 베드로는.. 기도 해봐야 소용 없겠네?' 이러지 않았다는 거죠.

베드로가 아니고, 내 남편이, 내 자녀가 어떤 위기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들 보니까 기도해도 별 소용 없던데?'
그걸 보면서, 가족이 위기 상황에 빠졌는데.. 기도 안 하겠습니까?

왜 기도해야 됩니까?
사랑하니까 기도하는 거죠! 끝까지 기도하는 거죠!

만약 사랑하지 않으면, 손 놓고 기도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사랑한다면, 끝까지 7전 8기로 계속 기도하는 거죠!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 중병에 걸렸는데,
'기도 응답의 성경적 원리, 신학적 원리' 이런 것 따지기 이전에,
그런 질문하기 이전에, 나가서 철야하고 금식하고 병낫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겠어요?
그런 거 따지기 이전에, 당연히 기도해야지요!

사랑은 여러분, 모든 좌절과 혼란을 뛰어넘게 하는 거예요. 
신학도.. 지식도.. 다 폐하여지지만 사랑은영원하다.. 그랬어요.

사랑은 여러분, 이런 모든 혼란과 모든 어려움과 모든 절망을 다 뛰어넘어서 
그거 이상으로 나가게 하는 파워가 사랑이에요. 

마치는 말
우리 온 교회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정원 자매(가명)를 불러 가셨어요. 
그 이유는 모르죠. 우린 아무도 몰라요. 

야고보를 예수님이 가장 공들여 키우셨던 
세 제자 중에 하나인 야고보를 왜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는지 
우리는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그건 하나님의 주권이예요.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살아 있잖아요. 
그럼 어떡할 거예요? 다시 간절히 기도 해야 되는 거죠. 
하늘의 뜻이 이땅가운데 이루어지도록 다시 기도해야 되는 거죠. 
그게 초대교회의 믿음이라는 거에요. 이게 올바른 믿음이라는 거예요. 아멘! 

우리 안에 아직도 치유가 필요한 많은 지체들이 있어요. 
그러면 야고보가 죽었다고,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 안 하겠습니까? 
그건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초대교회는 야고보를 데려가시고,
며칠 뒤에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서 또 베드로도 감옥에 갇혔지만
온 교회가 간절히 기도 했어요. 왜? 사랑하니까! 

믿음은 여러분 반드시 소망과, 사랑과 함께 가야 해요. 
사랑은 우리의 많은 절망을 뛰어넘게 하고요. 
사랑은 우리의 많은 혼란을 뛰어넘게 하고 
사랑은 지식과 신학까지도 뛰어넘게 해요. 

소망은 하나님께 대해서 실망하지 않은 자세이죠.
소망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죠.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조금 더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게, 
소망이고, 사랑이예요. 아멘! 
믿음, 소망, 사랑으로 승리하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