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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로부터의 회복

LNCK 2023. 5. 23. 09:13

◈단절로부터의 회복      막1:40~45          고성준 목사 마가복음5강

본문에 나병환자 한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성경에서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나병'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나병만 질병이었겠습니까? 많은 다른 질병들이 있었겠죠. 
특별히 나병이 전염성이 심해서, 잘 관리해야야 되는 병이긴 하지만 
전염되는 것이 나병만 있었겠습니까. 

광야에서 위생도 좋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다보면 
나병 말고도 수많은 전염병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율법들을 보면 
나병에 대해서는 굉장히 여러번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질병들 보다도 많이 언급되어 있고 
나병을 어떻게 판별해야 되는지, 또 나병에 걸렸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 굉장히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는데, 이 나병은, 영적인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병에는 '영적인 상징성'이 있어요. 

특별히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지요. 
그래서 신약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진리들이 
구약에서는 어떤 사건과 환경을 통해서, 비유적이고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죠. 
그런 의미에서 나병도, 영적인 상징성이 있다는 거에요. 
나병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적인 질병인데 
나병은 죄와 그 결과를 상징합니다. 

▲나병에 걸리게 되면 무슨 증상이 나타나느냐면 
처음에 신경이 마비되기 시작하고, 
그다음에 심해지면 몸의 이런 저런 지체들이 이렇게 잘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손가락도 잘려나가고, 발가락도 잘려나가고, 
한참 지나면 코도 떨어져 나가고... 그렇게 되죠. 

그러니까 '나병'은 단절을 상징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병에 걸리게 되면, 사회로부터 추방을 당합니다. 
excommunicate 되어, 이 사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나병의 가장 무서운 저주는 뭐냐면, 질병도 질병이지만 
사회적 단절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동안 누렸던 모든 관계들이 다 끊어집니다. 
친구들하고도 끊어지고, 심지어 가족들하고 관계도 끊어져야 되고 
사랑하는 아내, 또 사랑하는 남편, 자식들, 부모님...
그런 모든 관계들이 단절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모든 저주 중에 가장 잔인한 저주가 
아마 나병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손가락과 발가락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듯이 
내 삶을 구성하고 있는 관계(몸)에서부터 단절되어 나와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현대인이 앓고 있는 가장 큰 영적 질병은 
단연코 '나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죄의 본질적인 속성이에요. 
그 얘긴 뒤에 가서 조금 더 할게요.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1938년도부터 지금까지 한 70~80년을
이렇게 아주 긴 시간에 걸쳐서 연구해오고 있는 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하는 책임자들은 계속 바뀌는데도 불구하고 
그 프로젝트는 70 년 이상을 쭉 이어져 오는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7백명 이상의 사람들을, 평생에 걸쳐서 이렇게 추적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인생을 쭉 추적해서 
어렸을 땐 어땠는지.. 젊었을 땐 어땠는지.. 
그러다가 노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평생에 걸쳐서 쭉 추적하는 그런 아주 긴긴 프로젝트입니다. 

지금까지 80년 팔십년 가까이 연구해 오고 있는데,
그 주제가 뭐냐 하면 <행복>이에요. 

'언제 사람들의 행복한가?' 이것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래서 연구진들이 매년 인터뷰를 진행하고, 또 의료기록을 받아보고 
피를 뽑고, 뇌를 MRI 촬영하고, 
또 자녀들하고 대화하는 걸 가서 이렇게 카메라로 찍고 
또 배우자와 고민을 나누는 모습들도 촬영하고...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는데 
최근에 1990대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했답니다. 

뭐라고 질문했냐면 '당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뭔 것 같습니까?' 
이 질문에 단연코 1순위로 나왔던 대답이 "부와 사회적 성공"이었다는 거예요. 

1990년대생, 즉 20대 사람들은 그렇게 가장 많이 대답했다는 거죠.

그런데 지난 75년 동안 7백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쭉 추적을 해 본 결과.
"행복은 부와 명예 하고는 일도 관계가 없더라"는 거에요. 
이게 지금까지 되어진 연구의 결론입니다. 전혀 관계가 없더라는 거예요. 

'부와 사회적 성공'이 최고 행복의 이유라고 답한 것은.. 20대 뿐이었고,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갈수록, 연륜을 통해 경험하고 느낀 것이 
"인생의 행복은 부와 명예 하고는 일도 관계가 없더라"는 거에요. 

그래서 이 연구 결과가 보여주고 있는 분명하고 확실한 결론이 있는데 
그 결론이 이겁니다. 
"우리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좋은 관계다" 
이게 하버드연구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맞아요. <행복의 본질은 좋은 인간관계에 있다>는 것을 
세상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게 성경에서 하고 있는 얘기죠.
  
하나님은 어떤 분이세요? 삼위일체의 관계속에 존재하는 분이세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기쁨을 누리시고 
관계가 깨어졌을 때 고통을 받게 되시죠.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시고, 그 속성가운데서 천지를 창조하셨어요. 
그래서 이 천지창조의 원리가 뭐냐면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그 관계가 단절되고 깨어졌을 때.. 고통과 슬픔을 느낀다는 거에요. 

자 관계에 대해서도 하버드 연구는 더 깊게 세 가지 결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1) 첫째는 사회적 관계의 연결은 매우 유익한 반면, 고독은 해롭다는 거예요. 
이건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고립되어 있는 이들은 덜 행복하고 
중년기에 빠른 속도로 건강이 악화되고 뇌기능도 일찍 저하됐습니다. 

중요한 건 '관계의 질'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한 명 또는 소수라도 깊고 만족할 만한 관계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거예요. 

친구가 많더라도 늘상 갈등과 싸움과 이런게 잦다면 
이것은 아무 유익이 안 되고,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는 겁니다. 
부부싸움 많이 하면 건강에 해롭다는 거에요. 상식과 상통하죠.

2) 좋은 관계는 우리 몸 뿐만이 아니라 뇌도 보호한대요. 
그래서 이 좋은 관계, 애착관계가 긴밀하게 형성된 80대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높은 기억력을 갖고 있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간단하고 빠른 해결책
또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만을 원하는데 
사실 행복은, 간단하고 빠르고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에요. 

관계라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꾸준히 투자되어야 되는 거죠. 
그래야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거에요. 

어떻게 보면 '관계'라는 것은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일 수도 있지만 
75년 동안 하버드의 연구는 동일한 결과를 계속 보여주는데 
그것은 우리 주위의 가족, 친구, 공동체가.. 그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거예요. 
사실은 이건 성경에 다 나와있는 얘기입니다. 
결국 그것(관계)이 우리의 모든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단절'을 가져오는 나병은, 단순한 질병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절을 가져오는 한센병은, 사실은 단순한 병 이상의 저주라는 거에요.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축복들을 누릴 수 있는 통로들을 
다 잘라버리는 거죠. 다 잘라버리는 아주 잔인한 저주입니다. 

그래서 나병이, 구약에 그렇게 많이 언급돼 있는 이유는 
영적인 메시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병은, 죄와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런 병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해보면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일4:7~8에 보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사랑이라는거에요.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거에요. 

그럼 여러분, 사랑의 속성은 뭡니까? 그것은 하나되게 하는 거에요. 
사랑은 여러분, 계속 하나되게 하는 거예요. 

사랑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애매하게 허물어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그냥 턱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물방울이 서로 이렇게 떨어져 있다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게 되면, 물방울이 서로 합쳐져서 하나가 되어 버리죠.
그래서 어디까지가 너고, 어디부터가 나인지가 
이제 구분이 안 되는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이 뭔지를 제일 잘 보여주는 예가 
응급실에 아이를 안고 온 엄마 입니다. 

그럼 분명히 아픈 건 아이 인데.. 죽어가는 사람은 엄마지요. 
그래서 아이하고 엄마의 경계가 없어져 버리죠. 이게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에요. 
그렇다면 죄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뭐겠어요? 계속 분리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정반대되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 뭐냐 하면 
계속 분열되는 거에요. 계속 갈라지고, 나눠지고, 단절되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대척점에 있는 죄의 본질이라는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나병'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적인 메시지가 있는 거에요. 

근데 나중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관계를 뭐로 비유하세요?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잖아요. 

그러니까 회복된 관계가 그리스도의 몸인데 
사랑 안에서 힘줄이 서로 이어지면서 한 몸이 이루어지는데 

나병은 이 몸을 오히려 해체시키는 게 나병이에요.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가게 만들죠.

손가락도 떨어져 나가고, 발가락도 떨어져 나가고, 코도 떨어져 나가고... 
이렇게 죄의 결과가 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나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든 모든 단절은 고통스러워요. 
왜냐면 하나님께서 행복을, 관계가 연결되는 것에 행복을 두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단절이 일어나면 우리는 행복을 뺏겨요. 그리고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종류의 단절이든지 간에, 단절을 경험한 사람은 다 알거에요. 
우리의 행복이 파괴돼요. 단절은 행복을 파괴합니다. 

그것이 관계가 깨져서 오는 단절이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단절이든 
오해에 의한 단절이든 
하여간 관계가 깨어져서 단절될 때는.. 행복을 파괴합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단절을 경험하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우리 영혼이 병들어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혼자 살도록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래요. 창2:18

그래서 단절은 회복이 필요합니다. 
사람 사이의 단절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은 더욱 그렇습니다. 

나병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물론 사람들에게서부터 떨어져 나와야 되는 고통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한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이에요. 

나병환자는 하늘로부터 저주를 받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율법이었거든요. 

하늘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나병에 걸린 거였기 때문에 
나병환자는 단순히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것뿐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하는 영적인 단절감이 더 컸어요. 

▲그래서 그 우리의 삶가운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단절들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치신 것은 절대 아니죠. 
그런데 내 안에,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뭔가가 생기는 거에요.
뭔가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어요. 

-죄책감이 될 수도 있고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실까? 이렇게 큰 잘못을 했는데, 이것도 용서가 될까? 

-또는 하나님이 불의하게 보이는 것, 
-낙심,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하느냐 했었는데 근데 뭔가 내 뜻대로 안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느끼냐면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지 않으신다'고 하는 
그런 잘못된 생각들이 생기죠. 

이런 이유들이 우리로 하나님과 단절되게 만들어요. 
그럼 이것은 우리 삶에 고통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단절, 또한 하나님과의 단절은 
항상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해요. 

자 그 나병환자가 예수께 나옵니다. 그리고 회복됩니다. 
이것이 마가복음 초반에 기록되어 있는 5가지 회복 중에 3번째 회복이었어요. 
첫 번째 종교로부터의 회복 :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심
두번째는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회복 : 베드로 장모를 고치심
세번째는 단절로부터의 회복 : 문둥병자를 고치심

단절로부터 회복시키시는 거에요. 
단순히 나병을 치유하시고 끝난 것이 아니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여라' 이건 무슨 말이에요?

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오라는 얘기거든요. 
끊어졌던 관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이런 회복의 역사가 여러분들 가운데도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단절로부터 회복될 수 있는가요?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깊게 묵상해보면 
단절로부터 회복되는 몇 가지 단계가 있어요. 

▲1. 첫번째 단계는, 자기 병을 <인식>해야 됩니다.  
굉장히 중요해요. 자기 병을 인식해야 돼요. 

단절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손가락 발가락은 몸에 붙어있도록 창조됐지 
떨어져 나가는 것이 정상이 아니에요. 

그런데 나병 균이 몸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신경을 손상시켜서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이 '단절'이라는 질병의 시작은, 공감하는 것이 마비되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래서 공감이 잘 되지 않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단절의 시작이에요. 모든 단절의 시작이에요. 

사람 사이의 단절이든, 하나님과의 단절이든... 
그래서 상대가 고통을 느끼는데, 나는 공감해주고 있지 않아요. 

또는 상대가 너무 기쁘고 즐거워하는데, 나는 전혀 공감하고 있지 않아요. 
그것이 나병의 시작이라는 거에요. 

상대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 
상대의 기쁨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 
그러면서 뭔가 공감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게 단절의 시작이라는 거에요. 소통의 문제가 되기 시작해요. 
소통이 잘 안 되기 시작해요.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주위에 있는 가족이나 지체들이나 누구든지 간에 
소통이 안 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시그널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시그널이에요. 단절이 시작되고 있다는 거에요. 

소통의 껄끄러움이 느껴진다면...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소그룹 지체간에든, 하여간 여러분 주변에 있는 관계 속에서 
공감이 잘 되고 있지 않다면..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면.. 
상대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내가 잘 공감하고 있지 못하다면.. 

자 근데 여러분, 그렇다면 왜 공감의 (공감이 안 되는) 문제가 생길까요?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자기 중심성!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거에요. 

이게 여러분 병의 핵심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 중심으로 느끼고 
자기 중심으로 결정합니다. 

나의 이 말이, 저 사람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나의 이 선택이 저 사람에게는 어떤 손해와 어떤 충격과 어떤 고민을 줄지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냥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걸 선택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그냥 하고 
그 말을 했을 때 상대가 어떻게 느낄까? 전혀 거기에 대해서 공감이 안 돼요.
이게 다 자기중심성이죠.

참 흥미로운 게 뭐냐면, 제가 목회를 하잖아요. 그럼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만나보면 참 재밌는 게 
상처받은 사람만 있지, 상처 준 사람은 없어요... 다 자기중심적이라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단절의 회복은, 비인격적으로 기적처럼 짠하고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절'은 기본적으로 인격에서부터 나오는 문제이기 때문에 
인격을 배제하고 짠하고 '회복'을 일으킬 수 없다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자기 중심적인 죄, 
그 문제가 단절들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회개가 선행되지 않으면 
단절의 회복은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단절의 회복'을 원하신다면, 먼저 기도하셔야 될 게 있어요. 
그건 뭐냐면 '성령께서 나의 죄를 인식하도록 조명해 주십시오' 
이게 먼저 선행돼야 돼요. 

'그 놈, 나쁜 놈'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고 
깨어진 관계에 있어서 뭔가 지금 힘들어진 관계가 있다면 
'그 관계에 있어서 성령께서 조명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거를 자꾸 자기합리화와 자기정당화를 가지고 합리화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 관계는 절대로 회복이 안 돼요. 
성령께서 조명해주시도록 먼저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아멘!  

▲2. 두 번째 뭘 해야 되냐 하면, 조명해 주셨으면, 액션을 취해야 합니다. 
예수 앞에 나왔어요. 이 문둥병자는 자기 병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나니까 
액션을 취했단 말이에요. 예수 앞에 나왔어요. 

우리도 액션이 필요합니다.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 플러스, 
이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움직여야 돼요.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움직이셔야 돼요. 

예수 앞에 나와서 어떻게 하냐면 
그는 '꿇어 엎드립니다' :40

깨어진 관계가 있다면 찾아가서 꿇어엎드려야 됩니다.
예수 앞에서 회개하며 꿇어 엎드렸다면, 
이제 사람에게도 찾아가 '미안하다. 정말 잘못했다' 하고 사과하는 거죠.

단절의 문제는, 상처 받은 사람들만 있어가지고 해결이 안 돼요. 
상처 준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해결이 되는 거에요.

거의 대부분의 '관계의 단절'은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행하는 일이 아니에요. 
반드시 죄인과 죄인이 부딪쳐서 일어나는 일이거든요. 1:9라도 쌍방과실이죠.

그 얘기는 뭐냐면, 내 쪽에서 무릎 꿇고 그 용서를 구해야 될 일들이 
반드시 있다는 거예요. 그 부분들을 여러분 우리가 액션을 취하셔야 돼요. 
액션을 취하셔야 돼요. 

▲3. 세번째 해야 될 일은, 예수님앞에 간구하는 것입니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0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셔야 돼요. 
사실 모든 회복의 문제는.. 오케이, 내가 가서 이제 미안하다 그랬어요. 

근데 진짜 회복이 되려면, 그 사람이 받아줘야 회복이 되는 거지 
내가 일방적으로 '미안하다' 그런다고 회복되는 게 아니죠. 
그럼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떻할 거에요? 그건 하나님이 만져주셔야 되는 거죠. 

그래서 회복은, 내가 해야 될 부분들이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해주시지 않으면, 
단절에서 회복은 일어나기가 참 힘들어요. 

그래서 기도하실 때 도우심을 구하셔야 돼요.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제 잘못을 제가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우리의 단절된 관계를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십시오.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래서 이제 그분 앞에 구하셔야 돼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근데 여기 보면 재밌는 표현을 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0

'원하시면' 이 표현이 참 중요한 표현이에요. 
뭐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거거든요. 
그분의 주권 아래 머무는 거에요. 

이것은 이 관계회복 뿐만 아니라, 질병도 마찬가지였는데 *직전 베드로 장모 고치심
우리가 기도할 때 필요한, 참 중요한 태도입니다.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간구하긴 하지만 
그것을 이루어 주실지/ 안 이루어 주실지/ 언제 이루어주실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거에요. 

그 주권아래 우리가 들어가야 되는 거에요. 그것이 우리 영의 생명이에요. 
모든 문제는 결국 영이 제자리를 벗어나면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거거든요. 

단절은 보통 이제 우리의 혼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지만 
그것은 영이 제자리를 잡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거거든요. 

근데 영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굴복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 원하시면 이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나아가십시오. 

감사한 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고치신다'는 거에요. 
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이 역사가 오늘 저와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사람과의 단절'뿐만이 아니라 
더 힘들고 중요한 단절은 이 '하나님과의 단절'이에요. 
이게 더욱 더 고통스럽고, 더욱 더 근본적인 단절의 원인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단절'은, 보통 어떻게 어떻게 일어나냐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어!' 
혹은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할 수 없으실 거야!' 

큰 죄가 있다든지, 자기 스스로가 용서가 안 되는 경우에
그때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를 안 하셨다고 느끼는 거예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셨어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나 자신이 잘 용납이 안 되는 거에요. 

나의 그 죄나, 또 내가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내가 용납이 안 돼요, 내가 스스로 혐오스러워요. 

그런 상태에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아라'고
말씀하셔도.. 내게 회복이 일어나지 않아요. 

오늘 이 밤에 '하나님과의 단절'이 먼저 회복되는 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의 대해서 내리고 있는 판단,
그 판단이 월권이라는 거에요.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거에요. 
우리를 용서하실지/ 말지, 회복시키실지/ 말지 
이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거에요.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거에요. 
이것도 사실은 죄인 거에요. 내가 우주의 중심이 돼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고.. 
나는 용서받을 만한 존재인지, 용서받으면 안 될 존재인지..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은.. 이게 죄거든요.
그 죄에 꽁꽁 쌓여 가지고 있는 상태에요. 

또 이런 사람들은 뭐가 있는 줄 아세요? '자기 의'가 있어요.
'이런 건 하나님도 용서하지 못하실 거야!'

여러분 큰 죄를 지었어도, 정말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할 만한 죄를 지었어도 
자기 의가 없는 사람, 자기 의를 버린 사람은, 그냥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진짜 쓰레기고, 나는 진짜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될 진짜 나쁜 놈이고.. 
그렇지만 하나님 어떻하겠습니까, 도와주십시오!' 이러고 나간단 말이에요.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렇게 나아갔잖아요.
'나는 개입니다. 근데 개라도 하여간 뭔가 좀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 주세요'

그런데 누가 계속 단절되어 있는 줄 아십니까? 
그 안에 자기 의가 있는 사람, 
자기 의가 있어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정죄하고 있는 거에요. 
'이건 하나님도 안 될 거야!'
그게 결국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는 담들이 무너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같이 기도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