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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에서의 회복

LNCK 2023. 5. 23. 22:06

◈무기력에서의 회복          막2:1~12            마가1~10장 설교모음

이제 오늘은 네 번째 회복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인데.. '무기력에서의 회복'입니다.

중풍병자는, 손가락도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사람이었죠. *전신마비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무기력'입니다. 

그래서 네 번째로 예수님께서 회복하셨던 주제는 뭐냐면 
무기력함으로부터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는 거예요. 

첫 번째 종교로부터의 회복 : 귀신들린 자를 온전케 하심
두번째는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회복 : 베드로 장모를 고치심
세번째는 단절로부터의 회복 : 문둥병자를 고치심

우리가 삶을 살다 보면 무기력함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심지어 밥 먹는 것도 귀찮고, 집 밖에 나가는 것도 귀찮고, 
누가 만나자고 그러는 것도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거죠. 

저도 가끔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아주 에너지가 많은 사람입니다.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라서, 감당하기 힘들만큼 계속 일을 벌이잖아요. 

그래서 일을 벌이고, 벌이면 끝까지 해야 돼요. 이게 제 성격이라서요. 
제가 벌려놓고 중간에 그만둔 일은 기억나는 게 지금까지 하나도 없어요. 
일을 벌렸으면 끝을 봐야 돼요. 

그게 제 성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순간들이 있어요. 
그냥 손가락도 까딱하기 싫고, 이거 저거 다 귀찮고 
아무것도 안 했으면 좋겠고, 그냥 이대로 푹 자다가 천국 갔으면 좋겠다...는
그럴 때가 가끔 가다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런 경험들이 있으세요? 
의욕도 없고, 사람 만나는 것도 싫고, 뭐 설교 준비하기도 싫고, 
뭐 교회 가기도 싫고... 그런 때 있으세요.? 
이렇게 무기력함이 우리 삶을 덮칠 때가 있어요. 

모든 무기력함의 궁극적인 원인은 영적인 겁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는 적어도 두 가지 종류의 무기력함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에서부터 오는 무기력함이 있고 
-하나는 마음에서부터 오는 무기력함이 있어요. 

◑첫째는 '몸에서부터 오는 무기력함'이 있습니다. 
뭐냐면 몸을 너무 무리해서 쓴 거에요. 

몸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 한계가 있단 말이에요. 
우리 몸이 무한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 몸이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어요. 

그런데 그 한계를 막 넘어서, 몸을 너무 무리해서 쓴 거예요. 
잠도 안 자고.. 제대로 먹지도 않고.. 미친 듯이 뭘 했어요. 
그러면 당연히 그 다음에 역풍을 맞습니다. 그 다음에 무기력함이 옵니다. 

이것은 마음에서 오는 무기력함이 아니고, 그냥 에서 오는 무기력함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겪고 있는 무기력함 중에 
꽤 많은 것들이 몸에서부터 옵니다. 

자 이런 경우는 여러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쉬어야 돼요.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입니다. 

우리 몸은 여러분, 쉬지 않고 그냥 무리해서 막 계속 일을 하면,
결국 이제 몸이 더 이상 움직이기를 싫어합니다. 몸이 반응하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는 쉬어야 됩니다. 그래야 회복이 됩니다. 
몸에서 오는 무기력함을 다 그냥 영적인 거로 해석해서 
더 많이 기도를 하고, 더 많이 예배를 드리고... 그러면 회복이 아니라 
완전히 뻗어버립니다. 

몸에서 온 무기력함은, 더 많은 기도를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기도가 부족해서 오는 무기력함이 아니라 
몸이 무리를 했기 때문에 오는 무기력함이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병에서 오는 것도 있죠. 간이 안 좋아지면 쉽게 피곤을 느끼죠) 
그러면 더 많은 기도, 더 많은 예배.. 이런 거 소용없습니다. 
그렇게 해봐야 역효과만 있습니다. 더 많이 지치고요. 더 많이 나가 떨어지고 
나중에는 기도도 하기 싫어져요. 나중에는 기도 소리만 들어도 화가 나고 그래요.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냥 쉬어야 돼요. 
자기 몸을 잘 관리하는 것도 영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쉴 수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누가 쉬면 되는 거 모르나요? 쉴 수가 없다는 게 문제가 되죠. 

저도 그렇고, 집사람도 그렇고요. 요즘 오는 몸의 싸인들이 있습니다. 
'아 이거 좀 무리했구나.. 이렇게 더 가면 안 될 것 같아..' 이런 마음들이 있어요.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어요.
'당신 좀 쉬어, 그러다가 큰 일 나!' 그러면
'쉴 수 있으면 쉬지.. 지금 쉴 상황이 아니야, 이거 마치고 쉬어야지' 합니다.
그렇게 몸에 무리가 오는 상황을 계속 방치하면, 결국 병이 걸리게 되어있죠.

많은 경우, 지나친 책임감과 완벽주의가 있는 사람은 몸을 혹사하게 돼요. 
자 여러분은 혹시 지나친 책임감과 완벽주의 때문에 
자기 몸을 학대하는 스타일은 아닙니까? 

그래서 자기 몸을 혹사시키는 사람, 만약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라면 
그래서 몸의 무기력증을 가끔씩 경험한다면, 꼭 하셔야 될 일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의도적으로 삶의 빈틈(휴식)을 만드셔야 돼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컨트롤해야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의지적으로 빈틈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빈틈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공간이라고 믿어야 되는 거예요. 
그 빈틈은.. 하나님이 마무리 해주시는 공간이라고 믿으셔야 되는 거예요. 아멘! 

기억해야 될 것은 '자기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 역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이라는 거예요. 

'우리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거죠. 내 몸은 하나님 거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나에게 청지기로 맡기신 거라는 거죠. 

그래서 자기 몸을 잘 돌보는 것 역시, 
하나님의 굉장히 중요한 믿음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거예요. 

이 인식이 있을 때, 과로에서 오는 무기력증을 
벗어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두 번째, 마음에서 오는 무기력증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 에서 오는 무기력증보다. 더 복잡하고 더 치명적인데 
사실 몸이 과로로 힘든 것은, 며칠 잘 쉬면 회복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힘들어서 무기력증이 오는 것은, 쉽게 회복이 안 돼요. 
잘 먹고 잘 쉰다고 회복되지 않습니다. 

▲1. 그렇다면 마음이 어떨 때 무기력증이 오는가요?
그 첫 번째 원인은 실패입니다. 
큰 실패, 또는 반복적인 실패 때문이에요. 

제가 어렸을 때요. 철이 없었을 때인데, 어렸을 때 얘기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이제 개를 항상 키웠어요. 제가 개를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어린 마음에 장난을 친거죠. 제가 너무 예뻐하는 개가 있었는데 
빵을 조금 떼어서 주면 되게 좋아하거든요. 
빵을 이렇게 줬다가 개가 좋아서 먹으려고 하면 싹 뺏고, 
또 이렇게 줬다가 먹으려고 하면 싹 뺏고... 장난 친 거죠. 

여러 번을 하잖아요. 그러면 개가 우울증에 걸립니다. 진짜에요. 
그럼 그 다음부터 어떤 반응이 나타나냐면, 빵을 줘도 안 움직여요. 
그냥 이렇게 웅크리고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코앞에 갖다 대도, 얼굴을 돌리고요, 미동도 하지 않아요. 
개가 무기력증에 빠진 거에요. 

사람도 비슷합니다. 반복적인 실패를 경험하거나 
아니면 한 번이지만, 크고 치명적인 실패를 경험하면... 무기력해져요. 
그것을 낙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다시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무기력에 빠져버린 우리 마음은 
새로운 일 앞에서 웅크리고 엎드려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때는 어떻게 해야 회복되는 줄 아십니까? 
작은 성공이라도, 성공을 경험해봐야 회복됩니다.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친구들이 들 것에 메고 왔죠.
그런데 이 환자를 향해서 '그만 무기력해, 괜찮아!' 
이런다고 무기력증이 회복 되겠어요? 아뇨. 

실패로 우리 마음이 한번 무너지면, 그것은 신학으로 회복되는 게 아니에요. 
신학으로 회복된다고 하는 게 이런 거예요. 

이제 그 실패를 계속 경험하잖아요? 
그럼 우리 안에, 다른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해주기도 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는데 뭐냐면 
'실패에는 의미가 있을 거야.. 실패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실 거야.. 
이 실패를 통해서 내 안에 더 깊은 영성으로 인도하실 거고...' 

그런데 마음의 무기력에 빠진 사람은,
'헛소리하지 마, 그렇게 해서 해결된 사람 한 명도 못 봤어!' 이렇게 반응하죠.
신학적으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계속 실패가 반복되는데, 
그 실패에 대한 의미를 계속 자기가 스스로도 찾습니다. 
그 의미를 찾는다고 해도.. 그런 이론, 그런 신학을 통해서 회복되진 않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성공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그 마음의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죠.

어떤 것이든지 간에, 아무리 작든지 간에 
내 인생은 계속 실패만 경험하는 인생이 아니고 
결국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일으켜 세우실 것이고, 성공하게 하실 것이고.. 
이것을 작은 거라도 경험하게 됐을 때, 비로소 내 마음에 회복이 일어나는거에요. 

복잡한 신학이나 심오한 교훈으로 
스스로를 설득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그런다고 해서 내 마음에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내 마음에 회복은,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행하시는 역사, 
내 인생은 계속 실패하도록 디자인된 게 아니고 
결국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렇게 채우시는구나.. 
결국 하나님이 내 인생을 회복시키시는구나.. 
작은 거라도 그 경험을 해야, 비로소 거기서부터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를 정죄하시지 않았어요. 
정죄하는 거 가지고 회복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신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설득하지도 않으셨어요. 그럼 어떻게 하셨어요? 

'일어나라, 일어나서 걸어가라!' 성공을 경험하게 하신 거죠.
굉장히 심플했어요. 

'네가 뭐 때문에 중풍병에 걸린 줄 아니? 
중풍병에 걸렸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 줄 아니? 
믿음의 역사는 뭔 줄 아니?' 이러고 설득하지 않으셨다는 거에요. 
정죄하지도 않으셨어요. 

물론 죄에 대한 용서를 선포하셨지만, 정죄가 아니었잖아요. 
그건 용서의 선포였지, 정죄하지 않으셨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회복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대신 예수님께서는 굉장히 단순하지만 
굉장히 파워풀한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셨는데, 뭐냐 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11

그리고 이것이 그에게 경험되어졌을 때 
'어, 일어나지네? 나는 절대로 안 될 줄 알았는데 일어나지네?' 

침상을 들고 걸어갔을 때, 그의 인생이 비로소 회복되기 시작한 거잖아요. 

우리 인생가운데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회복은 여러분, 이론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회복은 신학이나 철학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회복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가운데 행하시는 일을 경험할 때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일하시는 것이, 조그만 거라도 경험되어질 때 
조그만 싸인이라도 내 삶 가운데 임했을 때, 

'아 나는 계속 실패하고 넘어지는 걸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도 성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다시 걸어가게 하시는구나!' 
이것이 인식되고 경험되어질 때, 비로소 무기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돼요. 

다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고, 다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고... 
이것이 여러분 복음인줄 믿습니다. 아멘! 

▲2. 무기력이 오는 두 번째 이유는 뭐냐하면 
('실패'와 비슷하긴 한데 조금 달라요) 너무 많은 염려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염려가 우리를 무기력증에 빠지게 해요. 

이 '염려' 와 '실패'는 비슷하긴 한데 다른 점이 있는데 
'실패'는 이미 일어난 것에서 오는 충격이라면 
'염려'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실패를, 현재의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염려는 실패와 굉장히 비슷한 영향력을 갖습니다. 
실패가 반복되면 결국 우리 마음이 무너지듯이 
염려도 계속 반복되면.. 우리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눅12:22~26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미래의 실패를 계속 믿음으로 취하면 마음이 무너져 버리는 거예요. 
마음으로 염려해봐야 달라질 게 없습니다. 

눅12:27~31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믿음이 어디서부터 오냐면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에요. 주위를 둘러보라는 거에요. 
들풀도 보고, 까마귀도 보고.. 보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어떻게 지키시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를 극복하는 길 중의 하나는 '보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특별히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어떻게 여러분은 이 자리까지 오게 되셨습니까? 
그 인생의 수많은 위기들과, 수많은 고난들 가운데 
하나님이 여러분은 어떻게 인도하셨습니까? 어떻게 건지셨습니까? 
어떻게 살리셨습니까? 어떻게 돕는 손길들을 보내셨습니까? 

하나님 행하신 일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이끄시는지를 보라는 거에요.

'아 그럼 지금까지 나를 지키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앞으로도 나를 지키시겠구나!' 

이것이 우리를 염려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무기력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줄 것입니다. 

▲3. 무기력을 느끼는 또 다른 경우는 <한계를 느낄 때>에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안 됐어요. 

'내 능력이 여기까지야'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때, 이럴 때 무기력이 엄습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엘리야 입니다.

왕상19장에 보면, 엘리야는 무기력증에 빠져서 로뎀나무 아래 누워서 잤습니다.
직전 장인 왕상18장에 보면, 구약의 가장 클라이맥스 중의 하나입니다. 
갈멜산 사건이죠. 엘리야 인생의 가장 위대한 그 순간이에요. 

갈멜산에서, 엘리야 평생의 사명은 바알 우상숭배하는 것을 척결하는 거였는데,
드디어 그날이 옵니다. 그래서 엘리아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그 일을 계기로 바알 선지자 수백 명을 잡아 죽입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 했을 때 3년반 가뭄이 끝나고 비가 내렸습니다.
구름과 큰 바람이 와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거잖아요. 
엘리야 인생의 클라이맥스 에요. 

그런데 바로 다음 장인 19장에 넘어가니까 
이세벨이, 이 이야기를 다 듣고도 꿈쩍도 하지 않아요. 미동도 하지 않아요. 
그리고 뭐라 그러냐면 '내가 내일 이맘 때까지 너를 죽일거야!' 

그 전까지는 엘리야에게 소망이 있었어요. 
'하늘에서 불이 내리면 될 거야,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거를 보면 
다 회개하고 돌아올거야. 
이 가뭄을 끝내는 비가 내리면 될 거야. 
기적이 일어나면 다 믿을 거야. 
다 바알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거야' 
그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열심히 기도한 거에요. 

그런데 이게 무슨 허무 시리즈도 아니고 
이세벨이 끄떡도 하지 않는 거예요. 거기서 엘리야에게 어떤 충격이 온 것이죠. 
'그럼 그 다음은 뭐 해야 되지?' 
'이것만 바라보고 왔는데.. 이것만 이루어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됐어요. 그런데 아무 것도 안 이루어진 거에요. 

엘리야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 한계에 딱 부딪힌 거에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무기력증이 오기 시작합니다. 절망에 빠지죠!

그래서 이 절망 앞에서, 믿음의 영웅이었던 엘리아가 무기력증에 사로잡힙니다. 
광야가운데로 도망가서 로뎀나무 아래 퍼져누워서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먹는 거, 마시는 것도 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누워서 '나를 죽여 주십시오' 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무기력증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 낙심이 어디서 왔습니까? 한계를 느끼는 데서부터 온 거죠.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소망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 
아무 것도 되어진 일은 없다. 그럼 나는 왜 존재하는 건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가, 확신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나를 죽여주십시오. 나는 우리 조상보다 하나도 나은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존재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뜻이지요. 

'내 역할은 여기까지인가 보다'며, 낙심과 절망이 찾아옵니다. 
'더 이상 나는 필요 없는 존재인가 보다'

이런 증상이 언제 많이 나타나냐면, 은퇴했을 때죠. 
자기 존재 의미가 확 그냥 죽는 거죠. 
'나는 왜 존재하는 거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그 전에 사회에서 열심히 일할 때는 몰랐는데 
딱 은퇴하고 나면, 이게 확 몰려오는 거에요. 

또 결혼한 자매들 같은 경우에는 
남편이 외도를 했을 때, 기다리던 아이를 유산했을 때.. 
그때도 절망에 빠지고, 무기력함에 휩싸이게 된다고 해요. 

자기의 어떤 한계가 막 이렇게 인식되면서 
절망이 오고 존재감이 이제 흔들리기 시작하고 
'내가 왜 있는 거지? 내 존재는 뭐지?' 
막 이런 의문가운데 무기력함이 이어지게 됩니다. 

▲엘리야의 무기력함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보면 2 단계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복시키시는데 

1) 첫번째는 그의 육체를 돌보십니다. 왕상19:5~6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사람이 복합적인 원인을 가지고 보통 무기력증에 빠져들게 되는데 
순서가 참 중요합니다. 
먼저 몸을 회복시켜야 돼요. 
영의 회복이 먼저 오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선교사들이 이제 안식년을 나오잖아요. 
그럼 교회도 이런 면들을 좀 도와줘야 되는데 
선교사들이 안식년에 나오면 영혼육이 다 피폐돼 있지요. 

그럼 보통 영적인 회복이 와야 된다고 해서
막 좋은 집회부터 참석시키고.. 막 이러면 선교사는 완전히 죽어요. 

그러면 먼저 해야 될 게 뭐냐하면, 먼저 육을 회복시켜줘야 돼요. 
그래서 선교사가 나오잖아요. 
그러면 얼마 동안은 아무것도 안 시켜요. 
아무것도 안 시키고 '그냥 놀아라' 
아무 부담 없이 쉬고, 그 다음에 잘 먹여요. 

왜냐면 회교권 선교지는 돼지고기가 없잖아요. 거긴 닭고기만 먹어요.
근데 또 눈치 없는 성도들이, 여기서 또 닭을 사줘요. 있을 수 없는 얘기에요.

소고기하고 양고기가 있으나, 좀 비싸서 잘 못 먹어요. 
양고기는 좀 비싸고, 소고기는요 진짜 맛이 없게 조리를 해요. 
그래서 만만하게 닭이라서, 종종 중동 선교사들은 닭고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나왔는데, 성도들이 '닭도리탕 맛있게 하는데 있어요' 하면서
선교사를 거기로 모십니다. 그러면 안 돼죠.

그래서 흥미로운 게 '몸을 먼저 회복시키신다'는 거예요. 

우리 몸이 완전히 탈진되어 있을 때 
마음과 영이 절대로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뭐 어쩌고 해도 
몸이 탈진돼 있으면, 마음과 영이 활동하지 않아요. 

몸이 탈진됐는데 '기도 더 해봐!' 이게 될 리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복시키실 때 
그의 육체를 먼저 돌봐주세요. 자는 그를 어루만져주시고 
먹이시고 쉬게 하시고... 이 순서가 참 중요합니다. 

2) 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호렙산으로 엘리야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십니다.

왕상19:11~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하나님을 대면해요. 
중풍병자가 예수 앞에 나오듯이 
엘리아도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몸의 회복도 굉장히 심플하죠. 잘 먹고 잘 쉬는 것, 
마음의 회복도 생각보다 심플해요. 
마음의 회복은 하나님 앞에 나가야 돼요. 다른 길이 없어요. 

그런데 대면했을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그 사람의 무기력증에 딱 맞는 처방들을 하세요. 

반복되는 실패.. 그럼 하나님 앞에 나간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 뭐 하게 하시냐면, 성공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고 

계속 염려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킬 거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자기 존재감에 한계에 부딪친 사람(엘리야)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과 비전을 주시는 거에요. 
엘리야가 지금 무엇 때문에 넘어져 있는 거예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이제 더 이상 없다'는 것 때문에 넘어진 거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거 다 해봤는데,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어!'
계속 그러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뭐라 그러시는 거에요. 
'네가 이러 이러한 일을 해야 돼, 그런 일들이 남아 있어!' 하면서 
새로운 사명을 주신 거죠!

'네 인생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야 
너는 거기까지가 끝 이라고 생각하고 
너는 은퇴하고 나서 너는 네 스스로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너를 통해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너는 누구누구를 세울 것이고, 엘리사를 세울 거야!'

'나는 아직도 너를 붙잡고 있고, 나는 아직도 네 인생을 통해서 보고 싶은 게 있고 
나는 아직도 네 인생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이때 바로 엘리야가 회복되는 거에요. 
이것이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회복의 역사인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