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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양심을 깨운 시대의 선구자, 우찌무라 간조

LNCK 2023. 5. 24. 15:10

우찌무라 간조의 생애 | 일본의 양심을 깨운 시대의 선구자 | - YouTube

◈일본의 양심을 깨운 시대의 선구자, 우찌무라 간조 內村鑑三   1861~1930


우찌무라 간조는 1861년 5월 23일 도쿄에서 무사 우찌무라 요시우키의 장남
으로 태어났습니다. 무사 집안에서 출생한 우찌무라는 소년 시절부터 
종교적 감수성이 매우 뛰어났으며, 훌륭한 유교학자인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은 본건 영주에 대하여 충성하는 것, 
특히 전시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의 영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마치 먼지처럼 하찮게 여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자라났습니다. 

지식과 도덕을 가르치는 스승에게도, 마찬가지의 마음을 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영주와 아버지와 스승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고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원마다 각각 신이 있다고 진지하게 믿던 일본의 문화 속에서 
그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신은 '배움과 글쓰기의 신'이었습니다. 
매월 25일, 그 신의 형상 앞에 꿇어 엎드려, 그는 진지하게 기도했습니다. 

쌀 재배를 주재하는 신에게는, 가난한 자신의 집을 
여러 재난들로부터 지켜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내밀한 마음을 살피는 까마귀 신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매일 모든 신 중에 가장 위대한 태양 신에게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가 7살이 되던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국가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찌무라의 집안은 순식간에 몰락한 사무라이 집안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장남인 우찌무라가 집안을 일으킬 인물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안고 우찌무라는 1874년 도쿄 나와아리마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우찌무라는 이곳을 발판으로, 다음 해에 도쿄 외국어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린 우찌무라는 새로운 세계를 위해 영어에 매진하였습니다. 

우찌무라가 도쿄영어학교의 상급반에 재학 중이었던 1877년이었습니다. 
호카이도 개척사의 관리가, 이 학교를 찾아와 삿포로 농학교 관리생을 모집
한다고 공지했습니다. 

도쿄 영어학교에서는 우찌무라를 포함한 12명의 학생이 
삿포로 농학교의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로 하였습니다. *16세

삿포로 농학교는 학생들에게 의식주는 물론이고 
용돈까지 지급하는 학교였기에 
가정의 형편이 어려웠던 우찌무라가 가기에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삿포로 농학교는, 1877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립농업대학교 교장인 클라크를 
초빙하여 본격적인 농학전문 교육기관으로 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홋카이도 대학에 전신이 된 이 학교에 
클라크가 남긴 영향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무엇보다 인간 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클라크는 
개교한지 얼마 안 되어 학생들을 모아놓고 '신사가 되라'고 이르고 
학생 각자의 자주, 자행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그보다 어린 시절에) 어느 일요일 아침 우찌무라는 학교 친구의 권유로 
영어로 진행되는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마음에 들어 일요일마다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흥미를 느껴 열심히 참석을 하였는데 
나이 든 영국 부인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친절과 섬김이 퍽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5년 후 기독교를 받아들이라는 공식적인 제안과 
지켜야 할 엄한 규칙들이 제시되었을 때, 그는 거부하였습니다. 

주일 성수를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하는 것은 
아직까지 믿음이 없는 그에게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믿어온 조국의 신들을 버리고 
기독교를 믿는 것은 배교이고, 조국에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랬으나 1877년 3월, 부임한 클라크 교장은 학생들에게 강권적으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당시 삿포로 농대 1기생들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해 있었습니다. 

1기생들은 2기생들에게도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집요하게 권유했습니다. 
학생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개종하는 학생들은 점점 늘어가고 
나중에는 우찌무라 혼자 우상 숭배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홀로 학교 근처의 우상의 신전을 찾아가 
진지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도 결국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거의 강제적인 서약이었습니다. 
그때가 1877년 12월, 그의 나이 16세였습니다. 

그는 주변 환경과 반 압력으로 받아들인 신앙이었지만, 
얼마 안 가서 800만의 우상이 아닌, 오직 하나의 신만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성과 양심은, '그래 이거야' 라고 반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상들에게 바치던 기도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고 
우상들을 섬기던 날들을 지킬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새로운 믿음이 가져다 준 영적 자유는 
그의 지성과 육체에 건강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1878년 6월 2일 주일, 마침내 동료 6명과 함께 
그는 감리교회의 해리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기독교식 이름을 정했는데, 그는 조나단으로 정했습니다. 

세례는 우찌무라의 일상에 큰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 어떻게 충성해야 할까?' 
'하나님께 헌신한 자들의 교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삿포로 농대를 다니는 동안, 학생들의 종교 모임을 통해 
많은 영적 유익을 얻었습니다. 

주일 오전에는 점심식사 시간까지 약 4시간의 모임이 있었고 
수요일 밤 9시 반에는 기도 모임이 있었습니다. 

상급생들과 함께 모이는 주일저녁 연합성경모임도 있었습니다. 

1879년에는 여름 두 달을 동경의 집에서 보냈습니다. 
그 기간에 친구인 프렌시스가 함께 했는데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2년 만에 만난 가족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어머니는 무관심했고, 아버지는 반대했습니다. 
남동생은 그가 준 로마서의 신성한 문구들 사이에 
기독교를 경멸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참았고,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떠날 무렵, 아버지로부터 
그가 믿는 신앙에 대해서 검토해보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은 
실로 큰 성과였습니다. 

졸업 후 고향집을 방문했는데, 2년 전처럼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가 전도하기에 가장 어려웠던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대학생활 3년 동안 아버지에게, 줄기차게 전도용 책 등을 보내면서 
속히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 받으시도록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강퍅한 아버지의 마음은 전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받은 장학금을 유익한 곳에 쓰기 위해 기도하다가 
그는 부모님께 선물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선물이 중국에 있는 독일인 선교사 파베르 박사가 
쓴 <마가복음서 주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받으신 아버지의 반응이 매우 냉랭하였습니다. 
총 5권 중 한 권이 아버지에 의해 쓰레기로 버려졌지만, 
또다시 다른 책을 아버지 책상 위에 놓아두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책을 한두 페이지 정도 읽으시고는, 다시 쓰레기로 버리셨습니다. 
그러자 다른 책을 아버지 책상 위에 두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인내가 승리의 깃발을 꽂았습니다. 
아버지가 결국 5권 중 첫 번째 책을 다 읽으셨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기독교를 비웃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두 번째 책도 아버지의 책상 위에 두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두 번째 책까지 다 읽으신 아버지는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세 번째 책도 다 읽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삶과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술을 덜 드셨고, 어머니와 자식들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더 부드러워졌습니다. 
네 번째 책을 읽은 후, 아버지의 마음이 드디어 무너졌습니다. 
'아들아, 내가 교만했다. 오늘부터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 

그는 아버지를 교회로 모시고 갔고 
아버지의 성품 전체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에서 들은 모든 말씀이, 아버지를 감동시켰습니다. 
누구보다도 남성적이고, 무사다웠던 아버지의 두 눈이 눈물로 젖어 있었습니다. 
더 이상 술도 마시지 않으셨고, 1년이 지난 후에는 세례도 받으셨습니다. 
철저하게 성경을 연구하셨고, 그 후로 성실한 기독교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후 삼촌, 형제들,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교회로 입문하였습니다. 
10년 동안 그와 가족들은 신앙 때문에 많은 냉대를 받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많은 불이익과 어려움을 감수하였습니다. 

◑1881년 7월, 그는 삿포로 농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20세
홋카이도 개척사 관리로 취업하였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신앙의 몇몇 동지들과 한 집에 살았습니다. 
그가 고향에 가 있는 동안에는, 동료들이 작은 예배처소를 얻었습니다. 

50명 정도가 모이면 꽉 찰 정도의 작은 성전에, 강단을 만들고 탁상을 준비했습니다. 
50명 정도의 성도들이 부르는 찬양 소리 때문에 
벽을 맞대고 있는 이웃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예배의 열기는 식지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모여들은 성도들이, 밤 10시 저녁 예배가 끝나고 돌아간 후에야 
조용해졌습니다. 그곳은 교회일 뿐 아니라 독서실이자 교실이요, 
위원회실이자 다과실이요, 클럽회관이었습니다. 
회개의 눈물과 웃음이 넘쳐나는 장소였습니다. 

감독교회 형제 자매들은, 안정된 성전을 포기하고 
우찌무라 간조의 교회와 합치기로 하고 
신앙서적과 오르간을 가지고 오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들은 소속 교단을 떠나서, '민족 독립교회'를 이루기로 뜻을 함께 모았습니다. 
YMCA를 조직하고 우찌무라 간조가 부회장에 임명되었습니다. 

YMCA 개회식이 있었는데, 약 60명의 사람들이 모였고 
교회가 발 디딜 틈이 없도록 가득 찼습니다. 

그때 그는 지질학과 창세기를 결합한 연설을 했는데, 성령의 감동이 충만하여 
미화 100달러를 후원금으로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어려움에 크게 봉착했습니다. 
400달러의 빚이 있는 데다가, 설교자들의 사례비가 전혀 나가지 않는데도 
교회 운영을 위한 지출이 적지 않았습니다. 

더 굳센 하나님의 일꾼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통이 따라야만 했습니다. 
성숙한 영혼은, 수많은 시험과 실패를 거치며 만들어져가기 때문입니다. 

1882년 새해를 맞이하여, 그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독립교회를 인정할 수 없으니, 속히 400달러의 빚을 갚으라' 
감리교 감독파 선교회의 편지였습니다. 

그와 동료들은 매우 당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감리교단 선교회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진 순간, 그에게 주님은 말씀하시는 듯 했습니다. 
'네가 다시 바꿀 수 없는 것이로구나. 그러나 일어나렴, 
나와 함께 다음 단계로 가자꾸나!'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사람이나 단체가 아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순수한 사역자로서의 발판을 삼고 다시 용기를 냈습니다. 
그는 산에 있는 제재소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교회에서 그곳까지는 약 24KM의 좁고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짐차가 다닐 수 있도록, 그와 교회 공동체가 힘을 모아 
길을 새로 닦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는, 그 공사의 측량 기사와 건설 책임자로 일을 하면서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전력을 다했습니다. 

연말에 드디어 교회의 빚을 다 갚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교회가 독립하자 
자신의 많은 헌신과 땀이 배어있는 그곳을, 스스럼 없이 떠나왔습니다. 

그가 쓴 일기의 한 대목입니다. 
「기독교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중재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기를 바라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영원하신 성령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마음속에 가지고 계신 그 뜻을, 우리로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내 영혼이여, 항상 선한 것을 의도하시는 그분의 뜻에, 그대의 뜻을 맞추어라. 
주께서 나를 치신다 할지라도, 나는 즐거워할 것이다. 
나는 비록 죽어도, 하나님의 뜻은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헌신된 영혼은, 자기 자신의 성공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시는 것만을 기뻐한다.」 

1883년 무렵, 그는 부패한 관료 생활을 보고, 직장에 사표를 제출하였습니다. *22세
마음의 공허함이 일어남과 동시에 건강도 약해져서, 그는 휴식이 필요했지만 
일본 기독인 대회에, (자기) 교회의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대회 기간 동안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집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했습니다. 

한 학생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지나가는 불교인 순례자를 붙잡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끈질기게 논쟁을 한 결과 
그들의 승복을 벗기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한 젊은이는 평소 말을 더듬었었는데,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마치 사도 베드로가 된 마냥, 불을 내뿜으며 말씀을 자연스럽게 전하였습니다. 
대회가 막을 내린 후에도 
성령의 충만한 열기로 후속 모임이 일주일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의 부패한 마음의 정신을 집중하고 
사흘간 회개를 힘썼지만, 어떠한 신령한 체험도 하지 못했습니다. 

뼈아플 정도의 실망이 밀려왔지만, 그는 눈에 보여지는 어떤 기적과 
신비한 체험만을 좇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삶의 변화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자 몸부림 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소책자로 된 <존 하워드의 전기>를 열심히 읽으면서 
소소한 위로와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실천적인 구제가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여기며 스스로 자문했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이 충만한 집회에 참석한다 하더라도 
주변에 있는 거지의 배를 채워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그와 동시에 하워드처럼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많은 교도소를 방문하다가, 열병에 걸린 병사를 간호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금년에는 후세를 위하여 이만큼 돈을 모아놓았다는 것도 좋고 
이만한 사업을 했다는 것도 좋다. 
나의 사상을 잡지에 논문으로 써놓았다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한층 좋은 것은 
‘후세를 위하여 내가 약한 자를 도와주었다. 
후세를 위하여 내가 이만한 어려움을 극복해보았다. 
이만한 품성을 수련해보았다'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믿는 바를 실행하는 사람이 진실한 신자이다’」 라는 말처럼 
그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한편 안정되지 못한 상태일 때 
우찌무라는 결혼 상대인 아사다 다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요코하마의 보통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가족과 동료들은 그녀와의 결혼을 반대하였습니다. 

우찌무라는 반대를 무릅쓰고 1884년 그녀와 결혼했습니다.  *23세
그러나 결혼은 7개월의 짧은 신혼생활을 끝으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혼생활의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환상이 깨어지고 
그의 마음에는 큰 상처로 남게 되었습니다. 

우찌무라는 심히 괴로웠으나, 주변을 정리하고 미국행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더 넓은 외국으로 나가서, 
조국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과 지식을 습득한 후에 
나라를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1884년 11월 24일 새벽, 청교도의 정신으로 세워진 미국이    *23세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자 (육지가 보이자)
벅찬 가슴으로 자신이 묵었던 3층 선실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자신의 꿈이 실현되었다.는 감격에 감사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의 눈에는, 미국인들 모두가 선교회 사명을 가진 사람들로 보였고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생각은 점차 바뀌어갔습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5달러짜리 금화가 들어있는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였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화적 충격은 시카고에서였습니다. 
기차 식당 칸에서 식사 전에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본 흑인 웨이터들이 와서 말을 건넸습니다. 

그 웨이터들에게 신앙에 대해 말하자 
자신들은 감리교 교인이라며 매우 친절하게 
그의 일행이 기차를 떠날 때까지 2시간 내내 시중을 들어주었고 
가방을 메고 표를 검사하는 곳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우찌무라 일행이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하고, 
가방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가방을 주지 않고 손을 쑥 내밀었습니다. '얼마라도 좀 팁을 주쇼' 

기차는 떠나기 직전이었고, 웨이터와 신랑이를 버릴 시간이 없었기에 
각자 50센트짜리 하나씩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가방을 돌려받은 후에, 겨우 서둘러 기차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조차 돈이 힘이라는 사실을 
여러 경험을 통해서 깨닫고는, 그는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기독교인 만큼 열쇠를 많이 사용하는 일을 본 적이 없었기에 
이 또한 놀랐습니다. 당시 일본의 고향에서는 열쇠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집은 거의 대부분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하인이나 이웃이 자신들의 소유에 손을 댈 것이라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전혀 달랐습니다. 

온갖 문과 창문 등 모든 것을 잠갔고, 
가정마다, 시멘트 지하실과 돌을 깎아 만든 저장실이 필요했고, 
그것을 불독과 경찰들이 지켜야 하는 문명을 
과연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정직한 크리스천이었던 우찌무라는, 심각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구의 초대로 방문한 적이 있는 델라웨어 주에서는 
흑인들만을 위한 지역이 도시에 별도로 정해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이것은 매우 이교도적인 처사로 보입니다' 라고 말했더니 
그 친구는 '기독교인이 되어서 검둥이와 같은 구역에 사느니 
차라리 이교도가 되어 따로 살겠다'고 강력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대했던 기독교 문명에 대한 그의 믿음에, 큰 실망을 안겨주는 일들이었습니다. 

그가 미국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펜실베니아의 한 의사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실천적인 박예주의자였습니다. 

우찌무라는 그가 운영하는 장애인 보호시설에 간호인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주님께서는 완전히 새로운 인생의 관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찌무라가 간호사 겸 조수로 돌봐야 할 지적장애아동은 4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그들을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챙기고, 
발을 씻기고 배설물을 치우는 일을 하였습니다. 

일본의 한 전도유망한 엘리트 관료가 
미국에서 하루아침에 지적장애아동들의 배변을 처리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극복하는 훈련을 시키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아동들을, 자기 희생적인 기독교의 사랑으로 돌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자아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야말로 '자신이 가진 죄'라고 인식하였습니다. 
그는 정신적인 번민 가운데 고뇌하다가 

 

1885년 9월 엠허스트 대학교의 총장 줄리어스 실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24세
낡고 허술한 차림새와, 주머니에 달랑 7달러밖에 없는 그가 
총장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은, 온유함 그 자체였습니다. 

총장은 초라하고 볼품없는 그에게 
예의바른 인사와 함께 동정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경험했던 엄격한 스승(클라크 박사)이 아닌 
자신을 진정한 사랑과, 형제애로 대하는 총장의 인품에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총장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따뜻한 환대를 받고, 미국 북동부의 명문인 엠허스트 대학의 신학과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기숙사에 무료로 쓸 수 있는 방을 내어주며 
필요한 물품들까지 총장은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의 방은 제일 꼭대기 층에 있었는데, 의자에 다리 하나가 없었고 
침대는 삐거덕 소리가 났습니다. 
침대 덮개에는 빈대 종류의 벌레가 숨어 있었고, 
기숙사 바닥에 양탄자를 깔 여유도, 서랍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곳을 떠나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물질과 환경은 열악했지만, 뉴잉글랜드의 대학생활은 무척 즐거웠습니다. 
교수님들의 강의를 통해, 신성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습득했고, 
구약역사와 신론에 대한 특별 수업도 듣게 되었습니다. 

성경해석학을 통해서는 잘못된 사상들을 
성경적인 기준으로 새롭게 정돈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대학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총장은 그를 
규모가 큰 선교사들 모임으로 인도했습니다. 

낯선 이국 땅에서 그동안 맛보지 못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1만 명의 남성과 수많은 여성 지식인들이 
다른 민족에게 복음의 선함을 맛보게 할 방법에 대한 강의를 듣기 위해 
서너 개의 큰 홀을 넘치도록 채운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모임을 통해, *아마 선교대회 모임, 당시 SVM 이 일어나던 시기 
그동안 여러 가지 문화적 충격으로 실망했던 부분들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고 
기독교 국가 미국의 위상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한편 그의 내면에서는 어느 때보다도 죄와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내면의 어둠에 짓눌려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총장의 한마디가 우찌무라에게 전기가 되었습니다. 

「우찌무라, 자네는 자네의 마음속만 보니까 안 되는 거야. 
자기 밖을 보아야 해! 
자기 성찰을 그만두고 십자가에 달려서 
자네의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님을 왜 바라보지 않는가? 

자네는 어린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놓고 
그 성장을 보려고 매일 그놈을 뿌리째 뽑아보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네 
그건 하나님과 햇빛에 맡기고, 안심하고 자네의 성장을 왜 기다리지 않는가?」 

그러다가 그는 십자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이 무렵 쓴 일기의 내용입니다. 

「1886년 3월 8일,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다. 
오늘처럼 그리스도의 속죄 능력이 내게 분명히 드러난 적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에서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던 모든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빚을 해결하셨기 때문에 
나는 타락 이전에 태초의 사람이 가졌던 순결과 순진함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것이며 
결국에는 천국으로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는 악보다도 선이 훨씬 많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새, 꽃, 태양, 공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악에게 불평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갖추면, 이 세상은 천국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앙이다.」 

내적 싸움이 치열했던 만큼 주님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기쁨도 그만큼 컸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신앙의 힘과 하늘나라의 희망, 
이는 하나님이 그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는 사람에게 주시는 
가장 좋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이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많은 아픈 절단 수술을 행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어떤 때는 우리의 계획을 모조리 뒤엎어 놓으신다. 
또 어떤 때는 우리를 외딴 섬에 홀로 남겨두신다. 
또 어떤 때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저주받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게 하신다. 

그러나 시련이 그 보람을 나타내어, 하늘 문이 우리의 눈앞에 열릴 때는 
우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옮겨진 사람인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은, 이 육체가 천국에서 노닌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지극히 분명하고 지극히 조용한 기쁨이지 
이를 알고 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은사에 접하여, 세상 성공이란 것이, 분토와 같은 것임을 안다. 
이 보물을 마음에 얻은 때에, 우리는 지대한 부를 느끼며 
세상의 하찮은 수억만 부를 자랑하는 사람을 보고 
속으로 연민의 정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는 세상에 하찮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또한 늘 애썼습니다. 
비록 내면의 싸움으로 큰 번민과 고통은 겪었지만, 
이는 그의 영혼을 더 단단하게 하고 끊임없이 하늘을 소망하게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정말 하찮은 곳이다. 
한 사람의 악인의 일순간의 속임수로 말미암아 
일생의 행복을 잃게 되는 일이 있는 그러한 하찮은 곳이다. 

이렇게 하찮은 곳이기 때문에 
이 세상 생애에서 실패를 했더라도, 몹시 실망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세상은 어찌되든 좋다. 우리는 이 세상 이외에 영원한 집을 지을 것이다. 
좀먹지 않고, 녹슬지 않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도둑질하지 않고, 
악한 사람이 악한 꾀를 쓰지 못할 곳에 재물을 쌓아두라는 것이다」 

엠허스트 대학(MA소재)  졸업 후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 신학교에 등록하였지만 
자신의 복음주의적 신앙과 맞지 않는 신학교의 신앙 노선과 
건강 문제로 중퇴를 결심합니다. 


◑1888년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하였는데       *27세
주머니에 남은 돈은 달랑 75센트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은 평화로웠고, 자신의 남은 생애를 일본이 복음화되는데 
사용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본인으로서의 애국심을 불태운 사역자였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두 개의 제이만을 사랑한다. 
하나는 지저스의 J이고, 다른 하나는 제펜의 J이다. 

내가 예수님을 더 좋아하는지, 일본을 더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동포들에게서 미움을 받는다. 

그리고 국수주의적으로 일본을 감싼다고 해서 
외국 선교사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문제될 것은 없다. 

모든 친구를 잃을 수는 있지만, 예수님과 일본을 잃을 수는 없다. 
굶주린다 해도, 죽음이 찾아온다 해도, 예수님과 일본을 부인할 수는 없다.」 

1889년 7월 31일 요코하마 가즈코와 재혼한 우찌무라는   *28세
그해부터 제1 고등중학교, 오늘날의 도쿄대학교 교양학부에서 
영어와 지리, 역사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편생활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이 조선을 강제합병하고 
만주에 이어 중국까지 침략하던 때에 
반전운동, 평화운동을 펼쳐 극도의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일본군이 전쟁 초기에 연전연승하는 전황이 보도되자 
일본 국민들은 모두가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으나 
그는 그런 분위기에 맞지 않게 비판을 가하였습니다. 

일본이 아세아 평화에 기여하여야 나라의 장래가 있다. 
지금처럼 서구 제국주의 흉내를 내어, 
이웃 나라들에 대한 침략 전쟁을 계속한다면 
가미사마 하나님께서 일본 하늘에 불벼락을 떨어뜨릴 것이다 

가는 곳마다 전승 분위기에 들떠있던 때에 
전쟁을 반대하고 나선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용기였습니다. 

당연히 세인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비국민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일본 사회에서 비국민이란 말은 매국노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결국 1891년 1월 9일 중대사건이 발생합니다.     *30세
천황이 서명한 교육칙어 를 천황의 초상화 옆에 걸어놓고 
그 앞에 경의를 표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우찌무라는 60여 명의 비기독교 교사진과 
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양심에 따라 그 자리에 선 채 혼자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찌무라의 행동에 대한 비난은 
그가 재직하고 있던 제일고등중학교 학생과 교사들 사이에서 먼저 나왔습니다. 
심지어 우찌무라의 집을 습격해 돌을 던지기까지 했습니다. 
매스컴은 재빨리 이 사건을 "우찌무라 간조의 불경 사건"으로 포장하여 
전국에 퍼뜨렸습니다. 

우찌무라의 이름은 반역자의 대명사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여관 투숙을 거부당할까봐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가명을 써야만 했습니다. 

이 와중에 우찌무라는 폐렴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가 
2개월 만에 스스로 회복은 되었지만, 이미 실직자 신세였습니다. 

그동안 아내 가즈코는, 어려움 기간 가운데서도 우찌무라를 간호했는데 
결국 그녀 자신이 같은 병으로 병석에 누워 
그해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찌무라는 직장을 잃은 직후 아내까지 잃게 되어 
그 비통함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우찌무라 간조는 저술과 강연을 통해 
일본 기독교를 한 단계 격상시키는 진지한 학문(저술) 작업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발간된 그의 저서, <기독신도의 위로>는 
불경 사건 후 우찌무라가 겪은 쓰라린 체험을 바탕으로 일궈낸 
종교사상의 결정입니다. 

또한 일본 사회 어느 곳에도 발붙일 수 없게 되자 
<성서연구>란 제목의 잡지를 발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동경의 자기 집 6평짜리 방에서였습니다. 

일본이 성서 위에 세워져야 함을 강조하며, 
말씀으로 청년들의 영혼을 깨우쳐 
성서의 진리 위에 신일본을 건설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후에 그의 성서연구반 출신들이 새로운 일본을 세우는 일에 
큰 기둥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6평 집에서 가르친 학생들이라 합니다)

그곳의 출신으로 동경대학 총장 4명과, 교육부 장관 4명이 배출되었습니다. 
오히라 수상도 1명 배출되었고, 
일본 복지계를 이끌고 있는 일꾼들의 70%가 크리스천들입니다. 

일본의 기독교 인구가 0.3%임에 비하면 복지계의 70%란 엄청난 비율입니다. 
그 이유인즉,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생들이 
전후의 복지 분야를 주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청년성경공부반에 동경해서 유학 중인 조선인 유학생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찌무라 간주에 영향을 받아 
1927년 1월에 모여 <조선 성서연구회>를 결성하고는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는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유석동 6명이 중심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의 운동을 <성서조선 운동>이라 부릅니다. 
함석헌 선생의 말입니다. 

「우찌무라 간주의 교회관은, 교회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주의'를 배척한다. 거룩한 교회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오 
현 교회 안에 들어있는 교회주의를 미워한다. *'교권주의' 라고도 하죠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발생할 것이지, 만들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 교회 안에는 교회 본위로 인간적 노력으로 교회를 만들자는 주의가 
들어있는 고로 그것을 미워한다.」 

우찌무라 간조는 모진 핍박과 수많은 비방과 고통이 따랐지만 
세례유한처럼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뜻을 불같이 토해내며 시대를 깨웠습니다. 

1945년에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탄이란 불벼락이 떨어져 
일본이 패전하게 되자, 그제야 사람들은 우찌무라 간조야말로 
시대의 양심이요, 예언자라 칭송하는 분위기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1930년 3월 28일, 69세의 얘기로 하늘나라로 떠난 그가 
평생 절실하게 기도했던 표어입니다. 
"나는 일본을 위하여, 일본은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나라 사랑의 최종 목적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임종의 순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입은 하나님의 은혜는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쁘고 감사한 것이 있다면 
바로 저의 기도를 전부 들어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제가 한 기도 그대로를 하나님이 들어주셨다면 
저는 제 멋대로에다가, 교만하기 짝이 없고, 건방지기까지 한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의 영혼을 파괴하고 죄짓게 하는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오 주님 이것으로 인해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저의 온전한 기도만 들어주심으로, 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기독교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 그는 
하나님 사랑과 민족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어낸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