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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존감에서의 회복

LNCK 2023. 5. 24. 20:40

수치심에서의 회복 [마가복음7] - 갓피플TV [공식제휴] - YouTube

◈낮은 자존감에서의 회복        막2:13~17

마가복음 서두에 나오는 <5가지 회복>
첫 번째 종교로부터의 회복 : 귀신들린 자 온전케 하심   1:23~28
두번째는 질병으로부터의 회복 : 베드로 장모를 고치심  1:29~34
세번째는 단절로부터의 회복 : 문둥병자를 고치심         1:40~45  
네번째는 무기력에서의 회복 : 중풍병자 고치심            2:1~12
다섯번째 낮은 자존감에서 회복 : 세리 레위를 부르심    2:13~17

오늘은 5가지 회복의 이야기 중에 마지막인  
"낮은 자존감에서의 회복"입니다. 
본문은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인데요,  레위는 마태와 같은 인물입니다. 

본문의 스토리가 앞선 네 번의 경우와 좀 다른 것은 
앞서 일어났던 네 번의 회복은, 모두 다 당사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요. 

그런데 이 5번째 회복은 예수님께서 먼저 레위를 발견하고 부르십니다. 
조금 순서가 다르죠. 

왜냐면 이 낮은 자존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기가 먼저 다른 사람 앞에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기가 쓸데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잉여 존재라고 생각하고  *잉여 : 남는, 없어도 되는데 덤으로 존재하는

그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아이덴티티는 뭐냐면 
자신을 '잉여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인간이 아니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괜히 있어서 그냥 사람들한테 부담만 주고 민폐를 주는 존재!' 

그래서 이런 아이덴티티가 있는 사람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없습니다. 

뭔가를 시작하려고 해도 자꾸 스스로 위축되고 
사람들 눈빛을 자꾸 피하게 되고.. 
그러니까 당연히 예수님한테 먼저 나아갈 수 없었지요.

그래서 이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에게는, 예수께서 먼저 찾아가셨어요. 
참 예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얘기를 보면, 아주 섬세하세요. 

우리의 상황을 아시고, 우리의 상태를 아시고 
정말 섬세하고 정말 자비롭게, 우리를 다루시고 회복하시는 분이세요. 

오늘 예수님의 이 섬세한 회복의 손길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도 임한 줄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정확하게 맞는, 여러분에게 정확하게 필요한 그것을 가지고 
오늘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삶을 부르시고, 회복하실 줄 믿습니다.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좇았던 세리가, 레위 한 명만 아니었다는 거예요. 
많은 세리들이 예수님을 좇았는데, 스토리들이 대충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 중에 하나가 삭개오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레위하고 아주 비슷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삭개오죠. 
삭개오 와 레위의 이야기는, 많은 부분이 중첩돼 보일 정도로 아주 비슷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들이 왜 세리의 삶을 살게 됐을까요? 
모르긴 해도 아마 각자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이런 직업을 그냥 자기가 좋아서, 원해서 갖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뭔가 사정이 있으니까 이렇게 밀려간 거겠죠. 

우리가 전부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만한 것은 
삭개오는 키가 작았다는 거예요. 

당시는 육체 노동 사회였죠.
그러니까 사람의 가치가 육체의 노동력에 의해서 평가되는 시대였죠.

노동을 해도 육체로 노동을 해야 먹을 것이 나오고 
전쟁을 하더라도 힘이 있어야지 전쟁을 할 수 있고 그러니까 
남자의 가치는 육체 노동에 의해서 평가받는 그런 시대였어요. 

그런데 삭개오가 키가 작았다는 것은, 다른 직업을 가지기 힘들었겠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세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분명히 어려서부터 심한 열등감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자존감이 몹시 낮았을 것입니다. 
물론 레위는 키가 작지 않았겠지만, 다른 비슷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보죠... 

여러분, 자존감이 높으냐/ 자존감이 낮느냐는 
인생에 큰 영향력을 미칩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 인생을 그냥 방치해요. 
자기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까 
'난 쓸모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인생을 사는 것이 마땅해' 
또는 '나는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돼' 
이런 생각들이, 자기의 인생을 그냥 방치하고 냅둡니다. 그냥 학대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이, 결국 자신의 인생을 진흙탕 속으로 밀어넣고 
그곳에 방치하고 놔두죠. 

아마 삭개오나 레위도.. 모르긴 해도 
그들이 세리가 된 이유는, 
삭개오의 작은 키에서 엿볼 수 있듯이 
레위 역시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며 성장했을 겁니다.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고 
외모가 독특했을 수도 있고 
말이 어눌했을 수도 있고..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하여간 레위도 그렇고 삭개오도 그렇고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또 자존감이 워낙 낮았기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어도 
그게 그냥 자기에게 당연하고 합당한 처우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사람의 자존감이라고 하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거든요. 
사람의 자존감이라고 하는 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데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들을 바꿔주세요. 
이 회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침신) 신학교에 다닐 때, 신학교에서 자존감 테스트를 했는데 
제가 저희 동기 중에서 1등을 먹었습니다. 압도적인 1등이었어요. 

수치가 97%가 나왔는데, 거기에 대한 테스트의 종합평가가 뭐였냐면, 
'모든 사람이 당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할 수 있으니까 조심하십시오' 
이게 제가 받은 평가였어요. 

그런데 제가 원래부터 그렇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었냐? 그렇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는 말이 되게 어눌했던 사람이거든요. 
말을 되게 심하게 더듬어서, 계속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으면서 학교다녔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친구들이 내 말씨를 흉내 내고, 놀리고... 
이러면서 그게 굉장히 속상했죠. 

그러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스트레스 받고... 
제가 중학교 때부터는 조금 나아졌는데 
초등학교 때는 오늘날로 치면 거의 왕따였던 것 같아요. 
맨날 친구들한테 맞고 다녔어요. 왜 맞는지 모르고... 

'이상하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러지?'
그런데 모든 애들이 때리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거기에 하여간 나쁜 놈들 몇 놈이 있었어요. 

하여간 맨날 얻어맞고 다녔어요. 
그래서 제가 부모님한테 '나 태권도 좀 가르쳐달라, 
내가 좀 패줘야 될 놈이 있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제 자존감이 그렇게 높아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제 안에 일어난 변화는, 자존감이 높아진 거예요. 그건 진짜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일어난 변화예요. 

물론 세상적인 영향도 조금은 있었던 게 사실인 것 같아요. 
그게 서울대(수학과)를 들어가면서 조금 회복이 됐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 안에 일어났던 근본적인 자존감의 회복은, 복음과의 만남이었어요. 

지금 제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당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할 수 있다' 라고
할 만큼,  이 조금 위험해 보이는 자존감은 어디서부터 오냐면 

'하나님이 저를 지지하신다'는 믿음에서부터 와요. 
'네가 뭐를 해봐라, 결국 하나님은 내 편이야, 
덤빌 수 있으면 나한테 덤벼 봐, 난 누구든지 자신 있어!'

누구든지 내게 덤벼도 여러분은 손해입니다. 
저를 이기실 수 없어요. 왜요? 하나님은 내 편이시니까요.
지금 건강한 자존감의 예를 든 것입니다. 

저는 세상 누가 와서 저한테 뭐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지지하신다'고 하는 믿음이 있어요. 

하나님은 결국 내 편에 서 계실 거고.. 그 믿음이 있어요. 
이게 사실은 제 안에 있는 자존감의 진짜 근원이에요. 

제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컸기 때문에, 제 안에 자존감이 있었던 게 아니에요. 
제가 초중고 시절에는 찌질하게 지냈는데,
지금 제 안에 과도해서 오히려 위험할 정도로 자존감이 높아진 것은
'주님이 내편 되어 주신다'는 믿음에서 온 것이었죠!

우리 삶 가운데 근본적인 자존감의 변화는, 여기서부터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지하셔, 누가 뭐라 그래도 하나님은 내 편이야!'
 
그래서 죄 문제를 다루셔야 돼요. 
이 죄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으면, 계속 자존감이 낮아져요. 

그게 왜 그러냐? 
하나님이 내 편에 서실 지/ 안 서실 지 잘 모르겠거든... 그렇지 않아요.? 

뭔가 죄를 짓고, 뭔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래도 하나님은 내 편이야' 이런 마음이 잘 안 들어요.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셔, 벌 주실 거야' 이런 생각이 드는게 정상이죠.

뭐 이런 불안함이 생기죠. 
그러다 보면 우리 안에 '건강한 자존감'이 세워질 수 없어요. 

계속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고 
계속 자기에 대해 스스로 비하하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 삶이 '낮은 자존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진짜로 자존감이 회복되면서 오는 축복들을 
누리기 원하신다면 
일단 죄 문제를 어떻게든 처리하셔야 돼요. 
정말 하나님 앞에서 죄로부터 돌이켜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돼요. 

근데 그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은, 율법과 종교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정말 하나님을 깊게 사랑할 때, 죄가 멀어지는 거거든요. 
그 역사들이 있어야 돼요. 아멘! 
그럴 때 높은 높은 자존감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부어질 줄 믿습니다. 

◑낮은 자존감에는, 저주가 있습니다. 

▲1. 첫 번째 저주는 뭐냐면, <자기 인생을 방치한다>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돌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향해서 '그렇게 살면 안 돼!' 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분명히 No 라고 말해야 되는 건데... 그걸 못 해요.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 말아야 될 곳에 대해서 
분명히 No 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자존감이 무너져 있는 사람은, No 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없어요. 

전혀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가지 말아야 되고, 하지 말아야 될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는데도 
그냥 방치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진흙탕이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압박합니다. 

그 결과 더 손가락질 받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고, 더 손가락질 받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첫 번째 저주에요. 

▲2. 낮은 자존감의 두 번째 저주는, 그래서 그 결과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현대에는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외모에 집착하기도 하고 
그래서 수십 번씩 막 성형수술을 한다든지.. 
화장을 과도하게 하기도 하죠.

이게 왜 그런 줄 아세요.? 자존감에서부터 나오는 거에요. 
스스로가 '잉여'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비하하니까 
그래도 내가 존재해야 될 이유가 뭔가 있다고 하는 것에 계속 집착하는 거예요. 
뭔가는 있어야 그래도 인생이 버텨주는 거죠. 그래서 뭔가에 집중하게 됩니다. 

레위나 삭개오는, 그게 돈이었죠,
돈이 아니었다면, 뭐하러 세리를 하겠어요?
남자 중에서는 가장 낮은 직업, 아무도 안 하고 손가락질 하는 직업인데..
돈이 아니었으면, 이걸 왜 했겠어요?

뒤에서는 손가락질 하고 욕하겠죠.
적어도 앞에서는 자기를 손가락질하지 못합니다. 
굽신거립니다. 
그래서 삭개오를 향해서 뭐라 그랬냐면 '세리장이요. 그는 부자였다'고 했어요. 

레위도 부자였을 거예요. 
처음에는 돈 버는 것이 기쁘고 신났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 정도 돈이 모이고 나니까, 
돈 가지고 나의 자존감이 해결 안 되는 걸 인식하는 거죠.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있는데, 세계 위인전 있잖아요. 
나폴레옹, 조지 워싱턴...
이 사람들에 대해서 누가 심리조사를 해봤더니 
"위인전에 오르는 상당수 사람들의 자존감은 굉장히 낮았대요.

대부분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는 거죠.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분야에 따라 좀 다릅니다. 특별히 정치인, 부자, 세계를 정복했던 사람들은
아주 자존감이 낮았다고 하고요.
과학자같은 경우는 좀 달랐다고 해요. 

뭔가 자기를 증명해야 된다는 그 집착 때문에, 
과도하게 (성과에) 집착하는 거에요. 

그래서 건강이 망가지고, 주변에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계속 집착, 집착하다 보니까 
세속적 위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참 아이러니죠. 

근데 분명한 건 뭐냐 하면,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는 거에요. 

돈을 많이 벌었어요. 또는 높은 권좌에 올랐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낮은 자존감에 저주는, 자기를 결코 행복하지 못하게 해요. 

그래서 이 '낮은 자존감'은
인생의 참 의미는 상실한 채 
자신을 증명해줄 무언가에 노예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평생 자신을 증명해 줄 그 무언가의 노예로, 비참하게 삶을 살게 됩니다. 

▲3. 낮은 자존감이 주는 세 번째 저주가 있는데 
<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는 거예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타인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합니다. 
자신을 비하하고, 그래서 자신을 증명해줄 무언가에 집착하다 보니까 
삶이 정상적일 수 없습니다. 

자신을 증명하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까, 대부분의 대화가 어떠냐면
방어적이에요.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살짝 얘기만 해도 
계속 그걸 디펜스하려고, 방어하려고 그러니까.. 대화가 서로 피곤해요. 

또 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를 계속 비하하기 때문에 
작은 말에도 상처를 쉽게 받아요. 
그러니까 친구들도 하나, 둘.. 자기로부터 등을 돌리죠.

그러니까 상처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거든요.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상처를 안 받아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누가 흉보는 말을 해도, 또는 자기에게 공격성을 보여도,
'저렇게 말하는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을 거야'
또는 '좋은 의도로 한 것일거야' 이렇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과는 대화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정말 쉽지 않아요. 평범한 말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말에도, 자신을 비하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요. 제 옛날 친구 중에 한 명이 
참 얼굴이 독특하게 생겼었어요. 미안하지만 진짜 못생겼어요.

친구가 그것 때문에 자존감이 낮았는데 
하루는 친구들끼리 식사하러 갔다가 개떡이 나왔어요. 

근데 그 중에 한 친구가 얘 들으라고 한 얘기는 아닌데 
그냥 농담처럼 '개떡 진짜 못생겼네' 이런 얘기를 했다가 
이게 싸움이 붙어가지고 치고 받고 막 싸웠어요. 

그냥 개떡을 보고 농담을 좀 한건데 
그 친구는 '자기 욕 했다'고 받아들인 거죠.

이게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거든요. 
진짜 아무 일도 아닌데, 이제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죠.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랑 관계를 하다 보면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 듭니다. 
조금만 실수해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생각지도 않는 참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지치고 피곤합니다. 
자기를 증명하고, 방어하고, 정당화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정상적인 관계가 잘 안돼요. 
주변에 깊게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점 없어져요. 

행복은 관계에 달려 있고, 건강도 관계에 달려 있다고 그랬잖아요. 
중년을 넘어가면 얼마나 깊은 퀄리티의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건강도 결정되고, 우리 뇌기능도 결정되고, 우리 삶의 퀄리티도 다 결정되는건데,
이 복을 다 놓쳐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낮은 자존감은 저주에요. 
여러분들 가운데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회복이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낮은 자존감에서 회복될 수 있는가요?>

예수님께서 나를 지지하신다고 하는 것을 확신할 때, 그때 회복되는 거에요. 
레위와 삭개오가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보세요. 
예수께서 지지해주신 거잖아요. 

이렇게 지나가시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딱 레위를 보시고 
'나는 네가 마음에 들거든, 너는 나를 따라와!' 

아무나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로 부를 사람들만 딱 뽑아서 부르신 거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특별히 레위를 꼭 집어서 
'너 말이야 너!, 너는 나를 따라 와!'
 
삭개오 보고도 특별히
'삭개오야 나무에서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나를 지지하시고, 인정하신다는 뜻이거든요.
이게 여러분 우리의 자존감을 바꾸는 거에요. 

제 간증이기도 해요. 제가 앞서 말씀드렸지만 
제 안에 높은 자존감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제 안에 있는 확신때문에 그래요.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을 부르신 게 아니고, 나를 뽑아서 부르셨어요. 아멘!
그래서 저도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저의 모든 것을 다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지지하신다'고 하는 걸 
내가 어떻게 알고, 어떻게 경험했냐고요? 

그건 사랑은 속성 때문이에요.

한 자매한테 두 남자가 사랑을 고백합니다. 
경쟁적으로 아침저녁으로 꽃을 사들고 
매일 아침 꽃을 선물하고, 매일 저녁 금반지, 목걸이, 에어팟프로, 
이런거 매일 막 선물사가지고 와요. 좋을까요, 싫을까요?

똑같은 행동을 해도.. 그 사람이 스토커면 끔찍한 거죠. 
똑같은 행동을 하는데.. 그 사람이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연인이에요. 그러면 행복한 거죠.

자 보세요. 여러분, 이 두 남자는 여자를 똑같이 사랑했어요. 
스토커나 연인이나 똑같이 정말 생명처럼 사랑했어요.

근데 왜 이 여자가 느끼기에 
이쪽 사람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끔찍하다고 느끼고 
저쪽 사람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행복해할까요? 

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거잖아요. 
이게 사랑의 속성이에요. 한 쪽은 상호 관계적 사랑이고, 한 쪽은 그게 아니었죠.

하나님은 여러분을 똑같이 사랑하세요. 
똑같이 여러분을 위해서 생명을 주셨어요. 

온 우주에 여러분 한 명만 있다 그랬어도 
역시 오셔서 십자가 지셨을 거에요. 

그런데 내가 그 사랑을 얼마나 느끼는가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내 편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나를 지지하셔!'
이 확신의 강도는 어디서 오는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만큼 오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큼 오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자존감은 
그것(하나님의 지지, 하나님 빽)에 의해서 형성되는 거죠.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지지해주시는가?' 하는 것에 의해서 
내 자존감이 달라지게 돼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이 내 편이야' 
이 사람이 결국 높은 자존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어요. 
그걸 뭐하러 증명해요? 하나님이 다 증명해 주실 텐데... 

뭐 그걸 다 이렇게 일일이 설명해요?
무슨 오해받는 일이 있어도, 일일이 설명 안 해도 돼요. 
왜냐면 하나님이 나를 지지해 주신다는 거죠. 
하나님이 다 설명해주시고, 오해를 풀어주실 줄로 기대하는 거죠.

더 나아가면 '계속 오해하면 자기 손해지 뭐!' 하고 넘어갑니다.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정말 여러분의 생명을 다 드렸어요.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드렸어요.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렇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결국 그 지지하심을 자기가 알게 돼요. 
이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있게되기를 축복합니다

레위가 앉아있던 세관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다니고 있었어요.
세관은 시장 입구나, 성읍 중심지에 있었을 거예요. 통행량이 많은 곳이었죠.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레위만을 딱 집어서 '너 말이야 레위 너! 다른 사람 말고 너 레위!
내가 관심있는 사람은 너거든, 네가 날 따라와!' 

거기에 레위가 '아멘!' 하고 레위가 응했을 때 
레위 안에 있던 오래된 저주(낮은 자존심)가 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막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저와 여러분 가운데, 2020년도에 이 회복의 역사가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것은 다른 회복하고 좀 달라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있어야만 회복이 되는 회복이에요. 

병에서 치유되고 하는 것들은, 깊은 인격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예수의 능력으로 치유가 일어날 수 있어요. 

제가 기도해서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났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불신자도 있었거든요. 그분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데도 
치유된 적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 것들은 기적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낮은 자존감에 치유는, 비인격적으로 절대 회복될 수가 없어요. 
이 병 자체가, 우리의 인격에 붙어 있는 병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병 자체가 우리의 마음과 인격에 붙어 있는 거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그분이 나를 어떻게 지지하시고, 그 분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어떻게 나를 지목하여 부르시는가? 

어떻게 이 수많은 사람 중에, 나하고 눈을 맞추시고 
수많은 인파가 있지만, 내 이름을 부르시고 
막 떠밀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있지만 
다른 누구도 말고 '나는 네게 관심이 있거든. 
다른 누구도 말고 나는 OOO, 네게 관심이 있거든, 너는 나를 따라 올래?' 

그때 내가 응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응답한 그날부터 
뭐가 한 번의 사건은 아니었지만 
이제껏 함께 걸어왔던 그 긴 시간, 그리고 주 앞에 드렸던 예배, 
주 앞에 드렸던 헌신, 사랑, 
그거에 리워드(보상)가 뭔가 봤더니.. 자존감이 더라고요. 

하나님이 나를 지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저는 정말 어디에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 믿음이 있어요. 

마치는 말
자존감은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절대적으로 붙잡고 있다는 
이 믿음에서부터 오는 거예요. 
세상 성취에서 오는 게 아니에요. (성취 말고 다른 열등감이 있어요)

세상 성취해서 오는 것은 얄팍한, 잠깐의 심리적인 만족이고 
그거 말고 진짜 깊은 자존감, 
어떠한 폭풍 가운데도 흔들리지 않는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평강가운데 있는... 

무엇을 성취하던/ 성취하지 않던 
뭐 세상적으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무 관계없이 
어떠한 경우에도 누릴 수 있는 자존감은 
여러분 어디서부터 오는 거에요?

하나님의 지지하심으로부터 오는 거죠. 
그 지지하신 가운데 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