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은, 인생에 한번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런 질문은 사춘기때 방황하며 던지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대면해야 하고, 또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때는, 대개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입니다. 또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설 때 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거센 강물에 휩쓸려가는 나무토막처럼 그저 인생이라는 강물에 휩쓸려 가듯 이 질문을 파묻어 버리고 살아가곤 합니다. 이런 질문은.. 철학자들, 사상가들의 전유물처럼 그렇게 치부되고 맙니다.
▲구약의 욥도, 극심한 고난 속에서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욥은, 고난당할 때 처음에는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있어야 합니까?' 라고 질문 하지만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나는 왜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런 욥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욥기 38~39장에 이르기까지 긴 말씀으로 대답하시는 데, 그 대답은 도리어 하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폭포수처럼 많은 질문들을 하나님께서 쏟아내셨습니다. 그 중 일부를 읽어보면 욥38:2~6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하나님의 질문들의 핵심은, 인간은 스스로, 이 모든 것의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시작의 근원을 알아야만, 고난의 이유도 해석이 되는데 시작의 근원을 스스로 알 수 없으니, 고난에 관한 이유도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이 모든 것의 시작, 그리고 자신의 존재의 시작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자신의 시작의 이유를 알고자 하는 것입니까? 시작을 알아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해외로 입양된 분들이, 자신의 친부모를 모든 노력을 다해서 알고자 하는 것은 그래야 자신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능력, 사상적, 철학적인 노력, 심지어 과학적 연구로도 이 시작의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과학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연구하여 거기서 일정한 법칙을 발견하고, 또 현상을 발견할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발견 할 뿐이지, 왜 그 현상이 있어야 하는가? 왜 세상이 존재해야 되는가? 왜 인간이 존재해야 되는가? 그 시작의 이유에 대하여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신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직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시작하게 하신 분의 계시의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본론
본문 창세기 1:1절은, 바로 모든 것을 시작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의 시작을 '창조'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히브리어 '바라' 라는 단어는 무의 상태에서 유로 바뀔 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며, 이 동사가 쓰여질 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어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창조'란 어떤 있는 재료를 가지고, 또 다른 것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했던 어떤 것이 변화되어, 변이되어 새로운 것으로 바뀐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무의 상태에서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셨습니다.
▲2절에서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있었다'고 했습니다. 개역개정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이렇게 혼돈과 공허 라는 단어가, 매우 부정적인 용어입니다.
'혼돈'은 형태가 없었다 'formless,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라는 뜻이고,
(*한글번역 '혼돈'은 형태가 없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혼돈 chaos 했다고 번역했죠.)
'공허'는 말 그대로 '텅 비어있다 void' 라는 뜻이죠.
어떤 분들은 '혼돈과 공허' 라는 것을 1절에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1절과 2절을 서로 연결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또 접속사에 해석이 어렵습니다. *베 그래서 1절과 2절을 연결하는 접속사가 2절 서두에 나오는데 그것을 연결해서 이렇게 해석하는 거죠.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때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
그러면 창조하신 결과가, 창조하셨는데 그 땅이 공허하고 혼돈했으면 하나님의 창조가 문제가 있는 것이 되죠.
또 어떤 사람들은 상상을 했습니다. 1절 과 2절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Gap theory 간격설' 이라고 말합니다.
1절과 2절 사이에 긴 시간 동안, 엄청나게 많은 격변이 일어났고 또 반역이 일어났고, 그래서 3장에 사단이 나오죠.
그러므로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사단이 존재였으므로 1절과 2절 사이에 반역이 일어났고 그 반역으로 인하여 땅이 이렇게 혼란하게 되었다.. 라고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상당수에 많은 분들이 이런 해석에 은혜를 받고 '아 그렇구나' 또 나름대로 그런 근거도 있어요. 그러나 정설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든 세계가 사단의 반역으로 완전히 망가졌다.. 라는 가설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을 때의 상태가 (원래 있던 땅이 이미) 혼돈하고 공허했다 그러면, 그 땅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이미 창조 이전의 원물질이 존재하고 있다는 건데, 있을 수가 없는 거죠. 무로부터 창조한 창조가 돼야 되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미 존재하던 것을 가지고 창조하게 된 거네?' 이것도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1~2절을 해석할 때, 우리가 올바른 시각을 가져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의 상태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되고
그 무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형태가 없고 비어있었다' 라는 무의 표현이고 :2 그리고 1절에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라고 했고 2절에 넘어와서는 '땅이 형태가 없고 비어있으므로'
1절에서는 하늘과 땅을 설명하시고 *전체 창조의 서론 2절에서는 땅을 설명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본격적 각론
그러므로 1절과 2절은 시간적인 순서라기보다 1절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을 선언하신 것이고 2절은 그 가운데 '땅의 창조'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중심으로 한 환경, 이 땅에 창조의 초점을 두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1절에 '하늘과 땅'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1절에 나오는 '하늘과 땅' 이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그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지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할 때 그 '하늘'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 대기권, 구름이 있는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영어로 하늘을 sky 와 heaven 으로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스카이는, 우리 눈에 보이는 구름이 존재하는 대기권 하늘이고, 해븐은,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의 영역을 의미하는 겁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초월의 영역을 가리키죠.
예수님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에서 '땅'은 뭡니까?
우리가 발딛고 있는 땅, 랜드가 아니라 보이는 모든 이 세상, 우리가 눈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이 물질 자연의 모든 세상을 의미할 때 '땅'이라고 말씀하신 거죠.
골1:16에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 곧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 하늘과 땅을, 골로새서 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로 설명했죠.
우리는 지금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지만 역사적으로 니케아신경 이라는, 사도신경 정도의 권위는 아니지만 비슷한 권위를 가진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하늘과 땅' 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 이란 표현을 써서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 초월적인 세계와 보이는 세계,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 영역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땅에 초점을 둬서 설명하는 거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이 세상, 눈에 보이는... 빛으로부터 출발해서 해와 달과 별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환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의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은 다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가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에 초점을 둬서 창조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왜 '하늘'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습니까 말씀 한들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본 것을 우리가 상상할 수도 있고 본 것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데 보이지 않는 그런 초월의 영역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들 우리가 더 혼란케 될 수 있으므로, 그 부분은 생략하고 '땅에 창조'를 기록으로 설명하셨다는 겁니다.
그렇다고해서 초월의 영역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신비한 하나님의 초월적인 기적과 표적이 성경에는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1절은.. 하늘과 땅의 창조, 모든 창조의 초점을 두었고 *전체 창조의 서론 2절은.. 무의 상태에서 이 땅이, *각론 시작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에서, 이 땅의 창조의 초점을 두어서 기록하신거죠. 이렇게 보면, 앞서 여러 해석의 난제들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태초에 이루어졌다' 이 '태초에' 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표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표현입니다.
영원하신 분이, 시간을 태초에 부터 시작해서 시간을 시작하셨고 또한 땅을 창조하심 으로 공간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분이 시작하신 이 시간과 그분이 창조하신 이 공간 세계 속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후로부터만 알 수 있는 존재이며, 그 시작 이후는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1:3절 이후로 시작되는 이 창조의 기록을 통해 발견되는 중요한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창조의 역사를 이루신 분이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삼위일체 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1절에 '하나님이' 엘로힘 하나님 성부 하나님을 의미하죠. 또 골로새서 1:16절에서 보면 '만물이 아들로 인해 창조되었고 아들...' 성자 하나님이시죠.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은 '품고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창조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과,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 사역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창조의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을 설명하는 거죠.
그 만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성부 하나님과 독립된 인격이었지만 하나된 그분과 함께 하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 분을 통해 지음 받았으며 그분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를 이루실 때 아무 재료 없이 무의 상태에서 말씀으로 창조' 하시잖아요.
말씀하시되 '빛이 있으라.. 해와 달과 별이 있으라'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그 말씀이 누구냐면 요한복음은 '그 말씀이 곧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셨다. 곧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럼 왜 창조하셨을까요?
외로우셔서가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울 대상을 찾으신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존재를 만드신 겁니다.
하나님이 의지할 대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대상을 창조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 하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그 아들과 함께 나누시는 영원한 기쁨, 영광,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었기에,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근데 왜 창조 하셨습니까? 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고 나누는 대상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 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에, 이 창조주에 솜씨가 포함되어 있고, 가장 많이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가 나타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창조의 솜씨를 알려면 인간 자신을 들여다보면 됩니다.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 계획력, 실행력, 인간 안에 담겨진 이 엄청난 신비로움에 창조주의 솜씨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그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곧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고 사랑하며 찬양하는 존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시고 영광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존재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양의 가사처럼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나는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난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 사랑의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랑'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넘쳐나는 것은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나면 곳곳에 물이 넘쳐나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먹을 수 있는 깨끗한 물이듯이
이 사랑의 홍수 속에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그 이유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이유가 사랑이라면,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그 엄청난 스케일과 나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나의 작은 문제까지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 이시라는 것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신 그 분이 바로 나를 창조하신 분이라면 나의 삶에 가장 작은 문제 하나도, 하나님은 결코 흘려버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겁니다. 사랑으로 역사하기 원하신다는 거예요. 단,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높여드리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한다면...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는 곧 창조주 하나님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1:1절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라는 이 말씀은 창조주 그분의 증언인 것입니다.
창1장을 읽어가다 보면, 목격자 입장에서, 증언자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죠. 사람 중에 누가 그것을 보았겠습니까? 창세기의 기록자 모세 자신도 그걸 직접 본 게 아니겠죠. 누가 '빛이 있으라' 하는 음성을 듣고 기록 했습니까? 증언자, 목격자는 단 한 분, 창조주 그분 자신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상상해서 그럴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창조주 그분, 당신 자신이 증언으로 성령 안에서 계시해 주신 것이 창세기의 기록입니다. 그분의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설명이 나오는 것은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증언이기 때문이죠.
또한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증명이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은 증명이 필요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변명이 많이 있지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변명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창세기의 창조 기록이 1장만 해도 31절의 짧은 구절에 이 창조의 증언을 기록했어요.
6일간의 창조를 이 짧은 구절로 만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창조를 전부 기록하고 있다는 거.. 놀랍지 않습니까?
이 짧은 구절에 그 창조의 질서를 다 담을 수 있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 이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과학적으로도 틀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표현이 간결하며 그 심오한 내용을 간단하게 그 광대한 내용을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은 말이 필요 없어요. 자신이 일부 밖에 모르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전부를 아는 사람은,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간결하게 우리에게 창조의 기록을 남겨 주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질문이며, 또한 창조주의 선언입니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연히, 오랜 시간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두 단어로 항상 설명이에요. '우연히' 그리고 '오랜 기간동안' 이 두 단어 속에 모든 것을 다 설명합니다.
그 다음에 과학적으로는 지금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설명하죠. 종 안에서 변이가 일어나는 것은 가능하죠.
그러나 인간이 다른 존재로부터 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화석도 존재하지 않고, 그런 객관적인 과학적 증거도 없습니다. 추측이며, 상상이며, 또 하나의 믿음일 뿐입니다. 창조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그것은 모든 것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나 또한 시작하셨다. 나를 창조하셨다. 나는 그분에게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나의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너는 내가 창조한 피조물이다. 나를 기억하고, 나에게 돌아오고, 나를 의지하고, 나에게 예배하고 나를 찬양할 때.. 네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는 풀리게 될 것이다'
창1:1절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인 것입니다.
만일 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게되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것에 하나님의 창조주의 솜씨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 하지 않으면 피조물을 신처럼 떠받드는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겁니다.
왜 역사상 수많은 우상들이 나타났습니까? 피조물에도, 이 하나님의 창조주의 솜씨가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가장 많은 솜씨는 인간에게 담겨 있죠. 그러므로 우상숭배의 본질은, 인간 자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숭배 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 기만적이고 자기모순적인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경배하고 찬양해야 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때 인간은 피조물을 섬기게 되고, 자신을 섬기게 돼요.
큰 나무에 절을 하고, 바다를 향하여 빌고, 별을 보며 빌고, 동물을 신처럼 숭배하고... 그런 현상으로 반드시 추락하게 되고... 더 안타까운 것은, 인간이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다는 거예요.
그저 가만히 있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 이하의 형태로 추락하게 되는 거예요.
동물은 본능에만 충실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 이하의 존재가 되는 거예요. 어떻게 인간이 마약에 취해서, 그렇게 인간 이하의 존재, 좀비처럼 될 수 있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대한 신앙이 없을 때는 인간은 급속도로 피조물을 숭배할 뿐만 아니라 피조물 이하의 존재로 추락하게 되는 거예요.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께 대한 창조 신앙을 회복해야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는 경배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 짧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도전하며, 비판하며, 연구해 보겠다고 하며, 과학적으로 '이것을 (창1~2장) 내가 도전해 보겠다'고 하며
그 모든 것 보다 더 중요한 건 뭐예요?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대답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증언을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이 하나님의 선언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인생에 해답이 열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적용)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해 본 적이 있습니까? 또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내가 창세 전에 창조되었음을 묵상해 봅시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나를 창조하신 점을, 묵상해 봅시다. 나는 하나님과 오늘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