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심분리기 막3:13~19 스크랩, 출처 휘발
◑일단 먼저 세우시고, 점점 만들어 가신다.
본문은 열두 제자를 예수님께서 삼으신 내용입니다.
그래서 성경들마다 이 단락의 제목을 ‘열두 제자를 세우시다’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원어를 살펴보면, 그냥 숫자만 나와 있어요.
열두 제자를 세우셨다고 나와 있지 않고,
마10:1절에는 열두 ‘제자’라고 표현하고
곧바로 2절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하고
‘사도’로 명칭을 바꿉니다만,
마가는 그냥 숫자 ‘12’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열둘을 세우셨다’입니다.
(개역성경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세우셨다’고 하는 이 말도 우리는 ‘제자라는 자리에 사람을 임명했다’ :14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대통령을 세웠다, 국회의원을 세웠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웠다’는 말의 원뜻은
헬라어로 본문에 마가가 특별히 어떤 단어로 사용하는가 하면,
‘에포이에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입니다. *포이에오
열둘을 특별히 골라내서 그들을 제자의 자리에 임명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창조하신다는 얘깁니다.
‘열둘을 세워서 그 열둘을 창조하셨다,
예수님의 사람으로 창조하셨다’는 얘기에요.
정리하면,
예수님은 12명을 일단 먼저 세우시고,
그 후에 점점 사도로, 제자로 만들어 가신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나라 사역을.. 제자를 통해 세워 나가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마가의 시점, 시기적인 위치, 이것은
막3:19절에 ‘가룟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경험한 시점에서 지금 쓰고 있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일은
실제로는 지금 열둘을 세우고 있는 역사적인 시점보다는 훨씬 뒤의 일인데,
이미 뒤의 일을 다 경험하고 난 이 시점에서, 이걸 쓰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19절에 ‘이는 가룟유다니 예수를 판 자라’는 말을 살짝 끼워 넣지만,
이것이 지금 복음서를 이해하는 key예요, key!
▲마가복음을 기록할 당시 마가는
지금 승천하신 예수님까지를 보고 난 뒤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는 이 사건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이야기로 지나갈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것을 목격하고 경험한 마가(베드로)의 입장에서 이것은 충격입니다.
그 이후로는 밥을 먹어도 친구와 이야기를 해도,
나가서 장사를 해도, 그 무슨 일을 해도,
또 예수님에 관한 이전의 어떤 기록들을 봐도,
이 충격과 쇼킹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나라로 승천하신 예수님의 그 충격적인 장면과
연관 짓지 않고 볼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 연관 하에서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 기록된 자료들을,
지금 이런 식으로 배열하고 있고,
이런 식으로 줄일 것은 줄이고 상세하게 기록할 것은 상세하게 기록하면서
마가복음을 써내려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관점(십자가, 부활, 승천 후)에서 보는 거예요.
그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때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각이 뭐였겠습니까?
마음에다 파스를 바른 것처럼, 천국이 쏴~한 마음으로 느껴지고 있는 마가가
마가복음을 쓰면서, 예수님께 몰려오는 군중들을 회상해 볼 때,
그 군중들의 삶은 천국과 대비할 때 카오스(혼돈)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카오스의 현장이
하나님의 나라로 바뀌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 복음사역의 시작이
바로 열둘을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름떼처럼 몰려온 수천수만의 ‘모바일 카오스’(움직이는, 혼돈에 빠진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그 열둘을 세워서.. 그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열두 명을 → 사도로 만드시는 과정
여기에는 제자라는 말도, 사도라는 말도 아직 안 쓰여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데,
우리는 이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과정에 대해서,
한번 면밀하게 살펴보자는 거예요.
진짜 내가 지금 예수님의 사람인가?
자, 열둘을 세우셔서 그 세우신 목적을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하며,
귀신을 쫓는 권능을 가지게 하려 하심이라’ 3:14~15
세 가지이죠?
-예수님과 함께한다,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보내어집니다, 전도합니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냅니다.
여러분, 이것 세 가지를 하고 있습니까?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면 아직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걸 분명히 인정하면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1. 자,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이 말,
여기에서부터 벌써 그리스도인 되는 것이 좌초됩니다.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이 사실이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좌초시킬 뿐만 아니라,
좌초되지 않는 사람은 사이비 그리스도인으로 빠져나가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으면서
함께하는 줄로 아는 사이비 그리스도인들로 양산되는 거예요,
이 첫 번째 조항에서부터.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회사에서 말단직원이 사장님과 함께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기 전까지는 사장님과 함께할 수가 없어요.
이건희 씨와 함께할 수 있는 삼성의 직원이
수만 명 중에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아무나 쉽게 함께할 수 없어요.
하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가 일어나야 됩니다.
만들어져야 됩니다, 창조 작업이 일어나야 됩니다.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세상을 살다가
지금 현재 열심히 세상을 살고 있는 이 모습 이대로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예요.
가룟유다가 미끄러져 나간 것이 함께하지 못한 것이 어느 시점입니까?
십자가를 계기로 가룟유다가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합니다.
다른 열한 명의 사도들이 그저 삐걱거리면서도
그 십자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하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가 뭐예요?
이게 바로 ‘원심분리기’라는 겁니다. (세탁기를 연상하세요.)
내 마음이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그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내 마음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함께 나를 동일시해서
마음이 달라붙을 때,
십자가에 달린 내 마음이 원심분리기 안에 들어간 것 같이 돌아가면서
마음에서부터 무엇이 분리되는가 하면,
(마치 물먹은 빨래에서, 세탁기가 돌 때, 물이 분리되어나가는 것처럼)
세상 물을 잔뜩 먹은 내 마음에서부터, 세상이 분리되어나갑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하려면,
내 마음이 윙~ 하고 돌아가는 거예요, 원심분리기인 십자가 위에서.
내 마음에 지금 자식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고 있는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에
계속 내 마음이 원심분리기 안에서 돌아가듯이 돌아가면서
내 마음 안에 물이 스며들어 있듯이 깊이깊이 젖어들어 스며들어있던
‘내 자식’이라는 문제가 빠져나갑니다.
‘사업’이라고 하는 문제가 내 마음에서 분리되어 빠져나갑니다.
‘이 세상에서 내 인생을 잘해보겠다는 꿈도 비전’도 다 빠져나갑니다.
그렇게 빠져나가면 마음이 흰 눈처럼 되는 거예요.
십자가 위에서 흰 눈처럼 되는 겁니다.
△이 십자가는 여러분!
우리가 비가 올 때 자동차를 타고가면
유리창을 닦아주는 와이퍼를 비가 오는 동안에 계속 움직여주어야 됩니다.
마찬가지예요, 내가 기도했을 때 마음이 다 깨끗하게 하얗게 되었어요.
세상이 다 원심분리기에서 빠져나갔어요.
그래서 이제 가족들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하고
아내와, 자식과, 부모와 대화합니다.
이럴 때, 또 그들 속에 있던 세상이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자동차에 비가 내리듯이.
그러면 와이퍼가 계속 움직여야 되는 것처럼
마음이 십자가 위에 얹혀 져 있는 일이 계속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마음이 계속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원심분리기 or 와이퍼로 비유된) 십자가가 계속 돌아가지 않는 한,
내 마음 안으로 세상이 스며들어 오고 젖어들어 옵니다.
그걸 계속 돌려야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세상이 젖어들어 오려고 할 때,
다 튕겨져 나가는 겁니다.
이렇게 하얗게 되어야.. 하나님과 함께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빠져나가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약속대로, 하나님아버지의 약속입니다, 그렇게 세상이 빠져나간 마음은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하늘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몸은 이 땅에 있어도
마음은 하늘로, 성령에 의해서 천국의 세계를 감지하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느끼고, 거기서 우리가 계속 얘기해오고 있었던
특히 마가가 주안점을 두고 있는 안식을 경험하게 됩니다.
안식을 경험해서 충만한 감사와 기쁨이 있을 때, 두 번째, 보내어집니다.
보내어진다는 거예요.
▲2. 보내져서 전도합니다.
전도가 뭐예요?
이제 천국을 경험한 사람 -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마가와 같은 입장이에요 -
천국을 경험한 사람의 입장에서 박씨 아저씨를 만났어요,
그분의 얼굴이 사업 걱정 때문에 새까매요.
이때 전도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천국을 제시하는 겁니다.
박씨 아저씨는 돈 문제가 해결되는 지점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치 야생동물들이 이 땅 위에서 먹이를 찾아서 땅만 보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이 세상 경계 안에서의 해결을 보기 위하여 세상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 분께 천국을 제시하는 겁니다.
마음이 세상 경계 바깥으로 넘어가야 됩니다.
그래야 궁극적인 행복과 기쁨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과감하게 이걸 제시하는 거예요.
사업 잘되게 해주겠다, 꿈을 이룰 수 있다, 비전이 있다.. 이런 게 아니라,
마음을 떼 내는 겁니다, 세상 바깥으로 보내는 것, 이게 전도예요.
세상 바깥의 허공에 내보내는 것인가? 아니에요.
천국을 프로젝트(투사) 하는 겁니다.
원심분리기에서 세상을 분리했던 것처럼,
그래서 마음이 천국을 만나서 천국으로부터 보내져 온 것처럼,
천국을 투사projection 해 가지고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아, 천국을 어떻게 가지?’ 할 때.. 십자가로 인도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전도입니다.
원심분리기로 인도해야 되요.
천국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는 거죠.
그러나 천국 가는 길이 어디에 있어요?
원심분리기를 통과해야 됩니다, 마음에서 세상을 다 빼내야 되요.
사업 잘할 수 있는 길을 얻는 게 아니라,
사업에 대한 마음 자체가 싹 다 빠져나가야 됩니다.
물기가 상추에서 빠져나가듯이 싸~악 빠져나가도록
십자가로 인도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전도입니다.
이거 하고 계십니까?
이거 안 하고 계시는 이유는, 내가 원심분리기를 통과해서
천국에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천국을 느끼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3. 그리고 세 번째로 귀신을 쫓아내는 겁니다.
이 귀신 쫓아내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니까
우리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는 것만
귀신을 쫓아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그런 귀신들린 자를 만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아주 진귀한 일입니다.
그런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지만,
늘 그렇게만 생각하니까 귀신을 못 쫓아내는 거예요.
귀신은 보이지 않아도, 그가 하는 일은 보여요.
귀신이 하는 일, 꿈에도 소원인 귀신의 소원이 뭐냐 하면,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더 이 세상 경계 안에 묶어두는 것’입니다.
절대로 주님께서 가까이 가져오신 천국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세상 담장을 넘어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세상에 마음을 묶어두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을 세상에 묶어두기 위해서 귀신이 하는 말씀들이 뭐냐 하면,
‘희망을 가져라’, 세상 경계 안에서 이룰 수 있는 희망,
‘잘살 수 있다, 잘살아보자, 성공할 때가 올 거야’
이게 다 귀신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뭐가 성공이고 뭐가 형통입니까?
왜 우리의 희망이 세상 경계 안에 묶여있어야 됩니까?
천국을 가까이 갖고 오셨는데…
모두 귀신의 말씀이에요.
세상의 일을 마음에 담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면 됩니다.
내 마음은 세상 경계를 넘어서 하나님께로 가야 됩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힘과 뜻을 다해 사랑하라’
힘과 뜻을 다하는 길은 이 세상에 대해서 힘을 쓰지 않고, 뜻을 쓰지 않는 거예요.
내 뜻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 뜻을 다하는 것이 돼버리는 겁니다.
왜요? 이 세상에 전혀 내 뜻과 계획과 의도를 지불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향해 뜻을 다 사용하는 게 되는 거죠.
귀신을 쫓아내는 것, 어떻게 합니까?
자, 자식문제 때문에 걱정하는 엄마를 봅니다, 여기서 귀신을 쫓아내야 돼요.
귀신이 지금 자식이라고 하는 미끼를 써서,
엄마의 마음을 세상에 꽁꽁 묶어두고 있습니다.
이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자식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그 엄마의 마음을 빼내야 되요.
‘지금 당신이 자식문제 때문에 걱정하는 것은, 실제로 자식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 마음이 하나님으로 차 있지 않아서 생기는 결핍을
마귀가, 자식이 문제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거다’
이렇게 가르쳐 주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가 도리어 귀신의 말씀을 강화시킵니다.
‘돈 벌 수 있다, 잘살 수 있다, 병 고침 받고 오래 살 수 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마음을 빼내는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원심분리기로 이끌어내는 겁니다, 천국으로 지금 넘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게 귀신 쫓아내는 거예요.
원심분리기에서부터 이 역사가 다 시작이 됩니다.
예수와 함께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원심분리기’ 안에 내 마음을 집어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