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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 1강 설교자 만들기 ▣ 존 파이퍼 설교 모음
Lecture 1: The Making of a Preacher
제가 지금 71세인데요. *1946년~
나이를 더 먹어갈수록
제가 오래 살면서 목회에 대해 더 생각할수록
더욱더 설교의 능력과 귀중함과 필요성을 더 실감하게 됩니다.
이 영상을 시청하는 여러분 중에는
아마도 40~50대의 사업가로서 (내가 늦었지만 앞으로)
설교자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죠.
혹은 15살 학생으로서 고등학교에 다닌다든지,
혹은 대학생이나 신학생일 것입니다.
설교에 관한 이 시리즈에서
제 생각에, 여러분께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제 과거 이야기, 제 소명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설교자 만들기’라고 불러도 됩니다.
왜냐면 이것은 꽤 상당한 불가능한 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가 여러분에게 간단하게 말씀드릴 텐데요.
과거에 제게 설교에 대한 어려움과, 장애물로 여겨졌던 것들이
제 생각에는 (인생을 뒤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저를 설교자로 만드셨던, 불로 연단하는 용광로였다는 것입니다.
▲제 7학년에서 한 번 시작해 봅니다.
제가 중1학년 쯤 되어서 알게 된 사실은
‘제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할 때는, 얼어붙어 버린다는 사실’이었죠.
이것은 사람들이 흔히 놀리는, 평범한 초조함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누구나 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거니까, 그냥 이겨 내!’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 앞에 서면, 그냥 마비가 왔습니다.
매우 심각한 증상이었습니다.
그 증상이 무엇이며, 그게 어디서 기인했으며, 왜 제게 그게 나타났는지
저는 지금까지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왜 저를 그렇게 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그런 상태였습니다.
사람들 앞에만 서면, 겁에 질려서 일종의 마비가 왔습니다.
그 마비는 장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고작 여섯 명이 모였을 때나
학교 수업시간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예를 들면, 9학년 과학 수업시간이었죠.
학생들은 그룹 단위로 돌아가면서, 책을 한 문단씩 읽고는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했을 때였습니다.
우리 그룹이 앞에 나가서 발표할 차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슴이 너무 쿵쾅거려서, 고개를 숙여서 제 가슴을 내려다 봤습니다.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리며 뛰었는지, 옷 밖으로 그걸 볼 수 있을 정도였어요.
그 발표 직전에, 저는 너무 심장이 뛰는 게 못 견뎌서
갑자기 교실을 뛰쳐나가서, 화장실에 가서 혼자 울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저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선생님께, 저는 도저히 발표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0학년 때였습니다. *고1
버밀리온 선생님이 사회과목을 가르쳤는데요.
수업 첫날에 공지하기를
구두로 하는 책 보고가 있을 텐데 *oral book report
모두가 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심장은 완전히 내려앉았고
목은 부어올랐으며, 어깨는 얼어붙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저는 도저히 그 발표를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조니야, 이 과목에서 네가 발표하지 않으면
C 학점밖에 못 받는단다’
‘괜찮습니다. 저는 C를 받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C를 받았습니다.
그 발표를 하지 않았고, 저는 도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저는 한 번도, 학급 반장, 부반장 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려면 앞에 나가서 연설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죠.
▲제가 10학년 때, 어머니께서..
이때는 ‘기독교 심리학’도 있기 전이었습니다.
1961년이나 62년쯤이었으니까요.
어머니께서 저를 데리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왜냐면 그 증상이 제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어려웠고,
제 인생의 모든 것을 짙은 먹구름으로 덮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죠.
정신과 의사는, 제게 어떤 것을 보게 했는데,
오늘날 그것을 ‘로샤 검사’라고 부릅니다.
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테스트를 한 시간 정도 한 이후에
이 정신과 의사가 진단한 것은
제 어머니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의사의 진단에 기가 찼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에서 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한 사람,
저를 참아주고, 저를 도와주는 딱 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결코 어머니를 탓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병원에 다시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체나 교회 앞에서 나서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건너뛰고는,
▲이제 (제가 원하던 기독교 대학인) 휘튼 대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끔찍하게 두렵고 떨면서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휘튼대학교에는, 모든 학생들이 필수로 이수해야하는
<연설 Speech> 과목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1966년, 제가 대학 2학년과 3학년 사이에 있을 때,
교목이었던 에반 웰치 목사님께서 제게 오셨습니다.
그 해 여름방학 Summer school 학기에,
저는 화학 수업을 들으며, 의대 예비과목을 듣고 있었습니다.
저는 매우 들떠 있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제가 의사가 되도록
제 인생을 충분히 계획하셨다며, 과학 과목을 미리 수강함으로써,
졸업 후 의대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제게 말했습니다.
‘내일 채플 시간에, 네가 대표로 기도해보렴!’ 라고요.
‘얼마나 오래 하면 되나요?’
당시 섬머스쿨 채플에는 약 5백명이 왔습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30초나 1분’
어떻게,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나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기로는
제가 캠퍼스를 혼자 걸어가면서
하나님과 거래 deal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하나님께 거의 서원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번 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이 내일 대표기도 라는 과제를 잘 통과하게 해주신다면,
그저 제가 통과하게만 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얼어붙지 않고, 제 목소리가 기도 중에 멈추지 않게 해 주세요.
그러면 저는 주님을 위해서 말하는 기회를, 앞으로
두려며하며 거절하는 것을, 결코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을 정말로 제게는 무서운 서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무사히 통과하게 해주셨고요.
그래서 저는 그 서원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저는 의대가 아니라, 신학교에 갔습니다.
▲휘튼 대학에서 있었던 일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가을에 저는 단핵증에 걸렸습니다. *3학년 시작 때
그래서 3주를 학교 양호실에서 보냈습니다. *편도선 염, 림프절 비대
그 3주 동안 저는 해럴드 존 오켄가가 Harold John Ockenga
채플에서 설교하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양호실에서 2~3백 야드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오켄가 박사처럼 성경을 다루기를 원했습니다.
3주 뒤에, 저는 섬머스쿨 ‘유기화학’ 수업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모종의 결심을 한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방식으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의대에 진학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너는 신학교로 가서, 내 말씀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제가 진로를 바꾸게 된 것입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노엘과 결혼하고, 풀러 신학교로 갔습니다.
(감명을 준 설교가 해럴드 존 오켄가 가 풀러 신학교 설립자)
거기서 M.Div. 3년을 보내면서, 성경공부 하는 것을 사랑했고,
제 소명이 <말씀 사역>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제가 설교를 할 수나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풀러 졸업반 때, ‘클레런스 로디 설교상’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18분짜리 설교를 Desiring God 웹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어요.
저도 찾아서 들어봤는데,
제가 25살 때 한 설교치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당시에 유행했던 노래 ‘Big Bad John’의 예를 들면서
엡1:6절을 설명했습니다.
(최근에 그 설교를 듣고서) 저는 그저 놀랐습니다. 완전히 놀랐습니다.
제가 수백 명의 신학교 학생들과, 교수들 앞에 서서
졸업 설교를 했다니요...
▲저는 졸업 후에도 계속 대학원 공부를 했는데, *독일 뮌헨대학에서 박사
사실 다른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특정 사역 분야에도
어떤 특별한 소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벧엘 신학교에서 6년 동안 가르치면서 (1974~1980)
저는 너무 좋아했는데,
제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저를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학문에 대한 사랑과 환상에서 벗어나서
제가 듣는 모든 설교에 끌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설교가 훌륭한 설교라면
‘나도 그렇게 설교하면 정말 좋겠다’ 생각했고,
그 설교가 형편 없는 설교라면
‘우리는 그것보다는 더 잘 설교해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 : 신학생들과 교수인 자신
▲1979년 10월 14일, 제가 밤늦게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저는 이 열망(말씀사역 개척)에 더이상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저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교수직을 사임하고, 교회를 알아보면 어떨까요?’
아내 노엘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그것이 (Desiring God 과 베들레헴 교회)
제가 그다음 33간 사역했던 것입니다. 거기서 저는 설교했습니다.
(*2013년 교회는 은퇴, Desiring God 대표로는 아마 계속 활동)
그래서 제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이 오늘의 저로 이끌었는데,
그것은, 제가 계획을 하고
설교자가 되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저는 제 십대의 삶을 다시 살기를 전혀 원치 않습니다.
그때는 조금도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도요.
제가 돌이켜보며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한 설교자를 만들기 위해서
기쁜 일과 슬픈 일을 모두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설교자를 만드실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 얘기를 듣고서) 여러분께 적용할 것은,
'여러분은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 인생에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지금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소명을 따라, 열리는 문으로 걸어들어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