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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해저터널

LNCK 2023. 6. 2. 17:32


◈십자가 해저터널      막15:42-47      출처 휘발      마가11~16장
 
우리나라 통영에, 일제시대 때 만든 해저터널이 있습니다. 
어떻게 공사를 했는가 하면, 바다에 방파제를 두 겹으로 쌓았습니다. 

방파제를 두 겹으로 쌓으면, 그 방파제 사이에 공간이 비지 않습니까? 
그 사이에다가 터널을 콘크리트로 공사를 한 겁니다, 483미터의 터널을. 

그러니까 나무로 터널모양(거푸집)을 만들어 놓고, 
그 나무 위에 콘크리트를 부어 가지고 터널을 만든 거지요. 

다 만든 다음에, 이 방파제를 부쉈습니다. 
방파제로 막혀있던 바닷물이 그 콘크리트터널 위로 덮쳐져서 해저터널이 된 것이에요. 

미묘한 생각이 듭니다. 
이게 꼭 출애굽 때에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을 연상하게 해 준다는 겁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질 때 그 홍해 바다가 양쪽으로 방파제를 세워둔 것처럼, 
투명방파제를 세운 것과 마찬가지가 되겠죠, 

투명 방파제를 세워서 바닷물을 양쪽으로 몰아놓아 바다 밑에 땅이 생겨서 
통영 해저터널을 사람들이 걸어 다니듯이, 그렇게 걸어서 홍해를 건넌 겁니다. 

그러니까 세계 최초의 해저터널은, 출애굽 때의 ‘홍해 해저터널’이었어요. 

그런데 그 해저터널은 신기하게도 일회용이었지요. 
단 한번 사용하고 말았던 해저터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홍해 바다 밑으로 마른 땅을 걷는 이 사건, 
양 옆으로 방파제가 투명방파제로 세워진 것처럼 바닷물이 서 있고 
그 사이로 걸어서 노예생활을 하던 애굽 땅을 빠져 나온 이 사건이 
구원 사역의 예표요 상징 아닙니까? 

그리고 이 예표적인 홍해를 건너는 구원 사건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데, 
<십자가가 이 구원을 이루는 해저터널>이요, 

우리가 그리로 건너감으로 노예상태에서 빠져 나와서 해방의 사건, 
구원의 사건이 이루어지는 해저터널의 입구가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설교 제목이 ‘십자가 해저터널’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에요.  

    출애굽 사건을 연상할 때, 출애굽은 해저터널의 사건입니다. 
    해저터널을 통하여 빠져 나가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는 자, 
    내가 죽은 것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에게는 
    그 사람의 마음이,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해저터널을 빠져나가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몸은 세상에 있지만, 마음만 세상을 빠져 나갑니다.
    그 해저터널의 입구가 ‘십자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6시간 달려 계시는 동안에 
그러니까 6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오후3시쯤에 돌아가시고, 이제 한 3시간 뒤쯤이면 안식일이 시작이 됩니다. 
지금은 안식일 전날이에요, 준비일이라 그랬어요. 

준비일이라는 게, 안식일 날은 아무런 노동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안식일 날 먹고 살 것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날입니다, 안식일 전날. 

그래서 이제 3시간 뒤쯤이면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안식일이 되면 장사를 지낼 수가 없어요, 장례를 치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었던 사람인데 
참 아이러니하지요? 

    예수님을 죽음으로 넘겨주기로 결정한 곳이 산헤드린 아닙니까? 
    그런데 그 회원인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장사를 지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 사이에 끼어있는 
이 예수님의 장례절차, 
뚜렷하게 마가가 기록하고 있는 이 장례절차가 갖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얘깁니다. 

참 특이한 거예요. 
우리가 그 동안 신앙생활 할 때, 이것을 교리화해서 얘기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사실의 의미를 잊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시신이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서 장사 지내진 사건의 의미가 
많이 잊혀 져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그런데 의미가 있으니까, 사도신경에 신앙고백할 때, 
‘장사한지 사흘만에’라고, 꼭 ‘장례’내용을 포함시킵니다.) 

그런데 죽음과 부활사이에 있는 
이 장사 지냄의 의미가 아주 특별하다는 것이에요. 

▲어떻게 특별하냐고요? 
예수님의 무덤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에만 자꾸 의미를 둬요. 
그런데 부활에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무덤에도 의미가 있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의 모든 무덤은, 그것이 길가에 버려져서 돌로 이루어진 돌무덤이건, 
진시황의 왕릉이건,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건 어떤 무덤이든지 간에 
시신이 놓여 진 곳은 막다른 곳입니다. 

그게 웅덩이든 웅덩이를 파고 시신을 내려놓던, 
아니면 그 시신을 지금 이 유대풍습대로 굴 속에 집어넣던, 
아니면 돌무덤처럼 그냥 평지 위에 시신을 놓고 돌을 쌓던지 간에, 
시신이 놓여 진 모든 곳은 다 막다른 장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만큼은 막다른 장소가 아니고 무엇이냐? 
터널이라는 거예요. 
저쪽 다른 쪽 끝으로 뚫려 있는 터널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이유는,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장사 지내셨다고 하는 이 사실은, 막다른 곳에 묻혔다는 얘기가 아니라 
터널을 뚫는 작업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을 내가 죽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그 죽음을 따라가고 있는 이 여자들처럼, 막달라 마리아나 이 여자들처럼, 
그렇게 죽음을 따라 들어가서 장사 지내지는 예수님과 함께 
내 마음이 따라 들어갈 경우에, 

그 예수님이 장사 지내진 그 무덤은 무덤이 아니라 
터널이었다는 얘기입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저쪽 끝으로 태어나게 되는, 저쪽 끝으로 옮겨지게 되는, 
마치 파리에서 유로터널의 입구로 들어가서 40분 달리고 나면 
런던으로 몸이 올라오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부활을 하여 다른 세상, 이 세상의 경계 바깥으로 나가버린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노예생활을 하던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영도를 받아서, 
홍해 바다가 갈라져서 그 바다 밑바닥을 걸어서 애굽 땅을 빠져 나오는 것과 같은 
일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장사 지내심을 통해서. 

아! 이게 참 신기한 겁니다, 여러분. 
신기한 것이고 또 신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나사로의 부활과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의 부활과 다른 것은 무엇이냐? 

죽음을 경계로 봤을 때, 죽음의 경계의 이쪽으로, 현 세상이 있고, 
죽음을 경계로 해서 너머에 죽음 너머에 저 세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사로의 부활은 죽음의 지점으로부터 
다시 이 세상 안으로 튕겨져 나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부활은, 죽음의 경계를 이 세상 끝인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 
저쪽으로, 터널 반대편 바깥으로, 저 세상으로 넘어가버린 것이에요. 

▲그러므로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제자들을 
40일 동안 같이 만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냐? 

우리가 탈옥영화 많이 보잖아요, 빠삐용이라든지 뭐 등등 
그런 탈옥영화가 많이 있는데, 
영화를 통해서 볼 때, 항상 탈옥이 실패하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탈옥을 하다가 실패해서 돌아온 것이 
나사로의 부활이고, 나인성 과부 외아들의 부활입니다. 

탈옥에 성공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이 세상을 빠져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만났다는 것은 세상을 빠져나간 탈옥수가 완전히 신분을 바꾸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다 문을 닫아걸고 있을 때 
그냥 투명한 것처럼 뚫고 들어오시는 그런 영화로운 몸이 된 것처럼 

신분을 바꾼 사람이 감옥으로 와서 
자기 동료들이었던 죄수들과 면회를 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 40일 동안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을 만나셨지마는, 
그 예수님이 거하신 입장은 이 세상에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미 저 세상에 속한 분의 입장으로서 
완전히 다른 영화로운 몸을 입으신 분으로서 
이 세상에서 면회를 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같이 세상 속으로 돌아오신 것이 아니라. 

이게 가능한 이유는 하늘의 차원이라는 것이 차원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시공간의 차원과 겹쳐있을 수가 있는 겁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시공간에 제약이 돼있다 그러면 저 세상으로 넘어간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만나질 수가 없지만, 
저 세상이라는 게 차원이 다른 세상이기 때문에 
이 3차원의 시공간의 차원과 겹쳐질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얘기지요. 

▲자, 이제 중요한 것은 뭡니까? 
십자가에서 주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주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하면서 
내 마음이 주님의 죽음과 연합하게 될 때, 
그 마음은 주님이 장사 지낼 때에 주님의 무덤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무덤은 막다른 장소로서의 무덤이 아니라, 
웅덩이가 아니고 굴이 아니라 터널이었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주님이 부활하실 때 
같이 따라가서 저 세상으로 마음이 옮겨지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 때 
십자가 해저터널을 꼭 생각해야 됩니다. 

지금 파리에서 입구로 들어가게 되면 이제는 파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도버 해협을 넘어서 지나서 영국 런던으로 빠져 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주님을 붙들 때는 항상 마음속에 각오가 돼 있어야 되는데, 
이제는 이 세상에서 그 동안 내 마음에서 좋다고 여겨서 
내가 갖고 싶어 했던 것들이나 이미 좋아서 갖고 있는 것들 
모든 것들을 다 놓고 빠져 나가는 겁니다. 

몸을 통해서 접하고 있던 이 세상에서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는 것이 십자가 터널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죄 사함 받아 가지고 나사로가 부활하듯이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부활하듯이 
다시 내 마음이 이쪽 세계 안으로 튕겨져 나오는 것.. 
그건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튕겨져 나오면 안 되고, 
십자가의 주님을 붙잡는 데는 반드시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제 그 동안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서 좋다고 여겨진 모든 것들로부터 
빠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출애굽의 해저터널을 지나온 것을 생각해보면 
노예상태로부터 빠져 나온 것이 구원인데,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얘기는 
이 세상의 노예로부터 빠져나간다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노예상태로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좋게 여겨지고 있어서 
그것을 마음이 붙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노예상태라는 거예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우리 마음의 행복과 기쁨의 원천이신데 
그 당신 자신을 끊으신 것, 이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 위에 인간이 더 저주를 가중 시켰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로 행복해 지고 기뻐하는 것, 
행복해지려 하고 기뻐지려 하는 것, 
이게 바로 이중의 저주로 인간 스스로가 
자기 자신들에게 갖다 퍼부은 저주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을 많이 벌고 사업이 잘 되서 내가 행복하고 기쁘다, 
이게 바로 저주에 빠져 들어가는 거예요. 

참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요 여러분, 너무 낯설지요. 
예쁜 자식을 낳고 자식을 보면서 행복해 한다, 이게 바로 저주라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면서, 
예쁜 자식을 보고 기르는 것이 올바른 모습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면서 사업을 했는데, 
돈이 벌릴 수도 있고, 안 벌릴 수도 있는 게.. 이게 올바른 모습이라는 겁니다. 

사업이 잘돼서 행복하고, 자식을 낳아서 행복하고, 
좋은 대학을 들어가서 행복하고, 이게 다 저주의 모양이고 
더블저주를 지금 만들어 내고 있는 현장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건 무엇이냐?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고 싶어 하고 갖고 있어서 좋은 것들,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입니다. 

왜냐? 마음은 하나님만 좋아하게 만들어졌고, 
하나님만으로 행복하게 되어 있는 것이 마음이었는데, 
타락한 뒤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마음이 마귀의 꼬임을 받아 가지고 

‘이 세상에서도 좋은 게 있어, 하나님이 당신을 나로부터 끊어냈어? 
흥~ 좋아 그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할 좋은 것들을 찾아내면 되지 뭐!’ 
이러고 사는 것이 지금 더블저주의 상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해방이란 무엇이냐?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 쪽으로 향하는 것이, 
이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결단이고 사랑의 표현이라는 겁니다. 

자식을 마음에 집어넣으면 좋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식을 마음에서 빼내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에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게 되면 주님의 십자가는 터널 입구입니다. 
이제 내 마음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들로 기뻐할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는 
상태로 빠져 나갑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그러면 십자가를 붙잡으란 얘깁니다, 그러면. 
돈이 많이 벌려도 기뻐하는 건 신앙이 아닙니다. 
돈이 안 벌려도 슬퍼하는 건 신앙이 아닙니다. 

돈이 벌리건 안 벌리건, 자식의 문제가 잘되건 안 되건, 
내 건강이 있건 없건, 그 전에 내 마음은, 건강이 있고, 
사업장이 있고, 가족이 있고, 좋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이 세상을, 

십자가의 주님과 함께 죽고 십자가의 입구로 들어감을 통하여, 
그 뒤로 이어져 있는 해저터널을 통해서 
이 세상을 마음이 빠져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고 이게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사랑. 

주님의 몸이 장사됩니다. 
이 장례절차, 무덤에 묻히신 이 사건은 무덤이 아니라 터널을 뚫는 사건이었고, 
이 터널을 통해 우리는 빠져 나가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을 빠져 나가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기뻐하지 않겠다, 
하나님만으로 기쁠 때까지 십자가를 붙들겠다’ 
이 각오가 되어있어야 십자가 신앙이 성립한다는 얘깁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고민거리가 무엇입니까? 
지금 그 자리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십자가의 주님을 기억해 내세요. 

십자가의 주님을 기억해내자마자 여러분 발밑에는 해저터널이 뚫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해저터널을 걸어가는 겁니다. 

해저터널을 걸어간다는 의미가 뭡니까?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좋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을 다 등 뒤로 돌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지금 간다. 

지금 사업이 급박한 상황이던 건강문제가 시급한 상황이건 자녀문제가 시급한 상황이건, 
그 어떤 문제가 시급한 상황일지라도 놔두고 떠나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에, 그냥 롯이 돌아보지 않고 떠나온 것처럼… 
돌아보면 안 되는 거예요. 
아무리 시급한 문제가 있고, 불안한 문제가 있어도 돌아보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붙잡았으면 이제는 십자가를 붙잡고 다시 죄 사함 받아 가지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리라는 약속 받고 이 세상에 태어 나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그 일들을 해결해 나가는 게 아닙니다. 

나는 마음이 떠나버리면 되요 해저터널로. 
그리고 남은 몸은, 거듭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의 손이신 성령께서 내 몸을 끼시던지, 
내 몸을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체가 되셔서 입으시던지, 
이 세상에서 당신 뜻대로 해 가실 것이에요. 

당신 뜻대로 행하시는 모습이 사업을 완전히 망하게 하실 수도 있고, 
다른 일을 하시기 위해서, 
왜냐하면 그 사업이 하나님 뜻에 의해서 시작된 게 아니니까… 

내 자식을 대학에 떨어뜨릴 수도 있고, 내 자식을 더 성숙시키기 위해서… 
또 사도 바울에게 가시를 준 것처럼 내 몸에 문제를 일으키실 수도 있고 
어떤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이제 내 마음은.. 하나님 품에 안겨 있는 겁니다. 

해저터널을 지나서! 
이게 바로 구원이라는 거예요. 

살아있는 동안에 내 마음이 십자가 입구로 들어가서 해저터널을 지나서, 
주님 승천하신 주님 따라서 저 세상에 있는, 
하늘나라에 있는 아버지 보좌에 계신 그곳으로 가는 것, 
이게 바로 구원이라는 겁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이 해저터널을 빠져나간 경험이 없으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은 게 아니고 믿음이 온전한 것도 아니지요

기껏 나사로의 부활과 나인성 과부 외아들의 부활을 재현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다시 십자가 이쪽으로 튕겨져 나오고 있는 거예요. 
그건 안 돼지요.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장사되십니다, 무덤에 묻히십니다. 
알고 봤더니 무덤은 터널이었습니다. 

이제 그 터널을 지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지금 하늘나라로 가는 겁니다. 

어떤 어려움에 닥쳤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발밑에 생긴 해저터널을 지나서 
주님 따라 우리 마음이 오늘도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평강과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우리 나머지 몸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대로 살아지는 모습을 또한 보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해저터널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매일매일 모든 순간에 
모든 사건 속에서 건너가는 우리의 길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넜던 그 사건의 구원과 해방의 의미가 
모든 사건 모든 순간 속에서 거듭거듭 우리 마음속에 체험되어, 
우리 마음에 하늘보좌에서 평강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