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 골1:13~20 스크랩, 출처분실
▲골로새서 기록 목적 '나의 주님은 그리스도'
옛날 로마 제국이 세계를 통치할 때의 일입니다.
로마시대 사람들이 거리에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면,
이런 인사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가이사는 주님이시다.’ 이렇게 인사를 하면,
그를 만난 다른 사람이 이렇게 화답을 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나의 주님은 가이사입니다.”
그러나 이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가이사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아닙니다. 나의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고백 하나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콜로세움의 형장에 야수의 밥으로, 맹수들의 먹이로 사라졌고,
또는 무사들의 노예로 일생을 팔려 가는 비극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신앙고백은
초대 교회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고백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그들은 이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 골로새서라는 이 책, 이 편지의 핵심적인 강조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로드십 Lordship, 주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
골로새서의 기록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의 핵심구절
골2:6절이 골로새서 전체의 내용을 대표하고 있는 말씀이죠.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
이것이 골로새서의 전체의 핵심적 강조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주님이신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의 핵심 단어
본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 사역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들이 몇 단어가 등장합니다.
14절에 ‘구속’이라는 단어가
16절에 ‘창조’라는 단어가
17절에 ‘그 안에, 즉 주 안에 함께 서 있다. 함께 서 있다’
즉 '섭리'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서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섭리되고 있다’
18절에 보시면 ‘교회’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네 단어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이 네 단어는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되심을 고백하는 근거를 가르쳐 줍니다.
왜,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까?
◑1. 그가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입니다.
14절에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구속’ 이라는 낱말은 ‘대가를 지불하고, 값을 지불하고 사서,
원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상태 속에 있었습니까?
13절에 보시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본래는 '권세들' 복수입니다.
흑망의 권세들. 어둠의 세력들, 어둠의 세력들 속에 우리는 묶여 있었어요.
우리의 삶의 방황, 절망,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온갖 한스러움, 저주스러운 삶,
이것은 어둠의 세력들이 우리를 묶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 앞에 왔을 때,
그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었을 때,
주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셨습니다. 건져내셨어요.
그리고 우리를 어디로 옮기셨다고요?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3
'천국'이라는 표현보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 얼마나 좋은 표현이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사랑의 나라,
천국의 백성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속 redemption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 사함’을 받아야 되요. 죄사함. 어떻게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죄를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은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
우리의 죄는 생명을 통해서만 구속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지불한 (구속의) 대가입니다.
값을 지불하셨어요. 생명의 피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된 영광스러운 자리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속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주1)
◑2. 그가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5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6
하나님은 볼 수 없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나타내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1.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5
이게 그냥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냥 단순하게 겉으로만 읽으면,
‘그리스도가 창조물 가운데서 제일 처음 창조된 분이다.’ 이런 인상을 받아요.
초대 교회 시절에, 유명한 이단자였던 아리우스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로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창조자가 아니자,
피조물, 창조된 하나의 인간의 차원으로 격하시켰습니다.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와 아주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구절에 근거해서 그리스도를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물,
첫 번째 피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5
그러나 여기서 ‘나셨다는’ 단어는,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고 할 때 쓰여지는 단어가 아닙니다.
가장 비슷한 다른 단어로 바꾼다면,
여기서 ‘나신 자니’ 라는 말은 ‘먼저 계신 자니’
이렇게 바꾸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먼저 게신 자니’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계셨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들이 창조되기 전에
그는 이미 존재하고 계셨다. 이미 계셨다.’
17절에도, 그 사실이 강조됩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그리스도가 창조물의 한 부분이라는 말이 아니예요.
그는 창조물과 엄연히 구별되는 존재이다. 분명하게 구별되는 존재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존재하기에 앞서서 그는 이미 존재하셨다.’ .. 라는 뜻입니다.
▲2. 16절에서 그것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그렇습니다. 만물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 모든 보이는 것들과,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도 주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 물질적인 세계,
그리고 영적인 세계의 모든 영적 존재들까지도 주님이 지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 어떤 것들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대표적으로 천사들이죠. 천사들. 천사들은 눈으로 볼 수 없죠?
그러나 천사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빚어진 피조물입니다.
▲3. 그 다음에 나오는 명칭들은 바로
천사들에 대한 다양한 명칭이라고 봅니다.
‘보좌들’ ‘주관들’ ‘정사들’ ‘권세들’이 어떻게 다르냐? :16b
이게 천사들에 대한 이름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아무도 정확하게 말하지는 못해요.
대략 성서학자들은 아마도 기능에 따른,
천사들의 기능에 따른 다양한 천사들의 이름일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보좌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옹위하고 있는 천사들,
주관(주권)들은, 아마도 나라를 주관하고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장하는 일에 활동하는
그런 영적 피조물인 그런 천사들.
정사(통치자)들은 인간의 마음속, 생각 속에 역사하는
어떤 역할을 하는 천사들, 영적 피조물들.
권세들은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자연의 변화, 또 기적적인 사건들, 또 재앙,
이런 사건들에 아마도 관계하는 천사들이 아니겠느냐? 하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들, 보이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도
다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분에 의해서 지어졌고,
그 다음에 무슨 단어가 나옵니까?
▲4. “그를 위하여” :16
그분에 위해서 지어졌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만물은 주님에 의해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만물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만물의 주인이시다. 만물을 지으셨다.’
실감 안 나세요? 그럼 이렇게 바꾸어 보세요.
‘주님이 나를 지으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또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의 근거의 두 번째는
그가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3. 그가 우리를 <섭리>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입니다.
17절,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게 한글은 한글인데 쉽게 이해가 안 되요.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현대어 성경’ 번역을 보니까 이렇게 번역했어요.
‘그 안에 유지되느니라.’
만물이 유지 된다. 잘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영어성경에 보시면 ‘hold together’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창조한 만물을 주님이 붙들고 있다. 서로 붙들고 있다.
창조한 만물을 붙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창조한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에 만물을 구속하시고,
그리고 그 만물을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만물 가운데 간섭하시며 만물을 돌아보시고, 잘 간수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창조물 가운데 가장 으뜸인 인간인 나를 창조하시고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는 내 삶 속에 찾아오십니다.
나를 돌아보십니다. 그리고 간섭하시며 나와 함께 하십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현대인들의 신관 가운데, 이신론이라는 신관이 있습니다. *Deism 理神론
혹은 자연신론 이렇게 부르는데, 이 사람들은 신을 믿어요.
하나님을 믿습니다. 창조도 믿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다음에, 창조된 우주는 법칙대로 움직일 뿐
더 이상 하나님은 만물에 관여하지 않으신다.
창조만 하고 그냥 법칙대로 움직여 가는 거예요.
더 이상 참견을 안 하신 단 말이예요. (방관, 주무신다고 보는 거죠)
마치 엄마가 태아를 자기 품에 9달 동안 품고 있다가
드디어 생명을 탄생시킵니다.
출산한 다음에 갓 태어난 자기 아기에게
“아가야, 내가 너를 아홉달 동안 품고 있느라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아니?
너 드디어 세상에 나왔으니 이제부터는 네 노력껏, 실력껏 잘 살아가거라,
사랑하는 아가야 굿바이.” 그리고 떠나가는 어머니.
그런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마 세상에 너무 문제가 많고, 불의가 판을 치니까,
인간의 이성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손 놓고 계신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신론理神論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간섭하시는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이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싫어해요.
현대인들의 삶이 자꾸만 이기적인 삶의 모습이 되다 보니까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해요.
그래서 우리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탐탁지 않게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의 변천하는 이런 생활 습관이
이런 신관을 더욱 부추겼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컴퓨터 시대의 영향. 이 컴퓨터 문화의 영향. 극단적으로 말해서,
현대인은 이제 이웃이라는 존재가 아무런 필요가 없어요.
그냥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 세계에만 몰두하면 된단 말이죠.
이 기계화된 시대 속에서 현대인들이
얼마나 자기의 세계를 좁혀 놓고 사는지 몰라요.
이웃과의 관계를 상실하고 있어요.
더군다나 하나님,
나와 더불어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나님.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고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런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다릅니다.
그는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내 가장 작은 일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내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믿으십니까?
▲히브리서 1:2절을 한번 찾아보세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저로 말미암아,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예. 그는 창조자가 되십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히1:3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그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만물이 유지되고 있는 것, 섭리되고 있는 것, 그분 때문입니다.
그분은 만물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더 더욱 애정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를 창조하시고 버려두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게 다가오시사 나를 주관하시고 내 속에 다가오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그는 주장하십니다. 그는 나의 주님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왜 그가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까?
그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섭리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 그가 <우리를 통해서 일하고자> 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일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저를 따라서 말해 보세요. ‘하나님은 나를 쓰고자 하신다.’ 믿으십니까?
▲골1:18절,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 창조와 구속과 섭리를 말하다가 바울 사도는 갑자기 교회를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왜 교회가 나올까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 주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신 다음에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교회라는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되게 하십니다.
개인으로, 홀로 이 세상에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십니다.
교회의 한 부분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자 우리의 몸이 활동하는 것은 머리로부터 끊임없이 명령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지체는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시고,
그리고 머리이신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충만을 경험합니다.
▲1:19절에 보시면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지신 그분, 하나님의 충만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는, 그의 몸의 지체가 된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충만을 경험합니다.
이 충만함을 가지고 세상에 나갑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믿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고,
세상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놀라운 공동체로 쓰임을 받습니다.
여러분! 내가 이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특권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쓰임을 받기 위해서,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분명한 관계를 맺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신뢰하고, 내가 주님에게 복종할 때,
주님은 나를 쓰십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주님은 나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여기 18절에 보시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여기서 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나셨다고 강조할까요?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의 능력일 것입니다.
무에서부터의 창조, 아무것도 없는 상태 속에서 유를 창조한 것,
얼마나 위대한 능력이예요.
그러나 창조의 능력 못지 않는 능력이 있다면, 새로운 창조(거듭남)의 능력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파괴합니다.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을 때
인간은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음 가운데서 일어나셨습니다.
주님은 사망과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 하십니다.
복음을 받는 사람들을 새롭게 하십니다.
▲적용
우리의 삶의 온전한 회복을 원하십니까?
내 삶이 온전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고,
나를 통해 주의 능력이 흘러가고,
이웃들이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바른 관계,
나는 지금 유감없이 주님을 내 삶의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습니까?
내 삶의 방황을 느끼십니까? 절망을 느끼십니까? 좌절을 느끼십니까?
나의 주님이신 그분 앞에 와서, 그 주님 앞에 내 삶을 온전히 드리셨습니까?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촉구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시겠습니까?
‘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주님이 지배하는 곳, 주님이 다스리는 곳에 영광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이 능력, 이 생명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남아프리카에 어떤 인쇄하는 회사에서,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유명한 회사로부터
인쇄 기계를 수입을 했다고 합니다.
인쇄하는 기계를. 아주 정교한 기계였다고 합니다.
아주 비싼 값을 주고 사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그 기계가 고장이 났어요.
그래서 전화로 물어 보았지만은, 지시를 해 주어도
아무래도 그 기계를 고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아프리카에서는 미국에 연락을 했습니다.
‘사람을 한명 보내 주십시오. 전문가를.’
그래서 얼마 후에 전문가가 공항에 도착을 했어요.
그런데 이 기술자를 맞으려고 공항에 나가 보니까,
20대의 새파란 청년이 왔더래요.
실망을 해가지고 회사 직원들이 당장 전보를 쳤대요.
‘우리는 좀 노련한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아니 새파란 젊은이가 와서 뭘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 연락을 받은 시카고의 회사에서 당장에 답장이 왔는데,
짤막한 세 줄이 왔더래요.
첫째 줄은, 그 젊은이가 그 기계를 설계한 분입니다.
두 번째 줄은, 그 사람만이 그 기계를 고칠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그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르십시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방황하십니까?
내 삶이 충만하지 못하다고 느끼십니까? 왠지 인생이 곤고하다고 느끼십니까?
혹시 내 삶의 주인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서는 아닐까요?
주님 앞에 오십시오.
우리의 사랑이요,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분의 주인 됨을 인정하고 엎드려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찬양하는, 네가 경배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가 너를 창조했느니라.
너를 지으신 그분만이 너를 고칠 수가 있느니라. 그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를지어다.’
그 예수 그리스도.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구속하신 그분의 말씀 앞에
내가 온전히 승복하기를 결단하실 때, 주님의 고치심은 시작될 것입니다.
내 삶은 회복될 것입니다. 주님의 충만이 임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1)
구속과 창조, 이 두 가지 사건을 아름답게 조화시킨 유명한 성경의 선언이
이사야서 43:1절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를 조성하신 자가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다"
왜 하나님이 너는 내것이라고 선언하십니까? 왜요? 창조하셨기 때문에,
내가 너를 창조하였고, 둘째로 뭐예요? 내가 너를 구속하였기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너를 다시 나의 자녀로 회복시켰다.
그러므로 너는 내것이다.
이런 재미있는 예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원주민 청년 하나가 내 평생 소원이 뭐냐면?
통나무 배를 타고 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정글에서, 밀림에서 큰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로 통나무 배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어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여러 달 동안 정성과 땀을 쏟은 끝에 아주 아름다운 통나무 배를 만들었습니다.
자기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배를 타고 강을 다니면서 얼마나 좋아하고 즐겼는지 모릅니다.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집 앞에 배를 매어 놓았는데,
그날 밤 폭풍우가 쏟아졌습니다. 폭우가 막 쏟아졌어요.
아침에 나가 보니까 배가 없어졌어요.
그래도 자기가 만든 그 작품에 대한 애정,
집착, 포기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그 청년은 배를 찾아 나섰습니다.
강 하류를 죽 따라가다 보니까, 저 아래 어떤 마을에,
자기가 그렇게 찾던 배를 드디어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어느 집 앞에 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배가 내 것이다’ 라고 주장을 했지만, 통하지를 않아요.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흥정을 했습니다.
팔라고 그랬더니 또 웬걸, 아주 값비싼 높은 가격을 요구해요.
그래도 자기가 만든 애정 때문에 아주 비싼 값을 지불하고
자기가 만들었던 그 배를 다시 샀습니다.
그래도 자기 배를 찾은 그 감격 때문에 그 배를 타고 노를 저어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서, 감격에 젖어 혼잣말로 속삭이기를
“배야 배야, 내가 너를 만들었고 말이야, 너를 잃었으나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샀으니, 내 배야 너는 두 배로 내거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고백인줄 아십니까?
‘내가 창조하였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 그러므로 너는 두 배로 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