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칠도의 귀중하고 아름다운 사역 사49:6 ☞▣ 해외 선교 설교모음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인생 칠도”를 생각하게 되었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신앙 오도”를 생각하게 되었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복음 삼도”를 생각하게 되었고,
“처절한 회개가 무언기를 생각하다가 “해변 칠언”을 생각하게 되었고,
“아름다운 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미언 오언”을 생각하게 되었고,
“선교”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선교 칠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주체적 선교
▲제가 선교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선교의 최고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시게 되었는데 성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첫 번째 선교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부족한 우리들이 올바른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선교의 선구자가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수행하신 선교의 사역이
어떤 사역이었는지를 자세하게 살펴보고 본받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성자 예수님으로 하여금 올바른 선교 사역을 수행하도록 명하시고
인도하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부터 세계 선교를 계획하고 계셨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아브람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얻을 것이니라”(창12:1-3).
그 다음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그 다음 성부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악독이 하늘까지 상달한 니느웨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욘 1:2).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죄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1).
▲결국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선교의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애굽으로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여리고 성으로
이방으로 골고다로 달려가셨는데,
제자들은 그런 곳으로 가는 것을 싫어하며 거부했습니다.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 다음과 같은 선교 사역 위임의 말씀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도 선교 사역을 수행하시는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을
반기독교 세력의 중심지인 로마에까지 가서 선교하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볼 때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의 선교의 필수적인 대상은
공산권과 모슬렘 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니느웨와 로마가 정복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북한과 아프가니스탄 등 공산권과 모슬렘 권은 정복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게으르고 나태한 거짓되고 정욕적인 죄인인데
부족한 저에게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선교 사역의 관심과 비전을 깨우쳐
주신 분들이
조동진 목사님과 랄프 윈터 박사님과 풀러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님들과
영국의 존 스토트 박사님과 독일의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과 한경직 목사님 등이었습니다.
저는 11년 동안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려고 했는데
조동진 목사님의 권유로 1974년 초 풀러 신학교에 가서
Research Associate의 자격으로 8개월 동안 선교 신학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풀러 신학교 선교 신학원에서 랄프 윈터 교수님을 비롯한
그 당시 저명한 선교 신학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의 안목을 조금씩 넓혀갈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후에는 존 스토트 박사님으로부터 “균형 잡힌” 선교관과 복음관과
대화관과 구원관과 회심관을 배울 수 있었고
특히 십자가 복음의 약함과 어리석음의 신비를 터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으로부터는 현대 에큐메니칼 선교 신학의 동향과
복음주의 선교 신학의 동향에 대해서 정확하게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목회가 무엇이고 선교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목자이시고 선교사이신 성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히 3장과 12장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과 눈을 오직 성자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목회와 선교의 참된 모델이신 성자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이 요1:14과 막10:45이라고 생각합니다.
존 스토트 박사님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막10:45 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선교 칠도의 귀중하고 아름다운 사역” 이라는 제목으로
선교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첫째로, 선교는 “버리고” “떠나서”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시고” 세상을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 7).
여기 “자기를 비어” 라는 말씀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떠나셨다” 라는 뜻이고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셨다” 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고후 8:9) 이라는 말씀도
부요함을 “버리시고” 가난과 약함을 몸에 지니셨다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하늘 집을 “떠나서”
세상을 “찾아오시되” 구유에 찾아오셨습니다(눅 2:6).
성자 예수님의 선교 행적은 “버림”과 “떠남”과 “찾아감”의 행적이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버림”과 “떠남”과
“찾아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인용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고향과 부모를 떠나 애굽에 가서 살았고
나중에는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제자들도 결국 “버림”과 “떠남”과 “찾아감”의 길을 걸었는데
성자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7-29).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웨일즈를 “버리고” “떠나서”
조선 땅을 “찾아왔고,”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미국을 “버리고” “떠나서” 조선땅을 “찾아왔습니다.
▲2. 둘째로, 선교는 찾아가는데 그치지 않고 찾아 간 곳의 사람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이셨고 말씀이셨는데 하늘 집을 버리고 떠나서
세상에 찾아오셔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셨다” 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The Word became flesh.”
선교는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육” 즉 “Incarnation” 이라고 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그냥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고
“죄 있는 육신”을 가진, 죄 있는 사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
너무너무 놀라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가진
“죄 있는 사람”이 되신 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고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요하신 분으로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고후 8:9).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즉 선교를 위하여 종이 “되었고”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이 “되었고”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고” 약한 자와 같이 “되었고”
여러 모양이 “되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 9:19-23).
선교는 “성육”의 사건을 본 받아서 백인이 흑인이 “되는” 일이고,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이 “되는” 일이고,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본래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부러 가난한 거지가 “되었고” 일부러 병든 환자가 “되었고”
고통을 몸에 지닌 고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나병환자가 “되기”를 그렇게도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3. 셋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영광 중에서 사셨지만
하늘 영광을 버리고 하늘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 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선교는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선교는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처처럼
백인이 아프리카의 흑인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언더우드 선교사 4대 손처럼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신홍식 선교사 3대 손처럼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 병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의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시자 마자 어머니 마리아 아버지 요셉과 “함께 사셨고”
나중에는 제자들과 “함께 사셨고”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면서 가까이 교제” 하셨습니다(마9:10-13).
선교는 선교지에 가서 대형 집회를 잠깐 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 가서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독일의 저명한 선교 신학자 준더마이어 박사는 올바른 선교는
“콘비벤츠” 즉 “함께 사는” 삶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준더마이어 박사는 “콘비벤츠”의 원리를 복음서에 기록한 예수님의 삶에서
입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람들 가운데 살았으며 그들과 함께 동고 동락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았다.
특히 예수님은 사람들과 자주 함께 식사를 나누었는데
이러한 식탁 공동체야 말로 예수님의 선교에 중심이 된다.
왜냐하면 함께 하는 식탁은 ‘공동체’와 ‘잔치’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는 타자와 함께 사는 교회이다.”
너무너무 귀중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는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4. 넷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성자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섬기셨고”
열병 환자의 손과 소경의 눈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과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에게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섬김”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그리고 원수들에게 까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선교는 “함께 사는” 것이고
그리고 모두를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의 선교적인 삶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이 사셨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몸으로 나타내면서
말이 아닌 삶과 죽음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신앙의 선배님들을 따라서
세계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곤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를 찾아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우물 10개 이상을 파주었습니다.
방글라데시를 찾아가서 재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위해서 안과 병원을 하나 지어주기도 했고
노재인 이라는 영양사 한 사람을 방글라데시에 파송했습니다.
홍수와 재난으로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결핵환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불쌍한 연변의 조선족 고아 어린이들 150 여명을 돕는 일을
지난 22년 동안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2005년 1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가서 재난과 가난으로 고통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하나 지어주고 준공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강원도의 감자 1690톤을 99대의 트럭에 실어서 북한에 보내기도 했고,
5개 종단 대표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13대의 대형 트럭에 싣고
북한 황해도 개성에 가서 그곳 민화협 대표들에게 전달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파키스탄 페샤와르를 방문하고 테러로 130여명의 생명을 잃고
170여명이 부상을 당한 역사적인 교회인 올 쎄인트 교회의 성도들과 유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제가 세계 곳곳을 방문하면서 조그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모슬렘과 공산주의 진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설교나 강의나
전도를 하지 않고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폈는데
저들의 마음과 생각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교의 길은 반드시 설교나 강의나 전도를 하는 길이 아니고
다양한 행사나 프로그램에 치중하는 길도 아니고
순수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섬기는
“사랑과 섬김”의 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을 북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도
방글라데시에서도 중국 연변지역에서도 발견했습니다.
중국 연변지역의 고아 아이들과 저들을 보살피고 있는 지역의 회장들
대부분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저는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2005년 12월 16일 아프가니스탄 무라취드에 세워준 학교 준공식에 참석했는데
모슬렘 지도자들이 나와서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또 하고 또 했으며
아프간 어린이들이 나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조용히 펼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이 녹아지는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5. 다섯째로,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틀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설교만 하고 강의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고
함께 놀아주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는 설교만 하고 강의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자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셨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도 함께 하시고 대화도 함께 하시면서
함께 놀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2005.11.12. 개혁신보에 실렸던 제 글의 일부입니다.
『나는 선교지를 여행하면서 현지인들과 선교사들과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힘과 기쁨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내가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설교나 강의가
반드시 저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로는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
위로와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브라질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이틀 동안 밤마다 강성철 선교사와 총신 제자 한 사람과 젊은 초년생
선교사 한 사람과 밤 늦게까지 볼링을 친 일이 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젊은 초년생 선교사가 많은 스트레스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선교지를 떠나려고 했었는데
스승인 나하고 이틀 동안 볼링을 치고 나서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었고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선교에 임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말을 들었다.
내가 불라디보스톡에 간 일이 있었다. 어느 날 20여명의 선교사 자녀들과
서너 시간 동안 열심히 논 일이 있었다. 게임도 하고 선물도 나누어주고
농구도 같이 하고 그네도 같이 타고 씨이소도 같이 타며 신나게 놀았다.
어린이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고 모두 너무 기뻐했다.
유치부 어린 아이 하나는 내가 떠날 때 예쁜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그네를 함께 탄 아이였다. 그 상자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정예찬 2000.6.10.”
하루 오후에는 선교사 사모들 대 여섯 명을 데리고 바다 가에 가서 놀다가 왔다.
맛있는 바다가제도 사 주었다. 너무너무 좋아했다.
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스승이 되는 내가 그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함께 놀아준 것이 그들에게 많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함께 놀아줄 때 선교사들과 자녀들은 물론
현지인들의 마음이 열립니다. 그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에 사랑이 들어가고 복음이 들어가고 예수님이 들어가십니다.
저는 이와 같은 경험을 태국에서도 캄보디아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도 홍콩에서도 했습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6. 여섯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구유에 탄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목적이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심에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증오와 분노와 분쟁으로 가득한 세상과 우주에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가져오시는데 있었다고
누가와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6).
성자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화해와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지만 동시에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주님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세상을 등지고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주님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신 성자 예수님의 모습은 낮아진 모습이었고
따뜻한 모습이었습니다.
말하기 싫어하는 수가 성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셨습니다.
소통을 먼저 시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소통이야말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낮아진 모습으로 그리고 따뜻한 모습으로
수가성 여인에게 말을 건네셨습니다.
“여인이여, 내가 목이 마른 데 내게 물 한 모금 마시게 해 줄 수가 있소?”
성자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낮은 자세로 따뜻한 모습으로 말을 건네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결국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
수가성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고 예수님을 향해서 “선지자로소이다”
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결과 수가성 사람들이 성자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요4:28-30).
저는 성자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
평화의 사도인 성 프랜시스와 사랑의 원자탄인 손양원 목사님과
한국교회와 사회가 존경하던 한경직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은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낮은 자세와 따뜻한 자세로 말을 건네고 소통하면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과 식물과도 친밀한 소통을 하면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었습니다.
사실 선교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으로 섬길 때
거기에는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이 이루어집니다.
사실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은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 지점입니다.
선교는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어가는 방편이고
과정이고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과 함께
모슬렘과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적인 일이 아닙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은 한국교회와 한국 민족이
반드시 이룩하여야 할 필수적인 일이고 민족적인 과제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 37:17).
엡1:10과 계 7:9-12은 앞으로 이루어질 우주적인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
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도 하니”(계 7:9,10).
어떻게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룰 수 있습니까?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리고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가슴과 몸에 지닌 하나님의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들이 일어나야 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일본 사람을 싫어했고 북한 사람을 싫어했고
중국 사람을 싫어했고 모슬렘을 싫어했고 타 종교인들을 싫어했었습니다.
자유주의자도 성령파도 싫어했었습니다.
그러나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존 스토트 박사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조금씩, 조금씩 저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졌습니다.
일본 사람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일본 교회와 교류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북한 사람을 사랑하며 북한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을 사랑하며 중국 연변에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 150여명을
지난 22년 동안 돕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를 방문하며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학교 하나를 지어주고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도 조용기 목사님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가까이 소통하며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5개 종단의 지도자들과 친하게 교제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북한 동포를 돕는 일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선교가 힘써야 할 일은 무엇보다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7. 일곱째로,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제물 되는 삶”을 사시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는니라”(엡 5:2).
기독교는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으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없이 선교가 이루어진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2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없었다면 조선 땅에
선교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16년 후인 1882년에는 조미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게 했고,
2년 후인 1884년에는 알렌 의사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 다음 해인 1885년에는 아펜셀라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한 사람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및 선교 역사의 흐름에 얼마나 길고도
깊은 고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헨리 아펜셀러 와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와서
희생적인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교육과 조선의 의료 사역의 기초가 놓여졌고
조선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저는 언더우드 가의 3대가 조선 구원의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여
조선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희생적인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어
지금 양화진에 모두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 앞에서
지극한 경외감과 존경과 사랑을 느끼면서 한 없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구원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를 만듭니다.
토마스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조선땅에 구원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2005년 12월 31일 강변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2006년도 새해의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자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사실 저는 지금도 같은 기도를 계속해서 드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