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 언더우드와, 어머니 엘리자베스의 셋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과학자이자 발명가 였습니다. 그는 발명에 재능이 뛰어나서, 여왕에게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항상 아이들과 함께 교회 갔고, 아이들과 함께 설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놀아주는 자상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갈망하는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가문 대대로 이어져온 것이었습니다.
언더우드의 외증조할아버지는 영국런던선교회 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영국성서공회 와 해외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4살 때, 우연히 인도에서온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인도는 인구가 대단히 많으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크면 '인도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언더우드가 6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막내동생을 낳은 뒤 후유증으로 그만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도 어려워져, 언더우드는 형과 함께 프랑스 한 지방에 있던 가톨릭 기숙 남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도 언더우드 형제는, 가정에서의 습관대로 자기 전에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본 주변 아이들은, 놀리며 베개를 던지고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그래도 형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밤마다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며칠 반복되자, 결국 기숙사 안에 모든 소년들이 무릎을 꿇고 밤마다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 형제의 신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언더우드가 13살이 되던 1872년, 미국으로 이민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의 가족은 미국 뉴더햄에 정착하여, 제일 먼저 화란개척교회에 등록했습니다. 아버지는 잉크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자식들에게는 일을 강요하지 않고 오직 공부에만 매진할 것을 권했습니다.
18살에 뉴욕 대학교 입학 한 언더우드는 11 Km 를 걸어서 통학했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12시까지 공부를 하면서도 식사는 부실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아낄줄 모르고 열중하는 언더우드의 상품 덕분이었죠.
언더우드가 대학생이 되면서, 아버지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사업과 발명에 집중하느라, 과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고통을, 주님을 바라보며 용감하게 견뎌내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자녀들이 부르는 찬양 소리를 들으며 1881년 존 언더우드는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언더우드 22세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 노예해방의 주역 윌버포스 등과 친구로 지내며 주님을 신실히 섬기던 그리스도인 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화란 개혁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언더우드의 외모는, 약 170 Cm의 키에 단정하고 세련된 외모를 갖추었습니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길을 걷고 해외선교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매일 19 시간의 학업 및 일을 하며, 5시간을 자면서도,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전도의 남다른 열정을 보이는 언더우드를 보고 교수님들이 오히려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교회 부흥회 때, 주간 하루 동안 7~8번 예배에 참석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라는 바울의 고백을 마음에 새기며, 매일 매일 전도에 힘썼습니다.
▲언더우드는 종파와 계급, 인종적인 편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신학교에 다닐 때, 구세군은 대부분의 교인들로부터 인정 받지 못했는데 언더우드는 그들과 길거리에서 만나면 언제나 함께 어울려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기도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의 이런 성격은, 나중에 선교지에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가 네살배기 소년시절에 꾸었던 선교사의 꿈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런데 선교를 위한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경제적 어려움이 심해졌습니다. 주머니 사정은 늘 변변치 않았고, 다음 식사를 해결할 돈이 없을 때도 많았습니다.
궁핍하게 살아가던 대학시절의 어느 월요일 이었습니다. 난로에 석탄이 떨어져서, 불씨가 꺼져 꽁꽁 언 손을 부비고 있었습니다.
전날 저녁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헌금 해서, 돈이 없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 온 교수님 한 분이 방안으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돈을 쥐어주고는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훈련하여 나갔습니다.
▲언더우드가 의대 1학년이 되어, 인도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신학생 때 선교 자원자들의 모임에서 1천2~3백만의 사람들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의 마음에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미국과 처음 통상조약을 맺은 상태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있었기에 한국의 갈 사람을 열심히 찾았지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또한 몇몇 선교 지도자들은, 한국에 들어가기 이르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언더우드는 애트맨 목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마음에 찔림을 느꼈습니다. '그때 왜 네가 가지 않느냐?'라는 음성이 언더우드의 가슴에서 울려 왔습니다.
언더우드는 선교부에 두 차례나 신청을 했지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재정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장로교회에 두 번 신청했으나, 소용없는 일이라는 답변만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한국으로 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미국의 남아있거나, 인도로 가는 문은 넓게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언더우드에게, 뉴욕에 있는 한 교회에 와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그는 갈등 끝에, 목회 청빙에 수락하는 서신을 써서 그것을 우체통에 넣으려는데, 바로 그 순간 어떤 목소리를 들은 듯했습니다.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그는 편지를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장로교 선교부에 다시 신청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로교 선교본부에 갔을때,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선교부가 원래 파송 하려 했던 사람이 조선에 갈 수 없게 되어 언더우드가 파송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편지가 막 도착한 것이었죠.
게다가 새로 임명된 선교부 총무 엘린 우드는 조선 선교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언더우드의 조선 선교 결정을 기다렸다는듯 어떤 성도는 선교에서 써달라고 1250달러의 헌금을 보냈습니다.
이로써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가 임명한 최초의 조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1884년 12월 16일 그는 선교지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언더우드의 짐은 여행용 가방 하나와 타자기 한 대, 그리고 대형 카메라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에 혼자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선교사들에게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위생상태는 열악했으며,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진흙으로 지어진 집에서 살았는데, 지하실도 없었고 창문에는 창호지를 발랐을 뿐이었습니다.
모기와 파리 떼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온갖 질병이 여러 외국인의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특히나 습기가 많은 조선 여름의 더위는 건강한 사람도 활력을 잃어가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기에 그의 선교보고서를 본 사람들은, 조선은 살기좋은 나라 라고 생각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조선의 오게 된 것을 하나님께 늘 감사했으며 불평을 사치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언더우드가 조선의 온지 3일 만에, 알렌 선교사가 설립한 광혜원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문과 한국어를 공부하여 1년 만에 전도를 할 수 있을 만큼 능숙해 졌습니다.
1886년에는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작은 고아원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고아 하나가, 언더우드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 나중에 새문안교회의 초대장로가 되었는데 번개비 라고 불렸던 김규식 입니다.
번개비는, 아버지는 귀향을 가고 어머니는 사망하여 고아가 되었으나 그의 친척들도 그를 돌보려 하지 않아 고아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아원도 4살 어린아이까지 돌볼 여건이 되지 않아 다시 친척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얼마후 아이가 아픈데도, 돌볼 사람이 없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약을 들고 아이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언더우드는 과로와 몸살로 몹시 피곤하고 아픈 상태였으나 아예 소식을 듣고는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착하여 본 어린 규식은 너무 굶주려서, 깡마른 몸으로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먹고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아이를 데려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김규식을 집으로 데려다가 극진히 간호 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어린 규식을 양자로 입양하여 존 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언더우드의 사랑과 기도로 회복된 김규식은 언더우드 학당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며 후에 기독교 지도자가 되어 민족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일제탄압 속에서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우리나라 입법위원 의장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한편 언더우드는 한국어가 제법 능숙해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간단한 소책자도 출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 아펜젤러와 공동작업으로 <마가복음>의 임시 번역판을 출판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처음 조선의 도착했을 때부터 성경번역을 그의 사역의 우선순위로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큰 일을 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한국인 세례교인이 탄생한 것도 그의 성경 번역 사업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한 양반이 유학 서적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독교를 반대한 구절에서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조선이 천주교를 박해 해온 역사를 알기에 자신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 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렌 박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자신은 영어를 배우는 척하면서 어느 날 알렌 박사의 책상에 놓여져있던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훔쳐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책을 훔쳐와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영접하고 앞으로는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1886년 7월 11일, 최초로 개신교 세례를 받은 노춘경 입니다. 1887년 언더우드는 헐버트 선교사에게 망을 보아 달라고 하고 세 사람에게 첫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신 외국인이 여행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서울에서 약 400 Km 떨어진 의주까지 갔습니다. 이 여행은 복음을 전파하는 데 아주 좋은 수단이 되었습니다.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은 낯선 외국인에게 따뜻한 환대를 베풀었습니다. 언더우드 또한 아이들을 보면 쓰다듬어 주고 주부와 하인들, 여관주인 과도 허물없이 대화였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사랑방에 사람들을 모으거나 언덕과 문밖 길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책을 팔았습니다. 또 다음 날이면, 다음 목적지를 향해 아침 일찍 떠났습니다.
한번은 밤늦게 어느 마을 사랑방에 언더우드가 앉아 있는데 초라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농부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달려 들어오면서 목사님이 좋아하실 것을 가져 왔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더니 커다란 소매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삶은 감자와 커다란 부침개를 꺼냈습니다.
당시 언더우드는 속병이 나서 고생하고 있었지만 농부의 정성을 마다할 수 없어 억지로 먹었다가 오랫동안 배탈로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선교사의 삶을 행복하게 여겼습니다.
선교사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한국의 덥고 습한 여름 날씨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여름 내내 지저분한 도시에서 고생하며 일했습니다.
하수구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언더우드는, 소년 학교에 건축을 감독하고 사전과 한국어 참고서를 만드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또 틈틈이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기를 힘썼습니다.
▲한편 언더우드에게 기쁜 일이 생겼습니다. 늘 혼자서 외롭게 선교 활동을 하던 그에게 의료선교사 릴리어스 호턴 이라는 좋은 동역자가 생긴 것입니다.
1889년 봄, 언더우드는 그녀와 결혼하였습니다. 당시 왕실의 의사였던 호턴은, 왕실에서 엄청난 선물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민비가 언더우드 결혼식에 1백만냥의 거액의 축의금을 조랑말에 실어보냈다고 함. 당시 양반들 축의금은 3천냥 수준)
그들의 신혼여행은,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돌며 전도하는 선교여행이었습니다. 주변 선교사들은 신혼여행 만큼은 좋은 곳에서 편히 쉬고 오라며 극구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개성에서 압록강까지 나아갔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며 아픈 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열악한 잠자리 였습니다. 서양식 매트리스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밤새 빈대와 벼룩들이 괴롭혀 잠을 푹 잘 수가 없었습니다.
평안도 어느 산골 마을을 지날 때는 마을 사람들이 달려나와 기겁하면서 말렸습니다. 그곳은 호랑이가 나오는 계곡이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가까스로 위험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또 어느 날은 도적을 만나 짐을 몽땅 빼앗기고, 두들겨 맞기까지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두 달간 1000 Km 가 넘는 거리를 여행하면서 600 명이 넘는 환자들의 치료하고 또 그 몇 배가 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북쪽 선교지부의 선교사에게 듣게 된 어느 일화는 언더우드 부부에게 큰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어느날 한 아주머니는 전도여행 중인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성경은 커녕, 작은 책자나 찬송가도 얻지 못 했지만 마음에 복음이 심겨져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우리는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 우리는 죄를 버리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일주일 7일 중 하루를 거룩히 지키고 예수의 피밖에 없네 라는 노래를 불러야만 한다.'
이제 아주머니는 집으로 돌아가, 배운 말씀을 이웃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동네 사람들 다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난폭하기로 유명한 싸움꾼 이었는데 그 또한 이 신앙을 영접하고 말씀대로 살게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보급하는 권서가, 이 마을에 와서 교리를 더 자세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술집에서 모임을 갔던 사람들은 이것을 잘못 임을 알고 술을 하수구에 다 버렸습니다.
찬송가와 교리 책을 얻게 된 이들은 더욱 열심히 전도하여 나중에는 700명의 교인이 모이게 되었고 정식으로 목회자가 된 사람 중에는, 과거에 싸움꾼도 있었습니다.」
▲언더우드의 순회전도 사역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언더우드의 선교사역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선교방식에 대해, 선교부에서 많은 반대 의견이 나온 것입니다.
당시 어학참고서를 출판하기 위해, 일본에 잠시 있었던 언더우드는 고민 끝에 선교본부에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얼마 후 선교본부 회장으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따뜻한 격려의 편지였습니다.
언더우드는 다시 큰 힘을 얻고, 주님께서 이 십자가를 면류관으로 바꿔주시기 전까지는 다시는 내려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언더우드의 아내 릴리어스 호턴 선교사는, 첫 아들 원한경을 출산하고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의사들은 미국에서 잠시 휴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습니다.
▲언더우드는 1891년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갔습니다. 그가 미국으로 가서 처음 한 일은 선교 본부에 가서, 조선에 보다 많은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정도 없고 사람도 없다는, 슬픈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언더우드는 개의치 않고 한국인들이 얼마나 신앙적인 열정이 뛰어난지 연설을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자기 사업을 하는 언더우드의 큰 형이 재정 후원을 약속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기회가 닿는 대로 교회나 신학교, 학생단체 등에 찾아가서 설교 하였습니다. *당시 학생자발운동이 부흥하던 시절
'여러분, 우리가 미지의 세계라고 하는 조선은 놀라운 부흥을 앞둔 땅이며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예비하신 땅입니다. 조선의 많은 백성들은 지금 선교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조선에 복음을 전하러 갑시다. 조선을 위해 기도한 후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언더우드의 열변은 후배 선교사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때 레이놀즈, 에비슨, 무어 테이트, 리 선교사 등이 언더우드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 오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언더우드 에게 많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형은 사업에 동업을 제안했으며 큰 교회 목회자로, 또한 대학 학장으로 초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모든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이제 아내 호턴의 건강도 많이 좋아져서, 다시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조선으로 돌아와서, 찬송가를 펴내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미 번역되어 있는 찬송가와, 자신이 번역한 찬송가를 편집하여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동료 선교사들이, 용어 문제로 이 찬송가를 사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언더우드는 할 수 없이 개인적으로 찬양가를 출판하였습니다.
이 찬양집은 오선 악보로 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찬송가 입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나의 죄를 씻기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예수가 거느리시니'
이러한 찬양은 언더우드가 번역한 찬양입니다.
그리고 후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같이 사용할 수 있는 합동 찬송가를 만들게 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이 일에 초대 책임자가 되었고 합동찬송가가 나올 때까지 '언더우드의 찬양가'는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한편 당시 조선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일들이 다반사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이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1893년 말 언더우드는, 미국에 있을 때 모은 기부금으로 휴양소를 건립하였습니다. 수목이 울창한 언덕에 지어진 훌륭한 휴양소는 버려지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축복의 터가 되었습니다.
또한 근처에는 작은 진료소를 세워서, 호턴 여사가 약을 보급하고 여성 성경반을 운영하였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터져, 외국인들은 모두 이동하지 말고 서울에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무척 무더운 여름날, 방안에만 갇혀 지내던 많은 선교사들은 병에 걸렸습니다. 서울 사람들은 짐을 꾸려 피난가기에 바빴습니다.
몇 명 선교사 가정의 자녀들은, 이때 더위에 못 이겨 죽고 말았습니다. 언더우드의 가족들도 여름 내내 앓았습니다.
언더우드는 한국 열병에 좋은 키니네 라는 약을 싼값에 팔아 복음을 전하고자 미국에 대량으로 주문하였습니다.
약병에는 미국에서 인쇄한 깨끗한 전도 문구로 포장하였습니다. '키니네는 육체의 어떤 병에는 효과가 있지만 이 약으로 영혼은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구할 수 있는 약은 따로 있습니다. 지금 곧 선교사를 방문하거나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서 생명의 책을 읽으세요.'
이렇게 키니네 와 함께 복음은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1895년 봄, 언더우드가 개척한 새문안교회 는 이제 넓은 예배당이 필요할 정도로 부흥 되었습니다. *1885년 입국 후 10년 경과
그런데 성도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한 달에 5천 원 이상 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한국인에게 낼 수 있을 만큼만 내고 후원금으로 건물을 지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기독교는 외국 종교인데, 왜 외국인들의 경비로 짓지 않습니까?'
그 때 언더우드 선교사는 대답했습니다. '만약에 외국 돈만 사용하여 성전을 짓는다면 기독교는 계속해서 외국 종교가 될 것이고 만약 한국인의 힘으로 짓는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가 외국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자 성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성전에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가난한데 어떻게 짓겠느냐'고 묻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불가능하겠냐고 오히려 반문했습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전 성도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봉사한 끝에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극심한 더위와 함께 콜레라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언더우드는 많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켜 방역에 힘썼습니다.
마을의 조력자들에게는, 응급처치와 소독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이 앞장서 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콜레라가 전국에 퍼지자, 정부는 사대문에 '예수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으려 하는가?' 라는 벽보를 붙여 놓았습니다. 콜레라를 통해 복음도 함께 퍼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 번은 어느 날 아침 언더우드가 병원에 출근하는 것을 본 한 일꾼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이 아침부터 저렇게 급히 어디로 가는, 저 외국인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것도 모르오? 우리 조선인들을 너무 사랑해서 밤낮으로 병자들을 돌보며 일하는 예수쟁이 아닙니까!' 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언더우드가 조선에 선교를 한지 어느덧 10여년 흘렀습니다. 조선의 신분의 벽은 정말 높아서, 양반들과 일반 백성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상류층 사람들을 위한 또 다른 선교방법을 고민하던중 기독교인이 된 지식인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기독청년회를 생각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는 YMCA 국제위원회에 요청 편지를 보냈고 마침내 한국 YMCA 가 설립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상류층 젊은이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중에서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젊은이들과 함께
YMCA 는 활성화되고 성장하기 시작 했습니다.
언더우드는 YMCA의 이사가 되어, 그의 평생의 뜻인 대학 설립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읍니다.
그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지은 종로 2가 YMCA 회관에 대학반을 만들어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 기독 대학은 나중에 연희 전문학교로, 그리고 연희대학교 를 거쳐 오늘의 연세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그리고 YMCA 를 통해 조선의 많은 청년들이 기독교 인재들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상류층 선교에 멈추지 않고, 왕실 까지 그 범위를 넓혀 같습니다. 언드우드 부부는, 고종과 민비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던중 콜레라가 터졌을 때, 선교사들의 희생에 감동한 고종은 언더우드와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내 릴리어스 호턴은 왕비의 건강을 돌보아 주었고 왕비는 때마다 선물을 보내며 가깝게 지냈습니다.
민비가 시해 되어 고종이 큰 충격에 빠졌을 때 언더우드는 고종 곁을 밤낮으로 지켰습니다.
고종은 궁중에 있던 어떤 신하도 믿을 수 없었지만 언더우드의 집에서 만든 음식이라고 하면 안심하고 먹었습니다.
국왕의 생일이 있던 9월, 언더우드는 고종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이 행사가 기독교인들의 위상을 높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밤새 책자를 인쇄하고, 찬송가와 함께, 서울 전역에 배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찬송가 70장의 곡조에, '하나님께 이 나라와 왕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의 가사를 지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수천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찬송과 기도로 시작하여, 주기도문으로 끝났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오직 '하나님을 섬겨야 이 나라가 번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를 금하는 나라에서 공식적인 예배 행사를 통해 수천명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계속해서 기독교 국가 한국을 소망하며 열심히 선교 하였습니다.
12주동안 1천 킬로를 걸어 5번의 지방 여행을 했습니다.
그는 이 여행동안, 4군데에서 훈련반 모임을 열었고 548 명의 세례와 학습을 받았습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성경번역과 저술작업도 계속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기 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와 언더우드를 대접했습니다. 닭, 달걀, 꿀 등 많은 음식을 가져와서 오히려 곤란할 정도였습니다.
언더우드 부부는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떤 행상인은 주일마다 장사를 하지 않아서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도 꿋꿋이 주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의 비석을, 교회의 계단으로 사용하라고 내어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귀가 먹은 한 할머니는, 무척 세례를 받고 싶어 했지만 귀가 어두워 질문에 들을 수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한 질문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셨을 때 어디로 가고 싶으십니까?' '예수님께로요!'
오직 예수님만이 희망임을 고백하는 할머니의 얼굴은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해 보였습니다.
당시 평양에는 2천여 명의 등록된 신자들이 있을 정도로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였습니다.
1900년 드디어 신약 전서가 출판되어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건강은 많이 악화되었습니다.
지난 여름 지독한 감기에 걸려 혹독한 고생을 한 탓이었습니다. 의사는 스위스 같은 곳에 가서 휴양하고 오라며 권면하였습니다.
▲1901년 언더우드는 두 번째 안식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26세 청년의 몸으로 한국에 온 지 어느덧 15년이 흘렀습니다.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이었지만 그동안 하나님께서 한국에 교회를 세우시고 부흥시키는 일들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안식년에 그는 미국으로 가기 전, 영국 성서공회에 들러 한국판 성서를 발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데 대해,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미국 선교부 총회가 추천하는 설교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국 선교에 대한 설교도 하였습니다.
고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가진 안식년 까지도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오자 새문안교회는 이제 벌써 비좁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계속해서 늘어났으며 여인들을 위한 6개의 사경회가 매주 여러 곳에서 열렸고 몇 명의 여인들은 여선교사들과 전도여행을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1904년 과 1905년 언더우드는 기회가 닿을 때 마다 특히 주일에는 감옥을 찾아갔습니다.
당시는 정치적인 문제로 감옥에 갇힌 높은 가문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외로움과 절망에 빠져있던 그들은, 옛 친구를 만나 복음을 듣는 것을 즐거웠습니다.
게일 벙커 선교사를 도와, 언더우드는 함께 이 일을 해나갔습니다. 감옥에서 읽을 것에 굶주려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과 소책자와 찬송가를 주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을 때 뿌려진 씨앗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회개로 열매 맺었습니다.
이들 중 이승만 이라는 젊은이는 감옥에서 받은 성경을 통해 회개하고 이 복음을 감옥의 동료들 뿐 아니라, 간수들에게 까지 전해 주었습니다.
이상재는 유명한 '감옥 그룹' 중 하나를 조직해 서울에 상류계급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성경을 연구하고, 밤에는 모여 토론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위대한 왕의 사자가 와서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무시했는지 일깨워 주었습니다.
더 이상 그런 기회를 소홀히 하여 더 큰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회개하여 거듭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국에 정책이 바뀌어,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고 내각의 장관이 되었습니다.
또한 게일 선교사의 교회에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으며 많은 친구들을 교회로 데려왔는데 후에 YMCA 총무가 되었을 때 그는 수천명의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907년 이제 조선의 교회는 6만명이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의 몸은 계속 약해져서 연설이나 설교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성경 번역과 교회들을 감독하는 일을 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스위스에 가서 차가운 공기 속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며 그를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언더우드는 유럽에서 쉼을 통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소책자를 준비하여 강연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여 많은 돈을 기부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별로 수입이 많지 않았음에도 망설이며 100달러를 기부하더니 다음 날 와서 500달러를 내야만 할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또 와서는 자신에게 돈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1,000달러를 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언더우드의 형은,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그가 미국에 머물면서 자신의 사업에 함께 하자고 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자신 또한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고 선교지에서 자신이 하려는 사업인 대학설립이 쉽지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에게 선교는 십자가 이기도했지만 생명이요 기쁨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지속되는 한 그 일을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긴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 새로 이전한 새문안 교회 건축을 위해 정성의 기울였습니다.
새문안 교회는 벽돌로 새롭게 건축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날로 성장해 갔고, 언더우드 할 일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언더우드가 자주 교회 비우게 되자 소래 사람 서경주 목사를 협동목사로 두어 함께 동역하였습니다.
어느덧 언더우드의 나이는 50을 넘어가고 있었으나 그의 불타는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때 회장으로 있던 조선성교서회朝鮮聖敎書會의 새 건물에 지었고 *기독교서회의 전신 가을에는 전국 복음운동 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복음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무엇보다 언더우드가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부터 꾸던 꿈인 대학을 세우는 일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인에게 근대적 고등교육이 절실하며 이 민족이 가장 높은 문화수준에 기독교정신을 더 한다면 세계 기독교화에 한국이 큰 몫을 감당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는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습니다.
대다수 선교사들은 이미 평양에 숭실대학교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대학은 필요치 않다며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계획은, 수도 서울에 세계에서 뒤쳐지지 않는 종합대학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주변의 반대에도 개의치 않고 몇몇 뜻을 같이하는 선교사들과 지인들의 힘을 얻어 서울에 대학을 세우는 일을 강력히 추진하였습니다.
먼저 기독청년회 회관에서 60여명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경신학교 대학부' 라는 이름의 대학을 설치하여 출발점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일제 총독부가, 대학에서 기독교교육을 할 수 없다며 법령을 만들어 반대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이때 신학과를 개설하여 자연스럽게 신앙교육과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여전히 경신학교 대학부로는 학교 설립허가를 내 주지 않아 언더우드는 할 수 없이, 경신학교 대학부를 연희전문학교 로 인가를 받아 세웠습니다.
▲1913년에는 정식으로 최초의 대표적인 장로교 총회가 열렸습니다. 230여 명의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언더우드가 첫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안수 받은 지 5년 만에 한국교회는 일곱 개의 노회에, 당회가 있는 조직 교회가 134개, 한국목사 69명에, 전체 교인 수는 12만 7천 여명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1913년 말에 들어서면서, 언더우드는 서서히 몸이 허약해지면서 병이 들기 시작했읍니다. 그동안의 피로가 쌓여서 쇠약해지고 탈진하였습니다. 동료 선교사들은, 언더우드에게 일을 그만두고 전문적으로 치료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나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다만 고개를 저으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학설립과 성경학교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916년 1월 환갑이 다 된 몸으로 일본어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총독부 법령 하에서 대학 강의를 하려면 일본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루에 9시간씩 일본어를 공부했습니다. 또한 세 선교사들에게, 한국 선교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그러나 동경에 있는 동안에도 점점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그의 아내 호튼은, 공부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가자며 눈물로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견딜 만하다며, 학기를 끝낼 때까지만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고집 하였습니다.
마침내 3월, 언더우드가 한국으로 돌아오자 그의 친구들은 언더우드의 건강 상태를 보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이 몸으로,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대학 설립 신청서를 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마침내 기독교 학교를 보증하는 인가를 받아냈습니다. 언더우드는 하늘을 향해 감격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연희전문학교 가 정식으로 대학으로 인가를 받았으나 이제 대학교 부지에 건물을 세워야 할 차례였습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학교가 한국 서울에 정식으로 우뚝 서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에 언더우드의 건강은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결국 그는 한국에 온 지 31년만에 미국 누이의 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건강이 회복되는가 싶더니만 무더위로 고생하면서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의사의 권고로 그는 아틀랜틱시티 NJ 로 옮겨 갔습니다. 그는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갔음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는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언더우드의 마음은 항상 한국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날 밤, 말하기도 힘겨운 상태에서 '나는 지금도 한국으로 여행 할 수 있어' 라며, 한국을 그리워 하였습니다.
다음 날 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아내가 '예수님이 곁에 계신 것 같아요?' 라고 묻자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 30분, 마침내 언더우드는 57간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언더우드의 죽음 소식이 알려지자 그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는 서신이 전 세계에서 도착했습니다.
특히 한국과 한국의 동역자들로부터 수개월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언더우드의 삶에 감동받아, 한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사람들도 이어져 나왔습니다.
심지어 한국에 있는 불신자들조차도, 그의 한국 사랑을 떠올리면서 눈물지으며 그리워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의 후배 선교사들은, 그가 누구에게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그의 훌륭한 인격을 증언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평생 수많은 선교헌금을 받았지만 이를 성경을 번역하고 배포하는 일과 한국의 수많은 교회와 청년들의 영혼과 육신이 살리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헌신하게 된 것도 그의 강연과 글을 통해서 였습니다.
그가 조선의 도착하던 날부터, 31년 후 한국을 완전히 떠나던 날까지 그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뜻을 이어 4대 걸친 후손들도 한국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 언더우드! 그의 삶은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위대한 선교사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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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김명혁 목사 설교에서 스크랩)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서 13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언더우드가 해외 선교에 대한 꿈을 처음으로 가진 것은 네 살 때의 일로, 인도 선교사의 강연을 듣고부터였다고 합니다.
작은 마음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선교에 대한 소망”은 대학 시절과 신학생 시절을 지나면서 점차 구체적인 “선교에 대한 소명”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언더우드의 마음속의 선교지는 네 살 때부터 줄곧 자라갔다고 생각합니다.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1년 동안 힘든 의학 공부를 할 정도로, 그는 자신이 인도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청년 시절 언더우드는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많았습니다. 중국, 일본, 아프리카,·인도,·미얀마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의 어려움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던 중 1883년에 언더우드는 같은 뉴브런즈윅 NJ 신학교 학생이었던 앨버트 올트만스가 선교사 지망생들을 모아 놓고 조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1882년 미국과 조약을 맺었지만, 아직까지 한 명의 선교사도 들어가지 않아 1천3백만 명의 조선인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와 조선에서 선교 하기를 희망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언더우드는 조선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인도 선교사로서의 강한 소명 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조선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의 마음에 파장이 일기 시작한 것은, 어느 조선인이 보내온 한 통의 선교 호소문을 읽고 나서부터였습니다.
그것은 1884년 1월의 일로 신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겨울날의 일이었습니다.
“조선은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굳게 닫혀 있던 쇄국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 이후 1883년 4월 조선에 미국 공사관이 설치되고 초대 미국 공사로서 푸트(Foote)가 부임했습니다. 이후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구미 여러 나라와 하나씩 조약을 체결해 나가며 조선은 바야흐로 근대화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1883년 제3회 일본 기독교도 대침목회에 참석한 이가 이수정이며, 이수정 바로 뒤에는 도시샤 대학의 창립자 니지마 조, 니지마의 왼쪽에는 일본의 대표적 근대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였습니다.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 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다른 나라가 그들의 교사들을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하며, 또한 그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이와 같은 선교 호소문을 읽은 그 순간 그의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으며, '조선에 아무도 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가슴이 조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니야, 그래도 누군가는 조선으로 가려고 나서겠지?” 언더우드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마음에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 라는 메시지가 울렸습니다. 호소문을 들고 있는 손이 바르르 떨리는 듯했습니다.
그 순간의 울림을 언더우드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 먹으면 바로 착수해야만 하는 저돌적인 성격을 타고난 언더우드는 그 길로 개혁교회 해외선교부를 찾아가 자신을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현재 기금이 부족하며, 또한 선교사 한 명으로 새로운 선교부를 개설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그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두 번, 세 번 찾아가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습니다. 낙담하고 있던 언더우드는 때마침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 조선으로 파송할 목회자와 선교사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길로 장로회 사무실을 찾아간 언더우드는 자신을 임명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미 북장로회에서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뒤 1883년부터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습니다. 선교부에서는 우선 1884년 4월 28일자로 의사인 헤론을 조선의 첫 선교사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파송할 목회자와 선교사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19세기 개신교 선교가 전 세계로 확장된 이래, 새로운 나라에 첫 선교사를 보낼 때에는 의료 선교사 한 명을 꼭 같이 보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따라서 새롭게 문이 열린 조선의 개척 선교사도 역시 의료 선교사와 목회 선교사 2명이 짝을 이루어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들뜬 마음으로 북장로회에 조선 선교사로 신청을 했습니다. 선교부는 언더우드에게 지원서와 각종 추천서, 증명서 등 서류를 요구했습니다.
언더우드는 뉴욕대학교와 뉴브론즈윅 신학교의 교수진 그리고 개혁교회 목사의 추천서, 의사의 건강소견서 등을 제출했습니다.
아래는 언더우드 본인이 쓴 지원서의 일부입니다. “저는 지금 거의 25세가 되며, 건강하고 철같은 체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 배우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며, 어떤 언어든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해외 선교지로 가려는 이유는 그곳에서 일꾼들이 많이 필요하지만, 그 사역에 나서는 사람의 수가 적기 때문입니다.
또한 언어에 대한 소양, 철같은 체질, 그리고 더위와 추위, 고된 일 및 수면 부족 등을 견디어 내는 힘 등 사역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선교사로 지원한 이유로 선교지에 일꾼이 부족한 것을 꼽으며, 자신은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체력과 지적 능력, 그리고 믿음이 있다고 간결하고도 단호하게 적었습니다.
이러한 지원서와 추천서를 받은 북장로회는 1884년 7월 28일 개최된 실행위원회에서 언더우드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습니다. 서류를 받은 지 2주 만에 내려진 임명이었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매우 신속히 이루어진 결정이었습니다.
부활주일인 1885년 4월 5일에 언더우드는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입국했는데 조선 정부에서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 성서 번역 위원회 초대 위원장, 대한기독교서회 회장, 한국 기독교 교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한편 예수교학당, 서울 구세학당,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교회 연합 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의 종교·문화·언어·정치·사회 등 여러 분야에 많은 일을 많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선교사로서의 업적은 교회 설립과 전도 여행이었습니다. 1887년에 조선인 교우들의 참여로 조선 장로교 교회사에서 첫 장로교 교회인 정동교회(현재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고, 1900년도 초 개신교 양평동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전도가 활발한 지역이었던 북한 지역에서의 전도 여행을 3차례나 하였습니다. 학생 시절에 피어선 박사에게 영향을 받았던 인연으로 후에 피어선 기념성경학원(현재 평택대학교)에서 교장을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역임하였습니다.
성서 번역에도 공헌하였는데 1887년에 상임성서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 복음서의 한글판을 번역·출간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또한 뛰어난 복음주의 설교가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사상에 연재되는 언더우드 설교 집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을 했습니다. 2014년 기독교사상에 연재된 이야기에 따르면, 언더우드 선교사는 일제에 의해 반일 인사로 여겨질 만큼 한국 민중과 연대하는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라디오 방송으로 “참고 견딘다면 해방의 날이 올 것입니다” 라고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친일 성향의 선교사 그리고 일제와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가 1916년 10월 12일 미국 뉴저지주의 휴양도시인 애틀랜틱 시티의 병원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사후에도 언더우드 가문은 조선에 남아 3대에 걸쳐서 의료 선교와 한남대학교의 설립으로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고, 특히 4대손인 원한광(호러스 호튼 언더우드 주니어)은 1980년에 광주민중항쟁 을 해외에 알려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언더우드 선교사의 후손들 28명이 한국에 와서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했는데 그 기념하는 모습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100주년, 우리 고향은" SOUTH KOREA "후손 28명.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방한한 후손들이 12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를 방문해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후손들은 모두 한복을 차려입었음. 이 날을 위해 특별히 한국 방문)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고 한국교회의 초석을 쌓은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의 후손 28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손자인 원득한(89) 박사와 증손자 원한석(61) 연세대 이사 및 원한광(73) 박사 등은 12일 연세대와 언더우드기념사업회가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개최한 언더우드 서거 100주년 기념 및 언더우드 선교상 시상식에 참석했다.
4대를 이어 한국땅에서 봉사해온 언더우드 집안은 2004년 “할 수 있는 봉사는 다했다고 생각한다” 라며 원 이사만 남겨놓고 한국을 떠났다.
원 이사는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념식의 인사말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이 행사에 많은 가족들이 참석할 수 있었다” 면서 “우리 가문의 뿌리는 한국에 있기에 페이스북에서도 고향을 ‘South Korea’로 기재한다” 라고 소개했다.
이어 “언더우드 할아버지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선 해외 선교사 파송도 필요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부터 모범적인 생활을 보여주며 기독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라고 당부했다.
손자 원득한 박사는 한국전쟁 정전협상 때 통역자로 일했고 제대 후 한국에서 30년 이상 거주하며 서울 외국인학교 총장으로 일했다.
연세대 영문과 교수 등을 역임한 증손자 원한광 박사는 한국인 2명을 입양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후손은 ‘언더우드 서거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고종 황제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하사한 ‘사인 참사검’ 등 150여 점의 전시품을 둘러봤다. 언더우드가 가져온 느티나무의 씨앗으로 기른 묘목을 백주년기념관 앞 정원에 심는 순서도 가졌다. 앞서 11일 연세대 신과대학 예배실에서 열린 언더우드 선교사 110주년 기념 공개강좌에서는 원득한 박사가 연세대가 언더우드 정신을 계승해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연세대 안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이들이 있지만 학교 전체적으로는 중심 사역과 목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며 “연세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학생과 교수들에게 전하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