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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돼지에게나 어울려

LNCK 2023. 6. 9. 20:58

그건 돼지에게나 어울려! [마가복음14] - - YouTube

◈그건 돼지에게나 어울려       막5:1~20     

예수께서 이방 땅인 거라사 지방에 가셨습니다.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들려서 삶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한 광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광인은 영과 혼과 육이 모두 망가져서 피폐한 상태였습니다. 
사람 사는 거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살펴볼 이야기는, 이방 땅에 살던 귀신 들린 자, 
영과 혼과 육이 다 피폐하였던 광인이 어떻게 회복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얘기입니다. 

▲'영'이라고 하는 게 뭔가요? 
하나님의 영, 또 세상의 영,
성경에 보면 다른 많은 영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영이라는 게 뭔가요? 

영의 본질 중에 하나는, 인간의 깊은 곳에 갈망을 일으킨다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가장 근원된 것이 영입니다. 

그렇죠. 인간의 삶 가운데 아무런 갈망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에요. 
목적도 없을 것이고, 삶의 의미도 없을 것이고 그렇겠지요. 

그런데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것이 무언가를 향한 갈망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갈망이 결국, 인간이 무엇을 향해서 살아야 되고, 
어떻게 살아야 되고... 하는 것을 다 결정하게 되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을 두셨어요. 
우리 안 깊은 곳에 하나님의 영을 두셔서, 영으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인간은 원래 지음 받기를 
우리 안에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영원한 삶을 갈망하고, 천국을 갈망하고... 
이렇게 디자인 됐다는 거에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본문에 등장하는 거라서 광인(미친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아닌, 다른 더러운 '귀신의 영'이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함께 살펴볼 텐데요. 

복음서에서 여러분, '이방 땅'이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을 모르는 땅을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로 얘기하자면 '하나님을 떠나서 전혀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하나님 으로부터 멀어져버린 인류, 또 멀어져버린 사람들' .. 이게 이방 땅이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죠. 이것을 상징하고 있는 그런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거라사 광인은, 
하나님을 떠난 인류가, 
그 결과 영과 혼과 육이 모두 피폐해져서 망가져버린 
그래서 사람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그 인류의 모습을 대변(대표)해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거라사 지방에 살던 미친 사람이 모습 가운데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일부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오늘 일부러 이방 거라사 땅에 찾아가셨습니다. 
왜냐면 광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이 광인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회복시키시는 
이 기적의 이야기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5:1~2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거라사 광인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하나님의 영이 거하셔야 될 곳에, 다른 영이 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정말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삶이 다 망가져버린 모습..
영도 망가지고, 혼도 망가지고, 뭐 관계도 망가지고.. 
이렇게 다 망가져버린 이 피폐한 모습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인생이 피폐해지는 진짜 이유는, 다른 환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거에요.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들을, 주변에 있는 환경속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혹은 내 안에 있는 어떤 결핍해서.. 
그런 것들이 인생의 문제를 일으키는 진짜 이유가 아닙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은,
인생이 망가지고 피폐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영적인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거에요. 

구체적인 이유들은, 구체적인 모습들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그 안에 있는 영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거에요. 

그 영은 뭐에요? 갈망을 일으키는 형이에요. 
갈망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갈망하게 하고, 
갈망할 수 없는 것들을 갈망하게 하는 이 더러운 영, 잘못된 영이 
우리 안에 있을때 

원래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도록 디자인한 이 사람이 깊은 곳에 
하나님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이 거할 때, 

그래서 원래 하나님이 사람으로 갈망하도록 만드셨던.. 
마땅히 갈망해야 될 바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들을 갈망하기 시작할 때, 
그것이 우리 인생을 피폐하게 하고, 망가지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는 것입니다. 

▲3~4절,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히자 그를 아무도 제어할 수 없어서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놨는데 
또 힘은 얼마나 좋은지 여러 번 끊어버립니다. 

영의 본질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안에 어떤 갈망을 일으키는 거에요. 
그래서 맘몬의 영이 들어오면, 돈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고 
음란의 영이 들어오면, 성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고 

그렇듯이 이 '영'이라는 것은 갈망을 일으키는데 
하나님의 영이든, 세상의 영이든 갈망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던 거라사 광인 안에도 
이 더러운 영이 주는 갈망이 있었겠죠. 뭔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향한 갈망인지, 성경에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그의 내면에는 그 갈망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강렬한 어떤게 있었다는 거에요. 그것은 감정과 욕구와 원함... 그야말로 갈망이죠. 

그런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는데 
이게 컨트롤이 안 된다는 거에요. 

원래 여러분, 사람은 지음 받기를 어떻게 지음 받았냐면 
우리 안에 갈망과 욕구가 있습니다. 뭐 사람을 하나님은 그렇게 만드셨어요. 

무엇인가를 원하도록 하시고, 무엇인가 갈망하도록 만드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는 
이 갈망과 욕구들을 절제할 수 있도록, 컨트롤 할 수 있도록 만드셨어요. 

성령의 열매 중에 '절제'가 있잖아요. self-control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는, 어떤 열매를 맺는냐면,
삶을 절제할 수 있는 열매를 맺습니다. self-control 의 열매를 맺어요.

그래서 우리 안에 비록 어떤 원하는 것이 있고, 갈급한 것이 있고, 
어떤 감정이 있고, 욕구가 있어도 
그것을 컨트롤하고 매니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거라사 광인을 보면, 그 기능이 망가져 버렸어요. 
원래 하나님이 디자인하셨던 기능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절제가 안됩니다. 
다른 사람도 말릴 수 없고, 스스로도 절제가 안 돼요. 

그리고 사실은 여러분, 우리 인생가운데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수많은 크고 작은 문제들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갈망이 절제가 되지 않는 문제!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 안에 있는 갈망, 욕구, 감정들이 절제가 되십니까?

아주 쉬운 예로, 야식에 대한 갈망, 라면에 대한 욕구는 어떠세요?
여러분 자재가 되세요? 쉽게 안 되잖아요. 

분명히 밤에 이거 먹으면 내 건강이 안 좋아지고, 살이 찌는 거 알아요. 
분명히 내 안에 있는 깊은 자아는 '먹으면 안 돼' 라고 말하죠.

나는 그래야 되는 줄 알아요.
그렇지만 아는데도, 야식이나 라면을 끊기란 쉽지 않습니다.
'절제'가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본문의 광인이 쇠사슬을 끊듯이, 
우리도 주위에서 아무리 먹지 말라고 말려도, 
그 모든 저항을 다 뿌리치고, 마치 쇠사슬 끊듯이 다 끊어버리고,
결국 먹어버리고 마는 사람들이 많죠. 비슷한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컨트롤할 수 없는, 절제되지 않는 갈망들로 인해서 
우리 삶을 파괴해 간다는 거에요. 

또 성적인 욕구는 절제가 쉽게 되던가요?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줄 알아요.

요즘은 불륜이라고 하는 게 너무 흔해서, 
요즘 이제 사건이나 이슈로 취급하지도 않을 정도로 흔해졌는데 

이거 하면, 여러분 어떻게 된다는 거 분명히 압니다. 
분명히 가정이 파괴될 거고, 
분명히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이 다 망가질 것을 알아요. 

아는 데도 절제가 안 되는 거에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 망가진 인간은.. 갈망이 컨트롤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과, 다른 더러운 영의 가장 근원적인 차이에요. 

하나님의 영은, 절제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하나님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무절제하게, 
나도 (그 상황을) 컨트롤 할 수 없도록 그렇게 하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의지를 원래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대로 사용해서 
우리가 자기 삶을 절제할 수 있도록 하세요. 
그게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인간의 고귀한 존재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그냥 단순히 본능에 따라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에요. 
개나 돼지는, 이걸 절제할 수가 없습니다. 
개나 돼지는, 그냥 먹을 게 있으면 반드시 먹어야 되고 
개나 돼지는 뭐 짝짓기 할 때가 되면, 무조건 짝짓기를 해야 돼요. 
안 그러고 버티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르다는 거에요. 
사람은 절제할 수 있도록 만드셨어요. 
왜냐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거든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데 
이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는, 절제 self-control 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그것이 우리가 지음 받은 방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하나님의 영이 거하셔야 될 곳에 
더러운 영, 또는 다른 영이 거하기 시작하니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절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도 나를 말릴 수가 없고, 스스로도 self-control 이 안돼요.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도, 이 갈망은 그 사슬을 끊고 나오고 
또 묶어 놔도 또 끊고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광인의 두 번째 문제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갈망하는지도 잘 모른다는 거에요. 
정확히 무엇을 갈망하는지도 잘 몰라요. 모든 것이 모든 것이 혼란스럽습니다. 
'아니 도대체 내가 갈망하는 게 뭐지?' 
'이 갈망과 목마름은 도대체 뭐를 향한 거지?' 잘 몰라요.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그냥 답답하고 소리지르고 싶기는 한데 
이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건지 잘 몰라요. 

이게 여러분, 혼이 망가진 거에요. 혼이 피폐한 거에요. 

우리는 정확하게 분별하고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이, 우리 안에 창조되어 있어요. 
정확히 내가 무엇을 갈망하는지, 
정확히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 무엇 때문에 답답한지, 
사람은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어요. 
이게 우리 혼의 기능이에요. 

그런데 혼이 피폐해져 버렸어요. 혼이 망가져 버렸어요. 
그래서 정상적으로 분별되지도, 인식되지도, 작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근원은, 영이 피폐한 거에요.  
하나님의 영을 떠나버린 인간은, 마땅히 갈망해야 될 것들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니까 '무덤과 산 사이를 떠도는' 거에요. 

갈망이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삶의 이유, 존재의 목적하고 깊게 연결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 안에 깊은 갈망들을 두셔서 
인간이 무엇을 향해서 살아가야 되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되고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존재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하셨어요. 
그것이 '갈망'이라는 형태로 우리 안에 부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가장 근본적인 갈망은, 영원을 향한 갈망이에요. 
그래서 인간 안에 하나님께서 영원을 향한 마음을 만드셨다고 그랬죠. 전3:11

영원을 사모하는 갈망 이외에도,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
사랑하고 싶어 하는 갈망,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싶은 갈망..
이런 갈망들을 우리 안에 두셨어요. 이게 하나님께서 주신 갈망들인데, 

이런 갈망들로 인해서 인간은, 
그 갈망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그것을 추구할 때 우리 안에 깊은 만족들이 주어지게.. 그렇게 디자인됐고 

그것을 통해서 삶의 목적을 알고, 이유를 알고 
삶이 만족을 누리도록 그렇게 창조되었단 말이죠. 
그게 사람의 지음 받은 방식인데, 

반대로 하나님의 영이 나가버린 인간은
무엇을 갈망하는 지를 몰라요.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지를 모르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무덤과 산 사이를 떠도는' 거에요. :5

도대체 어디로 가서 뭘 해야 될지 모르니까 
무덤과 산 사이를 이리갔다, 저리갔다 떠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십니까? 방향성을 갖고 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떠돌고 계십니까? 방향을 정확히 인지하고 계십니까? 

내 인생이 어디로 가야 되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어떻게 디자인하셨는지? 

무엇을 향해 갈 때, 내 인생에 의미가 있어지고 
그 안에 깊은 만족이 있는지.. 
방향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그 방향으로 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혹시 그냥 떠돌고 계시지 않습니까? 

떠도는 것은..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른다는 거에요. 

왜 광인이 무덤과 산 사이를 떠돌게 되는 줄 아십니까? 
내가 무엇을 갈망하는 지를 몰라서 그래요. 

△본문의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를 깊게 들여다 보면 
참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이 거라사 강인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도대체 왜 그러는지에 대한 이유가 성경에 전혀 없어요. 
그냥 귀신들려서 이렇게 산다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정확한 겁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닌 더러운 영이 들어오게 되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가 몰라요. 

뭐 수만 가지를 원하는 것 같은데.. 가보면 이게 아니에요. (만족이 없어요) 

또 저걸 원하는 것 같은데.. 애써 거기 가보면 그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결국에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게 돼요. 
이것이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피폐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리를 
더러운 귀신, 세상의 영이 차지해 버렸습니다. 

세상의 영들은, 세상 것들을 향한 전혀 다른 엉뚱한 갈망들을 일으킵니다. 
불륜, 간음, 마약, 뭐 약물 중독, 음란물, 돈, 여러 중독들... 

하여간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또 피폐하게 만드는.. 
그래서 사실은 인간이 절대로 갈망하면 안 되는 것들.. 
그런 것들을 갈망하도록 합니다. 

이 더러운 영은, 이런 갈망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을 피폐하게 하고, 컨트롤할 수 없는 상태로 몰고 갑니다. 
이게 혼의 피폐입니다. 

▲이어지는 5절과 또 병행구절인 눅8:27절에 보면, 
광인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눅8:27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이 광인은 내면만 피폐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 관계도 모두 망가져 있었어요. 
관계도 모두 피폐해져 있었어요. 

1) 누가복음에 보면, 그는 옷을 입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옷이 상징하고 있는 바는 
관계를 위한 최소한의 어떤 지켜야 될 예절, 또는 예의 입니다. 

사람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것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어요.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입니다. 

이게 무슨 보호와 은혜냐면, 
사람이 타락하고 나니까, 서로 벗은 것을 보고 서로 불편해하기 시작했어요. 
벗은 것을 보고 수치심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이건 뭐냐면,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거에요. 
영적인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하게 된 인간이 
그 안에 타락한 본성들이 있는데 
이것을 전혀 가리지 않고 그냥 다 보여주면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안에 지금 돌아가는 복잡한 생각들이 있어요. 
부부간에라도 그것을 거르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민낯을 다 보여주면 
여러분 어떻게 될까요. 가정분란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내 안에 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잖아요.
감사하게도 배우자가 그거를 못 보고 있으니까.. 
옷으로 가려주셨으니까.. 그나마 관계가 유지되는 거지, 

그렇지 않고 그런 것을 하나도 여과 없이 
민낯을 그대로 다 까발려서 보여준다면.. 
부부관계 뿐만 아니라, 아마 어떤 관계도 맺어질 수 없을 겁니다. 

타락한 인간은 무서운 존재입니다. 사실은 관계가 다 파괴돼버린 거에요. 
사실은 모든 관계가 다 파괴돼버린 거에요.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기 시작하니까 
인간이 정상적으로 맺어야 되는 관계,
심지어 아담과 하와 부부 사이에 가장 친밀해야 될 그 관계까지도 
다 파괴돼 버립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관계를 누릴 수 있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깊은 관계로 가려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정말 관계가 깊어지고, 그 안에서 의미 있고 풍성한 관계로 가려면 
그만큼 내 안에 것들을 오픈해야 돼요. 뭐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것을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데, 관계가 만들어질 리는 없죠. 
그런데 이것을 오픈하면 오픈할수록, 더 깊은 관계가 돼야 되는데 
타락한 인간은, 이것을 다 오픈하면.. 관계가 깨져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여러분, 얼마나 모순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과 
가장 소중한 기능들이 다 망가져버린 거에요. 
그래서 정상적으로 관계를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요. 
타락은 참 무서운 거에요. 죄는 참 무서운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아시고, 보호의 옷을 입히십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관계가 맺어질 수 있도록 보호하시는 거에요. 

그것은 예를 들자면 양심, 도덕, 체면, 예의.. 뭐 이런 거죠. 
그래서 이런 걸 신학적으로는 '일반은총'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에 대한 것들을 느끼게 하시고 
그래서 예의를 지키게 하시고, 그런 것들을 인간 가운데 두셔서 
그래도 최소한의 관계들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셨어요. 
안 그러면 다 깨져버리고 끝나니까... 보호하신다는 거에요. 
그것이 옷의 의미입니다. 보호하시는 은혜에 대한 의미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거라사 광인은
시도 때도 없이 옷을 벗고 돌아다닌다는 거에요.

뭐에요? 도덕도 없고, 예의도 없고, 
그냥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감정이 이끄는 대로... 그렇게 행동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관계가 가능할 리 없죠. 
이 거라사 광인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아무도 컨트롤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정상적인 사람이 지키고 있는 도덕과 예의도 없어요.. 
옷도 다 벗고 돌아다니고 있어요.
막 소리 지르면서 다니니까..  정상적인 관계가 될 리가 없지요. 

그래요 여러분, 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온전한 관계의 옷을 입지 못합니다. 

2) 그 결과, 그는 집에 거할 수 없었대요
'집'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를 얘기하는 용어입니다. 집이 어떤 곳이에요?
그냥 건물을 얘기하는 게 아니죠. 

쉴 수 있는 관계,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관계, 돌아갈 수 있는 관계,
이것이  '집'이 상징하는 바죠. 

그런데 거라사 광인은, 집에 가지 못했다는 거예요. 뭐 당연합니다. 
관계가 제대로 맺어질 수 없었다는 거죠. 
아주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다 끊어져 버렸습니다. 모두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을 떠난.. 그래서 피폐한 인간의 필연적 귀착점은
바로 이거에요. 관계의 단절! 
기본적인 관계까지 다 단절된.. 

그래서 이 거라사 광인의 영혼은, 집을 잃어버렸습니다. 
돌아갈 관계가 없어졌고요. 쉼을 누릴 수 있는 모든 관계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돌아갈 집이 있으십니까, 돌아갈 관계가 있으십니까? 
쉴 곳이 있으십니까?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을 보면,
마8:28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집에 거하지 못할 뿐만 아니고, 그 더러운 영들이 몹시 사나와서 
아무도 그 길로 지나다니지 못했대요. 

옷을 입지 않고 집에 거하지 않던 광인은 
계속 사람들을 해코지하며, 꽥꽥 소리지르며 다녔던 것 같아요. 

여러분, 이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특징 아닙니까. 
자기의 어떤 이익과 자기의 갈망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로 몰아넣잖아요. 
계속 악악 소리지르며 다니고요...

이 고통과 공포로 인해서, 주위에 왕래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고요. 
결국 그는 산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는.. 
그래서 무덤 사이를 떠도는 그런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3) 그래서 그를 묘사하는 세 번째 단어는 '무덤과 산'이에요. 
집에 거하는 것이 아니고 '무덤과 산'에서 왔다 갔다 했다는 거에요. 

무덤은, 산 자들이 거하는 곳이 아닙니다. 산 사람은 무덤에 살지 않습니다. 
인간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라면 
무덤은 '그의 관계가 다 죽었다'고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에요. 

또한 '산'이란, 죽음에 대한 상징은 아니지만,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니에요. 
산은, 자연이 있고 짐승들이 사는 곳이지,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니에요. 

그 얘기는, 이 거라사 광인이, 사람과의 관계는 무덤이 됐고,
죽어 있는 사람 말고는 아무하고도 관계를 못했어요. 

그런데 누구하고 관계하고 있었다는 거에요?
'산'하고 관계하고 있었다는 거에요. 

△여러분, 요즘도 좀 이렇지 않으세요? 
사람과 관계가 안되니까, 강아지 하고 맨날 살잖아요. 

뭐 개 키우는 걸 비하하는 건 아닙니다. 
저를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저는 개를 너무 좋아하고요. 
어렸을 때부터 개없이 살아본 적이 없고, 
요즘도 취미가 개 동영상 보는 거고요... 그거 보면 힐링이 돼요.

그렇지만 저는 산에 살지는 않습니다. 
저는 사람하고 살죠, 개하고 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린 존재는 
짐승들 키우는 걸 뭐라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하고 관계가 안 된다는 거에요. 

사람하고 관계가 안 되니까, 자꾸 다른 걸 찾는다는 거죠. 
그래서 찾게 되는 것이.. 요즘 TV에 보면,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제가 가끔 보는데, 그걸 왜 방송하는지 모르겠어요.
산에서 혼자 살아가는데, 일부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뭔가 망가진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관계가 단절되어서 산에 혼자 살죠.

보면 사람하고 관계가 안 되는 거에요. 
사람하고 관계에 큰 실패를 했거나, 상처를 받았거나.. 
그래서 사람하고 관계가 안 되니까, 자연에 들어가서 맨날 뭐 약초캐고 하는데,
그걸 방송할 필요까지 있나 생각이 듭니다.

이 거라사 광인이 어디 살았대요? 
집에 산 게 아니고, 무덤과 산에 살았다는 거에요. 
사람하고 관계가 안 되어서 그런 거죠.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 더러운 영이 거하는 자는 
그래서 내면이 피폐한 자는, 결국 완전한 고립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과의 관계는 다 죽어버리고요. 그래서 무덤을 떠돌죠. 
그래서 인간 이외의 것들과만 관계하는.. 산에 거하는.. 고립에 처하게 됩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 고독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어요. 
인간을 인간되지 못하게 한다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고독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지금 받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게 깨져버리면 죽은 거라는 거에요. 

이 거라사 광인의 삶은, 집보다는 무덤에 가까웠습니다.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웠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집에 거하십니까? 
혹시 무덤과 산 사이를 떠들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사람하고 대화해 본지가 언제십니까? 
혹시 강아지 하고만 대화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5b절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영과 혼이 피폐한 사람은, 결국 육체까지 피폐하게 됩니다. 
돌로 스스로의 육체를 자해했대요. 

영과 혼이 망가졌는데, 육체가 건강한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육체가 건강하려면, 마음도 건강해야 되거든요. 
절제도 되어야 되고, 뭐 스트레스도 덜 받아야 되고, 뭐 이렇게 돼야 되거든요.

 근데 내면이 다 망가졌는데, 육체가 온전할 리가 없습니다. 
자 그런데 이 자해하는 모습을 보면, 
단순히 육체를 망가뜨리는 것을 뛰어넘어서 
거라사 광인이 겪고 있던 총체적인 고통을 상징해 보여줍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고통을 잊고자, 스스로 자해했다는 거에요. 
다른 고통을 통해서, 그 고통을 잊어버리고자 했다는 거죠. 

이 거라사 광인 안에 있는 총체적인 고통이 얼마나 아팠으면 
돌로 스스로를 계속 자해했다는 거죠. 여러분 그 모습이 상상되지 않으세요?

돌로 왜 계속 자기 몸을 치고 있겠어요?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그런 거잖아요.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자기가 모를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하여간 고통스러워요. 하여간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걸 잊어버리려고, 계속 자해하고 있었다는 거에요. 

자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이 거라사 광인에게 고통의 원인, 고통을 주는 가해자가 있는데 
이게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돌로 치는 사람이 외부 인이면 '치지 마!' 뭐 이러면 되는데, 
돌로 치는게 자기 자신입니다. 그럼 이걸 어떡하겠어요? 

떨쳐낼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고... 
24시간, 365일 그냥 계속 같이 있는 거예요. 

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막 돌로 자기 몸을 치면서 괴로워하고 소리 지르고 있는 이 모습.. 
이게 여러분, 하나님을 떠나서 이상한 영에게 그 자리를 내어 준 
인간의 이상하고 기괴한 모습입니다. 

사실은 거라사 광인 말고, 바로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류,
우리의 기괴하고 당황스러운 민낯입니다. 

사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그 민낯을 까보면 모두 괴물 아닙니까? 
'서촌동 광인' 
들키지만 않았을 뿐이지... 광인의 모습이 어쩌면 조금씩 우리에게 있을 수 있죠.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5
맞아요.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거하는 곳은 삶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죽음(무덤)이 늘 인생 곁을 떠돌고 있고, 가까이 있습니다. 

이 무덤이 두렵고 싫어서 떠나고 싶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다시 거기 와 있어요. 무덤 옆에 와 있어요. 

절망, 단절, 소외, 허무, 자기 증오... 이게 다 (상징적으로) 무덤이죠. 
소망이 죽은 곳입니다. 기쁨과 환희가 다 죽은 곳이에요. 
이것이 광인이 거했던 곳입니다. 

이 고통으로 인해서, 광인이 밤낮으로 소리 질렀대요. 비명을 지릅니다. 
'으악, 으아악~'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고통소리입니다. 
어찌할 수가 없어요, 자제가 안 돼요. 

무덤 속에서 자해하는 인간의 비명 소리, 
하나님을 떠나서 영과 혼과 육이 모두 피폐한 인간의 비명 소리가 
거라사 땅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수원시 서천동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오, 가련한 내 영혼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6절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 광인이 배에서 내린 예수께로 달려갑니다. 
여러분 이 광인이, 자기 인생을 통틀어서 딱 하나 잘한 게 있는데 이겁니다. 

다른 거는 사람다운 행동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뭐 자해하고, 소리 지르고, 옷 벗고 다니고...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데 

딱 하나 올바른 결정이 있었는데 그건 뭐냐면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왔다는 거에요. :6

물론 예수께서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그 광인을 아시고, 거라사 땅에 오셨을 거예요. 

왜냐면 거라사 지방에 오셔서, 그를 고쳐 주시고, 배 타고 떠나시거든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이 사람을 먼저 찾아오셨어요. 

그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광인이 예수를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는 거에요. 
그 앞으로 나아갔다는 거에요. 

예수 앞으로 나아가는 단순한 선택이, 기적 같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할렐루야! 
피폐한 영과 혼과 육에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8절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예수께서 이 광인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문제의 근원을 치신 거에요. 
문제의 근원은, 영적인 거라고 했어요. 

예수께서 이 광인을 봤을 때, 뭐 다른 말씀 하시지 않았어요. 
'얘야, 일단 집에서 좀 자면서 쉬어라,
옷 부터 좀 입어! 
소리 좀 지르지 마!' 이러지 않으셨다는 거에요.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이 광인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원인들은 맞아요. 
그렇지만 이것이 진짜 원인은 아니었다는 거에요. 

그 안에 근원이 되는 문제가 있었는데 
진짜 근원적인 문제는, 영적인 거였다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만나자마자, 처음으로 하신 것이 뭐에요? 
가장 근원이 되는 영적인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더러운 귀인아, 그에게서 나오라!' 

여러분, 우리 안에 엉뚱한 영이 자리잡고 있는데 
우리의 삶의 부분들이, 제자리를 찾아갈 리는 없습니다. 

영이 회복되지 않는데, 다른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갈 순 없습니다. 
혼도, 육도, 관계도.. 올바른 영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데, 
제자리를 찾아갈 수 없다는 거에요. 

인간은 원래 지음 받기를,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영을 불어 넣으셨다 그랬어요. 그 호흡을 불어 넣으세요. 
호흡이 히브리어로 영과 똑같은 말이거든요. *루아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도록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거에요. 
그래야만 원래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 이루어진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 영이 떠나시고, 다른 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모습을 살기는 절대로 불가능하죠.
깊고 사랑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안 된다는 거에요.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이에요. 

그래서 이 거라 광인에게 처음으로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에게서 떠나갈지어다' 

△오늘 예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 것 같으세요? 
가장 먼저 무엇을 물어보실 것 같으세요? 

'네 안에 깊은 곳에, 주의 영이 거하고 계시나?'
이것부터 물어보지 않으시겠어요? 

'네 안 깊은 곳에는 뭐가 있느냐?' 
'네 영 깊은 곳에는 누가 자리 잡고 있느냐? 
그곳에 하나님의 영이 자리잡고 있느냐, 아니면 다른 영들이 자리잡고 있느냐?' 
이것부터 여러분께 물어보지 않으시겠어요? 

2020년에, 저희가 '진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내 영 깊은 곳에, 어떤 영이 거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요?
어렵지 않아요. 이거 생각보다 쉬워요. 
내가 지금 무엇을 갈망하고 있냐? .. 를 살펴보면 됩니다. 

여러분 삶에서, 지금 가장 갈망하는 게 뭐냐고요? 
이게 '어떤 영이 내 안에 거하느냐?' 하는 것을 밝혀 줍니다. 

내가 주일을 빠지지 않고 매주 주일 성수하고 있다.. 로 만족하지 마시고, 
'내가 무엇을 가장 갈망하고 있는가요?' 

물론 우리 육체의 연약함과 죄악이 있기 때문에.. 유혹을 받습니다. 
그건 잠시 새처럼 앉았다가 날아가는 거고, 
갈망이란.. 내 속에 오래도록 떠나지 않고, 계속 안주하고 있는 어떤 것이에요.

'너희 안에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느냐?
정말 영원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갈망이 자리잡고 있느냐?'

만약 그거 말고 다른 갈망이 자리잡고 있다면 
오늘 예수께서 오셔서도 똑같이 말씀하실 거에요. 
'더러운 귀신아, 네게서 떠나갈지어다!'

▲9절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더러운 영이 한 놈이 아니었어요. 군대처럼 많았대요.
이게 여러분 얼마나 많았는지 아십니까? 

돼지 2천 마리 안에 들어갔거든요. 
하나님 한 분이 계셔야 될 그 영혼의 자리에 
다른 많은 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거에요. 

이 각각의 영들이 뭐를 일으키겠어요? 갈망을 일으키죠. 
돈에 대한 갈망, 성에 대한 갈망, 성공에 대한 갈망, 명성, 권력의 갈명,
인정 받고 싶은 갈망.. 이런 수많은 갈망들, 
채워지지 않는.. 아니 채워질 수 없는 이 헛된 갈망과 욕구들.. 
나도 모르는 갈망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거에요. 
이게 '군대'처럼 많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에는 무슨 영이 있습니까? 
분명히 내가 단언하건데, 
내 안 깊은 곳에 하나님의 영이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은 사람은 
수많은 다른 영들이, 수많은 갈망들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거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어요. 
갈망이 없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그것은 마치 영혼이 없는 인간이죠.

갈망이 없는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사람은, 
다른 뭔가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데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거예요. 

솔로몬이 얘기하잖아요. 
돈에 대한 갈망 때문에 돈을 많이 모아봤더니.. 이게 아니요. 
그 다음에 여자들하고 놀아봤더니.. 그것도 아니요. 

그럼 지혜? 지혜를 탐구해 봤더니.. 이것도 아니요. 
권력도 다 가져봤는데.. 그것도 아니더라는 거잖아요. 

갈망은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갈망 이외에 갈망들은 
채워지지 않는.. 채워질 수 없는 갈망들이에요. 
그래서 '헛된 갈망'이라 그러는거죠. 

세상 갈망들.. 그게 채워지면 잠시 잠깐은 좋은 것 같아요. 
근데 금방 다시 목말라요. 다 아시잖아요.

인생이 피폐해지고.. 우리 삶에 생기는 모든 문제들에 근원은 
결국 영에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에요. 
종교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에요. 

종교와 도덕과 윤리를 아무리 많이 갖다 댄다고 해도, 갈망이 바뀌겠냐고요?
도덕과 윤리와 종교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제어하고 컨트롤하는 데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갈망을 바꾸어주지는 않습니다.

갈망이 바뀌는 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만 바뀌는 거에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우리 안에 있는 갈망이 바뀌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뭐 도덕과 윤리와 종교.. 아무리 갖다 붙여도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들만 제어할 뿐이지, 갈망은 그대로 있는 거에요.
그거 가지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 안에 군대처럼 많은 갈망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삶이 정상이 아닐 겁니다... 

마8: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예수께서 이 '군대'를 향해서 '돼지에게 가라' 그러고 명령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네가 지금 갈망하고 있는 갈망들, 
네 안에 더러운 영들이 일으키는 그 갈망들은 
사람이 아니라 돼지에게나 어울리는 거라'는 뜻이에요. 

그저 더 먹고, 그저 더 군림하고, 그저 더 소유하고, 그저 더 성관계 하고 
이거는 여러분 개나 돼지한테나 어울리는 갈망들이지 
사람한테 어울리는 갈망이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갈망하도록 지으신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사람 안에는 무엇을 집어넣으셨대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집어넣으셨어요. 

사람은.. 이렇게 개나 돼지나 갈망하는 갈망을 쫓아서 살아가도록 
지음받은 존재가 아니에요. 전혀 다른 존재로 지음 받았어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시간을 보낼 것이기에
영원을 사모하며, 영원을 갈망하며, 
영원히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할 그 시간을 갈망하는 하늘의 신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로... 

이 고귀하고 정말 설명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가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늘에서 사람을 내려다보시는데 황당한 거에요. 

돼지에게나 들어가 있어야 마땅한 영이, 사람에게 들어가 버린 거예요.
마땅히 갈망해야 될 것들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돼지나 갈망할 것을, 사람이 똑같이 갈망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돼지가 언제 행복해하는 것 같으세요? 
먹여주면 돼요.

훈련시키는 방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에요. 간식을 주면 돼요. 나머지는 없어요. 

또 개나 짐승이 발정기가 되잖아요. 
그러면 관계 맺고 싶은 갈망말고 다른 갈망은 일도 없어요. 

저도 어릴 적에 개 키우다가, 잃어버린 적이 몇번 있어요. 
개가 없어지면 며칠을 잠도 못 자겠고 막 그런데, 
잃어버린 개들, 다 뭐 때문에 잃어버린 줄 아세요?
발정기 때 집을 나가는 거예요.

▲13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이거 여러분, 가장 통쾌한 장면 아닙니까!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할렐루야! 소리쳤습니다. 
너무 통쾌해서요. 

예수께서 2천마리나 되는 이 모든 고통을 한꺼번에 몰살시켜 버렸다는 거에요. 
돼지가 죽은 게 아까운 것이 아니라, 
이 악하고 더러운 영들이, 예수의 권세 앞에서 항복하고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여러분 안에 오신다면, 이 작업을 뭔지 하실 거에요. 
귀신 들린 사람 안에 있는 군대 귀신을 돼지를 끄집어내셔서
몰살시켜 버리실 거예요.

이게 여러분 사실은 세례의 의미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을 '세례'라 그러잖아요. 고전10:2

그런데 보면, 애굽 군대는 바다에 다 몰살시켜버리는 거에요. 
더러운 영들, 그 영이 일으키는 갈망들, 
그 영이 일으키는 인생의 고통들..  (*내 속에 애굽 군대도 있는 거죠)

예수께서 오시면 제일 먼저 여러분 안에서 
그 군대 귀신을 끄집어 내실 거라는 거에요. 
그래서 바다에 몰살시켜 버리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 어떡하시겠어요? 
오늘 예배가 끝나고 나서, 그 군대 귀신, 
2천 마리 돼지 떼에나 들어가기에 합당한 영들을, 그냥 그대로 가져가실 겁니까?
네 오늘 다 몰사시켜 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 인생을 피폐하게 하던 더러운 영, 
내 영과 혼과 육을 망가뜨리던 더러운 갈망들을,
예수 이름의 권세로 다 내쫓으시고, 바다에 몰살시켜 버리십시오. 

예수께서 명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나와라. 저 돼지에게나 들어갈지어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예수께서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동네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몰사한 2 천 마리 돼지를 아쉬워합니다. 

▲16~17절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왜 떠나시라고 했을까요?
돼지 2천 마리를 손해 봤다는 거지요.

동네 사람들은, 회복된 광인에게 초점이 가 있었던 게 아니에요. 
사람답게 살지 못하던 광인이,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아무 관심도 없어요. 

그러니까 확대 해석하면, 더러운 귀신이 거라사 광인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고, 
거라사 지방 사람들도, 광인이 갈망했던 것과 똑같은 것들을 갈망했다는 거예요. 
경중(가볍고 무거움)의 차이는 있겠죠.
그들은 멀쩡해 보이는 광인들이었습니다. 

▲15절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아이러니하게도 광인이었던 자는 
그 안에 있던 모든 더러운 갈망들이 치유돼고, 온전하게 변화받았는데

온전해 보이던 동네 사람들은 
2천 마리 더러운 영이 들어간 돼지 떼를 갈망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회복된 광인 입니까? 
-아니면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그 안에 돼지를 향한 갈망으로 가득한 
광인이십니까? 

거라사 광인은, 예수 앞으로 달려나갔지만 
돼지 2천 마리를 갈망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떠납니다. 

여러분들은, 본문에 회복된 광인들 편에 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갑니다. 
혹시 여러분 안에 아직도 군대 귀신이 남아 있다면, 
오늘 예수께서 명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아 나올지어다! 저 돼지 떼에게 들어갈지어다!
바다에 들어가 몰살될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