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 회퍼의 생애 | 독일의 행동하는 양심 | - YouTube
◈디트리히 본회퍼의 생애 ▣ 세계 교회사 인물들 (작성중)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아버지 칼 본회퍼와 어머니 파울라 사이의 8남매 중 6째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칼 본회퍼는, 명문가 출신의 정신의학 교수였습니다.
어머니 파울라는 신앙심 깊은 목회자 가정 출신으로
부친이 한때 황제 빌헬름 2세의 전임 목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본회퍼의 가정은 독일 제국의 엘리트 중산층에 속했습니다.
정원이 딸린 넓은 집에 살았으며,
현관 복도 벽에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학자, 예술가, 종교인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신실한 신앙인들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버지 칼 본회퍼는 전형적인 근대학자로서
추측이란 허용될 수 없는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본회퍼의 가족 중 정기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디트리이가 6살 때 그의 가족은 베를린으로 이사했습니다.
아버지 칼 본회퍼는, 신경학과 와 정신의학과의 회장 자리를 맡았으며
베를린 국립대학병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칼은 매우 엄격한 아버지였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시간,
아버지가 먼저 말을 붙일 때만 대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잔소리나 애정의 표현을 최대한 절제했으며
자녀들에게도 엉뚱한 말은 용납하지 않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도록 가르쳤습니다.
자녀들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 파울라가 직접 교육했는데
어머니의 교육은 생동감이 있었고
스스로 생각하고 알아내도록 자녀들을 독려했습니다.
음악적이고 감상적이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를
디트리히 본회퍼가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디트리히가 8살 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전쟁에 대한 열정은 없었지만
독일의 전쟁 목적의 정당성에는 동의하기에
조국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해냈습니다.
디트리히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전선의 상황을 매일 점검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조작된 전투 소식, 참호전, 그리고 독가스 사용에 관한
소문들이 들려왔습니다.
사촌 형들의 전사 소식에, 디트리히와 그의 쌍둥이 여동생 사비네는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삶과 죽음이 어떤 것일까?'에 관해 깊이 생각하며
매일 밤 잠에 들었습니다.
▲1919년의 혁명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1922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장관이 피살되고
거리에서 노동운동가들은 사회적 혁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갈등은 가정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본회퍼의 형 한 명은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나,
그는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키는 세력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엘리트들이 사회를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23년 그는 최고 점수를 받으며 졸업했고, 신학도의 길을 택했습니다.
아버지는 교회를, 심약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집단이라 생각했기에
그의 아들 디트리히가 신학을 공부하기엔 머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그 결정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튀빙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한 첫 학기부터, 디트리히는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는 신학생들 가운데 이방인이었으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진 그는, 당분간 로마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개인의 신앙을 하나로 묶어주는 규율과 외적 형식을
갖춘 가톨릭 교회를 보고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살아있는 교회란 어떤 것일까?'에 대한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디트리히가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베를린은 이전과 달랐습니다.
전통적인 가치들은 빛을 잃어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든 것에 사사건건 논쟁을 벌였습니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추구하던 본회퍼는
하르낙을 비판하며, 칼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신학에 몰두하며, 당시의 정치적 사건들에는 매우 무관심했습니다.
나치의 전국구 대표로서 새로 선출된 요제프 괴벨스가
베를린을 방문한 사건에도 그는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본회퍼는 21살 되던 1927년에,
베를린 대학 신학부 박사학위 논문으로 <성도의 교제>를 제출하였는데
대단히 우수한 논문이어서
칼바르트는 이를 하나의 신학적 기적이라고까지 칭찬하였습니다.
그는 3년 뒤인 1930년에 교수 자격 논문으로 <행동과 존재>를 썼고
이 책과 함께 학자와 목회자로서의 삶의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삶과 신학을 일치시키는 방법에 몰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주장한 것은 항상 실천에 옮기려 했습니다.
다른 학생들 같으면, 전공 공부를 시작할 나이에 보고서를 8가지나 쓰면서
논문을 내고, 시험도 보면서 바쁘게 생활했습니다.
(그는) 낮시간에는 공부, 악기 연습, 독서 그리고 많은 산책을 하였고
거의 신학 공부만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1930년 9월 디트리히는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에 유학가게 되었습니다.
유니온 신학교는 자유로운 곳이었습니다.
디트리히는 그때까지 이론적인 신학만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곳에는 신학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마칠 무렵, '사회 복음'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 교회가 아닌
수많은 개별적인 종파들과 자유로운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놀란 것은, 대부분의 백인 교회들이
미국 사회 안의 인종차별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흑인 공동체의 예배를 몰래 참여하며
개인적으로 해방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을 떠나기 전 쿠바에 있는 독일인 공동체를 찾아가서
모세에 관해 설교했습니다.
엄청난 실업자들과, 전 세계에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어린이들과
중국의 기근, 인도에서 억압받는 이들, 그리고 불행한 조국 독일을 보면서
이 모든 것을 알고도, 자기 혼자 태어나고도 무관심하게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겠다는 사람이 과연 성도이겠습니까?
▲디트리히는 새로운 정치적 자각을 지닌 채 조국으로 돌아갔습니다.
1931년 6월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조직신학 강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아직 무명의 젊은 강사인 본회퍼의 강의를 들으러 오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1932년 여름학기에, 그는 <교회란 무엇인가>에 관해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본회퍼는 강의 시간을 정확히 지켰으며, 규율을 엄격히 했습니다.
강의 시간에 늦은 경우는 딱 한 번뿐이었는데
자신이 돌보던 어린이가 죽어갈 때 뿐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어린이 교리반'도 맡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베를린에서 가장 열악한 지역이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어려움이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는 아이들을 다루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가 성경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목사나 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운동선수처럼 보일 정도로, 아이들과 함께 잘 놀아주었습니다.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서, 직접 아이들의 견진 예복을 만들 천을 구해
각자 몸에 맞는 길이로 입혀주기도 했습니다.
▲1932년,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의 무너진 경제와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시킨 히틀러는,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당시 히틀러의 인기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대단하였습니다.
나치당의 의석수는 230석이 되었고,
이때 대다수의 목사들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종합"하기 위한
운동으로 독일 기독교 신앙운동에 가담하였습니다.
독일 기독교 신앙운동은, 히틀러를
무너진 독일을 세우고 온 세계에 번영을 가져다 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이 시대의 구세주라고 선전했으며
나치는 행동하는 적극적인 기독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본회퍼는 히틀러의 운동에 들어 있는
우상 숭배적이며 반기독교적인 정신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그리스도인들을 선동하는 정부를
강단에서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 관심을 쏟읍시다. 우리가 세상 일에 수수 방관하는 자들이 아니며,
신앙이란 정의롭지 못한 이 세상 한가운데서
불만 없이 지내도록 하는 아편이 절대 아님을 증거합시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희망하고 있기에
더 강하고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항거할 수 있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고 총통에 취임했습니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총통이 된 다음 날
아침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지도자와 젊은 세대"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은 직책을 세우셨고
이 직책에 적절한 사람을 뽑아서 일하신다.
그런데 직책에 관계없이 어떤 사람에게 전권을 주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요,
결국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 고 했습니다.
그의 말이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한 것이라
방송국 PD는 방송을 중단해버렸습니다.
본회퍼는 이 일로, 독일 나치 정권 하의 정치 경찰인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는 주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본 회퍼는 굴하지 않고, 다음 날 그의 모든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회람장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의 원고 전문은 독일 신문에 실렸습니다.
▲1933년 2월 27일에, 국회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고
정신 이상인 네덜란드 청년을 범인이라고 몰아세우며 현장에서 체포했습니다.
나치는 이 청년이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공산당의 반역 행위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을 구실로 삼아,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치는 신체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통신의 자유를 제한하며
가택수사와 압수의 권한을 부여하는 비상사태 법령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때 교회는, 이를 '질서의 회복을 위한 과정'이라 칭하며
국가질서의 기초를 훼손하는 모든 자들에게
공권력이 제재를 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무를 집행하는 것이라고 환영했습니다.
교회의 입장이 발표된 지 3주 후에
디트리히는 조심스럽게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의견을 펼쳐나갔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국가를 상대로 그 힘을 사용할 권리는 없지만
공권력이 인간의 기본권을 말살할 때
교회가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교회가 국가를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 가지 길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교회는 국가에게, 그 통치 행위가 합법적이고
국가의 성격에 부합되는가를 물을 수 있다.
둘째, 교회는 국가 공권력의 피해자들을 도울 수 있다.
교회는 피해자들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더라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셋째, 교회는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해자 측의 행위를 방해할 수도 있다.
'교회가 정치적인 저항 운동을 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대부분의 목사들은 깜짝 놀라며 자리를 떠나서
강의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텅 빈 강의실에서 마쳐야 했습니다.
디트리히의 의견에 동의한 자들은
종교적 사회주의자들로서 이미 탄압받고 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1933년 교회의 선거가 치러질 때
'아돌프 히틀러의 새 국가 안에, 그리스도의 새 교리를 건설하자'는 슬로건을
부르짖는 독일 기독교회가 있었습니다.
이들과 맞서는 복음과 교회 단체조차도
'국가에 무조건 순명해야 한다'는 성명만 되풀이하였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러한 입장에 분노하며
그것은 교회가 정치에 항복하는 것이라며
친구들, 제자들과 함께, 가능성이 없는 선거전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가 인쇄한 팜플릿은 선거운동 직전에 압수당하고 말았습니다.
선거를 앞둔 하루 전날 저녁에, 히틀러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부를 위해 의연히 일어선 독일 기독교의 세력이 승리하길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내정된 독일 기독교의 후보자들이, 교회 안의 모든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본회퍼의 심정은 더욱더 절박해졌습니다.
그에게는 교회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었기에
하나님을 배신한 교회에는 몸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더럽혀진 교회와 진정한 교회를 구별하자'고 외쳤고
'나치 정권을 교회가 막아내야 한다'고 역설하였지만
독일의 목사들은, 나치 정권과 제국 교회에 대한 디트리히의 비판이
도를 넘어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본회퍼는 이런 상황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한동안 돌아보기로 하며
학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1933년 10월 17일 디트리히 본회퍼는,
런던 남동쪽 포리스트힐 교외의 시든햄에 있는
독일인 교회 목사관에 입주했습니다.
그는 시든햄 교회와 런던 동부의 성바오로 교회를 맡았습니다.
목사직의 급여는 넉넉지 않았지만
그는 돈 문제에 있어서 늘 너그럽고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계산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돈만 있으면 족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디트리히는 목사관에서 사람들과 밤새 신학토론, 음악을 (감상 또는 연주) 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지나간 사건들을 정리해보며, 새롭게 다가올 상황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심사숙고해 보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본회퍼의 가정은, 사실 나치정부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좌익계열도 아니었고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체포된 것도 아니며
압수당하거나 태워 없애야 할 만한 글을 쓴 일도 없었고
무시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우를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칼 본회퍼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요,
형 프리드리히는 물리학 교수,
형 클라우스는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법률 고문이었습니다.
또한 매형 매제도 각각 교통부의 법률 고문과
법무부 장관의 개인 비서로 있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나치 정부에 필요한 집안이었습니다.
갈등보다는 편안한 삶을 좋아하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갑자기 도덕군자가 된 것도,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결심이 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위험과 권력에 맞서야 하는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얼마나 더 포기해야 하는지 등
앞으로 겪게 될 불이익을 생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며
더 이상 교회와 국가 간의 갈등을 못 본 척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본회퍼는 18개월 동안 영국 런던에서 목회하면서
독일 교회의 반히틀러 투쟁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덴마크에서 열린 <실천적 기독 정신을 위한 세계협의회>가 열렸을 때
독일에서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독일 교회만이 참여했는데
본회퍼가 이곳에 참여하여 회장을 설득하여
나치에 저항하는 고백교회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서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34년 바르멘에서 고백교회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독일 기독교회의 입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6가지 진술로서 고백교회를 대항책으로 설정했습니다.
이제 고백교회는 '저항하는 개신교회'라 부르게 되었고
나치에 동조한 독일 기독교회는, 형편없는 급진적 단체로 보게 되었습니다.
1935년 4월 26일, 그는 고백교회 총회로부터
고백교회 소속 신학교 중 하나인
핀켄발데 신학원의 책임자로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29살의 디트리히 본회퍼는 25명의 신학원생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신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학생들과 책을 먼저 들지 않고,
톱, 망치, 페인트와 붓을 들고 주변을 수리하고 정돈했으며
텅 빈 낡은 저택에서 학생들과 함께 일하며 기도했습니다.
영국에서 귀국하기 전, 본회퍼는 몇몇 수도원과 신앙 공동체들을 방문했었는데
그곳에서 배운 규칙을 신학원에 적용하였습니다.
하루 일과는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끝났는데
예배는 시편 낭송, 찬송, 구약 성경 읽기, 찬송, 신학 성경 한 부분 읽기,
잠시동안의 기도와 주기도로 이루어졌고
예배 이후에는 당시로서는 아주 생소한 30분 동안의 묵상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가 자리에 없을 때는 그 사람을 험담하지 말자'는 규칙도 적용
했습니다. 원장의 이러한 생소한 요구에 대해 대부분의 학생들은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신학을 머리로만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는 미래의 목회자가
그들의 삶과 일에서 필요로 하는 힘은
오직 성공적인 공동생활에서 길러진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자기가 소중하게 아꼈던 모든 것을
신학원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방 하나 이외에는, 아무런 특권도 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온 마음을 쏟아 신학원 생활 지도에 열중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때로는 휴강하고, 바닷가로 나가 학생들과 운동을 하였습니다.
저녁 토론 시간도 만들고, 오후에는 게임과 연주회와 문학의 시간도 함께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원장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고
그 자신도 영적으로 매우 충만해졌으며
신학원은 질 높은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본회퍼는 이러한 삶의 경험을 통해, 현대 영성신학의 고전이 된
<성도의 공동생활> 과 <나를 따르라>는 책을 지필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값싼 은총이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적이며
은총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면제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장 큰 오류다' 라고 지적했습니다.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절대를 요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불러서 죽으라고 하신다' 라고 하면서
철저히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935년 여름, 나치 정권은 교회에 대한 그들의 정책을 바꿨습니다.
히틀러는 교회안의 갈등으로, 정부에 반대하는 자들이 많아지길 원치 않았습니다.
고백교회의 많은 대표자들도, 이전과 다르게 정부에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을 '고백교회'라 명하지 않고
'신앙고백운동'이라고 개명했습니다.
여기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은 급진적 소수집단으로 전락했습니다.
1935년 12월 1일, 본회퍼가 운영하는 핀켄발데 신학원은 불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디트리히는 학생들에게, 각자 자의대로 신학원을 떠날 수 있으며
만약 한 사람만 남아도 자신은 함께 남겠다고 하였습니다.
학생들은 한 명도 떠나지 않고 모두 남았습니다.
1936년 2월, 제3차 고백교회 회의에서
타협을 원하는 전 고백교회와, 급진적 RADICAL 소수 집단(본회퍼 소속)은 완전히 갈랐섰습니다.
교회 위원회는, 교단 본부에서 준비한 시험을 치는 자에 한해서
목사로 채용하고 합법화 시켜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본회퍼 측 신학원생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때 디트리히가 그 답을 주었습니다.
'누구든 고의적으로 고백교회를 떠나는 자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진다'
이 말의 여파는 대단했습니다.
디트리히는 이단이요, 광신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올바른 교회가 아니더라도,
교회 안에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디트리히는 엉뚱한 곳으로 가는 기차를 잡아타고서
그 안에서 반대 방향으로 아무리 열심히 뛰어보아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본회퍼의 제자였고, 후에 동독연합교회 감독이 된 알브레히트 쇤헤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디트리히는 우리 교회 기독교인들에게 결핍된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활한 바를 실천하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생각은 날카롭고 논리적이었습니다.'
본회퍼의 제자 중 몇 사람은, 사회적인 압력과 가족들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합법적으로 목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디트리히는 그들을 이해했지만,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학생들과, 자신의 봉급을 나누었었고
사랑했던 여성과의 결혼도 포기하였습니다.
앞으로 지하교회의 목사가 될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데
아내와 가족을 염려하는 마음을 가질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로 연구와 신학원의 공동생활이
본회퍼 인생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본회퍼의 인품은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몇몇 학생들은, 그가 요구하는 삶을 따라가지 못하고
성령 강림절 오후에 이웃마을 선술집에 춤추러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신학원 1기생 중 자신의 좋은 조력자인 에버하르트와 함께
"형제들의 집"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시도했습니다.
이는 개신교 생활 공동체로서, 그 구성원들은 사유 재산 없이
물질을 함께 나누고 동정을 지키며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의 뜻을 위해 희생하는 삶에 전념하는 곳이었습니다.
본회퍼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지상에서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 안에 계속 살아 계신다.'
'이때 제자는 고독한 영웅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과의 연대감 안에서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
본회퍼가 핀켄발데 공동체 생활을 통해 얻은 가장 중요한 체험이었습니다.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견습 목사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고백 공동체를 찾아가
처음으로 불법적인 목회 활동을 시작했을 때
신자들은 그들을 열렬하게 찾아주었고 후원해 주었습니다.
모두들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현하는데 자신을 바쳤습니다.
본회퍼와 그의 공동체의 제자들은
점점 고백교회 내에 권위있는 인물들이 되어 갔습니다.
이것은 본회퍼가 더욱 무거운 짐을 지게 됨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자료 스크랩 「1932년 나치스당의 의석수가 230석이 되었고,
이때 독일 대다수의 목사들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종합하기 위한
운동으로 "독일 기독교 신앙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때는 본회퍼가 이미 중산층으로서의 자신의 사회적 한계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고 총통에 취임하였다(1월 30일).
본회퍼는 즉시 라디오 강연(2월 1일)을 하였다.
그는 "지도자와 젊은 세대"라는 제목의 글에서
'스스로 신성화하는 지도자의 직위는 신을 모독하는 것임'을 말하던 중
강연이 중단되었다. 그 후 나치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영국 런던에 가서 독일인 대상으로 목회를 한다.
18개월간의 영국목회 활동을 통해 본회퍼는
독일 밖에서 독일교회의 반히틀러 투쟁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덴마크에서 열린 W.C.C. 회의에 독일에서는 히틀러를 지지하는
독일 기독교회만이 참여했는데, 본회퍼는 이 곳에 참여하여
W.C.C.가 "독일 기독교회"를 정죄하고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지지
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34년에는 칼바르트가 선언한 "바르멘 선언"이 나왔다.
1935년(29세) 본회퍼는 영국에서 간디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C.F.Andrews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간디의 비폭력적 평화주의를 배우기 위해
인도로 갈 계획을 세웠지만,
1935년 4월 고백교회 총회로부터 긴급 부름을 받아 귀국,
발틱해 근처에 있는 Zingst에서 25명의 목사 후보생을 돌보는 신학교의
책임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데 이 신학교가 곧 슈테틴 부근의 핀켄발데(Finkenwald)로 이전하였다.
본회퍼는 이 신학교에서 특수교육의 과정을 만들고,
"형제의 집"(Bruderhaus)이라고 불리우는 집에서,
귀국하기 전 몇몇 수도원과 신앙 공동체들에게서 배운 내용들을 토대로
공동생활, 강의, 기도와 명상, 죄의 고백등의 교과과정을 실시하였다.
그는 이 기간을 자신의 생애에 가장 만족한 시간으로 회고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신학교는 결국 1937년 게쉬타포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 핀켄발데 신학교에서 강의하였던 내용이「나를 따르라」(Nachfolge, 1937),
「성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ben, 1939)이다.
그는 고백교회의 신학교에서 일한 결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미래의 목사가 그들의 삶과 일에서 필요로 하는 저항의 힘은
오직 성공적인 공동생활(연대감)에서 길러진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1939년(33세) 2차 세계대전 발발하였다.(1939-45)
라인홀드 니버와 폴 레만은 본회퍼를 미국 유니온 신학교로 초빙,
뉴욕에 도착하였다(6월 12일).
본회퍼는 독일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생각으로 항상 번민,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니버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저는 독일의 기독교인과 더불어 우리 조국의 이 어려운 시기동안 내내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의 동포가 함께 이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에서 기독교인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미국을 떠난다(7월 7일)」
▲그러나 커져만 가는 외부의 압력이, 오히려 그를 더 강하게 했습니다.
그는 사회적 상황을 무시한 채
묵상이나 찬양 같은 것에 도피하는 교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을 위해 소리 높여 외치는 자만이, 성가를 부를 자격이 있다.'
독일에서 유대인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 기독교인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1935년 9월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시행되고
'유대인 출입 금지'라는 푯말이 극장, 수영장, 음식점, 대학들에 공공연이 나붙었습니다.
다른 인종과의 결혼은 금지되었고,
아리안 계와 유대 계와의 모든 관계는 불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백교회 지도자들이 원칙적으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로써 이름 없는 많은 신자들은
교회의 도움이나 보호 없이 유대인 친구들을 숨겨주었고,
정치적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후원했으며, 체포된 목사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앙고백운동의 급진적인 사람들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37년 나치 독일은 마침내 핀켄발데 신학원을 폐쇄하였고
교장이던 본회퍼를 추방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본회퍼는 죽을 때까지 일정한 주소를 갖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이미 그를 요주의 인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회퍼는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여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히틀러의 진상을 알리고, 또 독일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런 활동 중에 그는 미국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에 있던 그의 친구 폴 레만은 본회퍼의 미국에서의 일정을 다 잡아놓고
전쟁이 끝나고 나치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그가 미국에 머물러서 강의와 연구를 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는 미국에 도착한 직후, 자기가 잘못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민족의 상황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기에
미국에 온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수난당하고 있는 이때
나는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
만일 이때 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나는 독일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1940년 6월 17일 디트리히는 친구 에버하르트 베트게와 함께
카페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백교회의 초대로, 사목자 강연을 하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스피커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뉴스를 듣는 즉시 환호성을 지르며 양팔을 높이 든 채
'독일 만세!'를 불렀습니다.
디트리는 나치 정권이 국민에게 범죄를 저지르고 성공했는데도
오히려 국민이 그 정권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히틀러의 군대가 승승장구할 때마다, 독일교회에서는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의 혁대 버클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다' 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항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저항할 수 있겠다'고 확신했습니다.
마침 그는 여동생 크리스티네의 남편인 한스 폰 도나니와 가까운 친구가 되어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도나니는 타고난 법률가였으며, 법무부 장관의 보좌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었고
현재 독일군 정보부의 정보부장 부관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본회퍼는 그의 도움을 받아, 지하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를 위해 일하며 많은 특혜가 주어졌고
독일 국방부를 대변하는 문서 등을 운반하게 되었습니다.
본회퍼는 세계교회운동의 연락망을 통해
독일 내 저항운동의 계획과 목적에 관한 정보를
서방국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대반역죄에 해당하지만
겉으로는 정부에 협조하는 것처럼 비추어졌습니다.
타협을 싫어하고 솔직한 심성을 가진 디트리히가
그러한 역할을 해내기까지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는 조국인 독일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히틀러가 총통으로 있는 한,
독일의 폐망을 하루라도 빨리 가져오는 길만이
진정 조국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목사로서의 나는,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그 가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의 손에서 핸들을 빼앗아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억울한 사람들이 무수히 희생되는 것에 방조하는 죄보다는
히틀러를 죽이는 죄를 범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보았기에
히틀러를 암살하는 운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회퍼는, 인간은 현실 속에서는 언제나 최선 아닌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매 순간 가장 적절한 윤리적 결단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1942년 가을, 본회퍼가 관여하고 있던 나치 전복음모는 중간에 발각되었고,
본회퍼는 매부인 한스 도나니와 함께 게쉬타포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본회퍼는 독방에 갇혔습니다. 감방의 침대에 준비된 담요는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추위에 떨면서도 도저히 덮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간수가 빵 한 조각을 던져 넣어
바닥에 떨어진 빵을 주워야만 했습니다.
고문을 당하며 취조받는 수인들의 비명소리가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들려왔습니다.
편지를 쓰거나 받아보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그가 왜 체포되었는지,
얼마 동안 갇혀있게 될지를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밤에는 이웃 감방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들은 하루종일 족쇄에 채워진 채 사형 날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디트리히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무력감으로써
더 이상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심한 외로움이 그를 덮쳐왔습니다.
그 또한 한 인간으로서, 감옥 창살 넘어 자유가 그리웠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보고 싶었으며
언젠가는 풀려나, 약혼녀인 마리아와 함께
기쁘게 아이들을 키우는 꿈에 잠기곤 하였습니다.
본회퍼는 외로움과 고통 그리고 깊은 절망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인생의 뿌리를, 하나님 안에 깊이 박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엄습하는 모든 어두움의 시간을 극복해 갈 수 있었습니다.
1943년 여름, 글을 쓰고 책 읽는 것과
10일마다 서신 왕래, 그리고 매일 1시간의 면회가 허락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검열관을 피해, 책이나 편지를 외부로 전달할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옥중서신>에서 앞으로 올 세대와
기독교 정신에 대한 새로운 신학을 제시하였습니다. *나중에 책으로 만들어짐
그가 수용되어 있던 부켄발트 수용소에는 당시 히틀러에 저항하던 정치범들과
여러 나라의 전쟁 포로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본회퍼는, 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목사로 섬겼습니다.
수인들과 경비병들은 그와 이야기하길 좋아했습니다.
당시 본회퍼를 본 페인 베스트라는 사람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매우 겸손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그분은 항상 지극히 작은 일 하나에도 기쁘고 행복해했습니다.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깊이 감사했습니다.
나는 그와 같이 진실한 사람은 별로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감옥의 공동체 안에서, 본회퍼는 또 한 번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의미'에 대해
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만에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이 말씀은, 종교적인 행위가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부르신다."
디트리히에게 있어서 기도하는 것과
인류를 위해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은, 동전의 앞 뒷면과 같았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의 하나님의 고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겟세마네 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있는 신앙임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1944년 9월 22일, 본회퍼가 포함된 히틀러 전복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의
명단이 발견되고, 본회퍼가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변할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나면서 그는 베를린의 게슈타포 감옥으로 옮겨졌고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디트리히에 대한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떠한 면회도 금지되었고, 단 두 통의 편지가 부모님 앞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 중 한 편지에는, 연말에 디트리히가 그의 어머니와 마리아를 위해 쓴 시가
들어 있었습니다.
「나와 함께하며 인도해 주신 선한 능력이
온갖 두려움을 넘어 위안과 힘을 주었습니다.
내 곁에 당신을 생각하며 이 날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새해를 당신과 함께 맞으렵니다.
과거는 아직도 우리의 영혼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들의 슬픔의 나날은 계속될 것입니다.
아버지, 시련을 허락하신 영혼들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위로와 치유를 허락하셔서
슬픔의 잔에서 고통마저 비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당신의 뜻이기에 머뭇거리지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당신이 사랑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한 번 더 삶의 기쁨과 따뜻한 햇살을 맞이하게 하소서
슬픔에서 배웠으니, 그 기쁨은 더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께 바칩니다.
오늘은 촛불들이 기쁨을 비추게 하소서
보라, 우리의 어둠을 비추는 당신의 빛이 아니신가요?
우리를 간절한 만남으로 이끄는 빛이 아니던가요?
당신은 가장 어두운 밤도 밝힐 수 있으십니다.
이제 침묵은 더 깊어져 가고
당신 자녀들의 노래소리에 귀기울이게 하소서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어둠에 쌓이고
당신을 찬양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선한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니
용기를 내어 미래로 향합니다.
새 날이 시작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마침내 본회퍼에게 죽음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1945년 4월 8일 아침, 그는 함께 있는 수인들과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본문을 읽고 간단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사복을 입은 두 사람의 간수가 들어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수 본회퍼, 우리와 같이 간다'
그때 본회퍼는 함께 있던 수인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1945년 4월 9일 새벽에 본회퍼는
사형 집행장 교수대 아래서 벌거벗겨진 채 꿇어 앉아 마지막 기도를 드린 뒤
그의 삶을 마쳤습니다. *당시 약식 단두대
본회퍼가 죽은 지 3주 후에 히틀러는 자살했고,
한 달 뒤에 독일 제삼제국은 무너졌으며,
히틀러의 희생자들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비록 39년의 짧은 삶을 살다가 떠났지만,
그의 삶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참다운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은 무엇인지" 무거운 질문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
♣1943년 2월, 슐라블렌도르프가 폭약실험을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목사이자 비폭력 저항운동가이고, 주일학교 교사이며 평화주의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그가 슐라브렌도르프의 암살 성공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제자도의 대가 The Cost of Discipleship』를 쓴 장본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죽음을 기도할 수 있었을까?
본회퍼는 한가로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돌발하는 절체절명의 문제들에 맞닥뜨렸다.
일촉즉발의 거대한 용광로와 같았던 나치 정권 하의 독일,
바로 이 히틀러의 제3제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사건들로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구체적인 결단들을 내려야 했다.
“우리의 임무는 국가가 법과 질서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남용할 때
바퀴 밑에 깔린 희생자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넘어,
그 바퀴 자체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순교자의 피를 요구하는 날이 온다고 해서 놀라거나 당황해서는 안 된다.”
본회퍼의 이런 담대함은 유전된 것이기도 하다.
본회퍼의 할머니인 91세의 줄리 본회퍼는 나치 정권이 유대인이 운영하는
가게를 대상으로 불매운동을 시작하자 감시 중인 나치 돌격대의 대열을 헤치고
곧장 유대인 상점에 물건을 사러 들어가기도 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모든 교회가 그 정권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결국 본회퍼의 지하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된다.
나치는 국민과 국가를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법령들을 쏟아냈는데,
이 법령은 강제수용소의 설립을 허가하면서
훗날 본회퍼가 처형당하게 될 수용소를 세우는 근거가 되었다.
1938년, 독일과 전 세계는 ‘수정의 밤’의 공포를 온몸으로 느낀다.
유대인 회당과 상점, 집들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타오르는 화염을 피하려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 이후로 나치 정권은 불에 기름을 붓듯 극악하게 타올랐다.
폭풍우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미국에서 또 다른 기회를 맞이한 본회퍼는
국제적이고 공식적으로 히틀러 반대 운동을 광범위하게 펼쳤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조국 독일로 돌아가야 한다는 칼 바르트의 생각에
근본적으로 의견을 같이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칼 바르트는 자신의 날카로운 충고가 젊은 동료를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에
괴로웠을 것이다.
이때 쓴 본회퍼의 저서 『제자도의 대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을 부르시며 내게로 와 죽으라고 명하신다.
나 스스로 대단한 일을 이루려 함이 아니다. 다른 이들을 섬기고 돕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섬김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구주께 속한 모습이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유대인 친구와 이웃이 새로운 곳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또한 칼 바르트 등과 함께 유대인들을
서방국가로 몰래 탈출시키는 일에 가담했다.
반란을 계획한 이들은, 이 반란에 히틀러 암살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며,
실제로 암살을 시작으로 반란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일단 이러한 상황이 분명한 현실로 드러나자
권총이나 폭발물을 전혀 다룰 줄 몰랐던 본회퍼도
자신에게 암살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라도 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함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그러나 결국 히틀러 암살기도는 수포로 돌아갔고, 본회퍼는 체포되었다.
“용기란 두려움 없는 마음이 아니라, 두려움에 맞서 행동하려는 의지다.”
이것이 바로 본회퍼가 형무소 독방에 갇혀 보여준 용기였다.
그가 남긴 종이쪽지에는 ‘수배 중인 다른 이들을 배신할 수 있다는 위험 속에서
자살이 어떤 의무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강인했던 그도
심문과 고문 앞에서 이처럼 움츠러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잘 견뎌냈다.
그의 ‘옥중서간’인 『저항과 복종』 에는 제3제국의 흥망성쇠 앞에서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한 제자가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본회퍼는 탈옥을 계획했다가 이내 포기했다. 탈옥에 성공했을 때 게슈타포가
가족과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마침내 1945년 4월 5일, 히틀러는 본회퍼를 포함한
일명 ‘조센 모임’의 회원들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했고,
4월 9일 아침 일찍 그는 동료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강제수용소의 담당 의사가 그날 보았던 본회퍼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한다.
“문이 반쯤 열린 독방 사이로 죄수복을 벗기 전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본회퍼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사랑스러운 형제가 정말 신실하게 주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확신으로 기도하는 모습에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형장에서 다시 짧게 기도한 후 담대하고도 편안한 모습으로
단두대 계단을 올랐습니다. 그리고 몇 초 후 처형당했습니다.
근 50년 가까이 의사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결코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형집행 후 며칠 동안 수용소 밖으로는 연합군의 폭탄소리가 빗발쳤다.
그리고 2주 후, 미군이 수용소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방면했다.
그리고 다시 1주 후, 56세의 히틀러는` 입 속에 권총을 연발로 쏘아 자살했다.
- 『본회퍼의 삶과 신학』 중에서
http://digest.mk.co.kr/Sub/Board/InfoBook.Asp?Type=T&Gubun=love&id=2&Sno=9010363&page=14